종군기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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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기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4)
몸으로 적의 화구를 막고 또다시 복수전에로!
우리는 지금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발행된 신문을 다시금 펼쳐보고있다.
한장한장 번질수록 가렬처절하였던 조국해방전쟁시기 영용한 인민군전사들의 위훈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목숨을 내대고 불비쏟아지는 전투현장을 누비며 취재집필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던 종군기자들의 그 용감무쌍한 얼굴들이 눈앞에 방불하게 안겨온다.
주체40(1951)년 8월하순부터 1211고지에 머무르면서 많은 기사들을 집필한 종군기자 윤창우는 주체41(1952)년 12월 또다시 1211고지로 올라갔다.
중대참호에서 글을 쓰던 그는 갑자기 달려든 적기의 공습에 중상을 당하여 전선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안과병동에서 입원치료를 받고있던 그는 거기서 적의 화구를 몸으로 막고 전투승리를 보장한 병사가 몸에 11발의 총탄을 맞고도 살아서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 용감한 전투원의 이름은 김성진이고 상등병이며 후송되여올 때에는 의식도 없는 매우 위험한 상태였지만 1차, 2차수술을 성과적으로 이겨내고 지금은 회복기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는 눈과 얼굴을 붕대로 싸매고있는 윤창우의 가슴을 더욱 흥분케 하였다.
하여 그는 여러차례 담당군의를 만나 김성진을 취재할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제의를 하였다.
그의 거듭되는 제의에 담당군의는 감동되였다. 몸으로 적의 중기화점을 막고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것이 싸우는 조선의 기적이라면 중상당한 기자가 붕대로 눈과 얼굴을 처맨채 불사신의 용사를 취재하는것도 싸우는 이 나라의 기적이 아닌가.
이렇게 되여 윤창우는 군의들의 방조를 받으며 김성진에 대한 취재를 진행하게 되였다.
김성진은 홍천에서 머슴군의 아들로 태여나 어려서 살길을 찾아 탄광마을을 헤매며 별고생을 다해본 청년이였다. 인민군대에 의하여 공화국남반부가 해방되여서야 비로소 사람다운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누구보다 선참으로 의용군에 입대하였으며 화선입당도 하고 선동원으로서 전우들속에서 신망이 높았다.
어느 한 고지습격전투에 참가한 그는 습격조원들과 함께 은밀히 고지정점으로 기여올라 적의 교통호까지 접근하였으나 누군가 기침을 하는 바람에 적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조성되자 자기가 먼저 나가보겠다고 공병들을 대기시켜놓고 단신으로 적진을 향해 전진하였다. 갑자기 그가 사라진 쪽에서 《정지, 누구얏!》 하는 적의 당황한 웨침소리가 들렸다.
수류탄 터지는 소리, 잠시후 또다시 수류탄폭발소리가 울려오고 적기관총이 불을 뿜어대다가 아가리를 다물었다.
습격조원들은 그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 순식간에 돌격하여 적의 교통호를 차지했다. 그들은 숨죽은 적화점앞에서 상반신으로 불구멍을 틀어막은 김성진을 발견하였다.
김성진은 윤창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마지막 반땅크수류탄을 던졌는데도 적화구에서 다시 불을 뿜었지요. 등골에서 식은 땀이 쭉 흘렀습니다. 지휘관의 명령은 조국의 명령이라던 부중대장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명령을 집행하지 못하고 조국을 지킨다고 할수 없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가슴을 화구에 틀어박았지요. 겨드랑이밑이 선뜩한 감이 들고 귀가 멜것 같던 기관총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았습니다. 몸이 뜨는것 같았는데 그 다음부터 생각 안납니다.…》
김성진이 몸으로 적의 화구를 막을수 있는 생활적인 바탕과 사상정신적기초에 대해 취재를 비교적 원만히 끝낸 윤창우는 안과병동으로 돌아가 즉시 기억해두었던 내용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일정한 체계로 갈라서 간호원에게 불러주었다. 이렇게 되여 간호원이 대필한 두툼한 취재자료철이 만들어졌다.
부상당하여 눈을 보지 못하는 그가 취재하여 올려보낸 자료는 본사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곧 같은 부서의 김문섭에 의하여 최고사령부 해당 부서에서 더욱 보충확인된 후 《몸으로 적의 화구를 막고 또다시 복수전에로!》라는 제목밑에 기사화되여 주체42(1953)년 2월 5일부 《민주조선》에 크게 발표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기사를 보시고 아주 좋은 기사가 실렸다고 하시며 출판보도부문에서는 인민군용사들의 이런 영웅적인 위훈을 많이 소개선전함으로써 우리 인민군용사들이 대중적영웅주의를 적극 발양케 하며 후방인민들을 전쟁승리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교시하시였다.
기사는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기사내용이 기적적이니 사실을 믿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큰 나라에도 화구를 막고 산 사람이 없는데 기자가 사실을 과장했다고 하면서 나라망신이니 신문을 회수해야 한다고 신문사에 압력을 가하는 사대주의자들도 있었다.
허나 그 어떤 사대주의자들의 압력에도 우리 종군기자들은 끄떡하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따라 승리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는 우리 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의 대오속에는 언제나 종군기자들이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을 심장깊이 새긴 김인환, 송희국을 비롯한 많은 종군기자들은 적의 맹폭격과 포격이 그치지 않는 전선길을 죽음을 무릅쓰고 뚫고나가면서 사진을 찍었고 포연이 자욱하고 총탄이 귀전을 스치는 전호벽에 기대앉아 글을 쓰고 또 썼다.
그들이 찍은 한장한장의 사진들과 그들이 쓴 한건한건의 기사들은 그대로 싸우는 인민군용사들과 인민들에게는 고무적힘이 되였고 적들을 향해 날아가는 한발한발의 총탄이 되고 포탄이 되였다.
* *
이 땅에 전쟁의 포성이 멎은 때로부터 어느덧 근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전화의 용사들도 하나하나 우리곁을 떠나가고있다.
하지만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조국을 지켜싸운 우리 인민들과 인민군장병들에 대한 영웅적인 이야기들은 종군기자들의 기사와 더불어 년대와 년대를 넘어 오늘도 사회주의건설의 격전장들마다에서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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