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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조선의 힘》 제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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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2,197회 작성일 23-08-2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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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 회

제 2 편

16


이천군 방장면 소재지인 가려주리에 제2군단 지휘부가 자리잡고있었다. 리숙이 여기에 도착한것은 정오가 지났을 때였다. 그를 안내한 군의장의 말이 이 작은 읍거리에 군단참모부와 후방부, 군단병원, 군단통신련락소, 군단통신기마중대 등이 자리잡고있다고 했다. 나무기와 혹은 돌기와를 이은 집들이 좌우에 빼곡이 들어앉아있었다.

바람이 불면서 길바닥의 먼지를 날렸고 동기와를 얹은 지붕우의 말라버린 호박넌출을 뒤집어놓았다. 추녀아래 빨간 고추를 매달아놓은것이 눈에 띄였다. 리숙은 그것을 눈여겨보았다. 웬일인지 그것이 정답게 느껴졌다. 토방아래에서 줄넘기를 하는 계집애들도 자꾸 돌아보았다. 모두 스쳐지날수 없는 전경들이였다. 함지를 머리에 인 어펑진 아낙네가 무어라고 욕을 하며 길을 건너가는데 털부숭이 강아지를 안은 사내애가 뒤를 쫓고있다. 무얼 달라고 칭얼거리는 모양이다. 말발굽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나이듬직한 병사가 말잔등에 찰싹 달라붙어 저쪽 음달쪽의 눈더미를 걷어차며 달려갔다. 옆으로 욱- 밀려났던 늙은이, 아낙네들이 호함지게 웃어대며 또 뭉쳐 걸어갔다. 이고 지고 들고… 이즈음 새로 섰다는 장마당으로 가는 모양이였다. 어데선가 종소리가 울려왔다. 포탄깍지를 때리는 종소리이다. 뗑-뗑-뗑- 리숙은 저도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종소리가 울리는 산기슭쪽으로 머리를 돌리니 둔덕우의 청색기와를 얹은 교사들이 보였다. 아이들이 밀려나오고있다. 수업이 끝난 모양이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눈시울이 바르르 떨리고 웬일인지 소리내여 막 울고싶은 심정이다. 흘러간 시절의 추억이 여기에 있다. 해방후 수년간 그리도 정들었던 생활의 숨결이, 그 목메는 체취가 벅차게 느껴졌다.

《그러다간 늦겠소.》 군의장이 재촉했다. 《후방부군단장이 군단장동지 있는데로 곧장 오라 했는데… 빨리 가기요.》

그는 이제 군단장동지를 만나면 어떻게 처신하며 어떻게 보고하라는둥 골백번도 더 곱씹었을 그 말들을 또 늘여놓았다. 리숙은 걸음을 빨리 했다.

《다 압니다. 군의장동지.》

마을변두리, 봉당이 있는 량통집으로 갔다. 이고장특유의 돌담을 쌓고 대문대신에 지게문을 단 허술한 농가였다. 그대신 널직널직 자리잡고있었다. 외양간과 고방, 간벽이 없는 작두간도 있는데 돌담너머로 늘어진 전화선들이 주위의 다른집들과 특히 구별되게 했다. 봉당마루에 커다란 가죽장화 한컬레가 놓여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그러나 군단장은 방에 없었다. 외양간에서는 두필의 말이 건초를 씹고있고 나이든 병사가 작두간에서 일하고있었다. 마사원같았다.

《군단장동지 계시오?》

군의장이 그에게 물었다. 마사원은 군의장과 리숙을 번갈아보다가 느릿느릿 허리를 펴며 마지 못해 례의를 표했다.

《저쪽에 있습니다. 굴뚝 뒤쪽에.》

그쪽에서 두런두런하는 말소리와 도끼질소리가 울려오고있었다. 군의장이 먼저 그쪽으로 달려가더니 잠시후 나타나 리숙에게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는듯 낮게 속삭였다.

《왜 그런지 군단장동지가 성이 난것 같소.》

리숙은 입술만 자근자근 깨물었다.

군단장은 그쪽에서 웃동을 벗어제끼고 장작을 패고있었다. 그의 곁에 서있는 후방부군단장은 두툼한 솜옷을 입고서도 추운듯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으나 군단장의 목덜미에서는 김이 문문 솟아오르고있었다. 도끼날이 번뜩일 때마다 굵은 참나무가 쩍쩍 쪼개져나가군 했다.

리숙을 보자 후방부군단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다.

《보고하오.》

리숙은 지금 자기의 출현때문에 군단장과 이들간에 좋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었으리라는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자기의 출현이 왜 문제로 된것인지 그 리유는 짐작할수 없었다. 후방부군단장자신이 직접 그를 선택하지 않았는가?…

《군단장동지, 보고할만 합니까?》 군단장이 머리를 돌렸다. 리숙은 거수경례를 붙인채로 서있다가 재빠른 말씨로 계속했다. 《군단병원에 소환된 간호장 리숙 당신의 담당간호장으로 임명되였음을 보고합니다!》

군단장은 손에 들고있던 도끼를 도끼모태 한귀퉁이에 쿡- 박아놓았다. 어느새 어데서 나타났는지 군단장보다 키가 한뼘이나 더 커보이는 부관이 그의 어깨에 보기드문 털외투를 걸쳐주었다. 그러는동안에도 리숙은 거수경례를 붙인채로 서있었다. 군단장의 소문난 눈섭이 쫑긋거렸다.

《쉬엿하오.》 다음순간 사납게 얼굴을 이즈러뜨리며 후방부군단장을 향해 돌아섰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담당간호장이구 뭐구 나한텐 필요없다구, 당장 이 체네군관을 군단병원에 데려가시오.》

후방부군단장이 어쩔바를 몰라하며 《군단장동지!》하고 입을 열었으나 최현은 이미 앞뜨락으로 씽하니 걸어나갔다. 키큰 부관이 그의 뒤를 따르다가 하얗게 질려있는 리숙을 흘끔 돌아보았을뿐이였다.

...이날 최현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도끼를 틀어잡고 장작을 패는것을 하나의 유쾌한 오락처럼 성수나하던 그였지만 오늘은 분노를 묵새길길 없어 도끼를 내려치군 했었다. 그의 이러한 분노는 며칠전에 있은 사단장 박정덕의 해임문제와 관련된 론의때부터 시작되고 커져온것이였다. 군사위원 리승엽이 물론 그때에는 조심스럽게 그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지만 자기의 의견을 즉석에서 묵살해버린데 대하여 의견을 가지고 뒤소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하나 그따위쯤은 참고 넘어갈수도 있었다. 그의 속을 뒤틀리게 한것은 아무런 까닭없이 군단장이 명령한 부대들의 이동전개가 자꾸 늦어지는때문이였다. 더우기 심상치 않은것은 일부 지휘관들은 부대들이 이동하는 때마다 적기들의 항공습격을 받군 한다고 보고해왔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군단지휘부안에서부터 지난날의 이러저러한 자유주의적이고 무규률적인 경향을 따지고들었으며 단호하게 유일적인 명령지휘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저녁무렵 최현은 군단통신련락소에서 지도를 마주하고있었다. 리승엽과 그 추종자들의 악랄한 책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후투쟁부대들의 활약은 더욱 맹렬해졌다. 하여 적들은 아호비령을 《괴물령》, 마식령을 《마귀고개》, 원산-마전리간도로를 《매복도로》라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적들은 자기들의 전반적작전수행에 커다란 위협을 주는 우리의 제2전선부대들을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멸》하지 않으면 안되리라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다.

최현은 지도우에 큼직한 동그라미들을 그려넣기 시작했다. 먼저 철원, 이천, 평강을 련결하는 삼각지대, 다음 마전리를 축으로 하는 아호비령, 마식령지구, 성천과 강동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 중부산간지역, 황해도의 신평, 곡산, 만년 지구, 끝으로 개성동북방 장풍과 금천을 중심으로 하는 동그라미들이였다. 그는 복잡한 전술부호들로 지도를 장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크고작은 동그라미, 삼각형, 릉형, 화살표- 이것이면 그 어떤 작전방안도 다 옮길수 있었다. 동그라미에도 갖가지 의미가 들어있는데 정성들여 굵게 원형을 그린것은 포위소멸, 타원형의 가는선을 마무리하지 않고 어느 한쪽에 터쳐놓은것은 반타격 및 역포위를 의미했다. 문제는 도형이 아니라 그 도형에 깃든 원숙한 사색과 탐구에 있는것이였다. 그리하여 그의 참모군관들속에서는 최현이 수표를 할 때 드문히 이름대신 동그라미를 그려놓군 하는데 그 어떤 명서기도 그것만은 위조해내지 못한다는, 무심히 그려넣은것같은 동그라미에 아주 복잡한 비밀이 있으며 만약 위조하는 날에는 그가 귀신같이 알아낸다는 풍설까지 돌아가는것이였다.

한때 철공소였던 외통집의 건넌방에서는 무선수들과 전화수들이 군단참모장의 엄한 독촉하에 각 부대들과의 련계를 취하느라고 교환대의 접속코드들을 재빨리 끼우는 등 부산스러웠으나 최현이 허리굽혀 서있는 이쪽방은 조용하였다. 낡은 연통에서 바람소리처럼 불길이 빠지는 소리만이 윙윙거렸다. 천정에 드리운 거미줄이 양철판을 오려댄 창문틈새로 마구 쓸어드는 찬바람에 그네처럼 흐느적거렸다. 아무도 그를 방해시키지 않았다. 그가 찾기 전에는 누구도 지금 이 방에 들어와서는 안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최현이 거꾸로 세운 삼각형을 신양쪽에 그려넣을 때였다. 문밖에서 부관과 웬 녀자가 무슨 일때문인지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부관이 성이 나 《동무!》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주 되알진 녀자의 목소리가 《걱정마세요, 나도 내가 할바를 알고있어요!》하고 쏘아붙였다. 문이 열린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였다. 누가 어데서 무슨 수로 구해왔는지 알수가 없는 새 모직군복차림을 가뜬히 한 처녀군관이 용감하게 걸어들어왔다. 최현은 흘러내리는 털외투를 바로잡으며 시선을 들었다.

《군단장동지!》 안면있는 처녀군관의 보고였다. 《간호장 리숙 만날수 있습니까?》

《?!…》

무엄하기 그지 없는 일이였다. 허락도 없이 군단장에게 들어갈수 있다는것을 과연 누가 생각이나 할수 있겠는가.

최현은 성난 눈길로 리숙을 쏘아보았다. 아까 자기가 쫓아보낸 처녀였다. 그때엔 무엇때문인지 가슴이 저려났었다. 락동강에서 희생된 간호장 림정옥이 생각났던것이다. 그날의 가슴을 비틀어대던 아픔이 상기되였었다. 아니, 안된다. 그런 일만은 견디여내지 못한다.

그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왜 또 왔소?》

《군단장동지, 저는 군단장동지의 담당간호장으로서 한가지 비준받을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군단장동지! 이제 곧 지휘처를 옮긴다기에 기회를 놓칠가봐 그랬습니다.》

최현은 덤덤히 처녀를 바라보았다. 당돌하다고 하기엔 너무도 조리있었고 무엄하다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깍듯한 처녀였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나에겐 동무가 필요없소.》하고 최현은 무자비하게 잘라 말했다. 《군단병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왜 또 왔어? 동무를 처벌해야겠소.》

《군단장동지! 전 특별임무를 받고…》

《내가 군단장이야, 난 그런 임무를 준적이 없어. 알겠는가?》

《군단장동지! 군단장동지의 건강을 잘 돌보라는것은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주신 임무입니다!》

《뭐라구?!… 장군님께서 동무를?!》

《아닙니다. 전 아직 장군님을 만나뵈온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군단의 군의근무일군들에게 특별히 군단장동지의 건강을 잘 돌볼데 대한 임무를 주시였습니다. 군단장동지! 혹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그렇게 말씀하십시오. 돌아가서 다른 간호장동무를 보내도록 제기하겠습니다.》

《…》

최현은 난생처음으로 나어린 처녀앞에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말문만이 아니라 억이 막혔다.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군단장이 소성 한알 박은 간호장한테 몰리다니?… 그와 동시에 그는 적후로 떠나오던 그날 장군님께서 그의 만성적인 병치료에 쓰라고 비상약을 친히 보내주시던 일도 회상하였다. 후방부군단장이 담당간호장문제를 어제부터 줄곧 꺼내드는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것이다.

《그래 비준받자는게 뭐요?》하고 최현은 당장 수표라도 해줄것처럼 지도우에 놓았던 《붉은별》표 색연필을 들었다. 명백한 후퇴였다. 이런 경우엔 군단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무상 권위도 소용없는것이다.

리숙은 여전히 차렷자세로 서서 그를 마주보고있었다. 아무런 비준문건도 내놓지 않고 그저 흥분어린 목소리로 명령서라도 받듯이 그 내용을 구술하였다.

《군단장동지! 우선 치료시간을 엄격히 지켜야 하겠습니다. 아침과 점심전에 약을 잡숫도록 제가 통제하는것을 허락하십시오. 저녁 7시부터 15분동안은 주사시간입니다. 기타 병세가 악화되거나 하는 경우엔 일과가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치료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전적으로 저의 지시에 복종해야 하겠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데서 이런 따벌같은 처녀를 골라왔을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능구렝이같은 후방부군단장을 두고 속으로 욕을 퍼붓는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요?》 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군단장동지! 나머지시간엔 제가 병원이나 해당 부대 군의소에서 일하겠습니다. 그렇게 지시받았습니다.》

최현은 쩝쩝 입맛을 다시다가 탁자곁의 철판의자에 걸터앉았다. 철공소에서 한때 만든것일 그 철판의자는 싸늘하였다. 그는 부자연스럽게 몸을 궁싯거리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문자판이 잘 알리지 않았다. 날이 어둡고있었다. 지금 이 시각 박정덕의 4사는 철원의 포위환을 압축할것이고 한창봉동무네는 신계간도로상에서… 이렇게 그는 지금까지 머리속에서 소용돌이치던 그 모든 실제적인 전투행동의 구상을 돌이켜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대리석으로 쪼아낸것 같은 맵시있는 처녀군관이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고있다.

웬일인지 이번엔 처녀를 쫓아보내고싶지 않았다. 온순하고 부지런하던 이전 간호장과는 판판 다른 이 차돌같은 처녀와 이야기를 나누고싶었다.

《왜 그렇게 소제대처럼 꼿꼿해있어?》하고 그는 버럭 소리쳤다. 《거게 앉으라구. 이름이 뭐랬더라? 리숙?!…》

《예.》

퍼그나 조용한 대답이였다. 긴장한 자세로 서있은탓인지 별안간 몹시 맥이 진한듯 해보였다. 처녀가 자리에 앉자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냥을 켜서 불을 붙이면서 조화롭게 잘 다듬어져있는 처녀의 자태를 새삼스럽게 훑어보았다.

《본래부터 그렇게 당돌한가?》하고 최현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군단장동지! 그저… 좀 용기를 내보았습니다.》

《그러니 철갑모를 쓰고 덤벼들었다 그말이지 엉?!》

《예.》

《내가 무섭지 않아?》

《무섭긴 해두… 소문보다는 좀…》

《허-》

최현은 이 처녀가 교양도 있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집요한 인내와 용기도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불쑥 그는 주머니를 뒤져 곱게 접어놓은 모조지 한장을 꺼내 탁자의 지도우에 펴놓았다.

문경고개에서 사단군악대장이 그려준 《유격대행진곡》의 악보였다.

《읽을줄 알아?》

리숙이 악보우에 머리를 숙였다. 《압니다.》 처녀는 천연스레 대답하였다.

《그럼 어디 소리내서 해보라구.》

최현은 털외투로 몸을 감싸안으며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이 처녀에게서 자기의 심금을 울려주는 노래소리가 울려나오기를 기대하고있었다.

잠시 악보를 들여다보던 처녀가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행진곡의 선률을 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도도도라 쏠쏠쏠도 레레레 레미도-》

불쑥 최현이 눈을 부릅뜨며 처녀를 노려보았다.

《됐어.》

처녀는 영문을 알수 없어 가느다랗게 중얼거렸다.

《그럼 가사를 붙여 부르랍니까?》

《됐다니까.》 최현은 두툼한 손으로 악보를 정히 접으며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그렇게 부르는게 아니야. 이건 그저 고운 목소리가 아니라 심장으로 불러야 해!》

악보를 접어 군복안주머니에 넣은 최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녀도 일어섰다. 이것으로써 담화는 끝나버린듯 했다. 때마침 군단장의 부관이 간드레불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섰고 뒤따라 참모장과 작전부장 등이 나타났다.

최현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붓끝같은 간드레의 불길이 시계의 문자판우에서 얼른거렸다.

《동문 가보라구.》

리숙에게로 향한 최현의 말이였다. 그러나 처녀는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의혹과 실망, 불안과 기대, 쓰디쓴 패배에 대한 의식이 처녀의 얼굴을 질리게 하였다. 그러건말건 최현은 참모장과 작전부장을 가까이 오도록 손짓하며 무뚝뚝한 어조로 계속하였다.

《가보라구, 어서. 우선 노래부터 배워야겠어. 그런 식으루 유격대행진곡을 불러가지구선 어림두 없어. 제2전선 사람들을 따라다니지 못한단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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