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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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작성일 23-12-07 00:12 조회 2,452 댓글 0본문
(제 30 회)
제 2 장
왕관없는 녀왕
7
(1)
마가을의 음산한 아침이였다.
《둥둥, 둥…》
옷갓을 깨끗하게 한 량반이 경복궁의 정남문인 광화문앞에 매달아놓은 북을 치고있었다.
이 북은 임금에게 상소를 하거나 억울한 사정을 하소할 사람들이 치게 되여있는 북이였다.
북주위에는 아침추위에 퍼렇게 언 아이들이 바지괴춤을 추켜올리며 호기심에 찬 눈길로 북치는 량반을 쳐다보고있을뿐 행인들은 별로 관심없이 그곁을 지나치고있었다. 너무도 드문히 보아오는 현상이요 더우기 상소를 했댔자 별 효험이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서울사람들이기에 오늘 아침 북을 치는 량반에 대해서도 객적은 량반자가 쓸데없는 객기를 부린다고 치부했던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아침의 이 상소가 어쩌면 이 나라의 력사를 변혁시킬지도 모르는 중대사건이라는것을 모르고있었다.
이윽하여 무거운 궁성대문이 찌쿵 열리더니 옆구리에 커다란 칼을 찬 수문장인듯싶은 무관이 나와 량반곁으로 다가갔다.
《웬일이요?》
북을 치던 량반이 꿇어엎드리더니 상소봉장을 두손으로 떠받들어올리였다.
《동부승지(승정원의 끝자리 벼슬아치.) 신 최익현이 상감마마께 올리는 탄핵상소요!》
《상소?…》
시답잖은투로 되뇌이던 수문장은 량반의 강단있는 모색을 다시금 훑어보더니 말없이 상소봉장을 받았다.
《상감마마께 꼭 전해주시오.》
최익현의 간곡한 당부를 들었는지말았는지 수문장은 대척없이 광화문안으로 사라져버리고말았다.
최익현의 상소문을 받은 승정원(임금의 명령을 아래에 전달하고 아래의 문건을 임금에게 올리는 관청.)의 승지들은 부들부들 떨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대원군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난한 그 내용이 너무도 무엄하고 신랄했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지존께 올리는 상소를 깔아뭉갤수가 없어 승정원의 우두머리인 도승지는 마치 법정에 나가는 죄인마냥 무거운 걸음으로 임금의 편전인 건청궁으로 향하였다.
공교롭게도 임금 고종의 편전에는 명성황후가 와있었다. 임금인 고종보다 명성황후를 더 두려워하는 도승지는 부복한채 명성황후에게 먼저 눈인사를 보내고나서 고종을 향해 입을 벌렸다.
《전하, 동부승지 최익현이 상소봉장을 올렸나이다.》
《상소?…》
이렇게 물으며 고종이 명성황후쪽에 고개를 돌렸다.
이마즘에 와서 명성황후에게 더 의거하는 고종의 태도를 보게 되는 도승지는 이번엔 명성황후쪽에 대고 대척했다.
《그렇소옵니다.…》
《그래, 무슨 상소냐? 말을 해라.…》
명성황후가 눈에 웃음을 담고 부드럽게 일렀다.
겁기어린 태도로 말하기를 저어하던 도승지가 가까스로 입을 벌렸다.
《저, 무엄하게도 국태공 대원위합하를 탄핵하는…》
《응?!》
고종이 흠칫 놀라 명성황후를 바라보는데 명성황후 역시 저으기 놀라는 기색이였다.
이때 합문밖에서 상궁이 아뢰는 소리가 돌렸다.
《대원위합하께서 듭시오.》
범도 제 소리하면 온다는 격인가. 또다시 고종과 명성황후는 놀라는 눈길로 마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흰 버선발로 편전에 들어선 대원군은 위압하는듯한 틀진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명성황후가 떠밀어주는 보료우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는 명성황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종에게 일렀다.
《주상, 앉으오. 익현이가 상소를 했다며?》
《방금 들으려던 참이오이다.》
읍을 한 자세로 이렇게 말한 고종은 자기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명성황후도 그를 뒤따라 안존한 자세로 앉았다.
《함께 듣기요.》하며 대원군은 도승지에게 눈길을 주었다.
《도승지, 읽으라!》
대원군의 분부에 난감하여 어쩔바를 모르던 도승지는 구원을 청하듯 고종과 명성황후의 얼굴을 갈마보았다.
《어서!》
대원군의 거듭되는 독촉에 도승지는 할수없이 떠듬떠듬 입을 놀렸다.
《신 최익현은… 감히 말씀드리나이다.》
도승지의 이마전에 진땀이 내배였으나 대원군은 평소의 버릇대로 눈을 감고 웃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요사이 나라정치는 옛법이 변하여…》
고요한 방안에 상소문을 읽는 도승지의 떠듬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문문한 사람만 뽑고 정승륙경들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없어졌으며 사헌부(중앙검찰관청)와 사간원(임금에게 간하는 중앙관청)의 관리들과 임금의 측근자들은 이런저런 일에 참견한다는 비방을 피하기 위하여 입을 다물고 조정에서는 비속한 론의들만 판을 치고있으니 옳은 의리는 없어지고 아첨쟁이들만이 제멋대로 날뛰고 정직한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가렴주구가 그치지 않아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였사옵니다.》
《엉?》
문득 경악에 가까운 대원군의 놀란 소리가 방안의 공기를 얼쿠었다.
고종은 몹시 송구스러워했다.
서원의 철페, 호포제도의 실시 등 중, 하층량반들과 토호들의 지위를 떨어뜨리고 그들을 억제하는 대원군정책에 불평불만을 품고있던 최익현은 대원군의 정책을 비난하는 이런 상소문을 냈던것이다.
대원군의 섭정시기에 일찌기 볼수 없었던 이러한 내용의 날카로운 상소는 사실상 섭정국태공 대원군에 대한 로골적인 도전장이였으며 그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고소장이였다.
이 천만뜻밖의 도전에 대원군은 물론 고종과 명성황후도 정녕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도승지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자기의 소임을 계속하고있었다.
《…그러므로 임금이 재위하는 동안 대원군에게는 그 지위를 높이고 그 록을 후하게 하는데 그칠것이요, 국정에 관여하게 해서는 아니되옵니다.…》
낯색이 불그락푸르락해져 입술을 씰룩거리던 대원군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괘씸한 놈! 전번에두 경복궁중건을 놓구 날 걸구들더니 또!…》
이 한마디를 내뱉고나서 대원군은 씽 찬바람을 일쿠며 밖으로 나가버리고말았다.
그의 뒤모습을 쫓는 명성황후의 얼굴에는 예리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순간 그의 뇌리에는 대원군을 국사에 참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최익현의 상소를 잘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번개치듯 갈마쳤다. 그리고 최익현의 이 상소문이 어떻게 처리되는가에 따라 대원군과 자기의 운명이 결정된다는것을 절감했다.
가슴속에서 고패치는 격정을 묵새기고 랭정한 리성을 되찾아 생각을 집중하기 위해 명성황후는 향원못가로 나왔다.
하늘에는 검은구름이 음산하게 드리우고 마가을의 차디찬 바람이 불어쳤다. 애처롭게 울부짖는 나무가지들, 어지럽게 흩날리는 락엽들… 명성황후는 거센 바람을 맞받아 오연하게 서있었다.
머리칼이 날리고 옷자락이 나붓겼다.
흥분으로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에는 야멸찬 웃음이 지꿏게 어려있었다.
(차면 기울고 성하면 쇠하는 법, 열흘 붉은꽃 없고 십년세도 없다는 말 모르십니까, 대원위대감마님…)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고 자연은 앙상한 자기의 자태를 더욱 드러냈다.
명성황후는 어쩐지 이 조락의 계절이 대원군의 종말을 말해주는듯싶었다.
고종앞에 명성황후와 민승호가 꿇어엎드려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고종의 얼굴에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한 착잡한 표정이 어려있었다.
《곤전, 어서 일어나오. 웬일이요?》
그러나 명성황후는 일어날념을 안하고 여전히 엎드린 자세로 방바닥에 이마를 조아리며 아뢰였다.
《상감마마, 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고 상감마마의 친정을 상소한 최익현에게 상을 주시든 벌을 주시든 하십시오.》
그의 말뜻을 모를리 없는 고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방안을 거닐었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고종은 문쪽으로 돌아서더니 탄식하듯 뇌였다.
《내 나이 벌써 스물이 지났으니… 이제는 정사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가진지는 이미 오래오.》
고종은 회고 가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대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서자니 자식으로서 아버님앞에 도리를 지킬수 없고 그냥 있자니 이제는 신하들 보기조차 부끄럽소만 차마…》
성미가 우유부단한 고종, 아마도 그때문에 그를 사랑하는지도 모르는 명성황후지만 이 순간 그는 안타까움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절절하게 부르짖었다.
《상감마마, 대원위께서 신첩에겐 뭐 남이 되시옵니까? 하오나 골육지간의 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군국의 정사부터 생각하셔야 할게 아니오니까!》
그래도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던 고종은 그냥 엎드려있는 명성황후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간청했다.
《곤전, 아무튼 일어나오. 한대중 엎드려있을 작정이요?》
《신첩이 엎드려있는것이야 무슨 큰일이겠소옵니까. 상감마마께서, 대왕께서 엎드려있는것이 제일로 가슴아픈 일이옵니다. 상감마마, 굳세게 일어서시옵소서.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명성황후의 말에서 그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고종이 문득 몸을 휘친거렸다.
꿇어엎드려 고개만 쳐든 명성황후가 더욱 강렬하게 요청했다.
《상감마마, 힘을 내시옵소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되옵니다. 네, 상감마마… 신첩이 상감마마를 힘껏 협찬하겠나이다.》
명성황후의 눈에서 바질바질 끓는 눈물이 두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민승호도 머리를 조아렸다.
《상감마마, 어서 결단을 내리옵소서!》
드디여 고종의 얼굴에 결심이 어렸다. 그는 허리를 굽혀 명성황후의 겨드랑이에 두손을 넣고 부축하였다.
《곤전, 내 곤전의 뜻을 따를테니 부디 일어나주오.》
《상감마마!…》
웃몸을 일으키던 명성황후가 그만 고종의 품에 무너지듯 왈칵 안기였다.
그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 환희의 눈물이 좔좔 흘러내렸다.
그러는 명성황후를 달래듯 세차게 떠는 그의 어깨며 잔등을 쓸어주며 고종도 걸그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곤전이 곁에 있으면… 그리고 늘 보필해주면 과인도 두려울게 없을것 같으오.》
《상감마마! 신첩은 마마와 한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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