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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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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2,117회 작성일 23-10-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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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회)

제 1 장

갑오년 정월대보름

10


골목에는 장작이며 솔가지며 검불을 태우는 연기와 냄새가 매캐하게 떠돌았다. 저물녘이 되니 날씨도 몹시 차졌다.

아정은 추위에 옹송그리며 종각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병무의 모습은 물론 광대의 자태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추위에 쫓기는 사람들이 량겨드랑이에 두손을 지르끼고 종종걸음치고있는 모습만이 보일뿐이였다. 장옷이라도 쓰고 나왔으면 한결 추위를 덜수도 있었을걸 공연한 고집을 부렸다는 후회도 들었다.

《와 벳삔상! (야! 미인이다!)》

갑자기 울리는 사내의 음성에 흠칫 놀란 아정은 고개를 홱 돌렸다.

하오리를 입고 칼을 찬 왜놈랑인배 네댓놈이 아정이를 둘러싸고 벌쭉거리고있었다. 놈들의 낯짝은 고구마알처럼 벌겋고 술내가 확 풍겼다.

놈들은 아정이곁으로 다가서며 음탕하게 이죽거렸다. 오까모도의 송별연에서 돌아오던 다까하시패거리였다.

미인아가씨, 우리와 좀 놀지 않겠소?》

돈두 주겠소.》

《저리 비켜!》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다까하시가 앞의 두놈을 밀쳐버리며 뇌까렸다.

《이럴 땐 말이 필요없어!》

다까하시는 색욕으로 눈빛을 번들거리며 아정이를 무작정 껴안으려고 하였다.

아정은 놈을 밀쳐버리며 째지는듯한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요!-》

방금 공지에 도착하여 서성거리던 엄병무가 이 소리를 듣고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절명에 가까운 녀인의 비명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잔뜩 긴장해진 병무는 소리난쪽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골목에 다달은 그는 너무도 처참한 광경앞에서 잠시 발길이 굳어졌다.

여러명의 왜놈들이 서로 밀치며 한 조선처녀를 희롱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처녀는 기절한듯 의식을 잃고 담벽에 기대여 가까스로 서있었다.

처녀를 알아본 병무의 눈이 커졌다. 계원사에서 만난 처녀가 분명했다.

《아니, 아가씨가?!》

순간 병무의 얼굴은 증오로 이그러졌다. 압축되였던 용수철이 튕겨나듯 그는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놈들아!-》

깜짝 놀란 왜놈들의 낯짝이 대뜸 굳어졌다.

병무는 발길을 날려 택견동작으로 대번에 두놈을 쓰러뜨렸다. 당황하고 불안해진 왜놈들이 칼을 뽑아들었다. 놈들의 낯짝이 험상궂게 찌프러지고 눈에는 살기가 어렸다. 적수공권인 병무는 방어자세를 취하고 놈들을 노려보기만 하였다.

!》

칼을 쳐든 왜놈 하나가 짐승같은 소리를 지르며 병무에게 달려들었다. 병무가 날래게 몸을 피하자 그놈은 헛칼질을 하고 몸을 기우뚱거렸다. 그 순간 병무가 놈의 정갱이를 걷어찼다. 왜놈은 비명과 함께 칼을 떨구고 앞으로 쭉 뻗었다. 날래게 그 칼을 집어든 병무가 천천히 그러나 용맹스러운 자세로 놈들에게 다가들었다. 남은 두놈은 겁기어린 눈으로 서로 돌아보더니 그만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따르려던 병무는 문득 고개를 돌려 아정이를 바라보았다.

아정은 실신한채 담벽밑에 주저앉아버렸다. 병무는 칼을 버리고 아정이한테로 달려갔다. 아정의 모습은 실로 처참하였다. 헝클어진 머리칼, 떨어진 저고리고름…

병무는 아정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아가씨.》

깨도를 못하는 아정이를 병무는 좀더 세차게 흔들었다.

《아가씨, 정신차리오.》

그래도 고개를 푹 떨군 아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시 망설이던 병무는 아정을 추슬러 업고 그의 집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에서 줄땀이 흐르고 목에서 단내가 났으나 그는 걸음발을 멈추지 않았다.

드디여 골목길을 누비며 아정의 집앞에 이른 병무는 대문을 두드렸다.

신발끄는 소리가 찰찰 나더니 대문이 빠금히 열렸다. 등롱불을 쳐든 하녀인듯한 어린 처녀가 깜찍하게 생긴 얼굴만 살짝 내밀고 의혹에 찬 눈길로 병무를 살펴보았다.

병무는 숨을 헐썩이며 다급히 말했다.

《문 좀 빨리 열어주시오.》

처녀는 올롱한 눈길을 쳐들었다.

《어느 댁을 찾으시와요?》

《저, 이 집이 홍역관댁이…》

《예, 맞아요.》

아참, 이럴새가 없소.》

병무는 무작정 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병무의 등에 업힌 아정을 띄여본 하녀가 안에 대고 기겁하여 소리쳤다.

《아니, 우리 아씨가… 마님! 마님!》

방문이 열리고 아정의 어머니 정씨가 밖을 내다보았다.

《밤중에 웬일이냐?》

이월네가 《마님, 큰일났사와요. 아씨가! 아씨가!》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마루앞에 헐썩이며 서있는 병무와 그의 등에 기신없이 업혀있는 자기 딸을 알아본 정씨가 황급히 마루로 뛰여나왔다.

《이게 웬일이요?》

《빨리 방에…》

병무의 재촉을 받은 정씨는 더욱 덤벼쳤다.

이월네야, 뭘하니?》

방에 들어선 병무는 아정이를 맨 구들에 내려놓을수 없어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정씨는 창황중에 어쩔바를 모르는데 이월네가 제꺽 이불장을 열고 눈처럼 흰 요를 내려 장판바닥에 펴놓았다.

《마님, 여기에.》

《응응.》

이월네와 함께 병무의 잔등에서 기절한 아정이를 받아내려 요우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정씨가 문을 열더니 사랑방쪽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좀 빨리 오시우큰일났어요!》

아정의 아버지 홍역관과 손님인 최도고가 성급하게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우?》

남편의 묻는 소리에 정씨는 눈물을 흘리며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딸을 가리켰다.

아정이가, 흑…》

아정이가 어찌 됐다는거요?》

《글쎄, 저 도령이 업구 왔는데…》

엉거주춤 서있는 병무한테 의혹의 눈길을 돌린 홍역관이 랭랭하게 물었다.

《젊은인 뉘시오? 그리구 우리 아정인 어찌된 일이요?》

《저, 아가씨가 종각곁의 골목에서 왜놈들에게…》

《왜놈들에게?》

병무의 말을 되뇌이며 급히 딸의 머리맡에 앉은 홍역관이 이불을 들치였다.

그의 곁에서 아정이를 기웃이 들여다보던 최도고가 홍역관을 안심시키듯 중얼거렸다.

다친덴 없는것 같은데 너무 놀라 정신을 잃은 모양 같소이다.》

《그런것 같소, 죽일놈의 섬오랑캐들!》

결기있게 내뱉은 홍역관이 안해를 힐책했다.

《에미란게 집에 있어가지구 아이가 이렇게 되도록 뭘했소?》

《글쎄 다저녁때 잠간 나갔다 오겠다기에…》

안해의 말은 들은둥만둥 홍역관은 병무에게 방바닥을 가리켰다.

《앉으시오.》

《예.》

자리에 앉으려던 병무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시 허리를 폈다.

《그럼 전…》

《갈려구?》

《예.》

《아니, 뉘신지도 모르는데…》

정씨가 황황히 만류했으나 병무는 선절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는 어둠에 묻힌 골목길로 달렸다. 날씨는 맵짰으나 그는 팔굽으로 연방 이마를 훔쳤다. 광대녀석이 날 기다리고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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