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침략을 노린《운양》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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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침략을 노린《운양》호사건
1875년 9월 20일은 일본침략자들이 강도적인 《운양》호사건을 조작한 날이다.
그때로부터 백수십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본은 《운양》호사건을 《일본군함이 측량을 하다가 조선군대와 교전한 사건》, 《포격을 당한 사건》 등으로 모호하게 묘사하면서 사건전말을 심히 외곡, 미화하고있다.
《운양》호사건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의 구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조작한 수많은 사건들중의 하나이다.
지난 19세기 후반기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정복하여야 한다는 조선침략론인 《정한론》을 제창하던 일제는 그 실현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그 첫 공정으로 일본침략자들은 1875년 봄 《운양》호를 우리 나라에 불법침입시켰다.
《운양》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까는 1875년 5월 3척의 군함을 끌고 부산-원산사이의 조선동남해안일대에서 발포연습이라는 구실밑에 무차별적인 함포사격과 비법적인 정탐행위를 감행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9월에는 《운양》호를 강화도앞바다에 침입시켰다. 이곳에 기여든 침략자들은 《청국 우장까지 가는 항로를 측정》한다고 하면서 방향이 다른 강화도부근에 불법침입하였으며 《먹는 물을 찾는다.》는 구실밑에 9월 20일에는 초지진포대근처에까지 접근하였다.
당시 초지진은 한성을 지키는 서해의 중요한 군사요충지로서 우리 나라 함선도 사전허가없이는 드나들수 없는 곳이였다.
그러나 일본침략무리들은 이 일대를 제멋대로 돌아치면서 초지진포대를 점령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조선수비병들의 일제사격으로 응당한 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자들은 방어시설이 약한 항산도와 영종도에 쳐들어와 무고한 주민들을 살륙하였으며 야만적인 파괴략탈을 일삼았다.
《운양》호사건의 전과정은 그것이 조선군대의 발포를 유도하여 사건을 확대하고 이를 구실로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며 《정한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계획적인 군사작전의 한고리였다는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있다.
《운양》호사건은 무력에 의한 일본의 조선침략의 서막으로 되였다. 《운양》호사건후 일본침략자들은 다음단계에로 넘어갔다. 침략자들은 조선봉건정부에 예속적인 조약을 강요하기 위한 방안을 세웠다.
그에 따라 일본침략자들은 《운양》호가 청나라로 항행하던 도중 포격을 받은 실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겠다고 하면서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고 위협하였다.
그 밑바탕에는 《운양》호사건의 책임을 조선봉건정부에 무작정 넘겨씌우고 군사적힘을 배경으로 양보를 얻어내려는 기도가 깔려있었다.
조선봉건정부와 공식적인 회담을 벌릴수 있는 합법적인 구실을 마련하였다고 생각한 침략자들은 1876년 포악무도하고 생트집을 거는데서 유명한 구로다를 우두머리로 한 대표단과 함대를 파견하였다.
이렇게 《운양》호사건을 구실로 우리 나라에 무력을 들이민 일본침략자들은 조선봉건정부를 위협공갈하여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조작하고 우리 나라를 예속화하기 시작하였다.
《운양》호사건과 날강도적인 《강화도조약》으로 하여 우리 나라는 반식민지화의 소용돌이속에 급속히 빠져들어가게 되였으며 끝끝내는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였다.
일본의 침략적본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까지도 일본반동들은 죄많은 과거에 대해 성근하게 반성하려 하지 않고있으며 오히려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군사적강점과 식민지통치, 온갖 반인륜적범죄를 정당화하면서 력사외곡책동에 광분하고있다.
일본반동들의 이러한 행위는 우리 인민의 대일증오와 분노를 백배, 천배로 불타오르게 하고있다.
우리 인민은 일제의 과거죄악을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그 대가를 반드시 받아내고야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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