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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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회)
제 1 장
갑오년 정월대보름
7
(2)
침묵을 먼저 깨뜨린것은 엄형국이였다.
《너 산에서 배가 고프겠구나.》
《가을철에 먹을걸 장만해두었습니다.》
《그래두 낟알이야 귀할테지?》
《스님들의 신세도 집니다.》
《그럴테지.》
또다시 대화가 동강나고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였다.
이윽하여 병아리어리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너두 닭알장사란 말을 알고있지? 옛적에 한 사람이 닭알 한알을 사들고 얼음판우를 걸어가며 궁냥에 잠겼더란다. 이제 이 닭알 한개를 깨워 병아리가 나오면 그것을 엄지닭으로 키워 닭알들을 받아내고 그 닭알들은 또 깨워 더 많은 닭을 키워 돈을 벌게 되면 송아지 한마리를 사야지, 그 송아지를 키워 암소가 되면 또 송아지를 받아내고 이렇게 키운 황소들을 팔아 이번엔 기와집을 장만할가, 논밭을 살가 하고 속구구를 하다가 그만 얼음판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안고오던 닭알 한개를 깨버렸다누나. 그러니 기와집두 논밭두 다 하늘로 날아나고말았지, 허허…》
병무는 아버지가 옹색스러운 처지를 모면하려고 누구나 다 아는 우스개소리를 우정 꺼내고 또 걸맞지 않은 웃음소리를 낸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래 자기도 재미있다는듯 덩달아 웃으려는 찰나에 다행히도 공씨가 부엌문을 열었다.
《병무야, 상 놓아라.》
《예.》
병무는 웃벽에 세워진 밥상을 가져다 아버지앞에 놓았다.
공씨가 부엌에서 개다리소반에 음식을 담아들고 들어와 밥상에 옮겨놓았다. 그것을 보던 엄형국의 눈이 커지고 얼굴에 대뜸 화색이 돌았다. 상우에는 고사리며 산나물과 같은 검정나물은 물론 굴비(소금에 절인 조기.)며 소고기산적까지 올라있었다. 아들 병무를 위해 이렇게 차린것도 기쁜 일이지만 우선은 굶주려오던 자기가 이런 푸짐한 명절상을 대하고보니 입이 벌어졌다.
《아니 부인, 이건 다 언제 장만했소? 육붙이까지 있구…》
《내가 뺑덕에미란 소린 들어두 할건 다 하우다.》
좀 으시대는 투로 이렇게 말한 공씨는 또 부엌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더니 상가운데 목이 길죽한 호로병을 놓았다.
《뿌연 탁배기가 아니라 멘경처럼 맑은 소문난 공덕리쇠주외다.
대보름엔 귀밝이술을 자신다는데…》
형국의 눈굽이 불그레해지더니 걸그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인, 정말 고맙소. 실은 병무가 명절이라고 해서 오래간만에 집에 왔는데… 방금전까지 옹색해서 어쩔바를 모르던 참이요.》
《삼순구식해도 오늘이야 상원절이 아닌가요. 병무도 오고…》
여느때는 과묵한 엄초관이지만 얼굴에 술꽃만 피면 말보따리를 즐겨 풀군 하였다. 그가 하는 말인즉 술이란 대체로 사람들을 다사하게 하는 물건이라는것이였다. 그래서 어느 집을 찾은 손님이 주인이 없기에 아들애에게 《네 아버지 어디 가셨니?》하고 물으니 애녀석의 대답인즉 《울아버지 말 사줍수러 갔어요.》했다던가. 그러나 지금 엄초관의 말이 헤퍼진것은 흔히 말하는 술주정때문이 아니였다.
《병무야, 우리 집 족보책에두 있지만 우리 엄씨집안은 대대로 무반의 록을 받으며 살아왔다. 너의 증조부께서는 정종진의 첨사벼슬을 하시였고 고조부께서는 병조좌랑을 하시였다. 그우로 쭉 병마절도사, 병조참판 등 무반직에서 뜨르르한 자리들만 차지하고계셨지. 나두 영종진싸움에서 왜놈들에게 이 다리 하나를 잃지 않았어도 지금쯤 당당한 군직에 올라있을게다. 옛적부터 상무기풍이 높던 이 나라가 본조에 들어와 문관을 중시하고 무관을 경시하는 중문경무에 빠지더니 나라꼴이 어떻게 되였느냐. 왜놈, 양놈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세상이 되지 않았느냐. 울바자가 헐면 뭇개들이 드나든다고 나라의 방비가 허술하니 이 모양이 될수밖에 없지. 허어, 통탄할 일이로다.》
엄형국은 비분강개한 표정이였다.
《하온데 병무는 왜 과거급제시킬 생각않구 군정을 시키시려구 하시우, 잘살지도 못하는…》
《마누라쟁이가 뭘 안다구.》
엄형국이 핀잔을 주자 공씨는 입을 삐죽거렸다.
《궐이요, 부인이요 하다가두 술만 자시믄 마누라쟁이야.》
엄형국은 안해의 말에는 개의치 않고 혼자소리하듯 중얼거렸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사람인가. 백성의 도리를 다하구 의리를 지켜야 사람이지.》
엄형국은 다시 아들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너도 알지만 내 다리가 왜 이렇게 되였니. 그 왜놈들의 〈운양〉호의 포탄에 맞아 한다리 없는 병(신)이 되지 않았니. 왜놈들은 끝끝내 우리 나라를 먹자는 심보다. 그놈들에게 먹히우면 우리 겨레는 문서 없는 종이 되고만다. 그래서 내가 너를 군정을 시키려고 하는게다. 주먹이 약하면 그 주먹으로 눈물을 씻게 되는 법이니라.》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은 이렇게 하면서도 병무의 머리속에는 학문과 무예를 착실히 닦아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왜놈들이나 양놈들과 같은 오랑캐들과 아직 직접 맞부딪쳐보지 못한 그는 놈들에 대한 이야기가 저 옛적 임진왜란때 왜적들을 우리 선조들이 물리쳤다는 옛말처럼 들렸을뿐이였다.
점심겸 저녁겸 명절상을 물린 병무는 웃방으로 올라와 팔베개를 베고 번듯이 누워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래방에서는 술에 취한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불구의 몸으로 하루하루 늙어가는 아버지며 생계를 유지하느라 아득바득하는 후어머니, 조반석죽도 잇지 못하는 집안형편을 두고 병무는 생각이 많았다. 이제는 한 장정이 다된 자기가 식솔들을 돌보지 않고 계속 무술닦기나 해야겠는가. 한때는 자기 집도 량반대가집으로 떵떵거리며 잘살았다고 한다. 흥, 량반!…
그러자 문득 그의 뇌리에는 오늘 낮 종각공지에서 자기를 멸시하던 광대의 모습이 삼삼해지고 그가 던진 말이 귀전에 쟁쟁히 울리였다.
《거지량반!》, 《고라리생원자식!》
병무는 벌떡 웃몸을 일으켜앉았다. 그리고는 급히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석양볕이 스러져가고있었다. 벌써 광대녀석이 종각에 나와 자기를 기다리고있을지 모른다. 병무는 불시에 욱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병무는 워낙 자존심이 강한 청년인데 천하디천한 광대한테서 그런 모욕을 받았으니 어찌 참을수 있겠는가. 내 이 자식을 오늘 밤에 그저!…
엄병무는 벌컥 방문을 열어젖혔다.
문득 아래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멎더니 아버지의 잠내나는 소리가 울렸다.
《어데 가니, 병무야?》
《아버님, 인차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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