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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9-5. 천교령의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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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194회 작성일 15-05-11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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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교령의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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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정대앞에 나섰던 군사정치적과제를 수행하고 귀로에 오른것은 1935년 1월하순이였다.


왕청 뒤틀라즈를 떠날 때 170명이나 되였던 대오에는 50~60명의 인원밖에 남지 않았다. 원정초기 연길중대가 동만으로 떠나간후 우리는 훈춘중대도 녕안땅에서 철수시켰다. 적의 위공작전으로부터 혁명의 책원지들을 보위해야 할 긴박한 정세가 조성되였던것이다. 석달동안 꼬리를 물고 진행된 전투들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였다. 부상자들까지 죄다 안전지대로 후송시키고나니 대오는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우리에게는 대오를 보충할수 있는 길이 따로 없었다. 원정대가 머무르는 마을들에서 참군을 요청하는 청년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전부 주보중부대에 넘겨주었다.

주보중은 우리의 귀로를 두고 진심으로 걱정하였다.

《입수된 자료에 의하면 적들이 지금 김일성부대의 종적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여 돌아친다고 하오. 아마 톡톡히 값을 받아내려고 하는것 같소. 이 겨울에 그들이 당신한테서 얼마나 혹독한 타격을 받았나말이요.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신변이 우려되는구만.》

내 얼굴을 바라보는 주보중의 눈길에서는 어딘가 불안스러운 기색이 엿보였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로야령 눈보라가 우리를 감싸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아무튼 무사히 돌아가게 되겠지.》

나는 우리의 신변을 념려해주는 그의 우정을 고맙게 여기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장 사지판에 들어서야 할 사람이 저렇게 태평이라니까. 김사령은 여전한 락천가로구만.》

주보중은 귀로에 오른 우리의 편의를 위해 가장 안전하고 믿음성있는 로정을 잡아주었으며 우리와 함께 갈 100여명의 반일부대력량까지 붙여주었다. 그 로정이란 우리가 북만으로 올때 잡았던 뒤틀라즈-로야령-팔도하자의 정상통로와는 완전히 다른 천교령-로야령-팔인구의 우회로였다. 이 로정은 적들의 배치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발들을 타게 되여있었다. 주보중의 말에 의하면 적들이 예측할수 없는 통로라는것이였다.


이 통로에 대해서는 주보중보다도 평남양이 더 잘 알고있었다. 그는 내 팔굽을 툭툭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천교령쪽으로 빠지면 어느 모로든지 무탈할것 같수다. 그고장 목재소들엔 식량이 많지요. 〈토벌대〉놈들도 천교령쪽에는 잘 오지 않구요. 이건 내가 장담할수 있수다.》

천교령이라는 말은 그대로 직역하면 하늘아래 다리라는 뜻으로 된다. 산이 다리 같이 생긴 아슬한 고지대였다.


우리는 북만동무들의 권유대로 천교령-로야령-팔인구의 우회로를 타고 간도에 돌아가기로 하였다. 로야령을 넘는 2~3개의 다른 통로들은 이미 적들에 의해 봉쇄되여있었다.

우리는 북만전우들의 뜨거운 전송을 받으며 주보중의 산막을 떠났다.

언땅에 베개도 없이 누워있는 수많은 리성림들의 령전에 봉분도 해주지 못하고 묘비도 세우지 못한채 간도로 돌아가는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였다.


잘있으라, 전우들! 나라가 독립되면 우리 다시 그대들을 찾아오리라. 지금은 타향만리 언땅에 그대들을 두고간다만 해방의 날이 오면 고향의 뒤동산에 업고가리라. 그대들의 령전에 묘비를 세우고 상석을 깔고 둘레에는 꽃을 심고 년년이 그대들을 조상하리라. 전우들, 그날까지 안녕히.

나는 북만의 황야에 쓰러진 전우들을 위해 전대오가 모자를 벗고 3분동안 묵도할것을 명령하였다.

녕안의 이름모를 봉우리와 골짜기들에 단벌홑옷차림으로 누워있는 전우들에게 안식이라도 주려는듯이 북만의 하늘에서는 그날도 발목을 휘감는 폭설이 물커지게 쏟아져내리였다. 그 폭설은 우리의 발자국을 메꾸어주었다. 은밀히 행방을 감추면서 행군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날씨였다.


그러나 그 푸짐한 하늘의 선물도 적의 매눈 같은 감시경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감싸주지는 못하였다. 해발 700메터 정도되는 릉선에서 원정대가 북만동무들이 싸준 점심밥을 먹고 간단한 휴식을 하고있을 때 적《토벌대》무리들이 멀리에서 나타났다.

평남양이 명예를 걸고 절대안전을 담보한 이 천고의 수림지대에서 총구를 우리에게로 겨누고 은밀히 추적해오는 적의 무리를 보는것은 실로 천만뜻밖의 일이였다.

원정대원들은 눈이 휘둥그래서 이게 웬일인가, 우리가 혹시 길을 잘못든게 아닌가, 돌아가는 길에서나 휴식을 좀 할가 했는데 저놈들이 저렇게 따라오니 휴식은커녕 또 시끄럽게 되였다고 하면서 짜증을 내였다. 이런 정신상태를 가지고서는 부대가 성과적으로 귀로를 돌파할수 없는 법이다.


나는 첫출발에서부터 대원들이 나약해지거나 긴장을 늦추지 않게 좀 훈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동무들, 우리는 이 몇해동안 줄창 적의 포위속에서 살아왔다. 앞에도 적이고 뒤에도 적이고 옆에도 적이고 지어는 하늘에도 적이였다. 빨찌산이 있는곳에는 어디에나 적이 있었다.

행군중에 적의 추격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면 있다고 말해보라. 우리 항일전쟁사에 총성도 없고 백병전도 없는 무탈한 행군이 과연 몇번이나 있었던가. 그러니 전우들, 우리는 이 행군에서도 결국 싸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싸움, 이것은 우리가 포위를 뚫고 간도에로 갈수 있는 유일한 출로이다.》

원정대원들은 내 말을 듣고 모두 정신을 번쩍 차리였다.


우리는 추격해오는 상대가 어떤놈들인가를 알아보려고 정찰조를 파견하였다.

그 정찰조가 적을 답새기고 척후병 두명을 포로해왔다. 포로들의 진술에서는 우리와의 거듭되는 접전에서 여러번 참패를 당한 정안군 부대장 요시자끼의 이름이 자주 튀여나왔다.


원정대의 공격에 만신창이 된 요시자끼는 패전의 수치를 씻어보려고 거듭 유생력량을 새롭게 증강하였다. 그 부대가 바로 우리를 추격하고있는 《토벌대》였다.

9. 18사변직후 관동군 참모 고마쯔소좌의 지도하에 관동군을 협력하는 특별독립군의 명목으로 조직되였던 정안유격대는 정안군의 전신으로 일만일체의 혼합부대로 편성되였다.


만주국군의 건군과 함께 1932년 11월에 위만군에 편입된 정안군은 사령 후지이 쥬로소장을 비롯한 지휘관의 3분의 2가 모두 일본인들이였다.

정안군에는 후보생대라는것이 있었는데 그 성원의 대부분이 17~18살의 일본본토출신의 중학교 졸업생들이였다.


정안군의 병기와 피복류는 관동군이 공급하였다.

팔소매에 붉은천을 동인것으로 하여 일명 《홍수대》라고도 하였는데 언제나 싸움터에 있을것을 강요한 《상재전장》의 정신으로 교육하면서 《야마도다마시》와 함께 악질적인 《세이안다마시》(정안혼)도 고취하였다.


이 부대에 있는 중국인들의 대부분은 자산계급의 자식들로서 모두가 일본말을 아주 잘하였다.

일제의 충견들로 조직된 정안군의 배심은 공산주의자들의 유격전에 유격전으로 대처한다는것이였다. 이것은 정안군의 기본적인 활동목표가 바로 우리 유격대를 소멸하는데 있음을 증명해준다.

조직초기 정안유격대의 력량은 3,000명 정도였다.

그것은 일본군의 한개 련대력량을 조금 초과하는 수자였다.

요시자끼는 바로 이 정안군 보병 제1단 단장이였다.


요시자끼의 부대는 정안군부대들중에서도 가장 검질기고 악착스러운 부대였다. 이 부대의 《토벌》에 일단 걸려들기만 하면 어떤 강자든지 피투성이가 될것을 각오해야 했다.

요시자끼는 자기 관하의 부대들이 소멸되면 다른 부대들을 인차 갈아대군하였다. 그의 수중에는 인민혁명군원정부대를 련속 타격할수 있는 예비력량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희생자를 대신하여 대오를 보충할만 한 그런 예비가 없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4~5차례씩 추격해오는 적들과 총격전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가 행군하면 적들도 행군하고 우리가 숙영하면 적들도 숙영하였다. 정말 상대가 혀를 빼물정도로 지독스럽게 따라다니는 찰거마리 같은 놈들이였다.


주보중이 말한것처럼 정안군놈들은 우리 대오가 김일성부대라는것과 우리의 력량이 얼마나 되며 우리가 어떤 전술을 쓴다는것도 알고있었고 천교령일대와 그 부근에는 우리를 지원해줄만한 공산군무력이 없다는것까지도 다 파악하고있었다. 그 당시 일본군대가 첩보사업을 아주 잘하였다. 그런즉 우리는 완전히 로출된 싸움을 하는셈이였다.


그때 적들은 《우리가 100명 죽고 공산군 한명만 잡아도 큰 소득이다. 우리는 100명을 보충할수 있지만 유격대는 한명도 보충하지 못한다.》고 떠벌이면서 부단히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였다. 군인의 예비가 많은 놈들인지라 배짱도 이만저만 뜬뜬하지 않았다. 정안군의 속심은 자기네 군대 1,000명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간도에서 온 원정대를 전멸시키자는것이였다. 원정대를 전멸하면 김일성의 운명도 끝장이고 김일성만 없으면 조선공산군도 반만항일도 일락서산이라는 배짱이였다.


정안군이 이처럼 집요하고 악랄한데다가 그해따라 눈보라가 얼마나 세차게 일었던지 적아를 식별하지 못할 지경이였다. 어느 한편이 먼저 말을 해야 적아가 구별되고 싸움이 붙었다.

우리를 따라오던 반일부대병사들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우리의 곁에서 떠나가버리였다. 희생정신이 박약한 반일부대 장병들에게 있어서 꼬리를 바싹 물고 끈덕지게 따라오는 정안군의 추격과 인정사정모르는 사나운 추위는 감히 맞설수도 없고 감당할수도 없는 도전으로 되였다. 그들이 우리를 보호한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 마지막까지 그들을 보호해준 셈이였다.


평남양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준 길량식도 인차 거덜이 났다.

우리는 며칠동안 생눈으로 끼니를 이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야 인적기라고는 느낄수 없는 황량하고 무정한 대지에서 눈은 우리가 돈을 주지 않고서도 구할수 있는 유일한 량식이였다. 결사대를 무어가지고 적의 숙영지도 몇번 기습해보았지만 그들이 로획해가지고 오는 식량으로는 대오를 먹여살릴수가 없었다.

적들도 전장으로 출동할 때에는 먹을것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어떤 곤난이 있든지 천교령목재소가 있는데까지만 가보자. 거기에 가면 식량이 많다고 평남양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런 희망을 가지고 서로 고무해주고 부축해주면서 꾸준히 행군을 다그치였다.


나는 먹을것이 조금씩 생길 때마다 그것을 대원들앞으로 돌려놓았다. 어떤 날에는 한되박의 강냉이를 가지고 전대오가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앞에 차례지는 강냉이알들을 어린 대원들의 입에 넣어주군하였다. 그리고 나자신은 눈으로 요기를 하였다. 그 눈이 무슨 기운을 냈겠는가. 그래도 악을 쓰며 눈보라를 헤치고 비탈길을 톺아올랐다.


한흥권은 그때 눈에도 영양성분이 있다는 주장을 하여 일동의 호기심을 끌었다.

나는 그 주장이 대원들의 맹렬한 반박에 부딪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 주장을 엉터리라고 일축해버리는 전우들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의 전우들은 오히려 한수 더 떠서 물에도 영양소가 많을지 모른다는 가설까지 내놓음으로써 한흥권의 발명을 무색하게 하였다.


나도 그 가설에 지지를 표시하였다. 그것을 허튼소리라고 하거나 무식한 소리라고 하면 구름장같이 허황한 가설을 내세우고 그 변론에 열중하는 방법으로 시장기를 잊어버리기 위해 애쓰는 대오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수 있었다.


밥이나 빵대신 자기들이 삼키는 눈속에 영양소가 있을수도 있다는 가설을 내놓고 그 가설에 대한 론쟁속에서 온갖 고통을 다 극복해나가는 원정대원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눈물겨운것이였다.


2만 5천리장정때 중국동지들이 가죽띠를 우려먹었다고 한다. 우리도 쌀이 없을 때는 가죽띠를 우린 물이 식량을 대신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을 남비에 넣고 끓일 시간적여유가 없었다. 행군이 이렇게 간고하다나니 어떤 날은 길림시절에 읽은 장편소설 《철의 흐름》에 반영된 생활들을 되그려보며 힘을 가다듬기도 했다.


나는 밤마다 다른 대원들과 꼭같이 보초를 섰다. 위기를 겪고있는 대오에서 대장이라고 틀을 차리기에는 우리의 처지가 너무나도 절망적이였다.

부대를 움직이는 지휘관의 수완과 통솔력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던 때에 원정대원들은 또 한차례의 타격을 받게 되였다. 내가 천교령부근에서 촉한에 덜컥 걸려 자리에 드러누워야 할 형편에 처하게 되였던것이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는 몸이였으니 병마인들 어찌 그런 육신에 쉽사리 달려들지 않을수 있겠는가.


온몸을 화독처럼 달구는 무시무시한 고열과 오한은 마침내 나를 눈구뎅이속에 사정없이 쓰러뜨리였다.

처음에 몸이 오슬오슬 떨릴 때 우등불이라도 쪼이였더라면 병이 덧나지 않았을터인데 전우들이 근심할것 같아 그냥 내쳐두었더니 손발마저 까드라들고 나중에는 빈사상태에까지 빠지였다. 전우들이 달려들어서 손발도 주물러주고 팔다리도 주물러주어서야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였다.


꿀이나 한사발 마시고 뜨뜻한 구들에서 땀을 쭉 뽑으면 촉한이 낫는다고 하였는데 해발 1, 000여메터나 되는 무인지경에서 그런 호사는 바랄수도 없었다.

한흥권은 대원들과 함께 사람이 끌고갈수 있는 발구를 만들고 거기에 개가죽을 깔았다.

전우들은 그 발구에 나를 앉히고 이불과 노루가죽으로 내몸을 감싼 다음 번갈아 끌었다. 제발 이 이상 적들이 더 따라오지 말았으면 하고 하느님에게 기도라도 드리는 심정으로 내 신변을 걱정하였으나 《토벌군》은 막무가내였다. 한편으로는 추격해오는 적을 견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력으로 앓는 나의 발구를 끌면서 험한 산령을 한치한치 돌파해가는 이 긴장된 활동은 고도의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하는 고역이였다.


요시자끼는 우리를 추격하는 《토벌군》의 무리속에 《토벌의 왕》이라고 불리우던 구도의 중대를 새롭게 들이밀었다. 구도는 만주에서 세운 전공으로 하여 죽어서 일본의 《군신》까지 된 자였다. 《군신》의 유골은 야스구니 진쟈에 안치된다고 한다. 구도는 천교령계선에 나타나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김일성은 지금 중병에 걸려 지휘능력을 잃어버리였다. 그러니 특별히 전투를 벌릴 필요도 없게 되였다. 싸움은 하지 말고 공산군의 기력이 다 빠질 때까지 계속 추격만 하라. 추격하면서 그저 한놈씩만 쏴제끼라. 한놈씩 쏴죽여도 한달안팎이면 공산군을 모조리 요정낼수 있다.


구도는 이런 배심을 가지고 여러명의 원정대원들을 전투서렬에서 떼내였다. 적의 사격은 명중률이 대단히 높았다.

내가 빈사상태에서 깨여났을 때 나의 주변에 있은 대원은 도합 16명밖에 되지 않았다.

눈정기를 모으고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았대야 나를 에워싸고있는것은 16명뿐이였다. 다들 어데로 가고 이 동무들만 남았을가. 그 아까운 전우들이 모두 천교령의 눈속에 묻혔단 말인가. 이렇게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왕대흥은 어데 갔소?》

목안이 말라서 말을 할수가 없게 된 나는 이불밑에 놓여있던 싸창자루로 설자(눈우에 쓰는 글)를 써보이였다. 그리고는 한흥권중대장의 얼굴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한흥권은 대답대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수염이 검숭검숭한 턱밑에서 목젖이 풀떡거리는것이 보이였다.

《정치지도원동무는 전사했습니다.》

십리평에서 발진티브스에 걸린 나를 간호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한 김택근소대장이 울먹거리면서 대답했다. 얼굴을 보니 그도 수염이 더부룩하였다.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들이 뚤렁뚤렁 떨어져내리고있었다.


부대가 적의 포위속에 들자 중대정치지도원 왕대흥은 김택근을 비롯한 몇명의 전우들로 결사대를 무어가지고 포위를 돌파하기 위한 백병전을 벌리였다. 왕대흥은 총창과 총탁으로 다섯놈의 정안군을 쓸어눕히였다. 그리고는 자신도 눈구뎅이에 묻혀 더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왕대흥, 그는 내가 가장 사랑해온 군사정치일군중의 한사람이였으며 만사람의 존경을 받아온 날파람있는 싸움군이였다. 왕대흥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어감과 중어를 조선말 못지 않게 자유로이 하는 솜씨로 하여 그는 노상 중국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군하였는데 사실은 순수한 조선사람이였다. 북만의 군대와 인민을 돕는데서 왕대흥은 뚜렷한 자기 몫을 남기였다. 중어에 능숙한 그는 어데 가서나 중국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주보중이 그를 탐낸것은 다 까닭이 있는 일이였다.


주보중이 달라고 할 때 왕대흥을 떨궈두고 오는건데… 나는 온몸과 마음이 천만쪼각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지는것 같은 통절한 심정을 안고 이미 내곁을 떠나간 전우들을 조상하였다.

《정황이 너무 급해서 정치지도원동무의 시신은 안장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비분과 회오로 떨리는 김택근소대장의 음성이 다시금 내 고막을 두드렸다.

《이 북만땅에 눈이야 많지 않은가. 왜 눈으로라도 안장하지 못했소?》

내 입에서는 하마트면 이런 푸념소리가 튀여나올번하였다.

그런데 리성이 그 목소리를 용케도 눌러버리였다.

김택근인들 왜 그걸 모르겠는가.

그 인정이 후한 사람이 오죽이나 급했으면 안장도 못하고 돌아섰겠는가.

나는 아까처럼 권총자루로 다시금 눈우에 글을 썼다.

《왕대흥이 죽은 골짜기를 똑똑히 기억해두었소?》

《네, 그걸 왜 잊어버리겠습니까.》

김택근의 대답이였다.

《그러면 됐소. 해토가 되면 와서 묻어주자구.》


대원들은 내가 눈우에 글을 쓸 때마다 글자들이 덧놓이지 않게 하느라고 발구를 조금씩 앞으로 움직여주었다.

그러나 그후 우리는 왕대흥의 곁으로 다시는 가지 못하였다.

천교령에는 왕대흥뿐아니라 우리가 미처 땅속에 안장하지 못한 전우들의 시신이 여러구 있었다.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다. 영원히 갚을수 없는 빚을 진듯한 심정이다. 그 송구스러운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하겠는가.


해방후 조기천은 장편서사시 《백두산》이 탈고되자 원고보따리를 안고 나부터 찾아왔다. 나는 첫 독자가 되여 그가 랑송하는 서사시를 감상하였는데 진주같은 명문도 명문이지만 그 내용에 완전히 심취되였다. 그 서사시에는 심금을 울리는 대목이 참으로 많았다.


이 나라의 초부들이여,

부디 삼가 나무를 버이라-

우리 선렬의 령을

그 나무 고이 지키는지 어이 알리,

부디 삼가 길옆에 놓인 돌 차지 말라-

우리 선렬의 해골이

그 돌밑에 잠들었는지 어이 알리!

이 구절은 국내공작임무를 받고 압록강을 건느던 철호가 적의 흉탄에 쓰러진 영남이를 안장했을 때의 심리를 반영한 주정토로이다.

그 대목을 랑송할 때에는 조기천이도 울고 나도 눈물을 흘리였다.


나는 그 대목을 들으면서 북만땅에 묘도 만들어주지 못한채 두고온 수많은 왕대흥이들과 천교령들을 생각하였다. 만주의 산야와 강하에는 실로 우리의 선렬들과 전우들의 유해가 수없이 묻혀있었다.


나는 전에 내각수상으로 사업할 때 교육성의 한 책임일군으로부터 이런 여담을 들은적이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어떤 교수의 집에 하루는 그의 전우가 찾아왔다. 두 전우는 반갑게 만나서 서로 쌓였던 회포를 풀었다. 교수한테는 유치원에 다니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손님은 그 아이하고도 인차 친숙해졌다.

손님의 무릎에 앉아 옷깃도 만지고 단추도 만지고 략장도 만지던 교수의 아들은 그 손님의 손을 만지다가 깜짝 놀라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피도 흐르지 않고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차거운 의수였던것이다. 어린것은 그 의수를 잡고 손님에게 물었다.

《아저씨, 이 손은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요?》

《전쟁판에서 미국놈들과 싸우다가 그렇게 됐다.》

《인민군대두 부상을 당하나요?》

《당하구 말구. 때로는 죽기도 하지.》


교수의 아들은 그 말을 듣고 몹시 분해하였다. 인민군대가 상할수도 있고 죽을수도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손님의 말은 인민군대는 죽지도 않고 상하지도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어온 어린것의 생각을 뒤집어놓았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그림책들과 아동영화들은 적이 죽는것은 많이 그리고 인민군대가 죽는것은 적게 그리였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인민군대나 항일유격대는 죽지도 않고 부상당하지도 않는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였다.


우리의 교육자들과 문필가들은 미일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전쟁의 승리가 얼마나 막대한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진것인지 후대들에게 사실주의적으로 똑똑히 가르쳐주지 못하고있다. 우리는 형언할수 없는 고뇌와 시체로 사닥다리를 쌓으며 항일대전의 승리라는 까마득한 령봉에 올라섰다고 말할수 있다.


호소로써도 청원으로써도 테로로써도 통하지 않는 제국주의강적을 격파하는 싸움에서 어찌 희생이 없을수 있겠는가. 죽음은 적아를 가리지 않으며 정의와 부정의를 구별하지 않는다. 단지 그 죽음이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뿐이다. 한명의 죽음으로 열명을 살리고 열명의 죽음으로 백명을 살리며 백명의 죽음으로 천명을 살리는것이 바로 혁명군대의 죽음이다.


왕대흥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후 얼마 안되여 나는 또다시 실신상태에 빠지였다. 온몸을 통채로 불사르는것 같은 고열이 오고 이어 환각인지 꿈인지 분간할수 없는 몽롱한 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담가를 들고 왕대흥과 함께 오가산령을 넘고있었다.

담가우에는 차광수와 주보중이 팔베개를 하고 나란히 누워있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것은 차광수나 왕대흥이 조금도 죽었다고 생각되지 않는것이였으며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도 그것을 조금도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것이였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여름날 갈길은 멀고 령은 높은데 우리는 갈증과 무더위로 헐떡거리고있었다.

고개를 오를수록 갈증은 심해졌다. 나는 참다못해 길가의 자그마한 물웅뎅이로 뛰여가 무작정 고인물을 들이키려고 하였다. 그 순간 어디서인지 《아서라!》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우에 소복단장을 한 어머니가 영주동생과 함께 고개마루턱에서 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있었다.

《아서라, 그 물은 독물이니 마시지 말아라.》

어머니의 말씀이였다.

웅뎅이를 들여다본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포도송이같은 올챙이알들이 물속에 와글와글하였던것이다. 이 물을 어째서 독물이라고 하실가? 내 눈에는 그것이 꿀물이나 정화수처럼 보이였다. 나는 웅뎅이앞에 엎드려 물마실 차비를 하였다. 그때 어머니의 두번째 경고가 또 날아왔다.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나는 그 경고에 놀라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리고는 고개마루턱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동생도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그것은 분명 꿈이였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그 꿈을 흔들어놓았다.

《성주형, 제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주시오. 성주형이 일어나지 못하면 우리 나라가 빛을 보지 못해요.》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누구인가 발구우에 상체를 숙이고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길림시절부터 나를 따라다니며 글도 써주고 시중도 들어준 왈룡이라는 공청원이였다.


석양의 강렬한 락조에 피빛으로 타번지는 수림속의 설경이 천천히 발구뒤로 미끄러져가고있었다. 저녁어스름에 물든 차디찬 하늘이 머리우에서 빙그르르 돌아갔다.

왈룡이는 《성주형》, 《성주형》하고 눈물을 뚝뚝 떨구며 발구를 따라왔다.

그다음은 오대성인지 누구인지 또 내 몸에 왈칵 매달리며 웨치였다.

《대장동지가 이대로 가면 조선이 망합니다.》

발구의 앞뒤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전우들이 나를 둘러싸고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였다.

나는 울지 말라고 타이르고 싶었으나 기력이 없어서 입을 벌리지 못하였다. 아니 나자신도 그 순간에는 울고있었다.

그다음은 아무것도 분간할수 없는 혼미상태가 내몸을 엄습하였다.


다음날 아침 고열에서 잠간 해방된 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때 나는 수림속 공지에 서있는 발구와 그 주변에 쓰러져있는 16명의 전우들을 보았다.

이제는 그들이 나를 위안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위로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것이다. 며칠째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고 내처 싸움만 하였는데 저 동무들인들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나를 살리느라고 고생인들 오죽했겠는가. 우리가 이 몇해동안 간도땅에서 죽을 고생을 다 해왔지만 저 사나이들의 얼굴이 저렇게도 축간적이 있으며 옷이며 신발이 저 지경까지 해진적이 있었던가.


가슴이 답답하였다. 아직도 갈길은 료원한데 끌날같은 저 친구들이 기진해서 다 쓰러졌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저들에게 과연 자리를 차고 다시 일어나 왕청으로 돌아갈 힘이 있겠는가. 저들이 저 눈보라속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파묻힐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혼자 살아남아서 무얼하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항일의 기발을 들고 만난을 극복하며 꾸준하게 싸워올수 있은것도 저 사람들이 시종일관 나를 지지하고 받들어온 덕이며 내가 그들을 믿고 그들의 힘에 의거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해온 덕이다.


저 사람들이 없으면 내가 살수도 없고 혁명을 할수도 없다. 저 사람들이 나를 살렸으니 이제는 내가 저 사람들을 살려내야 한다. 내가 일어나야 저 눈속에 파묻힌 전우들도 구원하고 혁명도 하겠는데 손가락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나의 의식은 다시금 몽롱한 안개속에 휘감겨버리였다.

겁을 모르는 불새마냥 창창한 대공으로만 날아다니던 내 한생의 뜻이 여기서 그만 죽지를 꺾이우고 주저앉고 마는가 하는 좌절감으로 하여 가슴은 천만갈래로 갈기갈기 찢기는것 같았다.


우리가 여기서 더 추서지 못하고 주저앉으면 재생의 희망을 가지고 우리를 쳐다보던 민족이 슬퍼하고 실망할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쳤다. 나는 전기에라도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선민족의 슬픔은 곧 일제의 기쁨으로 되고 조선민족의 절망은 곧 일제의 쾌락으로 된다. 우리가 주저앉으면 일본의 부자들과 군국주의자들밖에 기뻐할것이 없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지금 이 만주오지에서 우리가 굶어죽고 얼어죽고 절망에 빠져 투항하기를 고대하고있다.

력사는 우리에게 아직 죽을 권리를 주지 않았다. 력사와 시대 앞에서 자기앞에 부과된 과제를 수행하지도 못하고 한줌흙으로 사라져버린다면 그는 불효자이다. 한 가정이나 가문의 범위를 뛰여넘어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인민앞에서 불효자가 되고마는것이다. 우리는 결코 불효자가 되지 않을것이다.


나는 무겁게 내려감기는 눈시울을 눈가루로 문지르고 급하게 줄달음치는 사색을 침착하게 이어갔다.

만일 우리 혁명군이 천교령의 빙설속에 그대로 매장되여 영영 자취를 감춘다면 우리 인민에게로 쏠리는 일제의 폭압은 대번에 10배, 100배로 강화될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하고있는 지금도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인민의 고혈을 짜내고 우리 민족을 황민화하기 위하여 얼마나 악을 쓰고있는가.

일제는 1933년에 국제련맹을 탈퇴한후 경제봉쇄로 인한 손실을 조선민족에 대한 수탈로 메꾸려 하고있다. 1920년대에 사이또총독에 의해 추진되였던 산미증식계획, 면화, 양잠의 증산정책이 조선농촌에서 계급분화를 촉진시키고 리농, 리향의 비극을 격증시켰다면 우가끼총독시대의 조선공업화정책, 산금장려정책, 남면북양정책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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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우리 나라의 병약한 경제를 화약내풍기는 전쟁경제의 유지를 위한 부속물로 전락시키고있다. 강철도 석탄도 면화도 면양도 일본의 부국강병을 위한 제단에 깡그리 바쳐지고있다.

조선의 말과 글은 비공식적인 방언의 지위에 떨어졌다. 진보적인 서적들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불세례를 받았다. 조국땅에서 늘어나는것은 련병장과 감옥뿐이다. 우리 애국자들의 피로 얼룩진 악명높은 서대문형무소도 수용인원의 범람을 막지 못해 증축중이라고 한다. 세계제패를 꿈꾸는일본의 대재벌들과 군벌들, 그 번견들은 군국주의의 궤도를 따라 미친듯이 질주한다. 중일전쟁의 폭발은 시간문제로만 남았다. 방아쇠를 당기는것은 일본군벌들의 결심에 달려있다. 독일과 일본의 파시스트들에 의하여 지구의 서쪽과 동쪽에서 새로운 세계대전의 위험을 배태한 검은 구름장들이 전속력으로 밀려온다.

반혁명이 이처럼 게거품을 물고 악을 쓰고있는데 그것을 타승하려고 결심했던 우리가 어찌 한시인들 절망에 잠겨 오늘의 이 역경을 한탄만 하고있겠는가.
설사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기를 쓰고 살아서 혁명을 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면 우리를 기다리는 동만의 수많은 일거리들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리가 여기서 그대로 주저앉으면 조선인민이 일제의 영원한 노예가 된다.

내 머리속에서는 문득 하나의 시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반일전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노래를 낳은 시상이였다.

일제놈의 발굽소리는 더욱 요란타
금수강산 우리 조국 짓밟으면서
살인방화 착취략탈 도살의 만행
수천만의 우리 군중을 유린하노나
나의 부모 너의 동생 그대의 처자
놈들의 총창끝에 피흘렸고나
나의 집과 너의 밭은 놈들의 손에
재더미와 황무지로 변하였고나

일어나라 단결하라 로력대중아
굳은 결심 변치 말고 싸워나가자
붉은기아래 백색테로 뒤엎어놓고
승리의 개가높이 만세 부르자

나는 발구가까이에 쓰러져있던 왈룡이를 흔들어 앉힌 다음 그에게 가사를 받아쓰게 하였다. 처음에는 나와 왈룡이가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쓰러졌던 전우들이 하나둘 일어나 노래를 합창하였다.
우리는 아침 10시경에 시패린즈에 있는 어떤 목재소에 들리였다. 강낭죽이라도 먹고 땀을 내자는것이였다.
그날 나의 체온은 40도이상으로 올라갔다. 그때의 치료방법이란 강낭죽이나 먹고 중국호주에다 홍탕을 타서 먹는것이였다.

땀을 내야 차도가 보이겠는데 발구를 타고 장창 한지에서 떨며 지내다나니 병세가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각일각으로 악화되여가기만하였다. 전우들은 혼수상태에서 고열과 싸우는 나를 지켜보며 이제는 원정대가 구출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였다. 누구도 우리가 이 위기에서 솟아나 왕청으로 돌아가게 될것이라는 락관적인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망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침통한 기분으로 중대장인 한흥권에게 만사를 일임하고있었다.

한흥권은 목재소에서 심부름군으로 일하는 김로인에게 강낭죽을 끓여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때 우리 일행은 옹근 이틀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에 우리 동무들은 이 로인을 중국로인으로 보았다. 중국옷을 입고 중국말을 하였기때문이였다.
우리가 간도에서 온 조선유격대라는것을 알자 김로인은 자기를 조선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자기 아들이 팔도하자에서 유격대 대장으로 활동하는 김해산이라는것까지 다 이야기하였다.

김해산은 1931년의 겨울명월구회의 참가자의 한 사람이다. 김로인은 아들을 유격대에 보내고 여름이면 산에 가서 농사를 지어 먹을것을 벌고 겨울에는 목재소에 내려가 잡일을 하여 소금이나 기름같은것을 얻어 가지고 가는 령감이였다.

일행이 목재소에 들어가서 로인과 인사를 나눈지 얼마 안되여 한흥권은 적 《토벌대》가 목재소근처에까지 접근해왔다는 정찰보고를 받았다.
그때 왈룡이는 뚜껑도 없는 양재기를 부엌아궁이에 넣고 내가 먹을 물을 끓이고있었다. 한편으로는 내 발에서 벗겨낸 젖은 신발도 말리였다.
그는 대장의 병도 호전되지 않고 포위를 헤치고나갈 가망도 없으니 이제는 일이 다 틀려졌다고 생각하면서 슬프게 울었다.
길림에서 나를 따라 떠날 때에는 그도 맹세가 대단했었다. 그는 내가 죽으면 자기도 죽는다고 생각하였다.
왈룡이가 한창 울고있을 때 장작개비를 안고 부엌에 들어온 김로인이 그에게 왜 우는가고 물었다.

《대장은 앓고… 〈토벌대〉는 겹겹이 우리를 둘러싸고… 한시간후이면 그놈들이 이 목재소에 들이닥치겠는데 빠질 구멍이 하나도 없으니 답답해서 웁니다. 빠지려면 강을 건너야겠는데… 큰 강이고 얼지도 않았으니 물로 건너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딱 다리로 건너가야 살길이 열리겠는데 거기엔 〈토벌대〉들이 1개 중대나 있으니 이거야말로 사면초가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김로인은 왈룡이의 하소연을 듣고나서 그에게 포위를 뚫고 나갈수 있는 묘술을 하나 대주었다.
《젊은이, 너무 상심말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네. 우리 주인놈이 만주국 앞잡이인데 얼마후 여기로 올수 있네. 그러니까 이 주인놈을 붙잡게. 그놈을 잘 구슬려 〈토벌대〉가 목재소로 오지 않게 련락만 하게 하면 당신네들은 저녁때까지 여기서 견딜수 있네. 그 다음수는 저녁이 된 다음 궁리해보자구.》
왈룡이는 김로인이 한 말을 그대로 한흥권에게 보고하였다.

이렇게 되여 한흥권이 일행을 대표하여 그 로인과 담화를 하게 되였고 그 담화를 통하여 최종적인 탈출안을 확정하게 되였다.
한흥권은 김로인의 처방대로 주인을 비끄러매고 생트집을 걸었다.
《너 이놈, 누가 너더러 목재소를 경영하라고 허락했는가. 만주국이란건 우리가 승인도 안한거야. 죄를 씻고싶거든 우리 군대에다가 의연금을 단단히 내야겠다. 얼마나 내겠는가?》
주인은 키가 천정에 닿을만치 허우대가 크고 뚝뚝하게 생긴 한흥권의 외모와 엄포에 위압되여 처음부터 겁을 먹고 설설 기였다.
《아, 뭐 당신네가 바라는대로 냅지요.》
한흥권은 군복이 얼마, 돼지가 얼마, 밀가루가 얼마 하고 일부러 주인이 기절해넘어질만한 엄청난 수량을 부르고나서 너 이걸 낼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나를 살려만 주면 당신네가 여기 있을동안 〈토벌대〉가 안오게 하겠습니다.》
《어떻게 안오게 하겠는지 그 방법을 말해보라.》
《당신네 빨찌산이 다른데로 빠져나갔다고 하면 되지요. 내가 〈토벌대〉장교들과 가까운 사이니까 그들이 내 말은 신임합니다.》
《네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면 너를 용서할수 있다. 우리의 목적은 반일이다. 너도 죄를 씻고 반일을 하고싶은 생각이 있거든 우리를 협력하라.》
《요구대로 하겠으니 어서 나를 풀어만 놔주십시오.》

그 중국인목재상도 머리는 명석한 사람이였다. 그는 우리가 요구하는것이 물자가 아니라 신변안전에 있고 포위를 무사히 돌파해나가자는데 있다는것을 인차 간파하였다.
목재상이 대장이 누군가고 자꾸 묻자 한흥권은 나를 로출시키지 않기위해 《대장은 나다.》하고 대답하였다.
주인이 나를 가리키며 《저분은 어떻게 앓습니까?》하고 묻자 그는 몸이 좀 불편해서 누워있다고 어름어름해 넘기였다.
목재상은 약속을 잘 지키였다. 그가 련락을 해놓은 덕에 《토벌대》는 날이 어슬어슬해질 때까지 목재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목재소에서 아침겸점심을 먹고 저녁식사도 하였다.
저녁상에는 돼지고기도 올랐다. 입맛을 잃은 나는 갈증을 덜려고 강낭죽물만 조금 먹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다음 김로인은 탈출계획의 제2부를 내놓았는데 그것도 역시 대단한 명안이였다.
이제는 다리를 무사히 통과하는 문제가 남았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 어떻게 하든지 당신네들이 전술을 잘 짜야 한다. 우선 얼렁뚱땅해서 경비초소를 통과하는 방법이 하나 있고 목재소주인을 앞세워가지고 다리까지 가서 그놈의 힘을 빌어 경비병들을 속여넘기는 방법이 하나 있다.

놈들이 접근해서 검색을 하면 날쌔게 답새기고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건너만 가면 김사령을 업고 산으로 안내할수 있다.
다리목에서 20리쯤 내려가면 깊은 골안이 있고 그 골안에 자그마한 골짜기가 있는데 그 골짜기 막바지에 조선사람의 집 세호가 있다. 일본놈들 꼴이 보기 싫다고 비밀리에 들어와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인데 만주국에 호적등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람들의 도움만 받으면 김사령의 병치료도 문제가 없을것이다.

한흥권이 이 계획에 동의해나서자 김로인은 흐뭇해하면서 이런 안을 덧붙이였다.
다리를 건늘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소대장이 응전하는것이 좋겠고 나머지는 내 안내에 따라서 움직여달라. 중대장은 키가 크고 힘도 쎄니 김사령을 업고 내 뒤만 따라오라. 다리만 건너가면 그쪽 산발은 내가 다 꿰들고있으니 놈들이 암만 따라와도 문제가 없다. 다리를 무사히 건느게 되면 나하구 주인을 녕안현시가지근방까지 데리고 가달라. 거기 가서는 나를 좀 때려달라. 주인도 움쩍못하게 위협하고… 그러는 사이에 나머지사람들은 중대장과 같이 김사령을 모시고 골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한흥권은 그 말까지 듣고나서 나에게 로인이 내놓은 안을 소개하였다. 듣고보니 아주 리상적인 안이였다.
로인이 군사전문가는 아니지만 의병장도 할수 있는 대담한 작전가였다. 빨찌산대장의 아버지가 다르기는 달랐다. 로인이 짜준 탈출안은 사실 어지간한 지휘관들도 궁리해내기 어려운 묘안이였다. 그때도 절실하게 체험한바이지만 우리 인민의 두뇌는 세상의 그 어떤 난사도 다 해결해낼수 있는 지혜의 샘이였다.
어려운 때일수록 인민을 찾아가야 한다는 나의 신조는 이런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것이다.

나는 한흥권에게 당신한테 모든것을 맡기니 아무렇게나 하라. 나야 앓아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방책이 없지 않는가고 하였다.
밤이 되자 한흥권은 목재소주인을 내세워 다섯채의 말파리를 준비하였다. 그 목재소에는 말이 많았다. 싸움을 잘하는 김택근소대장이 주인과 같이 앞말파리에 타고 나는 세번째 말파리를 차지하였다.
다리를 지키고있던 일만혼성군 보초들은 우리 일행을 보자 어둠속에서 《누구얏?》하고 물었다.
목재상은 우리가 짜준 각본대로 우리 로동자들이 병이 나서 병원에도 가고 녕안시내에 뭘 좀 사러 가는 길이라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목재상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보초병들은 말파리곁에 다가오지도 않고 《가라.》하고 소리쳤다.
다섯채의 말파리는 쏜살같이 다리를 건너가고있었다. 말파리밑에서 흔들거리는 나무다리의 진동이 개가죽을 거쳐 내몸에까지 미쳐왔다. 다리밑으로는 사나운 강물이 사품을 일으키며 흘러내리고있었다. 그 강은 목단강으로 흘러드는 큰 원류였다.
《이제는 됐네! 그러면 그렇겠지.》
말파리들이 다리를 다 건너서자 김로인은 흡족해서 한흥권을 끌어안았다.

전설이나 정탐소설 같은 이 모험극은 이처럼 통쾌하게 막을 내리였다. 일행은 그 다음공정들도 계획대로 무난히 치르었다.
김로인이 아니였더라면 나는 사경에서 구원되지 못하였을것이다. 원정대는 나와 함께 천교령오지에서 괴멸되였을것이다. 그 로인이 사실 큰 은인이였다. 빨찌산대장의 아버지답게 우리를 희생적으로 도와준 훌륭한분이였다.

생사를 가르는 아슬아슬한 곤경에 처할 때마다 내앞에는 이상하게도 매번 김로인과 같은 귀인이 나타나 나를 사지에서 구출해주군하였다. 교하에서 이름모를 아주머니가 나를 체포의 위기로부터 보호해주고 마로인이 라자구등판에서 기한에 떨던 나와 나의 동무들에게 안식의 선물을 마련해준것처럼 천교령에서는 생면부지의 김로인이 절명직전의 원정대와 그 지휘관인 나를 천길나락에서 건져주지 않았던가.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우연이 나를 도와주었다고 말한다. 개중에는 그것을 필연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분골쇄신하는 애국자들을 귀인이 나타나 도와주는것은 우연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수 없다는것이다.

나는 구태여 어느것이 옳다거나 어느것이 그르다고 시비를 가를 생각은 없다. 내 일생에서 은인들의 도움을 받는 일이 여러번 되풀이되였다면 그 우연은 분명 내편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인민을 위해 한생을 바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우연조차도 선심을 베푸는 법이다.

우리 유격대가 인간해방을 위해 싸우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무력이라는것을 인민이 몰랐더라면 그리고 그 유격대의 영상이 아름답고 신성하고 거룩한것으로 인민들의 망막속에 깊이 심어지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그때 천교령에서 김로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을것이다. 우리의 항일혁명투쟁사에 천교령의 전설과 같은 신비로운 전설도 태여나지 못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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