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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2-2. 2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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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904회 작성일 15-06-06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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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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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안산 서쪽밀영에서 좌경분자들이 《민생단》보따리를 뒤적거리고있을 때 새봄의 눈석이조차 시작되지 않은 마안산 동쪽밀영의 음달밑에서는 수십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병마와 기한에 떨며 울고있었다. 그 아이들의 대부분은 간도혁명의 마지막보루라고 말할수 있는 처창즈에서 어른들과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고심참담한 나날을 보내다가 유격구가 해산된후 내도산을 거쳐 서정하는 인민혁명군부대들의 보호를 받으며 적들의 마수가 덜 미치는 남만주의 후방밀영에까지 굴러온 고아들이였다. 마안산밀영의 나어린 주민들중에는 연길지방에서 온 아동단원들도 있었다.


그 아이들이 유격구를 해산할 때 적구에 내려가 문전걸식하는 거지가 되거나 로두와 가게방과 장마당에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하루하루를 굼때나가는 소매치기나 방랑아가 되지 않고 불원천리 무송의 오지까지 찾아온것은 정녕 감탄할만한 일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인민혁명군부대들이 관할하는 후방밀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배고파서 울고 추워서 우는 참혹한 현상이 존재하게 되였단 말인가. 아이들의 양육을 담당하고있는 일군들이 갑자기 《이붓아버지》나 《이붓어머니》가 되여 그들을 학대하기 시작하였단 말인가. 아니면 그 아이들이 별치 않은 고난앞에서도 곧잘 눈물을 짓거나 투정질하는 응석받이가 되였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수가 없다!

나는 마음속으로 두가지 가설을 다 무시해버리였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의 울음은 무엇을 시사하는것인가. 추위와 주림으로부터 오는 생리적고통이 참을래야 참을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였다는 무언의 신호일수도 있지 않을가. 하지만 그런 고통이야 그 애들이 지난날 유격구시절에도 많이 겪어보지 않았던가. 우리의 아동단원들은 고생때문에 눈물을 지을 호부자자식들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일찌기 부모형제들을 잃고 홀몸이 된 그 애들에게 있어서 춥거나 배고픈것쯤이 무슨 요란스러운 슬픔으로 되고 고민거리로 되겠는가.


하지만 마안산밀영에서 아이들이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있다는것은 엄연한 현실이였다. 새 사단 편성을 위한 모임이 결속단계에 들어선 어느날 박영순은 쪽지편지 한장을 내 손에 슬그머니 쥐여주는것이였다.

《장군님, 회의가 끝난 다음 마안산의 아동단원들을 위해 시간을 좀 내주실수 없겠습니까? 그 아이들의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새 사단이나 꾸려놓고는 저하고 같이 마안산밀영에 한번 다녀오셨으면 합니다. 아이들이 장군님을 얼마나 안타깝게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그 쪽지에는 이런 사연이 적혀있었다.


마안산의 아동단원들이 겪고있던 참상에 대해서는 후날 내가 그 밀영에 도착하였을 때 김정숙도 구체적으로 보고하였다. 마안산의 고아들가운데는 그의 지도를 받던 아동단원들이 적지 않았다. 원래 그는 부암동에 있을 때부터 아동단지도원사업을 하였다. 아이들이 유격구시절부터 그를 몹시 따랐다고 하였다.


원래 김정숙은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유격구인민들이 가장 혹심한 식량난을 겪고있던 처창즈시절에 그와 아이들사이에는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련대가 이루어졌다. 그때 김정숙은 군부작식대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아사직전에 있던 아이들이 밤마다 그를 찾아와서는 먹을것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어떤 날은 그 아이들이 작식대원들 모르게 부엌에 기여들어서는 찬장도 뒤지고 쌀독도 뒤지였다. 그럴 때마다 김정숙은 끼니때에 먹지 않고 남겨두었던 누룽지나 송기떡 같은것을 그 애들의 손에 쥐여주군하였다. 그는 배고파서 쩔쩔매는 아이들을 위해 하루 한번 정도씩은 꼭꼭 끼니를 번지면서 자기 몫으로 차례지는 음식을 동무들 모르게 남겨두었다가 동냥을 오는 아이들에게 먹이군하였다.


처창즈에서 죽을 고생을 다한 아동단원들은 평생토록 그의 그런 선행을 잊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빨찌산을 따라 내도산에 가있을 때 김정숙은 거기서 아동단지도사업을 하였다. 그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나에게 마안산아이들의 생활형편을 보고한것은 리해할만한 일이였다.


공산주의자들의 보호를 받고있는 수십명의 고아들이 전쟁의 포화가 미치지 않는 혁명군의 후방밀영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는것은 무심히 스치고 지나갈수 없는 하나의 비상사건이였다. 나는 신경이 팽팽해졌다. 도대체 무슨 곡절이 있길래 그 애들이 그처럼 나를 안타깝게 기다린단말인가.


아이들의 눈물은 정의를 대변한다. 그 어떤 부당한 힘이 정의를 우롱하고 참혹하게 짓밟을 때 아이들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목놓아 운다. 그 통곡속에는 자기를 모욕하고 학대하는 인간들을 향해 어린 넋들이 던지는 론고가 있다. 그것은 온갖 불의스러운것에 대한 항변과 성토를 대신하며 그 불의로 하여 손상당한 자존심과 침해당한 권리를 대변한다. 아이들은 눈물로써 자기앞에 닥쳐온 재난을 경고하며 그 재난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해줄것을 요구한다. 울음은 자기를 사랑하거나 사랑해줄수 있는 사람들에게 어린이들이 보내는 최대의 하소연이다. 사람들이 그 울음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귀를 기울이는것은 후대들을 아끼고 돌보아주는것이 인간의 본성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본성으로 되고있기때문이다.


마안산의 아동단원들로 말한다면 전우들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금싸래기 같은 존재들이였다. 전우들은 유언으로 우리에게 자식들의 장래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아들딸들을 혁명가로 키워달라고 호소하였다. 우리의 두어깨와 량심에는 그 불쌍한것들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건실한 정의의 수호자들로 키워내야 할 신성한 과제가 지워지고있었다.


내가 마안산아동단원들의 운명을 걱정하는것은 단순한 인간적동정도 아니였고 소시민적인 감상주의의 발동도 아니였다. 그것은 그들의 부모들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우리에게 넘겨준 권리였고 의무였다. 설사 그 부모들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아이들의 눈물을 수수방관하지 않았을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만이 지닐수 있는 인도주의적감정이다.


전우의 아들이자 나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이자 전우의 아들로 되는것이 바로 공산주의적인간관계이다. 내가 아플 때 동지도 아프고 동지가 아플 때 나도 아프며 내가 배고플 때 동지도 배고프고 동지가 배고플 때 나도 배고픈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들로 부각시키는 륜리도덕이다.


어느 한 부업수산작업반 관리위원회 위원장은 강에 빠진 동지의 딸을 건져안고 뭍으로 나오다가 자기 딸이 물에 가라앉았다솟구쳤다 하면서 사경에서 허우적거리는것을 발견하였다. 보통사람 같으면 자기 딸부터 먼저 구원해놓고 련이어 동지의 딸을 구원하려고 강으로 들어갔을것이다. 그가 그런 순서로 구조작업을 했다고 하여도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건덕지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관리위원장은 품에 안았던 동지의 딸을 구원한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딸곁으로 헤염쳐갔다. 하지만 그 딸은 벌써 죽은 몸이였다. 마을사람들이 뛰여와서 울며불며 정에 넘치는 위로의 말을 하자 관리위원장은 구원된 동지의 딸을 가리키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나는 내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소. 이 애도 내 딸이요.》


천박하고 리기적인 인간들의 도량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엄두조차 낼수 없는 거룩하고 숭고한 희생성을 발휘하고서도 그것을 범상한 일로 묻어두며 만민의 평가와 우대앞에서 오히려 얼굴을 붉히며 수집어하는 여기에 바로 공산주의자들의 매력이 있으며 조선민족이 소유하고있는 미덕이 있다.


새 사단이나 꾸리면 인차 무송을 거쳐 장백으로 직행하려던것이 당초의 우리 계획이였다. 그렇지만 마안산아이들의 불우한 처지는 우리로 하여금 새 사단을 꾸린 다음 장백으로 직행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시키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그 아이들을 만나보지 않고서는 장백으로 가더라도 심리적속박에서 해방될것 같지 못하였다.


미혼진회의가 끝난후 나는 마안산 동쪽밀영의 아동단원들을 찾아갔다. 그날 나를 밀영에까지 안내한 사람은 마안산무기수리소 책임자인 박영순이였다. 나는 그가 자청하여 나의 길동무가 되여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였다.


이 걸음은 나로 하여금 인간 박영순을 립체적으로 파악할수 있게 한 좋은 계기로 되였다. 마촌에서 첫시작을 뗀 우리의 우정은 이 상봉을 통하여 더 심화되였다. 박포리가 다부작장편소설이라도 엮을수 있는 자기 가문의 방대한 력사를 처음으로 구술한것이 바로 이 상봉때였다고 기억된다.

박영순의 선대 할아버지들은 1860년대부터 금곡촌에서 타향살이를 시작한 첫 세대의 대표자들이며 이 일대에서 조선식영농법을 보급하고 전파시킨 황무지개척의 선구자들이였다. 아버지대에는 그의 집에 소박한 야장간도 생겨났다. 이 야장간에서 아버지의 조수로 일해온 박포리의 소년시절은 후날 그를 병기분야의 특출한 기술자로 명성을 떨치게 한 밑천으로 되였다. 그의 아버지는 농한기마다 양포를 메고 사냥을 다니였다. 박영순이도 17살 때부터는 소일거리삼아 수렵에 재미를 붙이였다. 아버지의 눈을 속여가며 이따금씩 슬금슬금 하는 사냥이여서 성수는 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양포단속을 무섭게 하였다. 맏아들이 사냥을 다니는것은 묵인해주면서도 둘째 아들인 박영순이 총을 다루는것은 좀체로 허락하지 않았다. 양포곁에 다가가 총신만 만져보아도 눈을 흘기며 불호령을 내리군하였다. 그러나 18살 때부터는 문제가 달라졌다. 금곡촌의 로포수들이 잡으려다가 여러번 놓쳐버린 호랑이를 그가 단발명중으로 쓸어 눕히였던것이다.


박영순은 범의 코수염을 뽑아가지고 의기양양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코수염은 그가 자기 힘으로 힘들게 얻어낸 포수면허증이나 다름없었다. 온 동네가 호랑이의 수염을 구경하려고 그의 집에 마실을 왔다. 아버지는 젊은 사냥군의 사격솜씨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날부터 금곡촌의 로포수들은 그를 《박포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박포리에게는 양포사용허가령도 내리였다. 계림탄광과 부그라즈광산에 입직하여 지하혁명사업에 참가할 때까지 박영순은 그 양포로 수백마리에 달하는 산짐승들을 잡았다.


나는 박영순에게 《박포리》라는 별명이 달리게 된 래력을 들으면서 그가 만일 병기창사업을 하지 않고 인민혁명군의 저격수로 활동하였더라면 자기가 잡은 산짐승의 수자보다 훨씬 더 많은 적을 소멸하였을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것은 그의 야장술이 사격술을 릉가한다는 사실이였다. 그는 현직군인대오에서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으로 심상하게 계산되고있었지만 병기분야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떠받들리우고있었다.


박영순은 초물구럭속에 대여섯마리나 되는 꿩을 넣어 짊어지고 나를 따라나섰다. 나는 그 푸짐한 짐짝을 보자 무거운 쌀배낭에 꿩을 얹어가지고 명월구골안으로 찾아오던 리광의 모습까지 새삼스럽게 겹쳐서 가슴짜릿해지는 심회를 금할수 없었다.

《박포리동무, 아직 사냥질을 좀 하는가요?》

나는 꿩구럭을 손짓해보이며 박영순에게 물었다. 박영순은 미간을 쪼프리고 구럭을 추슬러올리였다.

《그만둔지가 언제인데요. 이건 옹노를 놓아 잡은거랍니다. 아이들한테 빈손으로 가기가 멋적어서 좀 버럭질을 했지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는거야 좋은 일이지요.》

《사랑이라구요?》

박포리는 이렇게 반문하고나서 웬일인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런 치하를 받을 자격이 없는놈입니다. 이 박포리는 비겁한 놈입니다.》

《비겁하다니, 그건 갑자기 또 무슨 소리입니까?》

《생각만해도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사령관동지앞이니 창피스러운대로 이실직고하겠습니다. 내 한번은 메토끼를 여라문마리 잡아가지고 마안산아이들을 찾아간적이 있습니다. 애들이 그 메토끼를 보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나도 기분이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저 1사 정치주임이란 어른이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내앞에 나타나 삿대질을 해대며 막 야단을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무슨 사람인데 상급의 승인도 없이 여기에 와서 함부로 어슬렁대는가, 누가 당신더러 이런 자선을 베풀라고 했는가, 당신이 그래 저녀석들한테 어떤 꼬리표가 달려있는지 모른단 말인가고 하면서 눈이 쑥 빠지게 닦아세우고는 당장 사라지라고 파리처럼 쫓아버리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였습니까?》

《메토끼를 고스란히 망태속에 도로 넣어가지고 병기창으로 돌아왔지요.》

《왜 겁이 났던가요?》

《네, 부아도 나고 겁도 났지요. 지금은 이렇게 담이 커져서 탕탕 큰소리로 말합니다만 그때에야 어림이나 있습니까. 정치주임이 새끼〈민생단〉들을 도와준 반혁명분자라고 물고늘어지면 화단이 아닙니까.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더구만요. 그후부터는 아이들의 동네에 발길질을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망신스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박포리는 앞에서 초신감발을 하고 길을 내며 걸어가는 1사 정치주임 김홍범의 뒤모습을 아니꼽게 바라보며 골살을 찌프리였다.

《그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겁이 납니까?》

《이제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 옆에 계시니 힘이 납니다. 지난 몇해동안 〈민생단〉소동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걸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립니다.》

《그건 문자그대로 악몽입니다. 메토끼망태를 메고 아이들을 찾아갔다는 그것만으로도 동무는 후대들앞에서 절을 받을수 있습니다. 후대들을 사랑하고 동정한다는거야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감정입니까.》


박영순은 그 말까지 듣고나서야 팽팽하게 긴장되였던 얼굴의 근육을 풀고 큼직큼직한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놓았다. 바위돌같이 엄하고 무뚝뚝한 이 자존심이 강한 사나이의 입에서 문학소녀들의 일기책에서나 볼수 있는 진실한 고백을 들으니 눈물겹도록 고마왔다. 그의 언행과 마음씨에서 풍기는 강직하고 결백한 체취는 나에게서 형언할수 없는 감동을 자아냈다.

만일 그 누가 나에게 당신의 생활에서는 어떤 때가 제일 기쁘고 행복한 때로 되고있는가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것이다.

《나의 생활에서 기쁨과 행복은 례사로운것으로 되고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리상적인 생활을 창조하고있는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자주적이고 사상적으로 가장 진보적이며 문화도덕적으로 가장 문명하고 순결무구한 인민과 더불어 한생을 락천적으로 살아가고있기때문이다. 나의 생활은 매일 매 시각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되여있다.


특별히 기쁘고 행복한 때가 있다면 그것은 인민들속에 들어가는 때이며 그 인민들속에서 온 나라의 본보기로 내세울수 있는 훌륭한 인간들을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시국을 론하고 생활을 론하고 미래를 론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라의 꽃봉오리라고 부르는 아이들속에 있는 때이다.》

이것은 나의 일생을 좌우하고있는 행복관이라고 말할수 있다.


박영순과의 담화가 나에게 그토록 큰 만족을 주었던것도 바로 이런 행복관이 작용하였기때문이였을것이다. 박영순은 내가 생활속에서 찾아낸 혁명가의 본보기였으며 량심인의 전형이였다. 그후 실천을 통하여 나는 그가 혁명적원칙성이 남달리 강하고 부정과의 타협을 모르며 매사에 공명정대한 인간임을 다시한번 확증하게 되였다.


박포리가 항일무장투쟁전적지답사단을 인솔하고 중국 동북지방을 순방하던 1959년도의 일이다. 무더운 여름날 대표단은 소박하고 아담한 어떤 농가의 웃방에서 하루밤을 류숙하게 되였다. 그 지방 농민들은 선렬들의 발자취를 따라 매일같이 신고스런 답사의 길을 이어가고있는 이웃나라의 손님들을 위해 숙소에 도배도 새로 하고 노전도 새로 깔아주었다.

그런데 물것이라면 꼼짝 못하는 몇몇 답사단원들이 밤중에 빈대의 성화를 받다가 침구를 걷어안고 연줄연줄 마당에 뛰쳐나와 멍석우에서 하루밤을 지냈다. 그 방에서 마지막까지 잠자리를 고수한것은 박영순단장 한사람뿐이였다. 단원들은 자기네 단장이 지나치게 잠이 둔하거나 물것을 타지 않는 특수한 체질인 모양이라고 판단하였다.


다음날 아침 박영순은 답사단원들을 모여놓고 호된 비판을 하였다.

《한개 나라를 대표하는 답사단원이라는 사람들이 빈대가 문다고 뜨내기들처럼 멍석우에서 야숙을 하면 우리에게 좋은 잠자리를 마련해주느라고 수고한 이고장 사람들의 성의를 외면하는것으로 되지 않는가. 그런 정도의 곤난을 극복할만한 참을성도 없고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차후 다시 대표단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행위들이 나타나면 그 경중에 따라 조국으로 아예 소환시키고말겠다.》


그 순간에야 답사단원들은 이 빨찌산출신의 강의하고 과묵한 사나이가 빈대의 성화에 장밤을 시달리면서도 주인집 사람들의 성의를 저버릴수가 없어 그냥 방안에 남아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후에 이 일화는 전적지답사단원들의 입을 통하여 나한테까지 전달되였다.


우리가 밀영에 도착하자마자 마안산의 아동단원들은 《장군님!》하고 부르며 앞을 다투어 귀틀집에서 쏟아져나왔다. 밀영의 하늘에 부딪쳐 은방울처럼 굴러가는 아이들의 웨침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불길처럼 확 타오르는 격정에 온몸과 마음을 송두리채 내맡기며 아이들앞으로 바삐 걸어갔다. 저 아이들, 저 아이들이다. 적에게 맞아죽고 찔려죽고 불타죽은 부모형제들의 원쑤를 갚으려고 천산만악과 림해설원을 지나 천신만고의 가시덤불길을 헤치며 혁명군을 따라온 아이들, 바로 저 아이들이 철조망없는 수용소와도 같은 이 몰인정하고 을씨년스러운 산중에서 《민생단》련루자의 억울한 감투를 쓰고 겨우내 설음속에서 우리를 기다려온 아이들이다.


인민의 리익우에 초혁명적인 《원칙》의 구호, 《계급성》의 구호를 올려세우고 대중을 우롱하고 학대하는데 습관된 민족배타주의자들과 좌경기회주의자들은 혁명군의 짐이 된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외면하였다. 그 아이들이 가까이에 있으면 적들에게 밀영의 위치가 드러날 위험성이 있다고 자기들만의 보신을 위한 소왕국을 따로 짓고 깊은 수림속에 들어가 별거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 수림언저리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그 이붓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아이들이 엄동설한에 풀뿌리를 우려먹으며 기한에 떠는것을 보면서도 쌀 한토리 가져다주지 않았고 의복 한벌 해입히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련민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 아이들의 상처에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는 사람들, 아이들의 언손과 언볼을 입김으로 녹여주는 사람들, 아이들이 귀엽다고 쓰다듬어주는 사람들, 아이들이 설음에 겨워 울 때 함께 붙안고 우는 사람들은 례외없이 《민생단》명부에 오르고 박해를 받았다.


윤창범이 죽은후 대리련대장이며 명사수인 김락천은 아동단원들을 데리고 마안산으로 들어오다가 아이들의 헐벗은 몰골을 보다못해 련대후방부일군들이 간수하고있던 군복천으로 그들에게 옷을 해입히였다.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련대장에게 감사를 드리였다. 그러나 이런 선행으로 하여 김락천은 분하게도 《민생단》의 모자를 쓰고 처형되였다. 아이들을 동정하는것이 죄로 되고 랭대하는것이 오히려 공으로 되는 이 밀영에서는 참다운 인간적향취, 공산주의적향취를 전혀 느낄수 없었다. 주먹을 부르쥐고 내앞으로 밀물처럼 육박해오는 수십쌍의 눈물에 젖은 눈동자들은 인간성을 저버리고 초보적인 인간적도리마저 저버린자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고있었다.


숨가쁘게 뛰여오던 아이들의 무리속에서 갑자기 동요가 일어났다. 허우대가 제일 큰 선두아이가 무슨 장애에 맞다들었는지 공지 한복판에 발길을 못박아세우고 주춤거리였던것이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절벽에 부딪친 물멀기처럼 그 열풍같은 흐름을 멈추고 먼발치에서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고있었다. 나는 떼를 지어 머무적거리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박영순에게 조용히 물었다.

《박포리동무, 저 아이들이 왜 저럴가?》

《부끄러워서 그러는것 같습니다. 저 옷주제들을 보십시오.》

나는 아이들의 옷차림에 주의를 돌리였다. 옷이란 명색뿐이였지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나 다름없었다. 불에 타고 찢겨지고 닳아떨어진 그들의 옷은 옷이라기보다도 차라리 넝마나 걸레짝에 가까운것이라고 말할수 있으리만큼 람루하였다. 수개월동안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주림과의 싸움을 부단히 벌려온 아동단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백지장처럼 창백하였다.


나어린 수난자들의 그 참혹한 정상은 나로 하여금 불현듯 소사하에서 갈라진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영주동생의 모습을 그려보게 하였다. 나이를 보면 동생도 그 애들과 같은 또래였다. 허리를 치는 갈대밭속에서 철주와 함께 눈물을 삼키며 나를 바래주던 막내동생의 얼굴이 눈앞에 삼삼하였다. 친척도 아니고 동성동본도 아닌 이웃의 친지들에게 동생들의 장래를 부탁하고 소사하를 떠난후 문안편지 한장 똑똑히 보내지 못하고 4년 세월을 덧없이 보낸 자신의 무심한 처사가 민망스러웠다. 1936년봄에 동강밀영에서 나를 만난 김혜순은 영주가 안도에서 아동단사업을 하고있었다는것과 1935년 봄인가 여름에 그가 유희대원들을 데리고 처창즈에 며칠동안 와있으면서 연예공연을 하였다는 단편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때에 김혜순은 유희대원들의 밥을 해주었다고 하였다.


김혜순은 영주동생이 부른 노래가 아주 인상적이였다고 하면서 그 노래의 가사를 뜬금으로 줄줄 외우기까지 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무송에서 연예대활동을 지도할 때 새날소년동맹원들과 백산청년동맹원들이 부르던 노래였다.


여기 모인 여러분 허리건사를 잘하시오

웃음끝에 끊어진 허리는

화타 편작도 못이어요

에헤라 논다 뛰여라 논다

어깨춤이 절로 난다


화타, 편작이란 고대중국의 명의들이다.

김혜순이 동강에서 전해준 소식은 나에게 있어서 퍼그나 큰 위안으로 되였다. 하지만 마안산의 아이들을 찾아가던 그때만 해도 나는 동생의 행적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바람에 날린 마가을락엽처럼 한자리에 몰켜서서 오도가도 못하는 아이들의 애수에 찬 눈동자들을 살펴보며 그때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 영주도 저 애들처럼 어데서인가 기한에 떨고있지 않을가. 저 애들처럼 밥도 먹지 못하고 옷도 입지 못하면서 무정한 이 형을 그리고있지 않을가.…


그런데 혁명을 하겠다고 이 산중에까지 따라온 아이들에게 어떻게 《민생단》의 껍데기를 함부로 뒤집어 씌워놓을수 있단 말인가. 그래 그 모지락스럽고 얄미운 인간들한테는 저 아이들이 《민생단》이 아니고 《민생단》일수도 없다는것을 판단할 능력조차 없으며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돌보아줄 한가닥의 자비심이나 동정심마저 없단 말인가. 인간해방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할 결심이라고 맹약한 사람들이 인간중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자립성이 약한 어린이들을 어쩌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방임해둔단말인가.


우리 나라 력사에서 《어린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냈고 《어린이의 날》이라는 아이들의 명절을 처음으로 제정한 이름난 소년운동자였던 작가 방정환은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글을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바가 있다.

《…어린이는 어른들보다 더 높게 대접하시오.

어른은 뿌리라 하면 어린이는 싹입니다. 뿌리가 근본이라고 위에 올라앉아서 싹을 내리누르면 그 나무는 죽어버립니다. 뿌리가 싹을 위해 키워주어야 그 나무(그 집 운수)는 뻗어나갈것입니다.…》


이것은 1923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맞으면서 그가 인쇄하여 돌린 삐라의 한 대목이다. 이 부탁속에는 아이들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이 자자구구마다 스며있다.


내가 창덕학교를 다닐 때 강량욱선생도 학부형들을 만나면 이와 비슷한 말을 종종 하였다. 그 호소가 《어린이날의 약속》을 그대로 따온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자기 식으로 가공한것이였던지 그 여부는 잘 알수 없다. 아무튼 선생이 학부형들에게 아이들을 존중해야 한다, 아이들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어른들이 아이들한테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그 말속에 진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군하였다.


어린이들을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하라고 한 그들의 호소는 자기자신보다 후대들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넋속에서만 울려나올수 있는 숭고한 리성의 목소리이다.

《아이들이 없는 세계는 태양이 없는 세계》라고 한 명언속에는 후대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격조높이 고동치고있는가.

력사에 이름을 남긴 세계적위인들은 누구나 다 아이들을 열렬히 사랑하였다. 맑스가 아이들의 충실한 벗이였다는것은 칼 립크네흐트의 글을 통해서만 전해지고있는 사실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손들의 쾌락을 위해 이 위대한 인간이 《말》도 되고 《승용마차》로도 되였다는 일화는 온 세상 사람들이 즐겨 회상하는 화제거리가 되고있다. 후대들이 스위스의 페스탈로찌를 지금까지도 고이 추억하고있는것은 그가 아이들을 위해 자기의 전재산과 전생애를 바친 훌륭한 교육자였기때문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인류가 기억하고있는 동서방의 모든 위인들은 누구나 다 후대들에 대한 사랑을 미덕중의 미덕으로 간주하여온 아이들의 진정한 벗이였고 스승이였고 어버이였다.

그런데 귀족도 아니고 부르죠아지도 아닌 마안산의 주인들, 입만 벌리면 인간성을 운운하고 인간해방을 념불처럼 외우는 이 밀영의 공산주의자들은 어찌하여 아이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는단 말인가!


나는 치미는 분노를 걷잡을수 없었다. 혁명 그자체를 생명보다도 더 신성시해온 어린것들의 깨끗한 신념이 망울채로 저렇게 무참히 짓밟힌다는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일이였다. 나는 저 아이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사람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저 어린것들이 처창즈에서 어른들과 함께 어떻게 기아를 이겨냈고 내도산에서 인민혁명군을 도와 어떻게 주먹밥을 날랐고 어떻게 철야보초를 섰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아이들이 엮어온 그 개개의 자서전은 소설의 줄거리처럼 내 머리속에 죄다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큰 아이들의 겨드랑이밑에서 비에 젖은 햇병아리처럼 온몸을 오돌오돌 떨며 언손으로 무르팍의 살을 가리우고 서있는 백초구출신의 아홉살내기 리오송의 경력만 보아도 마안산의 아이들이 겪어온 천신만고의 준엄성을 능히 판단할수 있을것이다. 그 아이는 벌써 처창즈에 있을 때 집단적인 아사를 체험하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리오송도 배가 고플 때마다 동면중의 개구리를 잡아먹든가 봄파종을 한 밭들을 돌아다니며 씨종자를 파먹었다.


리오송의 아버지도 처창즈에서 아사로 인생을 마치였다. 오송이가 밭에서 보리이삭을 잘라다가 거스러미를 비벼없애고 줌에 채 차지도 않는 낟알을 아버지의 입에 넣어드렸지만 죽음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리오송은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초근목피로 보리고개를 넘기다가 내도산으로 철거하는 인민혁명군을 따라 처창즈를 떠났다. 그러나 그도 김락천의 처남이라는 리유로 《민생단》혐의를 받고있었다.


손명직을 단장으로 하는 14명의 아동단원들은 내도산으로 가는 수백리로정에서 조직생활을 통하여 부단히 련마해온 백절불굴의 투지와 혁명에 대한 충실성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앞에서는 허리를 치는 눈무지와 가파로운 산고개들이 길을 막아나서고 뒤에서는 《토벌대》의 무리들이 발목을 물고 늘어지였다.

행군의 첫날에 먹을것은 바닥이 나고말았다. 배고프면 솔잎을 뜯어씹든가 눈빵을 빚어 그것을 한입씩 떼먹으면서 허기를 달래군하였다. 강냉이떡 한개를 가지고 14명이 한끼를 굼때는 날은 그래도 잘 먹는 날이라고 할수 있었다. 밤에 야숙을 할 때마다 손명직, 주도일, 김태천을 비롯하여 체통이 큰 상급반 아이들은 10살미만의 나어린 아동단원들을 엄지닭처럼 품고앉아 몸으로 바람을 막아주며 잠간씩 눈을 붙이고는 교대로 주변을 감시하군하였다.


그 대오를 인솔하는데서 아동단 단장 손명직은 특출한 조직적수완과 통솔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원래 왕우구에 있을 때부터 아동단사업을 잘하였다. 한때는 적구에 내려가 김재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지하공작에도 참가하였다. 일곱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구학을 공부한 손명직은 10살도 되기전에 천자, 《명심보감》을 다 떼였는데 눈썰미가 빠르고 총기가 좋아 지하공작에서도 적임자였다. 그는 아동단시절에 조직을 발동하여 교내의 일본어교원을 비롯한 7명의 반동교원들을 숙청하는 실적도 올리여 일찍부터 혁명가들의 신임을 받았다.


손명직의 집안은 대대로 애국애족의 넋을 굳건하게 이어온 믿음직한 혁명일가였다. 할아버지는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 의병대장으로 활동한 사람이였고 아버지 손화준은 백호장의 간판을 가지고 리면에서 비밀공작을 한 혁명투사였다. 손명직의 5촌숙부 김봉석(원명 손봉석)은 소부대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몇시간 앞두고 애석하게 전사한 나의 충실한 전령병이였다.


죽어도 혁명군을 따라다니다가 죽겠다고 언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이 깊은 산중에까지 찾아온 아이들, 부자집 아이들이 자개를 박은 밥상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풍청거릴 때 우등불옆에서 가랑잎을 덮고 쪽잠을 자면서도 광복된 조국을 그려온 이 아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과연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귀여운 꽃봉오리들에게 금의옥식은 마련해주지 못할망정 왜 수수한 광목옷 같은것이야 못해입히며 콩죽 같은것이야 못해먹이겠는가.

《얘들아, 얼굴을 들어라. 너희들이 헌옷을 입고있는건 너희들의탓이 아니다. 어서들 이리 오너라!》

나는 두팔을 크게 벌리면서 아이들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전에 수십명의 아이들이 올망졸망 나를 둘러싸고 엉엉 소리를 내며 목놓아울었다.

나는 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병실로 들어갔다.

며칠째 병에 걸려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는 네댓명의 아이들이 모포도 없이 방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누워있었다. 무슨 병인가고 물었으나 아이들은 하나같이 대답을 피하였다. 밀영을 지키고있던 대원들도 골병이라고만 하였지 정확한 병명은 대주지 못하였다. 그것이 마음속의 병이라는것을 아는 사람은 박포리밖에 없었다. 아무 죄도 없는 청옥같은 아이들에게 《민생단》이라는 표쪽을 달아놓았으니 무슨 병을 앓는다고 대답하겠는가.


나는 전령병을 불러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라고 하였다. 그것은 왕청시절에 일본군수송대를 치고 로획한 나의 단매모포였다. 그 한장이나마 앓고있는 아이들에게 덮어주면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것 같았다. 나의 의도를 알아챈 대원들이 저마다 자기의 모포를 꺼내느라고 부산스럽게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포들을 임자들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동무들, 그만들 두시오. 이 아이들이 이렇게 병들어 누워있고 추워서 떨고있는데 100장의 모포를 덮고 잔들 내 마음이 더워질수 있겠소. 동무들이 나를 생각하겠거든 먼저 이 애들을 잘 돌보아주는것이 좋겠소.》

밀영의 후방부성원들은 그 말을 듣자 고개를 푹 숙이였다.

내 목소리는 갈리고 쉬였다.


나는 오늘 여기서 혁명가의 가치관을 두고 다시한번 심각한 음미를 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혁명을 시작했고 지금도 무엇때문에 만난을 무릅쓰고 혁명을 계속하고있는가. 우리는 그 무엇을 파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기때문에 혁명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온갖 불의와 페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적인것을 옹호하며 인간이 창조해낸 모든 부와 아름다움을 지켜내기 위하여 우리모두가 이 저주로운 세상을 향해 반기를 든것이 아니겠는가. 학대받는 계급에 대한 동정이 없고 망국의 설음속에 울고있는 민족에 대한 련민이 없고 가난과 무권리속에서 헤매는 부모처자들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곤난을 하루도 참아내지 못하고 따뜻한 온돌방으로 돌아갔을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인 우리가 어떻게 아이들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가만 내버려둘수 있겠는가. 동무들의 가슴속에서는 어느새 혁명의 길에 나설 때 간직했던 순결한 인간애가 식어버리기 시작하였다. 지금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어떤 의미에서 놓고볼 때 우리 혁명은 후대들을 위한 혁명이라고도 할수 있다. 후대들에게 밥 한술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옷 한벌 제대로 해입히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혁명을 한다고 말할수 있으며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떳떳이 자랑할수 있겠는가.


후대들은 계급의 꽃이고 민족의 꽃이며 인류의 꽃이다. 이 꽃을 잘 가꾸는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신성한 임무이다. 후대들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따라 혁명의 장래가 결정된다. 혁명은 한세대에 끝나는것이 아니라 여러대를 두고 완성되게 된다. 오늘은 우리가 혁명을 담당한 주인으로 되고 있지만 래일은 저 애들이 자라서 혁명을 떠메고나가는 주력군으로 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선혁명에 끝까지 충실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피줄기를 이어갈 후비대를 튼튼히 키워야 한다. 더구나 저 애들은 우리의 전우들이 남기고 간 유자녀들이 아닌가. 우리는 그 전우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저 아이들을 아끼고 따뜻이 돌보아주어야 하는것이다.


그 무슨 상급의 박해가 두려워 아이들을 외면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적의 총구앞에 가슴을 내댈수 있겠는가. 동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자신만을 위한 보신의 철갑속에 들어박혀 인간이 당하는 불행을 보면서도 그것을 동정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리는 용렬한 인간들이 된것이다. 동무들, 생각해보라. 이것이 세계를 개조하겠다고 나선 공산주의자들의 소위이겠는가.


후대들을 괄세하는것은 자기자신들을 괄세하는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그들을 잘 돌보지 않거나 그들이 곤경에 빠졌을 때 자기 보신만을 생각하면서 외면한다면 먼 후날에는 후대들이 우리들을 돌아보지 않을것이다. 우리가 후대들을 위해 바치는 노력은 수십년후 후대들이 우리를 보는 눈빛을 결정하게 될것이며 그들이 건설하게 될 조국의 면모를 좌우하게 될것이다. 우리가 지금 후대들에게 많은 사랑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래일의 조국은 더 부강해지고 더 문명해지고 더 아름다와질것이다.


동무들, 후대들을 사랑한다는것은 곧 미래를 사랑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우리 조국은 이제 저 아이들에 의해 백화란만한 화원으로 건설되게 될것이다. 조국의 미래,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후대들을 더 잘 가꾸고 돌보아주자!


내가 그날 병실에서 한 말은 대체로 이런 내용의것이였다. 이것은 80고령이 된 오늘에 와서까지 내가 변함없이 고수하고있는 후대관이라고 말할수 있다. 나는 지금도 후대들을 아끼고 돌보는데서 최대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있다.

후대들이 없이야 우리 생활에 무슨 락이 있겠는가. 우리가 연필문제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첫째 의정으로 상정한것이나 매해 설명절을 아이들과 함께 즐기고있는것도 다 이런 후대관의 표현인것이다. 후대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들의 교육교양을 담당한 교원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서도 표현되고있다.


공화국의 초대 내각성원들중에는 리병남이라고 부르는 보건상이 있었다. 그는 해방전부터 소아과계통에서 의료활동을 꾸준히 벌려온 이름난 박사이며 성실하고 량심적인 애국자였다.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석하려고 서울에서 평양으로 들어온 그는 우리의 권유로 공화국의 초대보건상이 되였다. 그 사람의 품성가운데서 제일 표가 나는것은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하고 특별히 잘 다루는 점이였다.


소아과를 전공한 리병남은 주머니에 딸랭이를 늘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우는 아이들을 달래였다. 중병이 들어 골골거리던 아이들도 그가 딸랭이를 몇번씩 흔들기만 하면 울음을 그치고 공손히 진찰을 받군하였다. 어리광대들도 찜쪄먹을 능청스러운 얼굴표정과 배꼽이 떨어져나갈 정도의 재미나는 익살로 상대방을 흐물흐물하게 만들면서 눈껌벅할사이에 치료는 치료대로 다 해치우군하는 능란한 솜씨로 하여 그는 어데 가서나 어린 환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의 살뜰한 벗이 되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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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우리 딸 경희는 홍역을 앓을 때 발진이 잘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게다가 바람간수를 잘하지 못하여 페염에까지 덜컥 걸리였다. 딸은 어머니를 찾으면서 줄곧 울었다. 어린 동생이 아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때마다 김정일동지는 《경희야, 아버지앞에서 어머니를 찾으면 안돼!》 하고 타이르군하였다. 정부병원의 소아과 의사들은 어떻게 할바를 몰라서 전전긍긍하였다. 그때 리병남보건상이 경희의 침상으로 찾아왔다.

리병남은 청진기는 꺼내지도 않고 세심히 증상을 관찰하였다. 그리고는 곧 《홍역보다 페염이 먼저 왔습니다.》하고 진단을 내리였다. 보건상의 처방대로 소아과의사들은 즉석에서 어린 환자의 입에 산소를 불어넣었다. 의식을 잃고있던 경희는 하루만에 울음을 터뜨리며 혼수상태에서 깨여났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발진도 잘되였다.
나는 리병남을 보고 물었다.
《리선생, 어떻습니까? 저 아이가 우는건 무엇때문입니까?》
《그건 좋은 징조입니다. 병이 나을 때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지요. 사흘후에는 따님이 완쾌될것 같습니다.》

리병남은 줄도 테도 다 금으로 되고 호박노리개까지 달린 회중시계를 풀어서 경희의 코앞에 대고 흔들었다. 그것은 그가 어린 환자들을 달랠 때마다 딸랭이와 함께 진정제처럼 사용하군하던 금시계였다. 딸은 울음을 그치고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사흘후에 정말 병이 완쾌되였다.
나는 보건상의 그 능란하고 거침없는 치병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것 참, 신통합니다. 어쩌면 리선생의 예언이 그렇게도 딱딱 맞아 떨어집니까. 리선생은 의사이기전에 아이들의 친구이고 아동심리학자입니다. 그러니까 소아과 의사들은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열렬히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그들의 가슴에 청진기를 함부로 대지 말아야 합니다.》

1950년 가을에 나는 고산진에서 리병남을 만났다. 모든것이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였으나 한가지만은 달라진것이 있었다. 그는 끈도 없는 허술한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군하였다. 경희를 달랠 때 풀어서 흔들던 번쩍번쩍하는 시계를 어떻게 했는가고 물으니 군기헌납으로 나라에 바치였다고 하였다. 전쟁승리를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려는 리병남의 애국적지성과 량심인으로서의 진정은 나를 크게 감동시키였다. 그 회중시계가 너무도 초라하기에 나는 후날 그에게 새 손목시계를 채워주었다.

이 자그마한 세부를 통하여 나는 후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애국자가 될수 있으며 인간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지닌 사람들만이 참다운 애국자가 될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절감하게 되였다. 후대들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 지니고있는 사랑가운데서도 가장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이며 인류에게 바쳐지는 송가가운데서도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송가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 송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자들이며 이 송가를 위해 투쟁하는 복무자들이다.

리병남과 같은 아동들의 벗이 한명만 있었어도 마안산아동단원들의 처지는 그처럼 험악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것이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어머니가 림종을 앞두고 나에게 유산으로 남긴 그 20원을 소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금전이 없이는 도저히 뚫고나갈수 없는 역경에 처했을 때에만 쓰라고 당부하시던 20원이였다. 손끝에 피가 나도록 삯일을 하여 한푼두푼 힘겨웁게 벌어들인 로력의 열매였다.

나는 어렸을 때 돈을 모르고 살았다.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자식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학습장이나 연필을 사는것도 어머니에게 맡기고 나를 상점이나 장마당 같은데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돈맛을 알기 시작하면 사람이 자라서 수전노가 되고 조국도 모르고 민족도 모르는 속물로 될수 있다는것이 돈과 관련된 아버지의 지론이였다.

어느날 병환에 계시던 아버지는 거리구경을 하자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바깥출입을 거의 못하시던 아버지가 나와 같이 나들이를 떠난것은 전에 없는 일이였다. 중국말에 능하지 못한 아버지는 통변이 필요할 때마다 이따금씩 나를 데리고 다니군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충실한 중어《통역원》이였다.
(병이 심한 때에 나들이를 떠나시는걸 보니 필경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구나. 오늘은 무슨 사람들을 만나시려고 저렇게도 바삐 서두르실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침상에서 일어나는 아버지를 부축해드리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팔을 끼고 거리에 나설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날이 나의 생일이라는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병환에 계시는 때여서 생일 같은것을 머리에 새겨둘 경황이 없었다.
거리를 한바퀴 돌아본 아버지는 뜻밖에도 내 손을 잡고 상점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예상을 뒤집어엎는 놀라운 나들이였다. 무엇하려고 이 상점에 나를 데리고 들어왔을가, 내가 이런 생각에 잠겨 진렬장을 덤덤히 바라보고있을 때 아버지는 나더러 마음에 드는 회중시계를 하나 고르라고 하였다. 그 상점에는 여러가지 회중시계들이 수두룩하게 진렬되여있었는데 어떤 시계들에는 손중산의 초상까지 새겨져있었다.

내가 손중산의 초상이 없는 회중시계를 한개 골라잡자 아버지는 그 값으로 3원 50전의 돈을 치르어주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는 시계를 찰 때가 되였다. 나라를 찾는 싸움에 나선 사람이 아껴야 할것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동지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을 귀중히 여기라는 뜻으로 주는 생일선물이니 잘 간수해라.》
시계를 찰 때가 되였다고 한 아버지의 말씀을 나는 내가 성인이 다 되였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였다.
내 귀에는 어쩐지 그 말이 림종전야의 유언처럼 들리였다. 아버지는 실지로 그때 벌써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예감한것 같았다. 그런 예감을 가지고 시계와 함께 평생의 로고가 바쳐진 독립의 위업을 나에게 넘겨주었던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성년식과도 같은것이였다.

회중시계를 생일선물로 사준지 두달도 못되여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였다. 그후 나는 그 시계를 가지고 화성의숙에 갔고 거기서 뜻이 맞는 동지들을 만나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직하였다. 우리는 빨찌산시절에도 그 시계에 맞추어 매일매일의 일과를 집행하였고 공격개시시간과 접선시간을 정할 때에도 그 시계를 기준으로 삼았다.

내가 그 회중시계대신 손목시계를 차기 시작한것은 보천보전투무렵이였다. 전우들은 나의 회중시계가 고물로 되였다고 하면서 사령관의 체모를 생각해서라도 이제부터는 새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나는 10년동안 가지고 다니던 회중시계를 다른 동무에게 주고 신식손목시계를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이처럼 내가 혁명투쟁의 길에 나설 때까지 돈을 모르고 자라나게 하였다.
내가 자기 손으로 값을 치르고 상점의 물건을 사본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길림시절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돈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 조장되였다고 하면 독자들은 그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사람이 돈이나 물건에 포로되면 당도 수령도 조국도 인민도 안중에 없고 나중에는 부모처자조차도 모르는 인간추물이 되고만다는것이 80풍상의 인생을 총화하면서 내가 후대들에게 하고싶은 말이다.

이처럼 자식들이 어려서부터 돈맛을 모르고 자라도록 엄하게 단속하고 통제한것은 아버지가 세워준 우리 일가의 독특한 가풍이였다.
그러나 림종을 앞둔 어머니는 처음으로 그 가풍을 어기고 나에게 평생의 신고가 집약된 20원을 유산으로 넘겨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풍랑세찬 일생이 몇장의 지전으로 압축된것 같은 감을 느끼며 그 돈을 소중히 받아안았다. 20원,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호신부와 같은것이였다. 그 돈을 품고있으면 배고프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항상 내곁에 계시면서 온몸과 넋으로 나를 지켜주는것 같았다. 내 개인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쓰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던 20원이였다. 가능하다면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표적으로 영원히 남기고싶었던 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준엄한 현실은 이 결심을 여러번 뒤흔들어놓았다. 나는 그 돈을 쓰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뺐다 하며 동요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우리에게는 돈을 쓰지 않으면 안될 정황이 수없이 생기였다.
라자구등판에서 우리 일행을 구원해준 잊지 못할 마로인과 헤여질 때에도 나는 그 로인의 은공을 어머니가 준 20원으로 갚으려고 하였다. 사람이 자기를 구원해준 생명의 은인에게 인사를 하는거야 응당한 처사가 아닌가. 근 20일동안이나 이 산막에서 로인의 한해 량식을 다 파먹었는데 주머니에 돈을 두고서도 사례를 치르지 않는다면 하늘이 굽어보고 나를 뭐라고 책망하겠는가. 하지만 그 신선같은 로인이 종시 나의 성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 나라를 찾자면 이보다 더 험악한 지경에 빠질 때도 있겠는데 그때에나 쓰라, 나야 다 죽은 몸이나 다름없고 이 궁벽한 산속에서 돈이 필요치도 않은데 그것을 받아 무엇에 쓰겠는가, 나는 옹노에 걸리는 산짐승만으로도 호구지책을 할수 있다고 하면서 한사코 돈을 되돌려주는것이였다.

이런 곡절을 거쳐 어머니의 사랑이 고인 20원의 돈은 한푼의 허실도 없이 내 주머니에 고스란히 남아있게 되였다. 그 돈으로 헐벗은 아동단원들에게 옷을 해입힌다면 어머니도 기뻐하실것이다. (어머니, 이 돈을 가지고 어머니의 곁을 떠난지도 네해가 되였습니다. 그동안 딱한 고비를 여러번 겪으면서도 장래를 생각해서 그럭저럭 보존해왔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이 20원을 소비해야 할것 같습니다. 세상에 살붙이가 하나도 없는 저 불쌍한 아이들에게 옷을 해입혀야겠습니다. 장차 이보다 더 험한 고비가 있을수 있으리라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마음먹고 택한 결심이니 어머니도 지지해주십시오. 아이들을 류달리 좋아하는 저의 성미를 어머니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멀리 토기점골의 차디찬 산등성이에 홀로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향해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뇌이였다.
《이 20원을 가지고 무송시내에 내려가서 천을 사오시오. 그리고 그 천으로 아이들에게 옷을 해입히시오.》
이것은 련대정치위원 김산호에게 하달된 나의 명령이였다.
김산호는 몹시 딱해하면서 마지 못해 그 돈을 받아들었다. 지주집에서 머슴군노릇을 하다가 작두날에 손가락 하나를 잃어버린 오가자시절부터 우리와 함께 반제청년동맹사업을 많이 해온 호남아 김산호는 20원속에 깃들어있는 사연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사령관동지의 령이니 집행은 하겠습니다만 어쩐지 손이 떨립니다. 그 돈이 어떤 돈입니까.》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나서 무송시내에 내려가 한자에 10전씩 한다는 캬바진비슷한 천을 7필인가 8필인가 사왔다. 힘이 장사인 김산호였지만 그것을 지고 오느라고 혀가 나올번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귀환도중 공교롭게도 토비화된 산림부대의 잔당들에게 그 천을 모조리 강탈당하였다. 토비들은 김산호를 나무에 비끄러매놓고 달아나버리였는데 힘이 황소같은 정치위원이였지만 하마트면 얼어죽을번하였다. 우리는 소부대를 파견하여 김산호도 구원하고 산림부대가 강탈해간 천도 모조리 되찾아왔다.

7,8필의 천으로는 밀영의 아이들에게 옷을 다 해입힐수 없었다. 나는 장울화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어 김산호를 다시 무송으로 내려보냈다. 김산호는 장울화의 도움으로 많은 천을 해결하였다. 우리는 그 천으로 밀영의 아이들과 《민생단》루명을 벗어내치고 새 사단에 편입된 100여명의 유격대원들에게 옷을 다 해입히였다. 그리고나니 무거웠던 내마음도 어느정도 가벼워졌다.

사실 20원이 무슨 큰 돈이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때 후련한 심정을 금할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 다음에 우리는 마안산을 떠나갔다.
새 옷을 입고 기뻐서 어쩔줄 모르던 밀영의 아이들이 모두 따라가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나는 여러 사람의 반대를 물리치고 아이들의 그 청을 쾌히 받아들이였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우리를 따라다닐수 없는 유년기의 아이들과 병든 아이들 약간명을 내놓고는 대부분이 남하하는 우리 대오와 함께 간고한 장정의 길에 들어섰다. 유격전으로 동분서주하는 혁명군이 10대의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데리고 다닌다는것은 일종의 모험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비록 유격전의 력사에 없고 상식에 어긋나는 처사라 하더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불길속에서 단련시켜 그들전부를 강철같은 인간들로 키우려고 결심하였다. 제일 힘든것은 진대나무를 넘고 강을 건느는것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싸움할 때와 행군할 때 아이들을 보호할데 대한 분공을 따로 주었다. 우리 대원들은 실로 아이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였다. 진대나무는 안아넘기고 강물은 업어 건늬였으며 적들의 총알은 몸으로 막아주면서 그들을 자래웠다.

그때 나를 따라 백두산지구로 나왔던 아이들은 그후 빠짐없이 혁명군에 입대하였고 가렬처절한 유격전을 통해 훌륭한 군정간부들로 성장하였다. 종군이 허락되지 않아 얼마간 대첨창밀영에 가있던 9살내기의 리오송까지도 손장상의 전령병으로 복무하다가 후에는 장백에 나와 나의 전령병으로 되였다. 1939년 5월에 우리가 부대를 이끌고 무산지구로 진공할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였다. 그는 물이 깊어 강을 건느지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를 안고 강을 건네주었다. 그때 그렇게 병아리처럼 품에 안아 키운 아이들이 지금은 우리 당과 국가와 군대에서 핵심적역할을 수행하고있다.

마안산에서 헐벗은 아이들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던 그때의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조국이 해방되면 어떻게 하나 아이들에게 국가가 무료로 옷을 해입히는 제도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령락된 나라를 재건하던 1950년대 후반기에 벌써 우리는 국가가 옷을 지어 공급하는 력사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안산에서의 고뇌를 체험한 조선공산주의자들만이 창조할수 있었던 하나의 기적이였다. 우리는 해마다 아이들의 옷을 해입히는데 수천수억원의 돈을 지출한다.

우리 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의 인사들은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그 많은 돈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지출하면 국가가 손해를 보지 않는가. 각자가 상점에서 필요한 천을 사다가 해입어도 되겠는데 왜 국가가 아이들에게 교복을 지어 입히는가. 무가로 옷을 해입히는데서 생기는 손실은 무엇으로 메꾸는가.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마안산에서 헐벗은 아동단원들을 만나던 때의 사연을 말해준다. 우리가 항일전쟁을 할 때 그 전쟁의 포성을 들어보지 못한 자본주의나라의 정객들이 공화국정부의 시책속에 담겨져있는 심오한 력사적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재정적계산의 각도에서만 문제를 고찰하는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인민을 위해 당하는 국가의 《손실》은 손실이 아니다. 인민의 복리를 위해 더 많은 돈이 지출될수록 우리 당은 더 큰 기쁨을 느끼며 후대들을 위해 더 많은 《손실》을 당할수록 우리 국가는 더 큰 만족을 느낀다.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제도가 존재하고 백두의 전통이 계승되는 한 국가가 아이들에게 옷을 해입히는 공산주의적시책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고 확신한다.
마안산시절의 옛 아동단원들과 항일투사들은 온 나라의 아이들과 함께 김정일동지의 은정이 깃든 새 옷을 철따라 받아안군한다.
나의 생일 70돐에 나를 만났던 리오송, 손명직은 김정일동지가 선물로 지어준 새 군복을 받아안고 내앞에 나타나 마안산시절이 생각난다고 하면서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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