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련재 《조선의 힘》 제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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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5 회
제 2 편
27
한밤중에야 리숙은 림진강기슭의 욕골근처에 이르렀다. 곧장 군단장을 찾아가 보고해야겠으나 군단장지휘감시소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겨우 서울제4보병사단이 배치된 골안을 찾았다. 어느 다리부근에서 전사들이 공병작업을 하고있었다.
《동무들, 여기 지휘관은 어데 있어요?》
누군가 청높은 목소리로 중대장을 찾는가 대대장을 찾는가 하고 물었다. 한 전사는 공병도끼로 돌방책의 버팀목을 다듬다말고 《간호원동무 아니요?》하며 마주나왔다. 가까이 이르러서야 녀성군관임을 알아보고 제꺽 거수경례를 붙였다.
《안녕하십니까. 군관동무!… 어서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와드립지요.》
사방에서 푸접좋은 그 병사를 두고 웃어댔다.
《누군가? 아는 사이래?》
《천만에. 괜히 수선을 떠는거지.》
《간호원처녀와 꼭 친해야겠다는 엉터리야!》
《어랍쇼. 꽤나 오랜 살겠군.》
《그건 왜?》
《간호원을 얻으면 밤낮 젖은 수건이나 약병을 들고 돌볼게 아닌가!》
《흐흐흐…》
리숙은 가벼이 미소했다. 녀성들과의 교제가 적은 화선병사들치고 누가 이런 때 롱을 건네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괜히 웃고 떠들며 자기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다 기분좋게 해주는 유쾌한 익살군들을 뭣때문에 나무라겠는가!…
리숙은 앞에 나와선 전사에게 물었다.
《4사공병별동대가 아니예요?》
《예, 군관동지!… 헌데 그걸 어떻게?…》
《중대장동문 어데 있어요?》
《그러니 우리 중대장동무도 아십니까?》
《어데 있어요?》
《예. 예. 갑시다. 저기… 아니 이쪽으로!…》
수다스러운 그 전사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나 차츰 걸음이 떠졌다. 걸음마다 바재이고 입술을 깨물며 자기의 행동에 놀라와했다. 내가 왜 여기로 가나? 누가 오랬기에… 이쪽으로 가나?!…
별안간 와뜰 놀라며 뒤걸음쳤다. 발밑에 시꺼멓게 얼어붙어있는 시체가 있었다. 그것을 밟을번 했었다. 그밖에도 사방 적들의 시체가 널려있는것이 보였다.
《아- 그것때문에 그럽니까?》 길안내를 자청해나선 전사가 리숙을 돌아보며 웃었다. 《우리 부대가 해제낀놈들입니다. 그런데 군관동문… 여기가 처음입니까?》
《예, 군단병원에서 오는 길이예요.》
《아- 그렇댔군.》
그 전사는 화제거리가 생긴것을 기뻐했다. 대뜸 리숙이와 걸음을 맞추며 흥이 나서 어제와 그제에 있은 통쾌한 전투들에 대하여 늘어놓았다. 그리하여 리숙은 전날 군단장이 행군속도를 최대로 높여 부대들을 기동시킨 까닭을 알게 되였다. 최고사령부의 작전적방침에 따라 서부에로 급히 기동한 제2전선 련합부대들이 여기 림진강계선에서 패주해오는 적들에 대한 대섬멸전을 벌린것이였다.
림진강은 우리 나라에서 여덟번째로 긴 강이다. 아호비령북쪽에 있는 두류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아호비령산줄기와 마식령산줄기사이에 있는 좁은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림진강은 개성, 장단 남쪽에서 한강과 강어귀를 같이 하면서 바다로 흘러든다. 그러기에 적 패주대렬은 이 강을 건느지 않고서는 남으로 빠질수 없다. 이 계선을 벗어나지 못하면 살아 도망갈수 없다는것을 잘 아는놈들은 이미 제2전선부대들에 의하여 완전히 차단되여있는 이 길을 열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해나섰다. 한편 미 제8군사령부는 38°선이남에 있는 작전적예비대까지 내몰아 퇴로를 열려고 하였다. 하지만 벌써 군단장 최현은 철원해방전투후 즉시 기동시킨 서울 제4보병사단을 대섬멸전의 주력으로 삼고 림진강을 사이에 둔 석둔리로부터 적동리에 이르는 10여km구간에 강력한 매복진을 펴놓았었다.
이 지방사람들은 이 지대를 삭녕 20리골이라고 한다. 여기서 지난 9일 괴뢰군 7, 8사의 혼합대렬로 이루어진 대부대가 삭녕골이 미여지게 기여들었다. 장풍쪽으로 가는 길이 이미 귀래동, 결운리 일대를 차지한 아군에 의하여 막혔으므로 부득불 림진강을 건늘수밖에 없었던것이다. 놈들은 결사적으로 림진강을 건너서기는 했으나 철원쪽으로 뻗은 길로는 빠질수 없었다. 욕골부근에 진을 친 우리 부대들이 조성해놓은 얼음판이 립석리까지 수km나 뻗어있었으며 물샐틈없는 장애물과 다면매복이 조직되여있었던것이다.
놈들의 첨병중대가 먼저 골안으로 들어왔었다. 놈들은 쌍안경으로 한참씩 주위의 산들을 둘러보았으나 어떤 기미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는지 이어 적대렬이 꼬리를 물고 골안에 흘러들었다.
삭녕골 20리! …무심한 바람결만이 휩쓸어대는 골안 가득히 들어찬 적들은 모두 총을 맞세워놓고 길바닥과 논밭에 마구 주저앉거나 드러누웠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놈들은 청천강계선에서 여기로 오기까지 단 하루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것이다. 숱한 놈들은 부락에 들어가 짚더미들을 무져놓고 불을 놓았다. 젖은 군복을 말리고 언몸도 녹이자는것이였다. 일부 적들은 저녁차비에 서둘러댔다. 실로 삭녕 20리골안은 수천명의 적들로 한벌 덮이다싶이했다. 대섬멸전의 첫 총성은 바로 이 순간에 울리였다. 박격포병들이 제2차철원해방전투때에 로획한 수천발의 포탄을 적들에게 쉴새없이 퍼부어대고 중기관총, 경기관총, 각종 저격무기들의 일제사격으로 얼어붙었던 대기가 산산이 찢겨졌다…
10일에도 여기서는 다시 치렬한 매복전투가 벌어졌다. 죽음의 골안에 기여든 적들은 전날에 쓰러진 저들의 무수한 시체앞에서 공포에 질려 굳어져버렸다. 이날 한개 련대 이상되는 적들은 총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투항하였다.
퇴로를 열려던 괴뢰군놈들의 이러한 말로에는 아랑곳않고 미제1군단의 1기병사단이 또 무리로 밀려오고있었다. 하기는 그것을 알았다 해도 그들에게는 다른 출로가 없는 이상 필사적인 모험으로 죽음의 삭녕20리골-절망의 함정속으로 기여드는수밖에 없는것이다. 림진강계선의 마지막 대섬멸전은 고조에 이르고있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침략자들에게 수치스러운 말로를 가져다줄 격전이 또 벌어질것이며 그것은 다음날 아침까지도 계속될것이다. 조선전쟁의 전행정에서 4 000여명에 달하는 적들을 쓰러눕힌 가장 규모가 큰 대매복전의 세번째날이 밝아오기까지 아직 3시간이 남아있었다.
《다 왔습니다. 저 다리가 보이지요?… 우리 중대장동문 저게 있습니다!》
마침 그쪽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사람들을 부르고있었다. 그가 바로 리숙이 찾는 류현수일는지 모른다. 웬일인지 목소리를 분간할수 없었다. 그는 저도모르게 다리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다스러운 안내자가 급히 비켜서느라고 비칠거리는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리쪽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뛰여오고있었다. 앞선 사람이 무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리숙을 안내해가던 수다스러운 병사가 얼떠름해서 《왜 저럴가?》하고 말했다. 어느새 리숙의 앞으로 달려온 전사들 가운데서 누구인지 그의 코앞에 나타나 안경알을 번쩍거리며 가느다랗게 부르짖었다.
《폭파요. 피하시오!》
어느새 그 사람은 리숙의 팔을 잡아끌고 길섶에 구겨박힌 땅크에로 달려갔다. 가까운 곳에서 여러 전사들이 파괴된 땅크며 자동차들에 몸을 숨기는것이 보였다. 잠시후 둔중한 폭음이 울렸다. 돌쪼각들이 파편처럼 어둠을 썰며 날아갔고 외통길의 레루방책에 부딪쳐 쩡- 하는 소리를 울리기도 했다. 크지 않은 폭발이였지만 추위에 얼어붙은 새벽대기를 산산이 뒤흔들어놓았다. 그때에야 리숙은 공병들이 림진강다리를 끊어버렸다는것을 깨달았다.
《아참, 군관동무두… 내 아니면 어쩔번 했습니까.》
안경낀 전사의 떨리는듯 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귀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리숙은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또 한번 폭발이 있을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그것은 없었다. 사방에서 대피했던 전사들이 자기 위치로 달려가는것이 보였다. 누군가 아주 생소한 목소리로 대원들에게 빨리 서둘러 자기 맡은 일을 끝내라고 웨쳤다. 리숙을 끌고왔던 안경낀 전사도 화닥닥 일어나 다리쪽을 바라보았다.
《됐어, 됐어! …음, 그렇지, 되구말구… 군관동무, 보이지요? 다리중간이 끊어진게 보이지요?》 그는 리숙이 허리를 펴고 일어나자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조금밖엔 안끊어졌거던요. 보이지요?》
리숙은 희여스름한 화약연기가 굼니는 다리쪽을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그러되 좀 비난하는 어조로 말했다.
《조금밖에 안끊어진게 그리도 좋아요?…》
《?!…》
그순간 리숙은 알아보았다.
《원철동무! 어마나- 나를 몰라봐요?!》
《아니 이게!… 간호장동무!-》
사레들린것처럼 허덕거리며 서로 부르짖었다.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질문을 퍼붓고 대답을 했다.
《여기 우리 중대장이 누군지 알아요?… 류현수중대장입니다!》
《예, 중대장동무… 알아요!》
《알아요?… 만났댔어요?!》
《그저… 좀…》
리숙은 그의 지꿎은 질문에 급해났다.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원철동무, 하나 묻자요. 아까 하는 말이… 저 다리를 조금 끊어놨다고 그리도 좋아하던데… 왜 그랬어요? 폭약이 모자랐나요? 아니면 우정?…》
《아하-》 박원철은 우정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건 우리 중대장동무가 구상해낸겁니다. 수학적계산은 내가 좀 도왔구요.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다리 가운데를 조금 끊고 나머지는 흔들거릴정도로 남겨두어서 말이지요… 아 저쪽에서 소리가 나는군. 빨리 갑시다!》
차디찬 강바람이 숨막히게 불어왔다. 군모밑에 흘러내린 머리칼이 눈앞을 가리며 마구 흩날렸다. 귀뿌리가 얼얼해졌다. 참을수 없을 지경으로 몸이 떨렸다.
다리한복판에 이르러 박원철이 멎어섰다. 뭉청 끊어져나간 구간의 앙상하게 삐여져나온 철근들이 칼바람속에서 윙윙거렸다. 컴컴한 아래쪽에서 희끗희끗 깨여진 얼음장들이 물살에 떠밀리며 서로 부딪치고있었다.
박원철이 수학적인 계산의 도움으로 조금만 끊었다고 자랑하던 구간이다. 한쪽은 약 2m도 되나마나했고 다른쪽은 좀더 넓었다. 적땅크들이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면 제일 좁게 끊어진 구간은 그대로 넘어갈것 같기도 했다.
《이거 야단났군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가…》 박원철이 아주 락망해서 하는 말이였다. 《중대장동문 저쪽에 있는데… 어떻게 건너간다?》
순간 리숙은 아릿한 안도감과 더불어 웬일인지 아픔과도 비슷한 실망의 감정을 체험했다. 끊어진 다리를 사이에 두고 류현수는 저쪽 어둠속에 있다. 네댓걸음만 뛰여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사이엔 무시무시한 심연이 가로놓여있다. 맞은편 다리란간쪽에 몰켜있는 검은 그림자들이 바삐 물러서는것이 보였다. 전지불이 번쩍거리며 두세사람이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누가 지휘관이요?》
호리호리한 키에 외투를 걸친 사람이다. 그러자 좀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그옆의 사람들이 대답했다.
《중대장동무!》
어둠속을 향해 누군가 소리쳤다. 순간 리숙의 눈에 익은 걸음걸이로 바삐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사단장동지! 공병중대장 류현수, 당신의 명령대로 왔습니다!》
리숙은 그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박원철이 그의 팔소매를 당기며 무어라고 말하는것도 가려듣지 못했다. 젊은 사단장이 왜 다리를 조금밖에 끊지 못했는가고 따져묻는것 같았다. 강바람에 말끝들이 흩날렸다.
《사단장동지! 우정 그렇게 했습니다.》 류현수의 대답이였다. 《이제 놈들의 륜전기재들이 끊어진 다리가운데 몰켜서면… 이 구간도 무너져내릴것입니다.》
그다음 또 무어라고 설명하자 그들모두가 끊어진 구간가까이 머리를 모으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전지불이 가까스로 붙어있는 골조들과 위태로운 경간들 그리고 깨여진 얼음장들을 샅샅이 더듬었다.
《좋소.》 마침내 사단장이 말했다. 《그럼직하오. 타산을 잘했소. 적땅크들이 다리우에 올라서면 저절로 무너진단말이지. 좋소. 성공하길 바라오!》
잠시후 전지불은 급히 오던쪽으로 되돌아갔다. 사단장이 가면서 날이 밝기 전에 급히 위장을 하고 매복하라고 하는 말들이 겨우 들려왔다. 사단장일행은 멀어져갔다. 류현수도 뒤따라 가버린듯 했다.
리숙은 끊어진 다리 이쪽에서 골똘히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의 눈길은 깨여진 얼음장들이 비비적거리며 흠씰거리고있는 강바닥을 향하고있었다. 앙상한 철골들밑으로 숨가쁜 휘파람소리를 지르며 무심한 강바람이 불어치고있었다.
박원철이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사단군의소는 여기서 멀지 않은데…》
《알고있어요!》 리숙이 말했다. 《하지만 난… 시간이 없어요. 곧 군단장지휘감시소로 가야 해요.》
《지금 당장이요?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우리 중대장동무랑 만나지 않고… 그냥 가겠나요?》
《가야 해요!》
《그러더라도 다리는 건너야겠지요?》
《그래요. 좀 도와주세요.》
바로 그때 리숙은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리숙동무!》
귀에 익은 그 목소리에 피끗 눈길을 돌렸다.
《우릴 찾아왔소?》
류현수의 시꺼먼 형체가 끊어진 다리 저쪽에 있다. 리숙은 추위에 얼어든 입술을 놀려 대담하게 말했다.
《동물… 찾아왔어요!》
그러자 현수는 저쪽에서 얼어붙은듯 했다. 맵짠 칼바람이 그들사이를 휩쓸어갔다. 리숙은 비로소 얼마나 추운 날씨인지 깨달았다. 발이 얼고 온몸이 얼어들어 견디기 어려웠다.
(아이참, 왜 저러구있을가?…)
이발이 떡떡 마주쳤다. 바로 그때 저쪽의 어둠속에서 현수가 몸을 움직였다. 비로소 돌발적인 흥분의 결박에서 풀려난것 같았다.
《리숙!》 그가 불렀다. 《조금만 기다리오. 내가 이제… 여길 건너오도록 도와주겠소. 잠간만!…》
그가 말을 마치자바람으로 이쪽에서 리숙이곁에 어정쩡해 서있던 박원철이 황급한 목소리로 웨쳤다.
《중대장동무! 그건… 내가 하지요. 내가 이제…》
어느새 박원철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스산한 페허와도 같이 끊어진 다리를 사이에 두고 두사람만이 남았다. 그러자 홀연 모든것이 어둠속에서 싸늘한 새벽추위속에서 신음하고 부르짖고있는듯이 여겨졌다. 얼음장이 쩡-쩡 터갈리는 소리, 다리밑의 깨여진 얼음장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사나운 바람소리, 밤하늘 저 끝에서 홀로 외로이 떨고있던 별빛마저 어둠속에 삼켜져버리고말았다.
《리숙!》 현수가 또 입을 열었다. 《난 언제부터… 동무에게 꼭 하고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리숙은 다시 이발을 떡떡 맞쪼았다.
《그건 말이요. 그건… 리숙, 내 말을 듣소?》
현수가 바람새는 소리처럼 물었다. 리숙은 먼저 머리부터 재게 끄덕거렸다.
《예!… 듣고있어요.》
《난 사실… 동무가 나를 수술하던 그때부터… 아니, 그보다 썩 이전인…》
그때 박원철과 또 1명의 병사가 통나무를 메고 달려왔다.
《중대장동무, 됐습니다. 구했습니다!》
리숙은 물러섰다. 찬바람이 벌려진 입으로 쓸어들었다. 그는 몸을 떨고 흐느끼듯 가쁘게 호흡하며 박원철과 다른 병사가 크고 작은 통나무를 가지런히 건네놓는것을 망연히 지켜보기만 했다. 두다리가 후들거리는것이 더이상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건너갈만합니까, 군관동지?》
비로소 리숙은 아까 너스레를 떨던 병사를 분간해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나가지 않았다. 그때 맞은편의 현수가 통나무들을 짚어보며 천천히 건너왔다.
《갑시다. 무서워말구… 나를 꼭 잡소.》
그에게 매달리는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을 당하고있는지, 무엇때문에 이 다리를 꼭 건너야만 하는지 그것도 알수 없었다. 정작 흔들거리는 통나무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엔 두눈을 꼭 감고말았다. 다리밑으로 무시무시한 심연이 느껴졌다. 온몸에 줄달음치는 오한과 같은 전률에 머리끝까지 쭈볏이 일어섰다. 그러자 홀연 《리숙이!》 하는 가는 속삭임과 함께 폭풍같은 힘이 그를 휘감아버리는것을 느꼈다. 숨막히는 압박감속에서 무엇인가 열렬하고 광포한 힘이 덮쳐드는것을 알수 있었다. 누가 신음했는지 무엇이 펄펄 끓고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를 밀어버리려고 애쓰며 또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리며 어데론가 미지의 어둠속을 한치한치 움직여갔다. 리숙을 휘여감은 억센 팔뚝에서 무엇이 뚝뚝 부러지는 소리를 내였다. 누구의 가슴에서인지 흉벽을 세차게 두드리는 박동소리도 들렸다. 온몸이 허공에 뜬것처럼 변화하고 끝없이 움직여갔다. 추위는 사라졌다. 불같은 열정에 몸을 맡긴채 리숙은 가까스로 흐느낌소리처럼 속삭이였다.
《아직 멀었어요?! 예?!…》
흐느낌소리가 목구멍에서 거품처럼 찾아들었다. 맵짠 칼바람이 거세찬 열풍처럼 어둠을 밀어가고있었다. 그들은 콩크리트바닥을 짚었다.…
리숙은 자기의 허리를 억세게 휘감았던 현수의 팔이 풀리는것을 느꼈다. 숨쉬기가 편해졌다. 미칠듯 고동치던 박동도 목구멍까지 들어차던 흐느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들은 뜨거운 피의 도취에서 헤여났다. 두터운 콩크리트바닥이 발밑에 느껴졌다.
《리숙이!》
현수가 그렇게 속삭인듯싶었다.
《놓세요.》 리숙은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바로잡았다. 《인젠 됐어요.》
리숙은 재빨리 군복옷섶을 쥐여당겼다. 계속하여 두손을 머리뒤로 가져다 머리빈침으로 뒤통수에 붙였던 채양없는 여름군모도 적당히 바로잡았다.
《고마와요.》
그리고는 걷기 시작했다. 웬일인지 빨리 도망치듯 했다. 격렬한 도취에서, 무분별한 정열에서 빨리 헤여나고싶었다. 그러자 등뒤에서 현수가 소리쳤다.
《리숙동무, 은페부에 가있소. 내 곧 뒤따라 가겠소!》
현수는 또 련락병을 소리쳐 불렀다. 두사람이 대답하는것 같다. 하나는 박원철, 또 하나는 오윤남의 목소리이다.
《간호장동물 모셔가오. 거기서 전화를 걸게 하고… 적당히 대접두 하오!》
《알았습니다!》
역시 두사람의 대답이다. 그들 두사람이 인연깊은 간호장을 뒤따라왔다. 오윤남이 먼저 말했다.
《간호장동무, 그런 인사불성이 어데 있습니까, 우리도 만나보지 않고 그대로 가버리겠다구요! 안됩니다. 저기 가서 우선 리치를 따져봅시다.》
박원철이 그의 말을 시정시켰다.
《리치가 아니라 도리를 따져야지.》
리숙은 홀연 마음이 개운해졌다. 숨막히던 가슴이 바람에 건듯 가셔진것 같았다.
《참, 전화가 있다지요? 마침 됐군요.》
…은페부는 릉선의 한쪽 귀퉁이를 깎아 대충 가름대를 세우고 천막을 덮은 반토굴이였다. 잉걸불이 있고 한쪽 돌판우엔 전화기가 놓여있었다. 친절한 오윤남이 리숙을 불담 가까이 자리잡게 하고 전화기까지 끌어다주었다. 리숙은 전화기를 무릎우에 올려놓고 발전자돌리개를 돌렸다. 《〈갈매봉〉입니다!》하는 청높은 남자통신병의 목소리가 귀청을 두드렸다. 사단교환이 전투를 앞두고 긴장한 작업을 계속하는것이였다. 리숙은 자기가 군단장동지 담당간호장이라는것을 말하고 환자후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데 군단장지휘처와 전화를 련결시켜줄수 없는가고 부탁했다. 군단장동지에게 직접 보고해야 할 급한 문제가 있다는것도 첨부했다. 물론 저쪽의 낯모를 전화수는 리숙의 그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군단장지휘감시소를 찾아주겠다는것만은 흔연히 약속했다. 처녀의 애원이 섞인 부탁을 거절할 병사가 어데 있겠는가, 전선에서는 그가 군복입은 처녀라는 그 한가지만으로도 존경과 친절과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법이다.
얼마후 남자전화수의 청높온 목소리가 공명판을 찌르르 울렸다.
《01번동지가 나왔습니다. 말씀하시오!》
리숙은 《01》번이 군단장이라는것을 전화수의 어조에서 먼저 알았다.
《군단장동지! 담당간호장 리숙입니다.》
《리숙이, 지금 어데 있어?》
《군단장동지! 간호장 리숙 당신의 명령대로 부상당한 기마통신병을 군단병원에 후송하였음을 보고합니다.》
《넨장,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지금 어데 있나 말이요?》
《군단장동지! 지금 4사공병중대에 도착했습니다.》
《그럼 거게 눌러있소. 전투가 끝날 때까지!…》
《군단장동지, 전…》
《명령대로 하오!》
다음 순간 군단장은 수화기를 놓고말았다. 리숙은 입술을 깨물며 꼼짝하지 않고있었다. 오윤남이 뛰여들며 《놈들이 나타났소!》하고 소리치는것을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누구요. 거기 간호장동무가 있소?》
《접니다.》
《리숙동무요? 나 부관이요.》 군단장의 부관, 남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성돌처럼 입이 무거운 사람이였다. 그 부관이 지금 성난 웨침소리를 지르고있었다. 《간호장동무, 당장 여기로 오시오. 그리고 이제부턴 그 누가 지시하든 자리를 뜨지 마오. 군단장동지가 명령을 해도 뻗대란말이요. 그런 배짱도 없으면 최현군단장곁에 있을 자격이 없소!… 그새… 동무가 없는새에… 군단장이 얼마나 심하게 앓았는지 아오?… 책임질줄 아시오!》
리숙은 성난 그의 목소리가 반가왔다. 그처럼 가차없이 자기를 질책하는것이 기쁘기까지 했다. 그 어떤 매질이라도 달게 받을것처럼 생각되였다. 누구인가 쉴새없이 몰아대고 고통을 주었으면싶었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그는 전투를 앞둔 때에 류현수를 찾아왔고 여기서 지체하고있는것이다. 지체하는것은 감정이고 그것을 비난하는것은 리성이였다.
《간호장동무, 말을 듣소?》
저쪽에서 독촉하는 목소리에 리숙은 재빨리 대답했다.
《듣습니다. 부관동지!》
《강기슭에서 멀찍이 떨어져 와야겠소. 그쪽은 위험하오!… 그리구 알아둘건… 군단장동지가 이제 련천쪽으로 또 갈것 같소. 그런 말이 있었소. 그러니 지금 만나지 않으면 동문 계속 쫓아다니기만 할거요. 무슨 말인지 알만하오?》
《예, 알겠어요.》 리숙은 경련이 이는듯 입술을 떨며 속삭이였다. 《곧 가겠어요. 지금 당장!…》
송수화기를 내던지듯 하고 리숙은 천막을 활 열어젖히며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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