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련재 《너를 사랑하기에》 제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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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 회)
제 4 장
4
(1)
설계실을 나선 강혜경은 잔사처리공정건물보수현장을 향해 경쾌하게 걸어갔다. 그는 잔사처리공정건물설계를 담당하였다.
언제나 열정이 활활 타는 가슴에 창조적의욕이 차넘치는 처녀는 야심을 먹고 잔사처리공정건물을 설계하였다. 그가 내놓은 건축형성안을 보면 보통생산건물이 아니라 아주 멋스러운 사무청사를 방불케 하는것이나 그안에서 공간을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설비들을 배치할수 있게 되여있었다. 하여 그의 잔사처리공정건물설계도는 설계실의 여러 사람들에게서 대단한 호평을 불러일으켰다. 설계실에 나왔던 신명욱책임비서도 혜경의 건축형성안을 보고 특색있다고 칭찬하였다.
《복덩이가 우리 설계실에 굴러들었단 말이야.》 신명욱책임비서는 혜경에게 엄지손가락을 쳐들어보이며 대견해하는 웃음을 지어보이였다.
혜경은 여러 사람들에게서 치하를 받자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무렴, 내가 간단한 처녀가 아니지.) 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말하였다. (앞으로 계속 본때를 보일테야. 비날론공장을 새롭게 일떠세우는데 이 혜경이의 자취를 남겨야지.)
저절로 사기가 나서 걸어가는데 1카바이드직장쪽으로 걸어가는 주선철의 모습을 보게 되였다. 선철은 위생가방을 한쪽어깨에 걸치고 한 처녀와 함께 걸어가고있었다. 아마 현장치료를 나온 모양이였다.
혜경의 두눈에 즐거운 미소가 잔즐거리였다. 그는 걸음을 빨리 다그쳤다.
선철이를 만나본지도 이젠 몇달이 잘되는것만 같다. 그전에는 선철이와 지원로동을 하면서 자주 만나군 했지만 요새는 설계과제를 수행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으므로 개건공사장에 지원로동을 얼마 나가지 못했다.
선철이를 만나면 혜경은 왜선지 기분이 좋아지고 들뜨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선철은 의사인 자기 직업을 사랑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하려는 야심이 만만한 청년이다. 혜경은 무엇보다도 그 야심이 마음에 들었다. 혜경은 자기자신 전공분야에서 부단히 탐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고 노력하는것만큼 남자도 그런 진취적인 형의 남자가 좋았다. 혜경은 자기 주위에서 일부 청년들이 뼈심을 들여 전공분야에서 한몫하려는 각오를 가지지 못하고 눈을 두리번거리며 먹을알이 있는 직업을 찾고 얼렁뚱땅 살아가려고 하는것을 보면 격분을 금할수 없었다. 그런 무골충같은 남자는 질색이였다. 혜경은 선철이가 일생의 길동무로 될 그런 남자일수 있다고 은근히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선철선생님.》 혜경은 소리쳐불렀다.
선철이가 돌아보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어디 가는 길입니까?》
《합성직장의 잔사처리공정건물현장으로 가는 길이예요. 선철선생은요? 물론 현장치료대로 나왔겠지요.》
《그렇지요.》
혜경은 선철의 곁에 선 간호원처녀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수고많겠어요.》
혜경은 다시 선철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헌데 우리 설계실에는 현장치료 안 나오는가요?》
《우린 다 담당이 있습니다. 제가 가고싶은데 가는게 아니거던요. 지금 우린 1카바이드직장에 갑니다.》
선철은 걸음을 늦추더니 제잡담 간호원에게 말하였다.
《먼저 가오. 내 이 설계원동무와 따로 좀 이야기할게 있어서…》
간호원처녀가 샐쭉 웃으면서 《그럼 천천히 오세요.》 하고 말하고 쑥 앞으로 나갔다.
선철은 정말 긴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인지 길가의 버드나무밑에 서서 담배를 피워물었다. 설레이는 그의 마음처럼 버드나무가 가볍게 흐느적거리였다. 어제까지 비가 오면서 날씨가 찌뿌둥해있더니 오늘 아침부터 해가 뜨고 날이 활짝 개였다.
《이렇게 혜경동무를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군요. 사실 공장에 들어서면 만나보고싶은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그래요? 어쩌면 나와 신통히 같은데요.》 혜경은 롱조를 섞어 말하고 까르르 웃었다. 《나도 선철선생을 보았을 때 오늘 참 기분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정말 좋은데요.》 선철은 담배를 피우면서 다리를 흔들었다.
혜경은 어쩐지 지나치게 자신의 속을 드러내놓은듯싶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머리를 돌리고 걸음을 옮기였다.
《천천히 걷자요.》
선철은 혜경의 걸음에 자기의 걸음을 맞추었다.
《잔사처리공정건물설계를 맡은 모양이군요.》 하고 선철이가 말하였다.
《어쩌면… 통찰력이 보통이 아니군요.》
《통찰력까지야 뭐. 설계원이 현장으로 갈 때야 설계때문에 가는게 아닙니까.》
선철은 혜경이가 말아쥐고있는 설계도면을 여겨보았다.
《혹시 그게 설계도면이 아닙니까?》
《그래요.》
《한번 볼수 없을가요?》
혜경은 선철에게 보이고 자랑하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선철에게서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싶었다.
《뭐 볼만 한것이 못되는데…》
《그래도 솜씨를 좀 봅시다.》
혜경은 못이기는체 하면서 건축형성안을 넘겨주었다. 선철이가 도면을 펼치였다. 그리고 대뜸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멋있구만요. 난 생산건물이 이렇게 멋있는걸 처음 봅니다. 역시 혜경동무가 재간이 있군요.》
《그저 새롭게 만드느라고 노력했을뿐이예요.》
혜경의 가슴에는 기쁨과 보람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껏 이 설계를 두고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지금 선철에게서 탄복하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흥분되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정말 마음에 드는가요?》
혜경은 다시한번 선철의 심정을 타진해보고싶어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선철은 무슨 생각에 잠겨 도면을 들여다보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야말로 혜경의 참다운 가치를 깨달은듯 한 감심과 행복감이 어려있었다.
《정말입니다. 잘했습니다. 난 아무 일에서나 도식적인것을 반대합니다. 창조가 없이야 안되지요. 그래 설계실에서 평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괜찮다고들 하는데…》
혜경은 말끝을 흐리였다. 자기 자랑을 너무나 하는듯싶어 부끄러워났던것이다.
(혹시 나를 경망한 처녀로 보면 야단인데…)
《글쎄 그렇겠지요. 정말 멋있는 건물입니다.》
선철은 도면을 말아서 주면서 경탄이 어린 아니, 어쩐지 격앙되고 뜨거운 정이 스민듯 한 눈빛으로 혜경을 보았다.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뭘요.》
그들은 어느 사이엔가 1카바이드직장을 지나쳐서 걸어가고있었다.
《가봐야 하지 않아요? 어디까지 가려는겁니까?》
혜경이가 말해서야 선철은 당황해하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헤여져야겠군요.》 선철은 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였다. 《저녁에 만나지 않겠습니까?》
혜경이가 대답을 하지 않으니 선철의 흰 얼굴이 감빛으로 벌겋게 물들어올랐다. 혜경은 얼굴을 붉히는 선철의 모양이 재미있고 정이 갔다.
《정 시간이 없다면 할수 없지요.》 선철이가 실망한 어조로 웅얼거리였다.
혜경은 선철이가 어쩐지 이전과는 달라진것처럼 생각되였다.
선철이가 대체로 쾌활하고 말도 거침없이 잘했는데 지금은 머뭇거리고 어줍어하는 모양을 보이기도 하는것이다.
이때 뒤에서 설계실의 한 청년이 혜경이를 찾았다. 대단히 름름하고 잘생긴 청년이였다.
《혜경동무, 여기서 뭘하오? 빨리 갑시다.》
《알겠어요. 의사선생을 만나 얘길 나누다보니 그만…》
혜경은 선철에게 《다시 만나요.》 하고 인사하고는 청년과 함께 걸어갔다.
선철은 마치 닭쫓던 개 지붕쳐다보는 격으로 청년과 함께 걸어가는 혜경을 보았다. 아쉽고 알찌근한 감정이 숨구멍을 막는것만 같았다.
다음순간 혜경이가 돌아서서 선철을 보며 방긋 웃었다.
《전 밤에 농약직장건설장에 지원나가요.》
선철은 금시 얼굴이 환해져서 싱글거리면서 소리쳤다.
《그럼 거기서 만나 함께 지원로동을 해봅시다.》
혜경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례의 젊고 잘생긴 설계원청년과 무엇인가 열정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가고있었다,
선철은 경쾌하게 걸어가는 혜경의 뒤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아쉬운 심정으로 돌아섰다.
그다음부터 선철은 줄곧 혜경에 대한 생각에서 헤여나올수가 없었다. 1카바이드직장의 너렁청한 배전반실에 자리를 잡고 찾아오는 로동자들을 치료하고 약을 내주면서도 눈앞에 얼른거리는 혜경의 모습을 보았다.
지난날 선철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어쩌면 쓰라린 아픔까지도 준 한 처녀가 있었다.
그 처녀는 선철이가 백두산선군청년발전소건설장의 청년돌격대에 입대하여 몇년간 대대군의로 일할 때 그 대대 대원이였다. 일 잘하고 동무들에 대한 정이 뜨거워 누구나 그 처녀를 사랑하였다. 그런데 그 처녀가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릴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선철은 군의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더 마음이 아팠고 신통한 치료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자기자신에게 환멸을 느끼였다.
처녀는 자기가 심상치 않은 병에 걸렸다는것을 알았지만 대대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처녀를 려단군의소에 후송하려고 자동차를 갖다대자 그는 아까운 휘발유를 쓰면서 가고싶지 않다고, 자동차는 긴장한 물동운반에 써달라고 하면서 끝끝내 선철의 부축을 받으면서 려단군의소까지 걸어갔다. 자기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는 동무들에게 처녀는 말하였다.
《울지 말아요. 이 땅에서 이만큼 살았다는것만 해도 난 만족해요.》
처녀는 주위가 조용할 때 선철의 손에 자기의 일기장을 쥐여주었다.
일기장에 씌여져있는 구절들이 선철의 가슴을 미여지게 하였다.
《살고싶다. 마음껏 생을 누리고싶다. 얼마간이라도 더 살면서 조국을 위해, 동지들을 위해 사랑을 바치고싶다. 그러나 짧은 인생을 탓하지는 않는다. 행복과 보람을 누리며 살았기때문이다.
동무들… 내 몫까지 합쳐 한껏 사랑하며 번영하는 조국의 모습을 보아주세요.》
혜경은 청년돌격대에서 순직한 그 처녀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래서 처음 혜경을 보았을 때 선철은 깜짝 놀라 자기의 눈을 의심하기까지 했던것이다. 선철은 혜경과 더 가깝게 사귀게 되면서 자주 지난날의 그 처녀를 상기하군 했다. 선철은 그들의 성격이 판 다르고 능력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얼굴모색과 뜨겁게 사랑할줄 아는 그 성정만은 비슷하다는것을 알았다.
마치도 너무나 일찌기 세상을 떠난 그 처녀가 혜경으로 환생하여 살고있는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선철의 가슴에는 걷잡을수없이 사랑이 불타올랐다.
아침에 잔사처리공정건물설계도면을 들고 걸어가던 혜경을 만나고 또 그와 다정하게 이야기하면서 걸어가는 젊고 잘생긴 청년을 보고나자 선철은 더는 혜경이와 뜨뜨미지근하게 지낼수 없다는 심장의 목소리를 듣게 되였다.
(저런 처녀를 사모하는 청년들이 어찌 한두명일것인가!)
욕망이 가슴속에 끓어넘치면서 조바심을 파도처럼 일구었다.
(오늘 밤엔 그에게 꼭 나의 열렬한 감정을 터놓으리라.)
선철은 이렇게 거듭 속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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