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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5-5. 새 무장력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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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580회 작성일 15-04-08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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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 무장력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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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봄은 세계를 뒤흔드는 사변들로 하여 매우 소란스러웠다. 만주대륙을 강점한 일제는 손중산의 국민혁명에 의하여 밀려난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부의를 내세워 괴뢰만주국을 조작해냈다. 일본의 어용선전기관들과 중국, 만주의 친일적인 출판물들은 때를 같이하여 《오족협화》,《왕도락토》건설을 부르짖으며 만주국을 찬양하였고 아세아와 세계의 진보적인 여론은 이를 강력히 반대배격하였다.


세계의 이목은 9.18사변의 발발원인과 그 책임을 해명할 사명을 지니고 방금 일본에 도착한 국제련맹조사단의 활동에 쏠리고있었다.

영국 추밀원고문관 릿든 경을 단장으로 하고 미국,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등의 렬강대표들로 구성된 조사단은 일본천황의 접견을 받고 수상, 륙군상, 외상까지 만난 다음 중국에 건너와 장개석, 장학량과 회견하는가 하면 만주에 나타나 관동군사령관 혼죠중장도 만나고 9.18사변 발발현장에 대한 시찰도 진행하였다. 일본측과 중국측에서는 서로 릿든조사단을 자기편에 끌려고 접대, 환영경쟁에 열을 올리였다. 조사단이 진상을 밝혀내고 국제련맹이 영향력을 행사하면 일본이 만주에서 철병할지도 모른다는 억측이 정계, 사회계와 보도계는 물론, 정치에 민감해진 소학생들과 마실방 늙은이들의 입에서까지 오르내리였다.


그러나 안도지구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있던 우리는 그런 억측이나 뜬소문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군사훈련에만 열중하였다. 소사하부녀회원들이 매일같이 점심밥을 함지에 담아이고 토기점골등판으로 올라왔다.


우리는 3월중순경에 안도에서 동만의 여러 현들에 조직된 유격대소조의 지휘성원들을 위한 단기훈련(단기강습)을 조직하였다. 지방들에서 20명 가까운 지휘성원들이 소사하 토기점골로 모여들었다.


단기훈련은 2일간 진행되였는데 첫날에는 리론강의를 하였고 다음날에는 동작훈련을 하였다. 나는 조선혁명의 로선과 방침문제를 가지고 정치학습에 출연하는 한편 유격대의 생활규범과 활동준칙에 대한 강의도 하였다. 군사훈련은 주로 박훈이 맡아 지도하였다. 우리는 그때 그 강습에서 대렬동작이나 무기분해결합법과 같은 초보적인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습격, 매복조직과 같은 전술적문제에로 훈련을 점차 심화시켜나갔다.


안도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본부로, 중심으로 되였다. 두만강연안의 여러 현들에서 공작원들과 통신원들이 우리와의 련계를 지으려고 소사하로 자주 찾아왔다. 우리가 안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한입 건너 두입 건너 국내에까지 퍼져나갔다. 그 소문을 듣고 조선과 만주각지에서 20살안팎의 열혈청년들이 사선을 헤치며 안도에 모여와 참군을 요청하였다.


변달환이 입대를 지망하는 오가자의 청년들을 8명이나 데리고 안도로 나오다가 일본군경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으로 끌려간것도 바로 이무렵이였다. 해방직후 나를 찾아왔던 변대우로인은 아들이 참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해동안 속절없는 감옥살이를 한데 대하여 몹시 아쉬워하였다.


간도 여러 현들중에서도 특히 연길지방사람들이 우리를 제일 많이 찾아왔다. 연길지방에는 적의 통치기관들과 폭압수단들이 집중되여있었고 밀정망이 발달되여있었다. 1932년 4월초에는 라남 19사단소속의 38려단 75련대를 기간으로 하고 포병, 공병, 통신병으로 증강된 이께다대좌휘하의 간도림시파견대가 동만지방《토벌》을 목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연길을 비롯한 간도일대에 쓸어들었다.


이런 실정으로부터 그 고장 지하조직에서는 참군을 요청하는 청년들을 안도로 많이 보내주었다. 조직의 추천과는 관계없이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청년들도 많았다.  돈화의 진한장도 호진민(호택민)이라는 중국청년을 데리고 내앞에 나타났다. 호진민은 화룡에서 사범학교 교원을 하던 사람이다.

어떤 날에는 청년들이 한꺼번에 10여명씩 무리를 지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구국군이 도중에서 그들을 붙잡아다가 무리로 학살하였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는 동북자위군, 반길림군, 항일구국군, 항일의용군, 산림대, 대도회, 홍창회와 같은 형형색색의 반일부대들이 많았다. 반일부대라는것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후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고 구동북군에서 떨어져나온 애국적인 군인들과 관리들 그리고 농민들로 이루어진 민족주의군대를 말한다. 이 부대들을 통털어 구국군이라고도 불렀다.

만주지방의 반일부대가운데서 유명한것으로는 왕덕림, 당취오, 왕봉각, 소병문, 마점산, 정초, 리두의 부대들을 들수 있다.


동만에서 제일 큰 반일부대는 왕덕림부대였다. 왕덕림은 한때 목릉과 수분하일대의 밀림속에서 아무런 주의주장도 없이 《록림호걸》의 토비생활로 청년시절을 보내다가 부하들을 이끌고 장작상예하의 길림군에 편입되여 정규군의 외모를 갖춘 장교로 된 사람이다. 그는 9.18사변전까지 구길림군에서 3려단 7련대 3대대장으로 복무하였다. 민간에서는 그의 대대를 《구3대대》라고 불렀다.


일본군대가 만주를 침공한후 그의 상관이였던 려단장 길홍이 투항하여 관동군사령관을 만났다. 그는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길림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되였다.

자기 상관의 반역행위에 분개한 왕덕림은 즉시에 반변하여 항일구국을 선언하였다. 그는 500여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산속에 들어가 중국 국민구국군을 조직한 다음 오의성을 전방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일본제국주의침략군대에 대한 항전을 개시하였다.

라자구일대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간도지방의 적을 견제하면서 후날 우리 유격대와도 피의 인연을 맺은 오의성, 사충항, 채세영, 공헌영은 모두 왕덕림의 충실한 부하들이였다.


남만의 산간지대들에서는 당취오의 자위군이 활동하고있었으며 흑룡강성일대에서는 마점산부대가 북상하는 일본군에 저항하고있었다. 안도의 산간오지로 밀려든것은 오의성의 휘하에 있는 우사령부대였다. 이 부대의 드살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일제의 앞잡이로 보았으며 조선사람들이 만주대륙에 일제침략군을 끌어들인 장본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중 두 나라 인민들사이에 쐐기를 박느라고 리간질을 계속하는데다가 5.30폭동과 만보산사건에서 받은 조선사람들에 대한 나쁜 인상이 그때까지도 중국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고있었다.


구국군의 완고한 상층은 조선민족과 중화민족은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에 의하여 꼭같은 재난과 불행을 강요당하고있는 피압박민족이며 중국사람들이 일제의 앞잡이가 될수 없는것처럼 조선사람들도 일제의 개로 될수 없으며 중국사람들이 조선인민의 적이 될수 없는것처럼 조선사람들도 중국인민의 원쑤가 될수 없다는것을 리해할만한 정치적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지 못하고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맹목적으로 적대시하고있었다. 그것은 구국군의 상층부가 대부분 자산계급출신들로 이루어져있는 사정과 관련된다. 구국군의 상층부는 조선사람은 공산당이며 공산당은 파쟁군이며 파쟁군은 일제의 앞잡이라는 제나름의 공식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조선의 청장년들을 가차없이 박해하고 학살하였다.


도시들과 벌방지대에서는 일본침략군이 살벌하게 돌아치고 일본군이 채 점령하지 못한 농촌들과 산간지대들에서는 수천수만명이나 되는 구국군들이 길목을 지키고 서서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구국군의 적대행동은 청소한 우리 유격대의 존재자체를 위협하는 엄중한 난관으로 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물론, 산림대와 독립군들까지도 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반대하였기때문에 우리는 문자그대로 사면초가의 고립무원한 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반일부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우리 유격대의 존재와 활동을 합법화할수 없었다. 유격대를 합법화하지 않고서는 대오도 확대할수 없었고 공개적인 군사활동도 할수 없었다.

부대는 조직했지만 합법화할수 없으므로 우리는 모두 뒤골방에 배겨있는 신세가 되였다. 세상에 나타나야 빛을 보겠는데 나타날수 없었다. 군복도 없이 모두 사복을 입고 남의 집 뒤골방에서 모젤이나 주무르며 이렇게 해가지고야 어떻게 항일을 하겠는가고 통탄만 하였다. 그것도 조선부락에나 숨어있을뿐 다른데는 얼씬거리지도 못하고 밤에만 몇사람씩 비밀리에 나다니는 형편이였다.

초기에 우리가 유격대를 비밀유격대라고 부른 리유도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그때 일본군대들뿐아니라 구국군과 만주군패잔병까지도 피해다녀야 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는 조선의 일부 민족주의자들과 반동분자들도 경계하면서 다니였다. 합법적으로 나타나기만 하면 공산당이라고 막 쏘고 행패질을 하는 판이여서 정말 문제거리였다. 연길, 화룡, 왕청, 훈춘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사는 집만 골라 다닐수도 없었다. 본래 어렵게 살던 사람들인데 몇십명씩 무리를 지어가서 다 털어먹고나면 생활이 더 어려워질것이니 그것도 야단이였다.


유격대를 합법화하여 대낮에 다니면서 노래도 부르고 군중들로부터 환영도 받고 선전도 해야 일도 되고 싸울 맛도 나련만 그렇게 할수 없는것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우리는 모여앉기만 하면 유격대를 어떻게 합법화하겠는가, 반일부대들과의 관계를 어떤 방법으로 풀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거듭하였다.


제일 심각하게 론의된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의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는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문제였다. 구국군은 그 상층부가 자산계급출신들로 이루어져있고 지주, 자본가, 관료계급의 리해관계를 대변하는 군대인데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그들과 손을 잡는것은 계급적원칙의 포기이고 타협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는 동무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그들은 구국군과 일시적으로는 관계를 개선할수는 있어도 동맹관계를 맺을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들의 적대적행동에 대하여서는 실력으로 눌러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주장이였다.


우리는 구국군이 비록 여러가지 제한성은 있어도 투쟁목적과 처지의 공통성으로부터 항일전쟁에서 우리의 전략적인 동맹자로 될수 있다는 확고한 립장을 가지고 구국군과의 관계를 개선하는것은 물론, 그들과 련합전선까지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상과 리념이 다른 두 무장력의 련합전선에 대한 문제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처음으로 제기된것이기때문에 복잡한 론쟁을 불러일으켰다.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을 실현하는것은 중국공산당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동만특위에서는 일찍부터 왕덕림부대에 주의를 돌리고 7~8명의 우수한 공산당원들을 파견하여 구국군과의 공작을 하게 하였다. 우리도 리광을 비롯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구국군부대들에 파견하였다.

나는 통신원들을 통하여 동산호부대에 파견된 리광이 구국군공작에 부심하고 있는 정형을 여러번 보고받았다.


구국군의 행패가 심해지자 우리 동무들은 련합전선은 공상이니 우리도 이제는 맞불질을 해서 희생된 사람들의 원한을 갚아주자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겨우 설복시켜놓았다. 구국군을 적으로 삼고 그들에게 1대1로 보복을 가한다는것은 반일이라는 대의와 도리에도 맞지 않고 청소한 우리 유격대를 자멸에로 이끌어갈수 있는 무분별한짓이기도 하였다.

간도는 물론, 만주전역의 공산주의자들과 유격대원들이 구국군때문에 고심하고있었다.

당시 각 현에 있는 유격대라고 해야 얼마 안되였다. 한개 현에 몇십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것마저도 구국군한테 잡히기만 하면 모조리 죽는 판이니 부대를 늘일 욕심이 있어도 도무지 늘일수가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나는 우리 유격대가 당분간 우사령부대에 들어가서 별동대로 활동하는것이 합리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우사령부대에 들어가면 구국군의 간판을 가지게 되니 피해를 입을 념려가 없고 무기도 좀 해결할수 있지 않겠는가, 영향만 잘 주면 그들을 공산주의화하여 안전한 동맹자로 만들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동무들의 토론에 붙이였다.


이 문제를 가지고 당조직의 본부가 있는 소사하 김정룡의 집에서 하루종일 회의를 하였다. 그 모임을 지금은 소사하회의라고 한다. 그 회의가 아주 격렬하였다. 구국군부대안에서 별동대로 활동하는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걸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목이 아프게 론쟁을 하였다. 애연가들은 물론, 담배를 피울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마라초를 꼬나들고 쉴새없이 연기를 뿜어대는 바람에 눈이 쓰리고 숨이 막혀서 혼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결국 별동대에 관한 나의 착상은 동무들의 지지를 받게 되였다.


회의에서는 구국군과의 담판을 위하여 우사령부대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적임자로 내가 선발되였다. 동무들이 나를 선출한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가겠다고 자청해나섰다.

당시 우리한테는 군사외교를 해본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누구를 대표로 보내겠는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론의되였다. 대표는 선출해서 보낸다 하더라도 상대측이 접근이나 시키겠는지, 정작 담판을 하게 되면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내대고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지 않겠는지 그리고 수틀리면 우리 대표를 사살하지나 않겠는지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대표로는 이 모든 정황에 능숙히 대처할수 있는 그런 사람이 가야 한다는것이 이구동성으로 강조되였다.


우리들가운데는 이런 기준에 적합한 인재가 없었다. 우사령과 마주앉자면 나이가 많은 사람을 선발해야겠는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는 박훈, 김일룡, 호진민뿐이였다. 김일룡은 나이가 나보다 10여살이나 이상되는 사람이였지만 중국말을 잘 몰랐다. 그 나머지는 다 조아범처럼 학교를 갓 나온 18~20살내기들이였다.

나는 동무들한테 나를 보내줄것을 제기하였다.


동무들은 그 제의를 반대하였다. 성주동무는 대장인데 우사령이 공산당이라고 잡아제끼면 곤난하다, 그러니 진한장이나 조아범이나 호진민 같은 중국동무들 가운데서 누구든지 외교에 능한 사람이 가는것이 좋겠다는것이였다.


나는 동무들에게 우사령이 내가 가면 무엇때문에 죽이겠는가고 물었다. 동무들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들어갔다가 《꼬리빵즈》하고 죽이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들이 다 죽는데 너라고 못 죽일게 뭔가, 왕청 관부대사건때문에 요즈음은 구국군이 조선청년들이라면 더 눈을 밝힌다는데 너는 가지 않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관부대사건이란 왕청에 있는 리광동무의 비밀유격대가 관부대란 반일부대의 무장을 해제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하여 유격대와 구국군사이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유격대의 활동에 더 어려운 국면이 조성되게 되였다. 왕청에서 온 통신원은 자기네 고장에서 관부대사건이 있은 다음 그 보복으로 여러명의 유격대원들이 구국군에 붙잡혀 총살당하였다고 하였다. 김책동무가 북만에서 산림대에 붙잡혀 죽을번한것도 이와 비슷한 시기였다.


나는 그냥 내가 가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내가 그렇게 고집한것은 남들보다 뛰여난 외교술을 가지고있거나 우사령을 굽혀낼 특별한 처방이라도 있어서가 아니였다. 유격대의 존망이 우사령과의 담판에 달려있고 우리의 성패도 그들과의 련계를 조정하는데 달려있다는것과 구국군을 동맹자로 만들지 않고서는 우리가 동만땅에서 유격전은 고사하고 문전출입조차 할수 없다는것이 엄연한 현실로 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리고 이 고비를 잘 넘기고 무장투쟁을 시작하지 못한다면 조선의 남아로서 살 보람도 없고 살아야 할 리유도 없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면 혁명을 하지 못한다, 내가 중국말을 잘하고 청년운동시기에 풍랑도 여러차례 겪어본것만큼 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우사령을 만날수 있다, 그러니 내가 가야 한다고 동무들을 설복하였다. 그런 다음 박훈, 진한장, 호진민 그밖의 중국청년 한명을 더 데리고 우사령을 찾아 떠났다. 아무런 신변안전담보도 없는 모험의 길이였다.

상대측의 사령부는 량강구에 자리잡고있었다.


구국군이 우리더러 어디에서 왔는가고 물으면 우리는 안도에서 왔다고 하지 말고 길림에서 왔다고 대답하기로 약속하였다. 구국군들앞에서 유격대의 주둔구역인 동만의 지명을 대는것은 재미가 없었다.

우리는 대사하로 가는 길에서 우사령부대와 맞다들었다. 수백명의 대오가 《삼국지》에 나오듯이 《우사령》이라고 쓴 기발을 날리며 위풍당당하게 행군해오고있었다. 우사령부대가 남호두에서 일본군대를 소탕하고 기관총까지 로획한후여서 그들에 대한 소문이 굉장히 날 때였다.

《피하지 않겠소?》

호진민이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아니, 맞받아나가자구!》하면서 그냥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머지 네사람도 나의 량옆에 가지런히 서서 보조를 맞추어 걸어나갔다.


구국군들은 우리를 보자 《꼬리빵즈, 오라!》하고 호령하였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우리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도 당신들처럼 항일을 하는데 왜 붙잡으려고 하는가고 중국말로 항의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조선사람이 아닌가고 되물었다. 나는 떳떳하게 조선사람이라고 대답한 다음 진한장, 호진민 동무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은 중국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급히 상의할 문제가 있어 당신네 사령한테로 찾아가는 길이요. 우리를 사령한테로 안내하시오!》

내가 이렇게 위엄을 풍기며 요구하자 그들은 좀 수그러들면서 자기네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 얼마쯤 갔을 때 구동북군장교차림의 지휘관이 점심식사지령을 내리고 우리를 어떤 농가에 구금하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길림육문중학교시절의 나의 스승이였던 류본초선생이 그 집으로 들어왔다. 류본초선생은 육문중학교에서 얼마동안 한문을 가르친적이 있고 그후 문광중학교와 돈화중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은 사람이였다. 그는 상월선생과도 친교가 깊었고 진한장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선생이 호인이고 지식이 해박한데다가 좋은 책들도 많이 알선해주고 훌륭한 시들을 지어 학생들앞에서 즐겨 읊어주었기때문에 우리는 무척 그를 따르고 존경하였다.


나와 진한장은 류본초선생을 알아본 순간 탄성을 내지르며 선생의 앞으로 뛰여갔다. 역경에 처했을 때 선생을 만나니 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류본초선생도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에게 연방 질문을 던지였다. 너 김성주, 어째서 여기 있느냐? 어떻게 되여 여기에 왔느냐? 어데로 가다가 이렇게 붙잡혔느냐?


내가 사연을 간단히 설명하자 선생은 자기 부하들에게 《이 사람들을 잘 대접하라. 나도 여기서 점심을 함께 먹겠다. 잘 차려오라.》하고 큰 소리로 지시하였다. 알고보니 그는 일본군대가 만주로 쳐들어오자 교단을 떠나 우사령부대에 들어와 참모장으로 활동하고있었다.


류본초선생은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라가 망해가는걸 보고 참을수 없어 군복을 입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부하들을 데리고 싸우자니 속타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하면서 같이 가서 자기네와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우리가 그 의견에 동의하고 나서 우사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자 그는 량강구에 있던 우사령이 지금 안도성시에 들어가니 자기와 함께 가면 만날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선생에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들도 조선사람부대를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제놈들에 대한 원한이야 중국사람들보다 조선사람들이 더 강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반일부대에서는 왜 조선사람들이 항일을 못하게 자꾸 행패를 부리고 잡아죽입니까?》

《아, 그러게 말이야. 나는 그러지 말라고 자꾸 말리는데두 그 모양이거든. 공산당이 뭔지두 알지 못하는 무지막지한것들이. 공산당이 일제를 반대하는데 무엇이 나쁜가?》

류보초선생도 분개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이제는 됐다, 살길이 나졌다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즉석에서 박훈을 소사하에 보내여 그곳 동무들에게 우리가 무사하다는것과 우사령부대의 참모장이 우리를 진심으로 후원해주었기때문에 유격대를 합법화할수 있는 전망이 보인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류본초선생을 따라 안도성시로 떠났다.


류본초에게는 전용군마가 한필 있었다. 우리가 선생에게 말을 타라고 권고하였으나 그는 《너희들이 걸어가는데 내가 말을 타구 가다니 될말이냐. 같이 걸어가면서 이야기나 하자.》고 하였다. 그리고는 성시에 가닿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줄곧 도보행군을 하였다.

반일부대병사들은 거의 모두 팔에 완장을 두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나같이 《부파스 부요민》이라는 글이 씌여져있었다. 그것은 죽기를 겁내지 말며 인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뜻이다.


군졸들에게서 풍기는 험상궂은 인상과는 달리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좌우명은 매우 건전하고 전투적이였다. 그 글이 나에게 우사령과의 해후가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한가닥의 기대를 품게 하였다.

그날 우리는 류본초선생의 안내로 거침없이 우사령을 만날수 있었다. 그는 참모장의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우리를 례절있게 맞이하고 대우도 높은 급으로 잘해주었다. 우리모두가 중학교졸업생으로서 연설도 할줄 알고 격문도 쓸줄 알고 무기도 다를줄 아는 한창나이의 젊은이들이라는것을 내탐하고 자기네 곁에 붙잡아두고싶은 욕심이 나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 짐작과 같이 우사령은 정말로 우리를 자기네 부대에 들어오라고 하였다. 나보고는 사령부선전대 대장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나의 속심은 자기 군대를 만들어 그것을 합법화하자는것인데 사령이 나더러 선전대 대장을 하라고 하니 나로서는 참으로 난처하였다. 내가 거절하면 우사령이 노염을 탈것은 분명한 일이였고 류본초선생도 립장이 딱해질수 있었다.


나는 일이 싱겁게 되기는 하였지만 우사령의 신임만 얻으면 운이 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령님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그의 제의를 수락하였다.

우사령은 몹시 흡족해하였다. 그는 즉석에서 부하에게 임명장을 쓰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사령부선전대장으로 되였다. 호진민은 부참모로 되고 진한장은 비서로 임명되였다. 소원밖의 황당한 결과였지만 우리로서는 어차피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사닥다리였다. 사실 이 벼락감투가 유격대를 합법화하는데서 큰 은을 내였다.


나는 남의 집 뒤골방에 배겨있을 때의 우리 처지와 류본초선생의 알선으로 우사령부대의 심장부에 깊숙이 침투하게 된 오늘의 처지를 대비해보면서 마음속으로 인제는 됐다고 쾌재를 올리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일에 부닥치게 되였다. 구국군이 연길에서 푸르허로 넘어오는 조선청년들을 70~80명이나 붙잡아서 성시로 끌어왔던것이다.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끌려온 청년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나는 류본초선생한테로 뛰여갔다.

《선생님, 이거 야단났습니다. 선생님네 사병들이 조선사람을 또 무리로 잡아왔습니다. 저 사람들속에 무슨 친일파가 있겠습니까. 저 사람들속에는 친일파가 없습니다. 왜놈의 앞잡이가 있는지 없는지 조사해보고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류본초는 나의 말을 듣고나서 《성주, 네가 나가봐라. 우리는 너를 믿는다.》고 하였다.

《선생님, 나 혼자서는 곤난합니다. 선생님께서 같이 나가셔야 합니다. 원래 선생님은 연설을 잘하시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연설을 하시면 왜놈의 개라도 다 감화될것입니다. 감화시켜서 왜놈들과 싸움시킬 생각을 해야지 거 친일파도 아닌데 자꾸 죽여서 뭘하겠습니까.》

《성주가 연설을 잘하는데 나까지 무슨 연설을 하겠나. 혼자 나가보라구.》

류본초선생은 손을 내 저으면서 한사코 사양하였다.


선생의 말처럼 내가 학생시절에 연설을 많이 한것만은 사실이다. 길림, 돈화, 안도, 무송, 장춘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일제의 만주침략야망을 폭로하고 조중인민의 단결을 호소하는 연설을 많이 하였다. 류본초선생이 이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선생님, 내가 조선말로 연설하면 선생님네 부대 어른들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혹시 내가 나쁜 선전이라도 하는가 하고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류본초선생은 나의 말을 듣자 또 손을 내저으면서 어서 나가보라고 재촉하였다.

《성주가 기껏해서 공산당선전을 하겠는데 일없어. 내가 보증할테니 마음놓고 연설을 하라니까.》

이 선생이 벌써 내가 공산당에 관계하고있으며 공산주의운동을 하고있다는것도 알고있었다.

《공산당선전도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해야지요. 그것이 뭐 나쁜게 있습니까.》


서로 믿지 않는 처지이면 그때 내가 류본초선생앞에서 감히 이런 말을 하지 못하였을것이다. 그들이 나도 공산당이고 일제의 앞잡이라고 잡아제끼면 그만이지 딴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이 나와 각별히 친근한 관계에 있던것만큼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류본초선생은 육문중학교시절부터 서로 격의없이 지냈다. 내가 길림에서 학교를 다닐 때 류선생은 따뜻한 심정으로 나를 극진히 돌보아주었다.


내가 류본초선생과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있을 때 우사령이 참모부로 들어왔다. 그는 붙잡혀온 청년들을 내다보며 또 공산당원들을 잡아온 모양이라고 하면서 공산당이 만주땅에다가 어느새 저렇게 많은 새끼를 쳤는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류본초선생이 얼른 나에게 선전대장이 빨리 나가서 저 사람들과 담화를 해보라, 조선사람들이 다 공산당일수 없고 또 공산당원이 다 일제의 앞잡이로 될수 없지 않는가고 하면서 끔뻑 눈짓을 해보이였다.


우사령은 참모장의 말을 듣고 대노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폭동을 일으키고 땅을 빼앗으려 하다가 일본놈들까지 끌어들였는데 그래두 공산당이 일본놈의 앞잡이가 아니야?》

조선사람들에 대한 우사령의 편견은 예상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맹목적이였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오해도 그만 못지 않게 집요하였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우사령을 설복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리고 당돌하게 들이댔다.


《사령님께서는 공산당이 나쁘다는것을 책을 보고 아십니까? 말을 듣고 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엇때문에 공산당원들을 나쁘다고 하십니까?》

《책은 무슨 책. 말을 듣구 알지. 입을 가진 사람이면 모두 공산당원들을 나쁘다구 해. 그래서 나두 나쁜줄로 알구 있는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아연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됐다!》하고 마음을 놓았다. 체험에 기초한 견해가 아니고 소문을 듣고 생긴 오해이니 얼마든지 바로 잡아줄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였던것이다.

《사령님이 자기 주견도 없이 남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면 큰 일을 어떻게 합니까?》

주위에 있던 진한장과 호진민도 공산주의자들이고 참모장까지 우리를 지지해주고보니 우사령은 결국 우리들에게 포위된 셈이였다.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나는 설복을 계속했다.


《사령님, 아까운 청년들을 자꾸 죽여선 뭘하겠습니까. 저 사람들에게 총은 당장 줄수 없겠지만 창이나 하나씩 주어서 한번 돌격대로 써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왜놈들 하구 잘 싸우는가 어쩌는가를 시험해보잔 말입니다. 잘 싸우면 그이상 더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죽여버릴거야 없지 않습니까.》

우사령은 내 말을 한참동안 듣고있더니《음, 그건 그래. 그럼 선전대장이 나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보게.》라고 하였다.


나는 붙잡혀온 청년들이 있는곳에 찾아가 쪽지 한장을 써서 그들속에 은밀히 돌리였다. 당신들은 증거가 없는 한 공산당원이라고 절대로 말하지 말라, 당신들의 몸을 수색할 때 나온 《반일병사들에게 고함》이라는 삐라는 어데서 주었다고 대답하라는 내용의 쪽지였다. 그 사람들은 이 쪽지가 어떻게 되여 자기들의 손에까지 들어왔는지 알수 없었다.


내가 나타나자 잡혀온 청년들은 모두 분노에 찬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를 우사령한테 와서 그의 하수인노릇이나 하는 나부랭이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적의에 찬 시선을 온몸에 받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동무들가운데 김성주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 물음 한마디에 얼음장같은 긴장감은 깨지고 장내에는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퍼져갔다. 김성주라는 이름을 들었다고 대답하는 청년들도 있었고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내가 바로 김성주올시다. 나는 지금 여기 우사령부대에서 선전대장으로 일하고있습니다.

우사령은 방금 나에게 당신들이 구국군에 합세하여 싸울 의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걸 알아보라는 과업을 주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싸워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있다고 말해주십시오.》

온 장내가 《싸우겠습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웨치였다.


나는 우사령을 찾아가서 청년들의 동향을 그대로 전달한 다음 우리가 그들을 흡수해서 일본군대와 싸움을 시켜보는것이 어떤가고 제기하였다.

우사령이 그 제의에 선뜻 동의해나섬으로써 청년들의 생사와 운명문제는 우리의 요구대로 결정되였다.

우리앞에는 반일련합전선을 실현할수 있는 더 넓은 길이 열리게 되였다.

이렇게 유격대를 합법화할수 있는 문어귀에 거의 도달했을 때 우사령의 뒤에서 그를 조종하고 있는 조선인고문이 말썽을 부리였다. 그는 김좌진파에 속한 오랜 민족주의자였는데 남호두에 와서 농사를 하다가 9.18사변이 일어나자 구국군에 합류한 사람이였다. 그는 지식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였기때문에 우사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있었다.


이 사람이 우사령을 사촉하여 공산주의자들을 박해하게 하는 모사였다. 그는 70~8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조사도 해보지 않고 부대에 받아들이는것은 경거망동이라고 하면서 그들중에는 친일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떠들었다. 이 사람을 눌러앉히지 않고서는 우리의 활동에 또다시 엄중한 난관이 조성될수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우사령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거 부대에 조선사람이 한명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숨기고 내놓지 않습니까?》

우사령은 아니, 아직도 못만나봤는가고 하면서 부하들을 시켜 그 사람을 데려오게 하였다.

만나보니 키가 무척 크고 체격이 건장한 사나이였다.

나는 《인사합시다. 선생님이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으시겠는데 우리 젊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니 많은 편달을 주기 바랍니다.》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였다.

그도 자기 소개를 하였다. 그는 사령부에 중국말을 잘하는 조선청년이 새로 들어와 선전대장이 되여 우사령을 보좌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자기는 그 소식을 듣고 같은 조선사람으로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했었노라고 하였다.


그가 감히 조선사람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민족에 대해 운운하기때문에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들이댔다.

《그러면 반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많이 모집해야지 어째서 자꾸 죽입니까? 사상이 다르다고 죽이면 됩니까? 조선사람이 제 나라 땅에서 살지 못하는것만 해도 분한 일인데 여기 만주에 쫓겨와서 구국군들한테까지 잡혀 죽으니 이 이상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공산주의를 했건 민족주의를 했건 주의를 가리지 말고 단결시켜서 일제와 싸우게 해야지 자꾸 배척하고 잡아제껴서 좋은 일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은 선전대장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여 두번째 장벽이 허물어졌다.

우사령은 우리의 담화가 호의적인 분위기속에서 결속되는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우사령에게 사령께서 나를 믿으신다면 선전대장자리는 호진민 같은 사람들에게 겸직으로 주고 나에게는 차라리 조선사람들을 모아가지고 투쟁할 대장책임을 하나 줄수 없느냐고 제기하였다.

류본초선생도 지당한 말이라고 하면서 나를 지지해주었다.


우사령은 조선사람으로 부대를 따로 뭇는다면 총은 어떻게 해결하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총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령님보고 손을 내밀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적의 총을 빼앗아서 부대를 무장시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우사령은 그 대답을 듣고나서 몹시 만족해하였다.

《그럼 부대를 뭇게. 그런데 자네네한테 무기를 주었다가 후에 그 총부리를 돌려대면 어쩐다?》

《그건 념려마십시오. 그런 배신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설사 총부리를 돌린다 해도 사령님네 부대와 같이 큰 부대가 우리 같은 햇내기들을 못당해내겠습니까?》


우사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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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우사령은 손을 내흔들며 오히려 제편에서 대장이 롱담을 진담으로 들은게 아닌가고 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처음부터 구국군에서 떨어져나오겠다고 하면 우사령의 노여움을 살것같아서 그에게 사령의 명의로 부대의 이름을 하나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옆에 있던 류본초선생이 《그럼 별동대라고 하지. 조선인별동대라고 하는것이 좋겠소.》하고 말하였다.
류본초선생의 제안에 우사령도 찬성하고 나도 찬성하였다.

비밀유격대를 합법화하기 위한 기초작업은 별동대의 탄생과 함께 성과적으로 종결되였다. 우리는 이 별동대안에 안도에 있는 비밀유격대 성원들과 우사령부대에 억류되였던 70~80명을 다 포함시켜 유격대를 합법화하였다.
나는 진한장과 호진민의 손을 량손에 하나씩 갈라쥐고 사령의 방을 나섰다. 우리는 《승리요!》, 《대성공이요!》하면서 온밤 성시의 둘레를 거닐었다.
호진민은 나에게 가치담배 한대를 권하면서 한번 연기를 삼켜보라고 하였다.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에는 술에 취하든가 술이 없으면 담배연기에라도 취해보는것이 좋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가치담배를 물고 연기를 삼키다가 숨이 막혀 오래동안 재채기를 하였다. 그 바람에 호진민도 웃고 진한장도 웃고 나도 웃었다.
《원참, 담배연기도 삼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빨찌산대장을 하나.》
호진민은 이런 롱까지 하였다.

소사하에 돌아와 담판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하니 뒤골방에 배겨있던 동무들이 나를 목마에 태워가지고 밖으로 우르르 쓸어나갔다. 그리고는 온 동네가 다 듣게 만세 삼창을 하였다.
명창으로 소문난 김일룡은 《아리랑》까지 불렀다. 흥겹고 생기발랄한 원무곡이나 씩씩한 행진곡을 불러야 할 그런 축제의 날에 강쇠같은 남아대장부 김일룡이 《아리랑》과 같은 비가를 부른것은 상식밖의 일이였다.
김철(김철희)이 김일룡의 팔을 흔들면서 물었다.
《일룡형님, 이 좋은 날 하필 그런 노래는 왜 불러요?》
《모르겠다 모르겠어. 나두 모르게〈아리랑〉이 쏟아져나왔구나. 어쨌든 우리는 숱한 고비를 넘지 않았니.》
김일룡은 노래를 그치고 눈물이 글썽해서 김철을 돌아보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숙연한 생각에 잠기지 않을수 없었다. 그의 말과 같이 우리는 이 날을 위해 실로 얼마나 험한 시련의 고개들을 넘어왔던가. 김일룡의 한생은 그대로 그 시련의 축도라고 할수 있었다. 그는 독립군으로서 민족주의운동도 해보고 공산주의운동도 해본 사람이였다. 조선에서도 살아보고 만주에서도 살아보고 연해주에서도 살아본 풍운아였다. 한숨도 쉬고 눈물도 많이 흘린 수난에 찬 생애였다.

《아리랑》은 그 생애를 집약한것이다. 한숨을 웃음으로 바꾸고 좌절에서 돌격에로 넘어가야 할 그 력사의 분기점에서 김일룡은 《아리랑》으로써 곡절많은 과거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의 기쁨을 푸른 하늘밑에서 마음껏 노래한것이였다.

그때 로상에서 류본초선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고 유격대의 운명은 어떻게 되였을가. 나는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미 고인이 된 선생에게 말없는 감사를 드리군 한다.

우사령부대에서 담판의 성공을 누구보다도 기뻐한 사람이 바로 류본초선생이였다. 그는 우리가 성시를 떠날 때 멀리 군영밖에까지 따라 나와 이제는 서로 적이 아니라 형제로, 우군으로 되였다고 기뻐하면서 손을 굳게 잡고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을 때려부시자고 격정에 넘쳐 말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안도성시에서의 잊지 못할 담판의 나날과 육문중학교시절을 회상하면서 슬프게 울었다.
우리는 우사령과의 담판에 성공함으로써 유격대의 존재와 활동을 합법화하고 우리와 련합하여 일제와의 항전을 벌릴수 있는 동맹군을 가지게 되였다. 담판의 성공은 또한 우리에게 애국애족의 대의를 내세운다면 사상과 리념이 서로 다른 타국의 민족주의자들과도 통일전선을 뭇고 공동투쟁을 벌릴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 신심은 그 이후 반세기이상에 걸치는 나의 정치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였다고 생각된다. 나는 사상과 리념이 다른 민족주의자들이나 복잡한 생활경력을 가진 자산계급출신의 각계각층 인사들을 포섭하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주저하거나 편견을 가지고 행동하는 일군들을 만나게 되면 우사령과 담판하던 경험을 상기하면서 그들의 도량을 넓혀주군 하였다.

소사하에 돌아온 나는 왕청지구에서 구국군공작에 고심하고있는 리광에게 우사령과의 담판내용과 조선인별동대가 조직되게 된 경위를 상세히 통보해주고 안도의 경험을 참작하여 왕청에서도 지체없이 별동대를 하나 조직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그때까지도 리광은 지하활동을 하고있었다. 나는 한개 중대의 인원을 리광에게 보내여 거기에서도 별동대를 조직해가지고 지하활동으로부터 합법적인 활동으로 넘어가게 하였다.
별동대라는것은 조선사람으로 조직된 특별부대라는 말이다. 조선사람으로 조직된 부대가 구국군들과의 관계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한것은 우리와 리광네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가 별동대라는 이름을 가진것은 우리 유격대의 합법적활동을 보장하며 구국군과의 련계를 강화하고 그들과의 반일련합전선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적조치였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는 별동대를 내온 다음 그것을 확대하고 재편성하여 빠른 시일안에 반일인민유격대를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을 활기있게 다그치였다.
대오를 편성하는 사업은 여러가지 론쟁을 동반하였다.

그때 어떤 동무들은 유격대대렬내에 로동자성분이 적은것을 가지고 몹시 우려하였다. 100여명이나 되는 입대대상자들을 조사해보니 대부분이 학생출신과 농민출신들이였다. 이 실태에 놀란 몇몇 동무들이 로동자성분이 적은것은 혁명군대를 조직하는데서 맑스ㅡ레닌주의원칙을 위반하는것으로 되지 않는가, 그것은 또한 장차 혁명군의 변질을 가져올수 있는 요소로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견해를 표시하였다.

나는 그런 견해에 대해 로동계급이 혁명군의 주구성성분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은 맑스ㅡ레닌주의군사학의 일반적원리이다, 그러나 이 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농민이 주민의 압도적다수를 이루고있으며 로동계급은 농민에 비해 수적으로 매우 적은 상태에 있다. 그렇다고 로동계급의 수자가 많아질 때까지 유격대창건을 뒤로 미루고 기다릴수는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농민이나 학생출신도 다 로동계급 못지 않게 혁명의식이 높고 민족성이 강하다, 출신이 달라도 로동계급의 사상을 가지고싸우면 된다, 농민이나 인테리출신이 많은것이 혁명군이 변질될 요소로는 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깨우쳐주었다.

우리는 지휘체계를 세우는데서도 기존공식을 절대시하지 않고 유격전쟁의 특성과 요구에 맞게 구령을 치는 사람보다 구령을 집행하는 싸움군을 많이 내는 방향에서 대오를 짜고 편제들을 결정하였다. 말하자면 지휘체계를 고도로 단순화하였다. 그러므로 부대에 후방부서나 그것을 주관하는 지휘관도 따로 두지 않았다. 모두가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싸움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정치공작도 할수 있게끔 준비시키였다.

그때 우리에게 그라우제위쯔의 《전쟁론》과 같은 책이라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은 계시를 받았겠는가. 당시의 우리 수준이란 그저 부대편성에서의 3.3제는 나뽈레옹이 창시한것이라는 정도의 상식에 머무르고있었다. 그라우제위쯔에 대해서는 이름이나 알 정도였다.
나는 2차 세계대전때에야 그라우제위쯔의 《전쟁론》을 처음으로 입수하였다. 지휘체계를 단순화하여 싸움군을 많이 내도록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나를 쉽게 공감시킬수 있었다.

반일인민유격대는 중대를 기본전투단위로 하여 조직되였다. 나는 대장 겸 정치위원으로 선거되였다.
유격대의 군복은 가둑나무 물을 들인 록색천으로 지었다. 왼쪽가슴에는 다섯모가 난 붉은천을 오려붙이고 거기에 중대번호를 써넣었다. 군모에는 붉은별을 달기로 하였으며 다리에는 흰 행전을 치기로 하였다. 유격대창건의 마지막세부작업이라고 할수 있는 복장제도를 하나하나 마무리지어나가기란 참으로 가슴흐뭇한 일이였다.

우리가 진지하게 토의하고 결정한 복장제도에 따라 부녀회원들이 떨쳐나서 군복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때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부녀회원들과 함께 온갖 정성을 기울여 군복을 마르기도 하고 재봉침을 돌리기도 하였다.

우리는 1932년 4월하순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한 최종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입대지망자들에 대한 마지막심사와 함께 유격대결성식날자와 장소에 대한 토의를 진행하였으며 당면한 활동지역을 확정하고 유격대의 활동과 관련된 전반적대책을 수립하였다.

이 회의후 입대지망자들은 3도백하의 입구인 류가분방(발재툰)에 모였다가 소사하에 집결하였다. 입대지망자는 100여명이였는데 그들중 지금까지 이름이 기억되는것은 차광수, 박훈, 김일룡(소사하), 조덕화(소사하), 곰보(별명, 소사하), 조명화(소사하), 리명수(소사하), 김철(김철희, 흥륭촌), 김봉구(흥륭촌), 리영배(흥륭촌), 곽ㅇㅇ(흥륭촌), 리봉구(삼인방), 방인현(삼인방), 김종환, 리학용(국내), 김동진(국내), 박명손(연길), 안태범(연길), 한창훈(남만)밖에 없다.

1932년 4월 25일 아침
우리는 토기점골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가지였다.
이깔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등판의 공지에 새 군복을 떨쳐입고 무기를 휴대한 대원들이 구분대단위로 정렬하였고 그 공지의 한쪽변두리에 소사하와 흥륭촌일대의 인민들이 모여서서 술렁대고있었다.
대원들의 생신하고 름름한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는 내 눈앞에는 가지가지의 회억들이 구름처럼 떠올랐다. 이 무장대오의 결성을 위하여 우리의 동지들이 길은 얼마나 걸었고 모임은 얼마나 가졌고 연설은 얼마나 하였고 준령은 얼마나 넘었으며 그 과정에 가슴아픈 희생은 얼마나 당하였던가. 반일인민유격대는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겨운 로고와 피어린 투쟁과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진 우리 혁명의 고귀한 산아였다.

나는 이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동지들과 고인들을 토기점골등판에 모두 불러오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가슴에 차넘치는 격정을 터뜨려 연설을 시작하였다.
내가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을 선포하자 대원들은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인민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만국로동계급의 전투적명절인 5월 1일 우리 반일인민유격대는 붉은기를 앞세우고 안도현성에 입성하여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면서 보무당당히 열병행진을 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김일룡이 이날의 행진에서 노래선창을 담당하였다.
그날은 시민들뿐아니라 반일부대장교들과 병사들까지 거리에 떨쳐나와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환영의 인사를 보내고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다.

무력시위를 끝낸 대오가 토기점골로 돌아왔을 때 차광수와 김일룡이 우리 집으로 달려가 몸져누워있는 어머니를 데려왔다.
병고에 시달린 얼굴, 미간에 생긴 주름살, 머리의 흰오리, 그러나 어머니의 눈은 고요히 웃고있었다. 어머니는 리영배의 곁에 다가와 총이며 탄띠며 오각별을 오래오래 만져보았다. 그 다음 김철, 조덕화, 김일룡, 방인현, 차광수의 앞을 거닐면서 이 총도 쓸어보고 저 총도 쓸어보고 이 어깨도 만져보고 저 어깨도 만져보고.
미구에 어머니의 눈이 서서히 젖어들었다.

《정말 장하구나. 우리 군대가 생겼으니 이제는 됐다. 왜놈들을 치고 나라를 꼭 찾아야 한다!》
음성도 퍼그나 젖어있었다. 어머니는 분명 우리에게 바친 자신의 지성은 까마득하게 잊고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먼저 떠나간 아버지와 애국지사들의 로고에 대하여 생각하였을것이다.

그후 연길, 왕청, 훈춘, 화룡을 비롯한 동만의 다른 지방들에서도 유격대들이 련이어 조직되였다. 김책, 최용건, 리홍광, 리동광 등 조선의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북만과 남만에서도 유격부대들이 련이어 태여나 적들에게 포문을 열었다.
1932년 봄은 항일대전의 총성속에서 무르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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