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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조선의 힘》 제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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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2,671회 작성일 23-08-1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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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회

제 1 편

20


전기관리국 기사장 리성조는 지금 자기가 《도주》한것으로 인정되고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그러한 리유로 장군님께서 몹시 걱정하시며 수시로 전화를 걸어 그의 행방에 대해 알아보시는줄도 모르고있었다. 리성조는 가지가지의 우연과 피치 못할 사정때문에 일이 꼬이기 시작한것을 자기의 운수가 나빴기때문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곡절은 내각사무국에서 그를 찾던 때로부터 시작되였다. 그때 리성조는 군자리의 기계공장에 출장중이였었다. 그곳에서 여러 로동자, 기술자들과 더불어 각종 변압기와 수력타빈제작의 가능성을 검토하고있었다. 밤중이였다. 공장지배인이 그를 직접 찾아와 한옆으로 불러냈다. 그의 얼굴은 침울했다.

《내각사무국 부국장동무가 전화로 찾소. 급한 문제인것 같소.》

전화를 받고나서야 리성조는 지배인의 낯색이 왜 그처럼 어두운지 알수 있었다. 그는 당장 공장을 소개할데 대한 아름찬 과업을 받았던것이다. 리성조에게는 현재 북방으로 이설되고있는 군수공장들에 대한 동력보장임무가 차례졌다.

《…아주 중요한 과업입니다. 기사장동무.》하고 내각사무국 부국장은 말했다. 《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소개되고있는데 전기를 보장하지 못하면 그것들이 다 파철무데기로 되고맙니다. 때문에 우리는 전기관리국 기사장동무에게 직접 이 어려운 일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장군님께서도 아십니다. 앞으로 당분간은 병기생산국에 배속되여 일해주십시오. 서병호국장동무를 아시지요?… 그렇게 하십시오. 서국장동무와 곧 련계를 가지십시오.》

병기생산국 서병호국장은 벌써 전화를 부탁하고있었다. 견결한 의지를 가진 사나이답게 청높은 목소리가 수화구를 쩡쩡 울렸다.

《기사장동무지요? 난 병기생산국장이요. 서병호라구 하는데… 에-같이 손잡구 일해봅시다. 그럼 곧 일에 착수할수 있겠소?… 아 아, 그래주면 더욱 좋지요. 어려운 때이니만큼 언제 모다앉아 말공부질이나 하고있겠소. 난 그런건 질색이요. 그럼… 우선 현지로 떠나시오. 거게 가서 봅시다!》

서병호는 간명하고 무게있게 말할줄 알았다. 흔히 아무런 론리도 세울줄 모르는 일군들이 주석단에 앉아 남의 토론을 중단시키고 한바탕 판에 박은 연설을 하기 좋아하는 법이다. 서병호는 그런 류와는 달리 자기가 하는 한마디한마디가 기억에 남도록 할줄 알았다. 그리고 무섭게 요구하고 에누리없이 정확히 받아내였다. 리성조는 그의 이러한 성격적특질을 소문으로나마 알고있었다. 그러므로 당장 현지로 떠날 생각이였다. 그러나 전화가 끝난 후에야 하루 혹은 이틀쯤 말미를 얻지 못한것을 후회했다.

그는 안해를 두고 훌쩍 멀리로 가버릴수 없었다. 앞일을 기약할수 없는 이때 그대로 가버리면 돌이킬수 없는 후과가 빚어질것이라고 생각했다. 안해가 다른 아낙네들같으면 언제까지 어느곳으로 짐을 싸가지고 찾아오라 하는 글쪽지만 보내도 될것이였다. 그러나 그의 안해 장영실은 사정이 달랐다. 해방직후의 어려운 정세하에서 일부 사람들이 그를 따돌리고 괴한들이 협박하려들자 서울로 가자고 끈덕지게 졸라대던 안해였다. 하얀 주먹으로 연탁을 두들겨대며 입에 거품을 물고 《프로혁명》을 부르짖던 사람들에게서 제나름으로 공산주의리념의 난해성과 가혹성을 보았고 그들이 기술자인 남편을 무대에 끌어내여 《친일분자》로 날카롭게 지탄할 때 불상용의 확실한 근거를 찾아본 장영실이였다. 그는 사람들을 불신하고 두렵게 생각했으며 그때문에 새로운 생활에 적응될수 없었다. 그러한 장영실이 이제 먼 북관땅-궁벽한 시골농가 혹은 널판자로 대충 간막이를 한 로동자들의 림시거처로 찾아오리라고는 믿을수 없었다. 젊고 아름답고 어느 정도의 지식도 가지고있는 녀자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그의 안해 역시 의심이 많고 도고하면서도 여리였다.

리성조는 결심했다. 북행차를 갈아타야 할 도중역에서 그대로 눌러앉아 평양으로 향했다. 집에 가서 안해를 설복하여 현지로 떠나갈 생각이였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니 우연적인 일이 그를 지체시켰다. 적기들의 야간폭격으로 철다리가 끊어진것이다. 지리하고도 괴로운 낮과 밤을 기다린끝에 다시 출발한 렬차였지만 그동안 연착된 군수렬차들에게 밀려 한정없이 느리게 움직여갔다. 평양을 가까이 한 어느역에서 또 항공습격을 받은뒤 선로반원들이 끊어진 철길보수에 떨쳐나서고 역장실의 전화통에 매달린 역원들과 호송군관들이 겨끔내기로 먼곳의 상대방에게 고함을 지르고있을 때 그는 끝내 참아내지 못하고 걷기로 작정했다. 땀과 먼지를 들쓰고 다음날 아침에야 신리의 옛 관청 주택가를 멀리서 바라볼수 있었다. 그동안 자기때문에 어떤 비상조치들이 취해져있는지 알지 못하고 다른 불안으르 가슴을 조였다. 근래에 적기들의 폭격이 더욱 우심해졌었다. 폭격통에 혹시 무슨 불상사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지칠대로 지친 그였지만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부르튼 발바닥에서 물집이 터진것 같았다. 쓰리다 못해 바늘끝으로 마구 쑤셔대는듯 했다.

집이 가까와졌다. 알싸한 끄을음내 풍기는 골목길을 꿰질러갔다. 그쪽에 여러채의 벽돌양옥들이 성한채로 줄지어있었다.

뜨락에 들어서자 출입문에 자물쇠가 걸려있는것을 보았다. 그는 무너지듯 토방우에 주저앉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고 또 자물쇠를 바라보았다.

(제길, 무사하군. 제법 조용하기까지 한걸. 어처구니 없이… 헌데 어델 갔을가?)

호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았다. 그런데 열쇠가 없었다. 옆구리에 끼고온 서류가방을 열어 발칵 뒤졌다. 다음번엔 양복주머니로부터 차례차례 깐지게 찾아보았다. 그래도 열쇠는 나지지 않았다. 늘 열쇠를 잃어버리군 하기때문에 안해는 한달이 멀다하게 새 자물쇠를 사오군 했다. 끝내 열쇠는 나지지 않았다.

그때 이웃집 로파가 문을 열고 그가 헤덤비는 모양을 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이사람 또 쇠대를 잃어먹었나?》

《예, 할머니! 처한데 또 야단맞게 됐구만요.》

로파는 쯧쯧 혀를 차며 측은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사람이 그리 고정한지 원!…》

그는 면구스럽게 웃었다.

《그까짓 자물쇠 또 사오라지요.》

《그 말이 아닐세.》 로파는 가슴을 우벼내는듯 한 기침소리끝에 또 나무람했다. 《안사람한테 너무 어자어자해선 못쓰네. 어제밤 어데로 가버린다면서 나갔네. 남들처럼 피난을 가자는겐지 아니면 영 집을 나가버린다는겐지 그 안속을 뉘라서 알수 있겠나.》

그순간 리성조는 머리속에서 부시돌이 부딪치는듯 한 야무진 소리가 나는것을 들었다. 그러자 한점 의혹이 불꽃처럼 펀뜩이였다.

《서울로 가요. 예? 예서 당신이 할 일이 뭐예요. 거게서 당신을 데리러 사람까지 오지 않았나요. 가자요. 당장 떠나자요!》

해방직후의 일이였다. 밤마다 울며불며 간청했었다. 그다음 리성조가 산업성 전기관리국 기사장으로 임명된 후에는 밤낮없이 집을 나가 사는 남편을 원망하고 지청구를 퍼부었었다.

《기사장이란 벼슬덕에 차례진게 뭐예요. 나를 집지기로 만든것밖에 더 있어요?…》

《왜 또 야단이요. 그래서 출장에서 돌아오자 곧장 오질 않았소. 자, 뚱해서 그러지 말구 저녁이나 짓소. 가만 이 정신 봐라. 내 그걸 어데 뒀더라?!… 만년필말이요.》

그때 리성조는 사실상 자기의 가죽가방속에 있는 그것을 찾느라고 주머니를 열심히 뒤졌다. 안해의 기분을 눙쳐주려고 수선을 떨어본것이다. 허나 안해의 얼굴은 굳어져있었다.

《그게 그렇게 귀중한거나요?… 그런걸 난 진종일 내 청춘은 어데로 갔나 하고 찾았군요.》

리성조는 안해의 마음에로 통한 열쇠조차 가지고있지 못했다. 가정, 행복 하는 말들은 다 허망한것이였다. 사랑도 역시 서가에 꽂힌 소설책의 먼지오른 갈피들에서 아직 현실로 환원되지 않았었다. 그래도 그는 기다렸다. 가정의 화목과 애정, 행복을 갈구했다. 《잃어진 청춘》을 찾고있는 안해를 끔찍이 위해주었다. 이런것을 사랑이라 하는것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지난날 병으로 잃은 전처는 조용했고 헌신적이였다. 말없는 그 꾸준함과 희생적인 헌신성이 오히려 그를 돌아보지 않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리성조는 오래도록 자기 안해가 앓고있는줄도 알지 못했었다.… 대신 아름답고 충동적인 장영실은 거의 매일과 같이 남편을 다몰아대였다. 나이지숙한 남편이 정조차 주지 않는다고 강짜를 부리기도 했다. 리성조는 웃고 빌고 또 순종했다. 이런것이 사랑인지, 이처럼 고달픈 멍에를 지는것이?!… 흔히 말하기를 사랑에는 우의적인 사랑, 정열적인 사랑, 헌신적인 사랑, 맹목적인 사랑이 있다고 한다. 하다면 리성조의 경우는 맨나중의것에 해당될것이다. 그 녀자의 무엇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 미모와 매혹적인 목소리와 젊음이 분에 넘치는것이라고 여겨진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지난날 병든 안해에게 못다해준 정성이 그리도 가슴속깊은 상처로 남은때문인지…

리성조는 안해가 가있을만 한 곳들을 찾아헤맸다. 그러다가 리화녀고 동창생의 집에서 그를 찾았다. 서로 비슷한 처지의 두 녀자가 옛 생활의 향수를 나누며 마주앉아있었다. 둘다 눈물자욱이 질펀했다. 리성조는 말마디를 힘들게 발음하면서 설복했다.

《…중요한 일때문에 빨리 가야 하오.》

《그러니 피난을 가는거죠?… 그만하세요. 어쨌든 피난이지 뭐예요. 그럴바엔 차라리… 친정으로나 가구말아야지.》

《뭐요?… 당신 그거 제정신을 가지고 하는 소리요?》

처가 말하는 친정이란 38°선이남의 한 도시를 말하는것이였다. 38°선이 막힌이래 아직 소식한번 주고받지 못한 그들이였다.

리성조는 격해지는 심정을 가까스로 눌렀다.

《당신 지금 미국놈들이 어데까지 밀려들고있는지 알기나 아오? 그래 이 전쟁통에…》

그가 미처 말끝도 맺기 전에 장영실이 암팡지게 쏘아붙였다.

《전쟁이 뭐 어쨌단말이예요. 죽기밖에 더할라구요. 될대로 되라지요. 운명이 그런것이면… 그렇게 되겠지요. 저갈대로… 다 가는 법이죠.》

그 녀자는 모든 희망과 기대를 내던진듯 했다. 입술이 새파랬다.

《그만하오. 제발 소리치지 마오!》 리성조는 사정했다. 《빨리 가서 짐을 꾸리기요. 지금 중요한 일때문에… 먼저 떠나게 됐소. 나를 찾을거요. 말도 없이 왔는데… 벌써 며칠째 이 모양으로… 빨리 갑시다. 정말 시간이 없소.》

안해를 설복하여 짐을 싸들게 하기까지 적지 않은 품을 들여야 했다. 저녁무렵에야 그들은 북으로 소개하는 어느 연구소의 화물자동차를 얻어탈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폭격통에 또 자동차를 잃었다. 순천을 지나던 어느 다리어귀에서 있은 일이였다. 길을 어기지 못해 기다리던 자동차들을 목표로 적기들이 내려꽂혔다. 차에서 뛰여내린 사람들이 사방 흩어지며 울부짖었다. 끔찍한 참변이 거기 벌가운데로 난 신작로에서 벌어졌다. 자동차가 박산나고 가로수가 꺾어졌으며 형체를 알수 없는 시신들이 길 좌우에 널려졌다. 이통에 장영실은 거의 얼이 나간것 같았다. 하루종일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고 리성조가 묻는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발을 놀려 따라올뿐이였다.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던 그 녀자의 고운 두눈에서는 가끔 한줄기 눈물이 쭈욱 흘러내리군 했다.


저녁무렵 리성조는 초라한 우편국에서 서병호국장을 찾고있었다. 며칠새 몰라보게 변한 장영실이 그의 곁에서 조는듯 마는듯 서있었다. 남편이 서국장을 전화로 찾았다고 기뻐하는것도 아랑곳 않았다. 보따리를 꿍쳐안고 거기에 머리를 기대고있었다.

《여보, 곧 나온다누만.》 리성조는 손끝으로 수화구를 가리켜 보였다. 《이제 무슨 대책을 세워줄거요. 아무렴!… 보통일군이 아니요. 여느 사람들하군 다르단말이요.》 갑자기 그는 송화구를 입에 바싹 가져가며 반갑게 부르짖었다. 《예, 접니다. 리성조입니다. 서국장동무지요?… 예, 제 지금 순천에 와있습니다… 예?… 언제 떠났는가 하면 저… 사실은 제가… 아니, 그런건 아닙니다. 이보시오. 국장동무… 전 사실…》

뿌옇게 흙먼지가 오른 리성조의 얼굴은 차츰 어수선하게 흐려졌다. 피기가 가셔지고 더부룩한 턱수염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건 너무합니다. 국장동무!》 그의 이지러진 얼굴전체가 떨며 부르짖는듯 했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말할수가… 아니요. 그런게 아니란말입니다!…》

수화기를 떨구었다. 재빛이 된 얼굴이 밑으로 수그러졌다. 창턱에 걸려 데룽데룽 매달린 송수화기에서 바람소리같은 소음이 성가시게 울렸다.

장영실이 맥풀린 눈동자를 굴렸다. 처음으로 그 녀자는 어렴풋이나마 사태를 분간한듯싶었다.

《왜 그러세요?… 그 사람이 뭐라구 해요?》

리성조는 진흙빛이 된 얼굴을 들었다. 암담한 공허에 빠진듯 생기없는 눈으로 그 녀자를 보고있었다.

《그 사람은… 우릴 믿지 않는구려.》

장영실이 금시 쓰러질듯 하는 그를 부축했다. 그 녀자는 입술을 떨고있었다. 흐릿해진 두눈에서 눈물이 그렁거렸다.

《그러니 여직 당신은… 그런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 사람들이 당신이 고와서 한자리 주는줄 알았어요?… 청맹과니! 당신이야말로 청맹과니지 뭐예요. 애초부터 그 사람들은 우릴 믿지 않았어요. 믿지 않았단말예요! 아, 내 이럴줄 알았어, 이럴줄 알았다니까.》

장영실은 창턱에 매달려 계속 바람소리를 내는 송수화기를 훌 들어던지다싶이했다. 그다음 얼굴을 싸쥐고 울었다.

《그들은 편협해요. 편협하고 옹졸하고 무지한 사람들이예요. 그 공산주의자들은 다 그렇게 모질단말예요!… 해방후 이에서 신물이 나도록 겪어본 당신이 아직도 그걸 모르세요? 그 공산당간부들이 당신을 얼마나 괴롭혔어요. 그때도 당신을 반동이니 뭐니 했지요?… 그런데도 아직 무슨 미련이 있어 이 모양이예요. 예? 무얼 바라고 누굴 따라서 이 고생이냐말예요?!…》

《그만하오!》

리성조는 술취한 사람처럼 문밖을 나섰다. 어두워지는 하늘에서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고있었다. 보따리를 꿍쳐안은 안해가 허둥지둥 달려나와 그에게 매달렸다.

《여보- 어델 가요, 예?》

《…》

그는 허탈상태에 빠진듯 했다. 그 녀자를 뿌리치며 허척지척 걸음을 옮겨갔다. 비방울이 눈섭을 때렸다. 이마우에 코잔등에도 떨어지고 차츰 턱수염에 맺힌 비방울들은 목덜미로 쓸어들었다.

《이봐요. 내 말 좀 들어요. 이제라두 제발… 돌아서요! 가지 말아요!》

《…》

비에 젖는 흙먼지냄새가 매캐했다. 바람이 휙- 불어치면서 누런 종이장들과 검부레기들을 쓸어갔다. 개굴창을 뚜지던 돼지새끼들이 화닥닥 놀라며 널바자사이로 달아났다. 비줄기가 세차졌다. 부드럽고 따스한 비물이 샤쯔밑으로 흘러들었다. 그러자 몸이 으쓸해졌다. 비물은 따스해도 살결에 닿을 때마다 육체의 온기를 죄다 뺏아가는듯 했다. 온기, 온기가 그리웠다. 그는 얼굴의 비물을 손으로 훑어던졌다. 입으로 스며든 비물이 쩝쩔했다. 비물과 눈물, 가슴까지 온통 젖어들었다. 수척하고 지치고 허둥지둥하는 사나이, 그 누가 이런 꼴을 본다면?… 이것이 나란 말인가, 한점 온기가 그리워 방황하는 이 얼빠진 사람이 나란 말인가?!…

그는 비틀거렸다. 안해가 그를 붙들고있었다.

《가지 말아요. 제발… 돌아서라요!》

《…》

비에 젖은 안해의 모습은 파리해보였다. 별안간 누를길 없는 마음의 충동으로 그는 안해의 팔목을 틀어잡았다.

《가야 해. 내 말을 듣소. 난 꼭… 가야 한단말이요!》

안해를 끌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간다. 기어이 가야 한다!… 부지중 리숙의 앙증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어릴적의 모습이다. 쌍태머리 량끝에 꽃송이를 달고있는… 숙아, 내 딸아!… 너 어데 있느냐. 너는 지금 어느 먼 싸움길을 가고있느냐?…

장영실이 무어라고 하소했건만 듣지 못했다. 무작정 되는대로 안해를 잡아끌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간다. 누가 뭐라든 나는 간다!… 숙아, 언제든 이것만은 믿어다오. 네가 걷는 그길을 나도 걷는다. 광복직후에도 서울에서 돈이 부르고 재산과 명예가 나를 불렀지만 난 이 길을 택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나를 믿지 못해 단죄하고 락인하지만… 나는 간다. 그 편협하고 속된 사람들을 쫓아가는게 아니다. 나에게 새로운 삶을 준 공화국을 따라간다. 변함없이 언제나 나를 믿어주시는 우리 장군님을 찾아가는것이다!…

어둠속에서 시퍼런 불꼬리가 날았다. 그러자 잠시후 먼 하늘가에서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구을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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