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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8-7. 영생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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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7,036회 작성일 15-05-01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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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 생 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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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이였다.

왕우구혁명조직에서는 상급의 조치에 따라 북동아동단학교 학생들인 김금순(김금녀)이와 김옥순이를 소왕청에 파견하였다.


두 소녀는 연길지방인민들이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던 재능있는 유희대원들이였다. 그들은 조직으로부터 혁명군중이 많이 집결되여있는 왕청일대에 가서 근거지인민들에게 노래와 춤을 보급하라는 과업을 받고 마촌에 왔다. 그 당시 동만지방의 혁명조직들은 인재들을 자주 선발하여 조선혁명의 책원지로 된 소왕청으로 끊임없이 보내주었다. 지금 우리 인민들이 평양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는것처럼 동만지방의 인민들도 소왕청을 위해서라면 어떤 형태의 지원이든지 다하였다.


마촌에 도착한 두 소녀는 나를 만나려고 동행한 북동아동단학교 관리원의 안내를 받아가며 곧장 군부로 찾아왔다. 만나고 보니 그들은 10살안팎의 애어린 소녀들이였다. 우리는 처음에 그들을 자매간이라고만 짐작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남남이였다. 그저 이름이 어슷비슷하였을뿐이다.


동행한 북동아동단학교 관리원은 내앞에 두 소녀를 차례로 내세우고 그들의 경력과 집안래력을 재미나게 소개해주었다. 그 소개가 대단히 인상적이였다. 관리원이 김옥순의 경력을 말할 때 김옥순자신은 눈물을 흘리였다. 나도 하마트면 눈물을 흘릴번하였다. 그가 걸어온 13살이라는 짧은 인생이 너무나도 큰 비극으로 얼룩져있었던것이다.


김옥순은 9살 때 벌써 20살이 넘는 지주의 아들과 혼약을 맺었다.그것은 본인도 모르고 부모들도 모르게 사기적인 방법으로 맺어진 혼약이였다. 20살이 넘으면 남자도 로총각이라고 그런 자식을 둔 부모들은 등이 달아서 중매군을 내세워 신부감을 물색하던 세월이였다. 총각이 20살이 넘도록 혼처를 정하지 못하고있다가 부정한 방법으로 그것도 녀자의 아버지에게 술을 몇사발씩 퍼먹이고 만취된 다음 손을 끌어당겨 문서장에 도장을 찍는 식으로 혼약을 성급하게 날조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 총각은 분명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장가를 가기 힘든 부실한 청년이였거나 병신이였던것 같다.


그 문서장에 의하면 김옥순은 15살이 되는 해에 신랑과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되여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문서장에 그런 강도적인 조항이 씌여있는것도 모르고 이틀동안이나 빈사상태에서 깨여나지 못하였다.술에 만취되였던 그는 집에 실려와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였는데 주머니에서 자기의 지장이 찍힌 약혼문서와 출처불명의 돈 80원을 발견하고는 통곡하였다. 그 80원은 딸을 지주집에 시집보내게 되는 대가로 신부될 측이 신랑될 측에게서 받는 선사금이였다.


그 사실을 알고 옥순이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딸의 운명을 한장의 문서장으로 결정해버린 그의 아버지 김재만자신은 얼마후 80원의 선사금으로 초가집을 사고 터밭을 사고 소와 돼지를 사서 묵묵히 생계를 꾸려나갔다.강약이 부동이라고 항변했대야 아무 소용도 없으니 이왕이면 주머니에 굴러들어온 돈을 밑천삼아 화를 복으로 만들어보겠다는 태도였다. 딸이 자기의 장래를 생각하며 쿨쩍거릴 때마다 김재만은 이런 말로 그를 달래였다.


《얘야,울지 말아라. 그 80원이 그래두 다 망하게 된 우리 집을 살렸다. 어쨌든 굶어죽기보다야 낫지 않겠니. 너 하나의 혼약으로 다 죽게 된 부모형제들을 살렸다고 생각하면 슬픈 마음도 가라앉을게다.》


무식하고 순박한 그는 혁명을 리해하지 못하였다. 사람이 누구든지 부지런하게 손발을 놀리면 가난을 이겨낼수 있고 지어는 백만장자까지 될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천진란만하였다. 그러다보니 자기를 착취하는 지주들에 대해서도 환상을 가지였다. 그 지주는 드문히 옥순이네 집에 먹을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김재만은 세상에 자기네 지주처럼 고마운 지주는 없다고까지 여기게 되였다. 한번은 옥순이가 학교마당에 가서 지하공작원의 연설을 들은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재만은 딸을 외양간에 묶어놓고 온몸에 굴뱀이 질 때까지 사정없이 매를 때렸다. 딸이 혁명에 발을 잠그게 될가봐 겁났던것이다.


김재만이 계급적으로 늦게나마 각성된것은 다섯차례에 걸치는 적의 《토벌》에 마을이 재더미가 된 다음부터였다. 옥순이네도 그 《토벌》에 집과 역축을 죄다 잃고말았다. 가까운 이웃들가운데는 불에 타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옥순아,이제는 놈들이 망하든지 우리가 망하든지 사생결단을 해야겠다. 아버지는 세상을 너무도 몰랐다. 이제는 너희들이 혁명을 해서 저 악귀같은 무리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딸을 왕우구유격구역으로 떠밀어보내던 날밤 김재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후 김옥순은 송림동에 있는 김금순이네 집에 거처를 정하고 금순이와 함께 북동아동단학교에도 다니고 구유희대,현유희대에 망라되여 군중계몽활동도 하였다.


조선의 아이들은 옥순이처럼 부모들의 곁에서 응석이나 부리고 투정질을 할 어린 나이에 벌써 민생고를 타개하기 위한 멍에를 걸머지고 생활전선에서 허덕이였다. 세월의 난파는 성년,미성년을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어린이도 몰라보는 세상,아이들에게도 어른들과 똑같은 등짐을 걸머지우는 악착한 세상에 항거하여 우리의 소년들은 투쟁에 궐기하였다. 간도지방의 조선소년들은 도처에서 아동단,소년선봉대,소년탐험대와 같은 혁명조직들을 뭇고 조직된 력량으로 싸움의 마당에 뛰여들었다. 혁명적조직생활을 통해 교양되고 단련된 우리의 모든 소년소녀들은 항일혁명을 움직이는 하나의 당당한 치차가 되고 나사못이 되였다.

김옥순,김금순이도 그 치차중의 한 치차였고 그 나사못중의 한 나사못이였다.


나는 김옥순의 경력을 듣고 측은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그의 청초한 모습속에 비껴있는 한가닥의 불행은 조선의 수백만 어린이들이 당하고있던 불행의 축도였다.

하지만 혁명을 하겠다고 어린 나이에 벌써 집을 떠나 유격근거지로 찾아들어온 그 결의와 기개야말로 얼마나 장하고 떳떳한가. 오늘은 또 소왕청을 지원하려고 왕우구-다홍왜-요영구-마촌 로정을 따라 수백리길을 걸어왔으니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어른들이나 신고다니는 지하족을 발에 걸치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막대기로 덤불길을 헤치며 허위단심 소왕청으로 찾아온 두 소녀가 내 눈에는 몹시도 기특하고 대견스러워보이였다.

《누가 너희들을 소왕청으로 보내더냐?》


나는 저 지하족을 운동화나 고무신으로 바꾸어주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두 소녀에게 물었다.

《윤병도선생님이 보냈습니다.》

두 소녀는 치마말기에 두손을 가져다붙이고 몸가짐을 가다듬으며 기운차게 대답하였다. 눈빛도 별처럼 초롱초롱했지만 목소리도 정신이 번쩍들게 또랑또랑하였다.


나는 기분이 매우 흡족해졌다. 아이들과의 친교는 사실 나의 생활에서 하나의 큰 락이였다. 아이들의 웃음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고통과 고뇌를 씻어주는 하나의 강력한 세척제라고 말할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동심속에 잠겨보라. 그러면 그대는 생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될것이다. 그리고 그 어린것들로 하여 인류의 생활이 더 아름답고 다채로와 진다는것과 그들의 눈망울에 차넘치는 리상을 꽃피워주고 지켜주는것이 성스러운 사명임을 가슴이 부풀도록 깨닫게 될것이다.


나는 얼굴과 종다리에 긁힌 자리가 여러군데 나있는 금순이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와 이런 질문을 하였다.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했다. 큰 령이랑 많았겠는데 넘기가 힘들지 않더냐?》

《발이 부르터서 혼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데리구 온 아저씨가 왕우구로 되돌아가라고 할가봐 힘들지 않은체 했습니다.》

《집에 돌아가 부모님들 곁에 있으면 더 좋지 않니.》

《좋기야 좋지요뭐. 그런데 언제 어른이 되겠나요. 어른이 되자면 고생을 많이 해봐야 한다구 아동단지도원선생님두 말씀해주셨는데… 난 고생을 많이 해서 빨리 어른이 되구싶어요.》

《어른이 그렇게 빨리 되여선 뭘하니?》

《조선을 독립해야지요. 김대장아저씨,무슨 일이 있어두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주세요.》


나는 금순이의 어른스러운 사고방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나이는 비록 어리였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려는 그의 각오는 사상적으로 매우 조숙한것이였다.

《응,그건 걱정말아라. 간도에서 세손가락안에 꼽히는 재간둥이들이 굴러들어왔는데 왜 돌려보낸단 말이냐. 이제부터는 우리하고 같이 왕청에 있자. 여기서 아동단생활을 하는게 괜찮아.》

금순이는 그 말을 듣자 기쁨을 참지 못하고 손벽을 마주쳤다.


나는 현과 구의 공청지도일군들에게 두 소녀를 마촌아동단학교에 편입시키고 아동단조직생활을 계속할수 있도록 해줄것과 부모의 슬하를 떠나 생소한 고장에 온 그들이 마음놓고 침식을 할수 있는 무던한 집들에 숙소를 정해줄것을 부탁하였다.


왕청의 군대와 인민은 마촌아동단학교 운동장에서 그해 5.1절을 크게 쇠였다. 5.1절행사에는 왕청지구의 군대들이 다 모이였다. 왕우구에서 온 두 소녀는 그날 달리기와 높이뛰기에서 각각 1등을 하여 왕청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금순이는 나이에 비해 몹시 체소했다.

그가 유희대의 선두에서 배낭을 메고 발을 재게 놀리며 달랑달랑 걸어갈 때면 그 순결하고 재롱스러운 모습앞에서 누구나 다 웃음을 짓군하였다.

나자신도 그의 모습에서 많은 힘을 얻었다. 나는 원래 생활을 비관적으로 감수하는 사람들보다도 락천적으로 감수하는 사람들을 더 좋아하였다. 우리가 산에서 풀뿌리를 우려먹으며 어려운 무장투쟁을 하던 그 시기에는 한명의 락천가가 몇십문의 대포와 맞먹는 힘을 내였다. 금순이는그 당시 당,공청,아동단의 3대동맹에서 제일 어린 세대를 대표하는 뛰여난 투사였고 락천가였다.


금순이를 만난 며칠후 나는 지휘부에 마촌아동단학교 아이들을 불러 그들의 생활형편을 료해하였다.

원래 아동단원들은 배낭속에 한주일분의 식량을 상시적으로 휴대하고 다니게 되여있었다. 그런데 그날 배낭검열을 당한 아동단원들속에는 학교에서 내준 미시가루를 먹어버린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금순이만은 한숟갈도 다치지 않고 한주일분을 그대로 고스란히 간수하고있었다.

《다른 애들은 다 먹어버렸는데 우리 막내가 참 용케 참아냈구나. 금순이가 제일이다!》

나는 배낭검열을 끝내자 엄지손가락을 쳐들어보이며 금순이를 크게 칭찬하였다.

금순이는 수집은듯이 웃기만 하다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두 미시가루주머니를 몇번이나 꺼냈다넣었다 했는지 몰라요. 먹구싶은걸 겨우 참았지요 뭐.》

《어떻게 참았느냐?》

《다른 애들이 미시가루를 먹을 때 난 눈을 꼭 감구있었어요. 그래두 먹구싶으면 밖으로 나가지요. 밖에 나가두 먹구싶으면 우물에 가서 물을 한드레박 마시고 오군했습니다. 그럼 미시가루를 먹은것만치나 배가 불렀거던요.》


나는 금순이의 류창한 대답을 듣고 다시한번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눈물겨운 동심속에는 유격구인민들이 당하고 있는 경제적궁핍이 그대로 집약되여있었으며 그런 궁핍속에서도 억척스레 혁명을 개척해나가는 어린 불사조들의 넋이 격조높이 고동치고있었다.


그날 우리는 아이들에게 10고뿌의 미시가루와 강낭떡을 나누어주고 배낭속에 성냥도 넣어주었다. 며칠후에는 새 솜옷과 솜이불에 신발,공책,연필까지 합치여 두달구지나 되는 필수품들을 아동단학교에 보내주었다.싸움이 잦은 때여서 우리에게는 적들을 치고 로획한 전리품의 예비가 적지 않았다. 먹을것과 입을것이 귀한 때였으나 우리는 그 예비의 많은 몫을 늘 아동단학교에 돌리군하였다.


《제일 좋은것을 어린이들에게!》라는것이 지금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의 움직일수 없는 원칙으로 되고있지만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하던 그 어려운 때에도 우리는 이 원칙의 요구에 따라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줄수 있는 모든것을 다 해결해주었다. 아이들이 먹고 입고 쓰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면 부대를 출동시켜 전투까지도 서슴없이 조직하군하였다.


우리는 아동단앞에 《조선의 독립과 전세계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라는 구호를 제시하고 그들을 애국주의사상,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사상으로 교양하였다.

아동단원들은 군중계몽,연예활동,보초근무,통신련락,적정탐지,무기탈취,유격구방위를 위한 투쟁에서 실로 어른들에게 못지 않은 위훈을 세웠다.적의 《토벌》에 불타버린 귀틀집들을 다시 일떠세울 때에도 우리는 일터에서 언제나 아이들을 볼수 있었으며 근거지를 사수하는 방위전의 불바다속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혁명군의 참호에 주먹밥을 들고 뛰여오던 어린 수리개들과 맞다들수 있었다. 농사철이면 그들이 밭에 가서 김도 매고 가을걷이도 하였다. 어떤 때에는 산과실을 따다가 유격대병실에 보내주기도 하였다.


언제인가 나는 뾰족산 중앙보초대에서 전방보초근무를 서고있는 아동단학교 학생들의 모습을 목격한 일이 있다. 허리에 묵직한 작탄을 한개씩 찬 그들은 1.5메터 정도의 길이를 가진 장대끝에 쇠붙이를 붙인 창을 들고 보초를 서고있었다.


보초교대는 한시간에 한번 한다고 하였다. 성냥가치 두개를 합친것만한 크기의 향에 불을 붙여 그것이 절반가량타면 교대를 하군하였다. 향이 전부 타는 시간이 두시간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이 독특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아이들이 한번은 겹으로 된 조선바지저고리와 대님,회색 양단조끼,승마바지,구두,장화,검정고무신을 일식으로 갖추어가지고 나를 찾아왔다.그것은 우리가 아동단학교에 전리품들을 여러번 보내준데 대한 보답이였다.우리는 그 당시 일본침략군의 수송대를 치고 로획한 조선사과도 아동단원들에게 모조리 선물하였다. 유격근거지 아이들가운데는 이국땅에서 태여나 조선에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조국의 사과조차 구경하지 못한 아이들이 수두룩하였다. 유격대원들이 로획한 조국의 사과를 상자채로 가져다주었을때 아동단원들이 얼마나 감격했고 얼마나 절절한 감사의 정에 사무쳐있었는가에 대하여 그 일화의 산 증견자이고 직접적인 체험자인 김옥순은 자주 뜨겁게 회고하였다.


박길송아동국장은 어느날 아동단학교에 찾아가 이런 말을 꺼냈다.

《얘들아,김대장선생님께서 우리를 친자식처럼 끔찍이 사랑해주시는데 우리는 지금 사랑을 받기만 하고 보답하지 못하고있다. 김대장선생님에게 우리의 성의를 조금이라도 표시해야겠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말들 해보아라.》

아동국장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금순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옷을 해드리자요. 대장선생님은 글쎄 추운 겨울에도 홑옷을 입고계신다지 않아요.》

박길송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금순이가 방금 좋은 옷을 해드리자구 했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아이들은 일제히 《좋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좋다면 됐다. 나도 금순이처럼 두툼한 옷을 해드리자고 생각했다.천을 구해다가 부녀회원들에게 부탁하든가 재봉대에 부탁해서 멋들어지게 옷을 만들자꾸나. 그런데 너희들이 알아야 할것은 천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지 않는다는것이다.》

《버섯을 뜯어다가 말려서 팔면 돼요. 버섯값이 비싸다구 했어요.돈만 있으면 천이야 못구하겠나요.》


금순이가 또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참새처럼 조잘거렸다.

《옳아요! 옳아요! 버섯을 뜯어다가 지주들에게 팔자요!》

다른 아이들도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다음날부터 아동단원들은 박길송과 함께 광주리를 들고 산으로 돌아다니였다.


나는 그들이 버섯을 따들고 대렬합창을 하며 리수구골안을 지나가는것을 여러번 보면서도 그 버섯광주리속에 무슨 비밀이 담겨있는지 간파하지 못하였다. 그저 저애들이 병원에 있는 전상자들에게 입맛이 당기는 부식물을 마련해주려고 끔찍이도 애를 쓰는구나하고 생각하였을뿐이다.그런데 그 버섯이 돈으로 되고 옷으로 되여서 어느새 내앞에 나타난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홑옷을 입고계시는 대장선생님께서 입으시라고 저희들은 옷 한벌을 지어가지고 왔습니다. 사양마시고 꼭 받아주십시오.》

금순이가 아동단경례를 맵시있게 붙이고나서 나에게 하는 말이였다.

그때 내가 정말 홑옷을 입고 겨울을 지내군한것만은 사실이였다. 그 옷을 받고나니 어째서인지 속으로 눈물이 났다.

나는 그 옷을 받아들자 이런 말로 아이들을 달래였다.


《얘들아,나는 비록 홑옷을 입고 지내지만 혈기왕성한 사람이다. 너희들의 성의는 평생 잊지 않겠다. 그러나 이 옷은 소왕청에서 년세가 제일 높은 할아버지에게 드리려고 하니 섭섭해들 말아라.》

아이들은 울상이 되여 원망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내가 옷을 받지 않는다고 못내 서운해하였다. 내가 두세번 타일러서야 애들은 마지 못해 웃음을 지었다.


군중집회가 끝난 다음 금순이는 내곁에 다가와 군복소매를 살그머니 만져보면서 귀속말로 이렇게 걱정하였다.

《천이 얇아서 바람이 쌩쌩 날아들겠네.》

지금도 엄동설한이 되면 소왕청에서 금순이가 하던 그 말이 이따금씩 귀전에서 감돌군한다.


처음에 왕청사람들은 그를 《깜장금순이》라고 불렀다. 눈동자가 새까맣다고 유격구인민들이 그런 별명을 지어붙이였다.조금후에는 《마촌콩새》라는 새로운 별명이 생겨나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였다. 콩새처럼 몸집이 작고 귀염상스러운 어린이라는 뜻에서 길주,명천 지방출신 녀성들이 달아놓은 애칭이였다.

사람들이 《깜장금순이!》하고 불러도 금순이는 《예!》하였고 《마촌콩새!》하고 불러도 《예!》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하루에 별명을 열번이상 들어도 절대로 노여움을 타는 성미가 아니였다.


금순이가 무대에서 탑프춤을 추는 날은 왕청사람들의 명절이였다. 그는 옥순이와 함께 늘 이 춤을 추군하였는데 아동단유희대의 공연종목가운데서는 늘 이 종목이 제일 많은 박수갈채를 받군하였다. 그가 발을 재게 놀리며 다리와 다리사이로 수건을 뽑는 동작을 되풀이할 때마다 관객들은 발을 구르며 환성을 올리였다.


나는 왕청에 있을 때 아침마다 백마를 타고 마촌골안을 돌아다니며 유격구의 실태를 료해하고 새로운 구상을 하군하였다. 아침산보는 나에게 있어서 어길수 없는 일과였다. 내가 백마를 타고 왕청골안을 돌아다닐때면 유격대나팔수 송갑룡과 전령병 조왈남이 나와 동행하였다. 나는 아침산보를 할 때마다 길가에서 꼭꼭 아동단원들의 가창대대렬과 맞다들군하였는데 그 대렬을 볼 때의 기분이란 참으로 흐뭇하고 상쾌한것이였다.


량볼이 사과알처럼 붉은 아이들의 건강하고 생기발랄한 모습을 마상에서 굽어볼 때에 느끼는 대견스러운 심정을 어떻게 하면 방불하게 그려낼수 있겠는지. 나는 눈비가 내리는 궂은 날에도 아동단원들이 보고싶어서 아침산보를 중단하지 않았다. 혹시 그애들이 눈비를 무릅쓰고 산보를 나왔다가 로상에서 나를 만나지 못하면 얼마나 허전해할가 하는 생각을 하군했다. 아이들도 나와 꼭같은 심정을 가지고 궂은 날이나 마른날이나 할것없이 산보길을 한번도 비우지 않았다.


가창행진을 할 때의 선창은 노상 금순이가 떼군하였다. 수십가지의 음성이 뒤섞여 울리는 조잡한 합창속에서도 우리는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금순이의 류다른 목소리를 쉽게 가늠해내군하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어째서인지 오늘 하루도 유격구에서 만사가 다 잘되여나가겠구나 하는 미신에 가까운 안정감이 마음속에 깃들군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리수구골안을 흔드는 아동단학교의 대렬합창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딴 지방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듣는것같은 생소한 느낌에 떠밀려 귀틀집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가창대대렬은 때마침 지휘부근처에 있는 소로길로 행진해가고있었다. 대렬 선봉에는 예전날처럼 역시 금순이가 서있었다.


금순이는 웬일인지 노래를 부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채 타박타박 걷기만 하였다. 그날아침 금순이를 대신하여 선창을 담당한것은 아동단단장인 리민학이였다.

금순이의 선창이 없는 가창대대렬은 사실 기둥가수를 잃어버린 합창단과 다름없었다.


그날은 왜그런지 하루종일 손에 일이 잘 잡히지 않았다. 나는 금순이를 만나려고 석양무렵에 아동단학교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뜻밖에도 왕우구에 있던 그의 가족들이 적에게 희생되였다는 비통한 소식을 듣게 되였다. 금순이가 입을 봉하고 묵묵히 가창대대렬을 따라다닌것이라든가 리민학이 그를 대신하여 직접 선창을 떼지 않으면 안되였던 까닭이 비로소 리해되였다.


금순이는 그날 내 무릎에 엎드려 기절할 지경으로 오래도록 울었다.

《난 어떻게 하면 좋아요? 아버지도 죽고 어머니도 죽고 동생도 죽었다는데 나혼자 살아서는 무엇하나요?》

그는 이런 사설질을 하면서 비에 젖은 참새처럼 온몸을 오돌오돌 떨었다.

그날 그를 달래느라고 정말 진땀을 뽑았다. 나는 황혼이 스며들 때까지 아동단학교에 남아 금순이를 위로하였다.

《금순아,마음을 굳게 먹어라. 네가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원쑤들은 너까지도 이 세상에서 없애치우려 할것이다. 왜놈들은 지금 이 간도땅에서 조선사람들을 멸족시키려 하고있다. 그러나 우리 조선민족이 그렇게 쉽사리 놈들에게 생명을 내줄수 있느냐. 너는 어떻게 하나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서 원쑤를 천백배로 갚아야 한다.》

금순이는 그때에야 비로소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씻으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는것이였다.

《말씀대로 원쑤를 꼭 갚겠습니다!》


그후부터 그는 웃음이 적고 말수더구가 적은 소녀로 변하였다. 그가 이전처럼 소리를 내여 웃거나 목청을 높여 입씨름질에 열을 올리는 날은 거의 없었다. 그는 선창을 뗄 때에도 종전과 같이 참새처럼 짹짹거리지 않았다. 소왕청에서는 《마촌콩새》라는 애교있는 별명이 자취를 감추었다. 어린 소녀의 복수심은 아동단생활과 유희대공작에서 배가의 열성으로 나타났다.


금순이를 핵심으로 하는 아동단유희대는 석현,도문의 회막동과 같은 적통치구역에 나가서도 맹활약을 하였다.

왕청아동유희대의 명성은 동만의 판도를 벗어나 머나먼 북만에까지 확대되였다.


그 당시 동만과 북만의 공산주의자들은 로야령을 사이에 두고 교류를 밀접히 하고있었다. 로야령산줄기에 구축된 천험의 장벽도 두 지방 혁명가들이 서로 부단히 왕래하고 접촉하며 지원하는것을 방해하지 못하였다.


간도를 항일대전의 성새로 만들어놓은 유격근거지들은 만사람이 동경하는 리상향의 모델로 되였으며 거기에 세워진 새 제도,새 질서는 린방인민들의 찬탄과 부러움을 자아내는 꿈으로 되고 숙망으로 되였다. 동녕현성전투는 특히 만주지방인민들과 무장부대들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상을 개선한 전환적인 계기로 되였다. 이 전투가 있은후부터 구국군들은 나를 《김사령》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인민들이 나를 《김장군》,《김대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였다. 유격구에서 우리가 내놓은 모든 로선과 민주주의적시책은 만민의 축복을 받는 시대적인 관심사가 되였다.


북만의 당조직들과 군부에서는 동만지방 인민들이 이룩하고있는 유격구건설경험을 섭취할 목적으로 왕청과 그 주변의 근거지들에 여러차례에 걸쳐 참관단을 파견하였다.

그무렵의 왕청중심지는 소왕청이 아니라 요영구였다. 금순이네 아동유희대도 마촌을 떠났다. 적의 대《토벌》이 있은후 유격구의 모든 기관들은 일제히 요영구로 이동하였다. 나도 1934년 봄에 일부 부대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1934년 여름 지방조직원들과 유격대원들로 무어진 녕안현 참관단이 임영주라는 녀공청서기의 인솔하에 팔도하자에서 신선동을 거쳐 뒤틀라즈로 찾아왔다.

그때 요영구의 인민들과 유격대원들은 참관단을 열렬히 환영하였다.아동단원들은 3각으로 된 붉은기를 흔들면서 《북만견학대를 환영합니다!》라는 구호를 연방 웨쳤다. 저녁에는 병실마당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참관단을 위한 연예공연을 하였다.


아동유희대는 북만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다채로운 종목들을 보여주었다. 이 유희대에는 뛰여난 예술적재능을 소유하고있는 아동단원들이 많았다.

리민학은 단스도 잘하고 하모니카도 잘 불었다. 그가 희극적인 역을 맡아가지고 연극에 출연할 때면 관중들이 모두 배를 그러쥐고 웃었다.김재범도 단스명수였다. 그는 춤으로써 오리걸음과 토끼걸음까지 흉내내는 특기를 가지고있었다.


이 아이들이 왕청현내의 혁명조직구들을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연예공연도 하고 노래보급도 하였다.

우리는 아동유희대를 위해 전투에서 로획한 물자들중에서 가장 좋은 비단으로 무용복도 해입히고 연극의상도 해결해주었다.


주보중이 직접 파견한 반일동맹군의 소부대도 얼마동안 요영구에 와있으면서 왕청유격대의 경험을 배웠다. 그것은 순수한 유람식참관이 아니라 훈련과 실천을 따라세우는 일종의 실습과 같은것이였다. 요영구에 체류하는 전기간 그들은 하루생활도 우리 부대가 제정한 일과표대로 하였고 군사훈련,정치학습,문화생활도 모두 왕청부대식으로 하였다.


우리는 공청조직과 아동단에 과업을 주어 정상적으로 반일동맹군 대원들에 대한 위문사업을 하였다. 아동유희대들이 반일동맹군 대원들에게 중국말로 된 혁명가요들을 련습해가지고 가서 배워주면 반일동맹군 대원들이 아동유희대원들에게 재미나는 중국노래를 배워주었다. 어떤 날에는 아동유희대원들이 중국말로 된 연극까지 준비해가지고 그들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아동유희대의 위문활동에 감동된 북만의 손님들은 맛있는 음식을 해먹을 때마다 그들을 병실로 초청하였다.

이 사람들이 북만에 돌아가서 아동유희대에 대한 소문을 크게 퍼뜨려 놓았다.


1934년 여름에 주보중은 왕청지방의 아동유희대를 북만으로 초청하였다. 우리는 그 초청을 쾌히 수락하였다. 나는 박길송에게 원정공연준비를 잘해서 북만의 군대와 인민을 기쁘게 해주자고 말하였다. 그리고 유희대가 북만에 가서 활동할수 있도록 일정도 구체적으로 짜주었다.

우리가 유희대를 북만에 파견한것은 중국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그들과의 련대성을 한층 공고히 하려는데 있었다.


주보중이 아동유희대를 초청한 목적은 그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밑에 있던 반일부대 지휘관들과 병사들을 교양하자는데 있었다. 그 당시 주보중은 녕안일대에 조직된 수녕반일동맹군의 판사처주임으로 활동하면서 왕덕림의 구국군에서 떨어져나온 항일대오를 결속하기 위해 간고분투하고있었다.


나는 아동유희대를 북만으로 파견한후에도 한동안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싸움에도 인이 박히고 온갖 고초와 주림에도 단련된 아이들이지만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닿겠는가 하는 우려가 잠시도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그렇지만 금순이와 같은 어린이가 험준한 로야령산줄기를 어떻게 타고 넘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공연한 걱정이였다.

아동유희대원들은 모두 동란속에서 단련된 어린 매들이였고 죽음의 고비를 여러번 이겨낸 불굴의 투사들이였다.

그들은 내가 그토록 커다란 불가항력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로야령산줄기도 어렵지 않게 돌파하였고 토비들의 활동구역도 무난히 통과하였다. 비가 내리면 머리우에 우산대신 솔가지와 봇나무껍질을 쓰고 행군하였다.밤에는 자기네끼리 야전밥통에 밥을 지어 대충 끼니를 굼때고 모닥불옆에서 보초를 서가며 로숙하였다. 몇몇 아이들은 배탈을 만나 산중에서 막심한 고생을 하였다. 더구나 유희대가 잡은 로정은 달구지나 발구가 다니게 되여있는 왕청-로야령의 큰길이 아니라 유격대통신원이나 다니는 실오리같이 가늘고 험한 지름길이였다. 그러나 수백리의 로정에서 락오자는 단 한명도 생기지 않았다.


유희대 막내동이인 금순이조차도 배낭을 메주겠다는 아이들의 제의를 가볍게 밀어버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 힘으로 로야령을 넘었다고 한다.

금순이와 함께 북만까지 갔다온 김옥순은 후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에게 구국군부대에서의 공연활동에 대하여 재미나게 이야기해주군하였다.


아동유희대가 북만땅에서 첫 공연의 막을 올린것은 마창에 주둔하고있던 채세영부대에서였다. 채세영은 구국군지휘관들가운데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있던 사람이였다. 우리가 교양만 더 잘하면 그들을 동맹자로 만드는것은 말할것도 없고 공산주의자로까지 개조할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마창에서의 첫 공연은 금순이의 연설로부터 시작되였다.

150명에 달하는 구국군 장병들이 채세영과 함께 공연을 보았는데 반영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금순이가 연설을 끝마치자 그들은 《밤알만한 처녀애가 어쩌면 저렇게도 말을 잘할가! 저애를 봐서라도 우리가 항일을 잘해야겠다.》고 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채사령은 감격한 나머지 자기 방에 금순이를 데려다가 무릎우에 앉히고 그에게 귀걸이와 손목걸이까지 걸어주었으며 순회공연을 잘할수 있도록 유희대에 두대의 마차까지 내주었다. 한주일로 예정되였던 공연은 반일부대장병들의 요청으로 자꾸만 연장되였다. 유희대는 주보중의 부대에 가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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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유희대는 주보중의 부대에 가서도 공연을 하였다.

채세영은 그들에게 솜저고리,다부산자,목도리,돼지,닭,당면,밀가루를 비롯하여 두달구지나 되는 선물을 보내주었다. 매 아이들에게 가방을 하나씩 메워주고 총까지 선물하였다.
유희대가 원정공연을 끝마치고 요영구로 돌아올무렵에 나는 부대를 데리고 다른 지방에 가있었다.
내가 유격구로 돌아오기 바쁘게 아이들은 나를 둘러싸고 북만에서 가지고 온 선물을 자랑하였다.
《이건 다 채사령이란분이 준거예요. 레닌처럼 수염을 기른분인데 마음씨가 정말 좋아요. 나는 그 사람의 방에 가서 돼지발쪽이란것도 먹어봤어요. 주보중선생님도 선물을 많이 줬어요.》

금순이는 이렇게 채사령과 주보중 칭찬을 한바탕 하고나서 칠성자 한자루를 내 옆구리에 채워주었다.
《장군님,이 총은 장군님이 꼭 차야 해요. 우리가 결정했어요.》
그는 결정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말을 끝내기 바쁘게 제풀에 캐드득거리며 웃어버리였다.

나는 아이들이 섭섭해하지 않게 그 칠성자를 며칠동안 차고다니다가 청년의용군 대장에게 슬그머니 넘겨주었다. 나머지 무기들도 모두 청년의용군에 인계해주었다. 북만에서 가지고 온 그밖의 선물들은 고스란히 아동유희대가 처분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 요영구유격구에는 금순이의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기적같은 풍문이 떠돌았다.
그 소식을 들은 금순이가 머리카락짬에 들국화송이들을 여라문개 꽂고 요영구골안이 좁다하게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닐 때 금순이네 가정내막을 잘 알고있는 근거지의 군중들은 한사람같이 흐뭇한 심정에 휩싸여 그를 바라보았다.

아동단조직에서는 어머니를 만나고싶어하는 금순이의 간절한 소망을 풀어주기로 하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도리에 밝고 집단주의정신이 강한 금순이는 처음에 조직의 이 배려를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부모를 만나보고싶어하는 아이들이 한둘도 아닌데 자기 혼자만 그런 특전을 받을수 있겠는가고 하는것이였다.

내가 금순이를 마지막으로 본것은 우리 부대가 전각루에서 북만원정준비를 다그치던 1934년 가을이였다. 그때 금순이네 아동유희대는 그 고장에 와서 연예공연을 하였다. 원정대원들을 전송하기 위한 특별공연이였다고 생각된다. 공연이 끝난 다음 우리는 노루를 잡아서 아동유희대원들에게 교즈를 만들어 먹이였다.

내가 유희대원들이 식사하고있는 집을 돌아보고 나올 때 금순이가 갑자기 먹던 음식그릇을 밀어놓고 내곁에 바삐 다가와 무슨 큰 비밀이라도 뚱겨주듯이 귀속말로 소곤소곤 속살거리는것이였다.
《장군님,우리 엄마가 살아계신대요!》
《오냐,유격대아저씨들이 그 소식을 듣고 다들 기뻐한다. 나도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난 오늘 너무 기뻐서 독창을 세번이나 했어요. 그런데두 또 부르구 싶었지요뭐.》
《그럼 자꾸 부르려무나.》

나는 전각루마을아이들에게 주려고 마련해가지고 온 몇가지 전리품가운데서 참빗과 얼레빗을 각각 1개씩 꺼내여 금순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장군님,고맙습니다!》
금순이는 어리광이라도 부리듯이 내 팔에 마구 휘감기였다. 나이는 어리나 응석기라고는 조금도 없던 이 귀여운 소녀의 몸가짐과 언행에서 새의 퍼덕거림과도 같은 환희의 선풍을 느끼게 되는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였다.
《그럼 인차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겠구나. 네가 떠날 때 나는 너를 바래줄것 같지 못하다. 북만에 가야 하니까.》
이것이 내가 금순이에게 할수 있었던 마지막말이였다.

금순이가 전각루에서 유희대활동을 마치고 아동단학교로 돌아간것은 요영구혁명조직에서 적구에 보내는 극비문건을 전달할 련락원을 물색하고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을 보내는것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이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조직에서는 심중한 론의를 거듭하였다. 그 적임자로 결국 금순이가 선발되였다.

나어린 금순이는 혁명조직이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는 중요한 련락임무를 줄 때 그것을 자기자신에 대한 최대의 믿음으로 고맙게 받아들이였다.
금순이가 적구로 내려가는 날 한성희는 그를 물가에 데리고나가 마치 시집가는 새색시의 차림새라도 보아주듯이 세수도 시켜주고 머리도 빗어주고 신들메도 매여주고 치마의 주름살도 펴주었다. 큰 머루알만한 도토리알 세개를 핀으로 꿰여 리봉대신 머리에 꽂아주기도 하였다.

그날 아동단원들은 동구밖까지 따라나가 금순이를 바래주었다.
어데까지 가니
연길까지 간다
어느령을 넘니
길철령을 넘지
무엇하러 가니
통신련락 가지
누구하고 가니
나혼자서 가지
금순이는 이런 노래를 흥얼거리며 숲속길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그 가사는 그가 걸음을 옮기면서 즉흥적으로 지어낸것이였다.

동무들은 그 노래를 듣자 손벽을 치며 웃어댔다. 그리고는 목청을 합쳐 요영구골안이 떠나가게 그 노래를 되받아불렀다.
금순이는 조직이 준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한 다음 어머니가 계신다는곳으로 발길을 돌리다가 어른들과 함께 일본헌병대놈들에게 체포되였다.
놈들은 금순이가 유격구에서 왔다는것을 알고 은근히 쾌재를 올리였다.중요한 정보자료들을 게워놓을수 있는 《새끼공산당》이 굴러들었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아마 그들은 금순이가 요영구에서 왔다는 사실까지도 다 알아냈던것 같았다. 요영구는 동만지도부가 자리잡은곳이니 잘만 구슬리면 큼직큼직한 비밀들을 얼마든지 뽑아낼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한 모양이였다.

실지로 금순이가 유격구의 비밀을 많이 알고있은것만은 사실이였다.혁명군의 활동,간부들의 움직임,유격구와 반유격구를 련결하는 비밀통로,근거지주민들의 생활형편과 동향 등은 그가 다 알고있는것이였다. 금순이가 유희대에 망라되여 적구에 가서도 공연활동을 많이 한것만큼 그를 굴복시키기만 하면 지방조직들의 비밀까지도 알아낼수 있었다.

적들은 이런 가능성을 저울질해보고 그에게서 귀맛이 당기는 정보자료들을 있는 힘껏 비틀어짜내려고 하였다. 처음에는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놓고 달콤한 말로 그를 달래였다. 다음에는 위협도 하고 고문도 하였다.
나는 전에 외국소설에서 어떤 섬마을의 어린애가 은시계에 유혹당하여 새초더미속에 숨어있는 사람의 행처를 대주었다가 자기 아버지에게 처형당하는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다. 그 소설을 보아도 알겠지만 사실 어린 아이들을 구슬리는것은 간단한 일이다. 아이들은 물질에 유혹당할수도 있고 위협이나 고문앞에 굽어들수도 있다.

그러나 조직생활을 통해 정치적으로 단련된 아이들은 지조를 굽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의 아동단원들가운데는 자기의 정치적신념을 한푼의 돈과 바꾼 아이들이 한명도 없었다. 해방후 우리 당의 품속에서 자라난 서강렴,리헌수,림형삼도 13∼15살안팎의 어린 소년들이였지만 적의 총구앞에서 조직의 비밀을 불지 않았다.

금순이는 항일혁명의 풍랑속에서 강철로 단련된 불굴의 어린 투사였다.이 나라의 어린 딸은 살점이 떨어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연것은 오직 교형리들을 욕하고 저주할 때뿐이였다.
《만약 네가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를 죽일것이다!》
금순이를 취조하던 헌병장교의 말이였다.
《더럽다! 너같은 강도놈들과는 말하지 않겠다.》
이것이 금순이의 대답이였다.

악착한 교형리들은 혁명군의 비밀을 불지 않는다는 단 한가지 리유로 어린 금순이를 죽이려 하였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여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유격구주민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다 이를 갈며 치를 떨었다. 백초구들판에는 눈물의 바다가 고이였다. 그러나 금순이는 오히려 자기를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어머니,오빠,언니들을 향해 이렇게 웨치였다.
《아버지,어머니들,왜 우십니까. 울지들 마세요. 혁명군아저씨들이 꼭 원쑤를 쳐없앱니다.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굳세게 싸워주십시오!》

불을 토하는것 같은 이 최후의 절규에는 9살밖에 되지 않는 그의 생애가 짤막하게 함축되여있었다. 사형장에서는 《일제놈들을 타도하라!》,《조선혁명만세!》를 부르짖는 금순이의 애된 목소리가 맵짜게 울리였다.

나는 금순이가 학살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동안 아동단학교에 찾아가지 않았다. 어쩐지 그 학교에 가기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금순이가 없는 아동단학교,금순이가 없는 아동유희대를 생각하면 마음이 한정없이 서글퍼지였다. 적들은 내곁에서 왕청사람들이 그렇게도 총애하던 유희대의 나비,유격구의 종달새를 영원히 앗아간것이다.

이제는 그 누가 금순이처럼 고생속에 혈전분투하는 유격구사람들을 위해 그렇게도 랑랑하게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도 발랄하고 경쾌하고 맵시있는 률동으로 춤을 추겠는가. 그 누가 금순이처럼 거침없는 중국말노래로 구국군장병들의 애간장을 녹이며 아침마다 백마를 타고 산책의 길을 더듬는 나를 향해 금순이처럼 령롱하고 생기있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 겠는가.

금순이의 최후에 대한 비통한 소식은 왕청일대의 혁명군중을 분기시키였다. 요영구골안에서는 금순이의 추도식이 엄숙히 거행되였다. 동만 각 현에서 격노한 수십명의 남녀청년들이 금순이의 복수를 다짐하며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다.

국제당계렬의 잡지와 중국과 일본의 출판물들은 세계 피압박민족들의 해방투쟁력사에서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이 어린 영웅에 대하여 앞을 다투어 보도하였으며 《어린렬녀의 략전》이라는 제목으로 금순이의 영웅적생애를 격찬하였다. 한뽐도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발로 사품치는 강하와 메부리들을 쉴새없이 넘고 건느며 혁명의 노래를 열정적으로 부르던 유격구의 종달새 금순이는 이처럼 9살나이에 세계를 격동시킨 인물이 되였다.

우리 나라 현대력사에는 류관순이라고 부르는 이름난 순국처녀가 있다.류관순이라고 하면 먼저 기미년 3.1운동을 회상하게 된다. 서울 리화학당에서 교비생으로 학업에 전심하던 처녀는 3.1운동의 열파로 학교가 페쇄되자 고향 충청남도 천안에 내려가 독립만세시위를 조직하고 그 시위를 진두지휘하다가 일본헌병들에게 체포되였다.

법관들은 그에게 7년형이라는 중형을 언도하였다. 3.1인민봉기를 최초에 선도한 33인에게 가한 형기가 최고 3년에서 최하 1년이라는것과 그 33인중에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는것을 념두에 두면 일본법정이 16살밖에 안된 처녀를 얼마나 무서운 중범으로 취급하였는가 하는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수 있다. 7년이면 3.1독립운동사상 최고의 형량이라고 시골농부들까지도 혀를 내두르며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류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후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줄곧 그를 《조선의 쟝느다르크》라고 부르며 뜨거운 애정을 담아 추억하고있다.

그러나 금순이한테는 아직 그런 칭호가 붙어있지 않다. 그와 대등한 나이의 영웅소녀도 없거니와 그의 투쟁업적에 견줄만한 위훈을 세운 처녀애들이 별로 없기때문이다.

3.1의 영웅 류관순과 함께 김금순과 같은 소년영웅을 가지고있는것은 의심할바없이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있는 자랑이고 영광이다. 최근에 금순이를 형상한 소설도 나오고 영화도 나왔지만 그것만으로는 후대들에게 그의 위훈을 충분히 소개할수 없다. 금순이와 같은 소년영웅들의 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서는 금상이나 동상을 세워주어도 아까울것이 없다.

김금순은 9살을 살고 영생을 얻은 소녀였다. 9살이면 꽁다리연필처럼 짤막한 생애이다. 그러나 번개의 섬광과도 같이 번뜩거리다가 사라진 이 어린나이에 그는 인생이 도달할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높이에 도달하였으며 사람이 사람으로 태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산 모범으로 똑똑히 가르쳐주었다. 세상에는 100살을 살 때까지 민족앞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가버린 사람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는 9살에 후대들의 추억속에 영생할 위훈의 창조자가 되였다.

김금순과 같은 어린이를 세계적인 소년영웅으로 키워낸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공로라고 말할수 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항일의 불바다속에서 수많은 소년영웅들을 육성하였다.
김금순,전기옥,목운식,강룡남,박명숙,박호철,허정숙,리광춘,김득봉…
그들은 모두가 항일혁명의 폭풍속에서 배출된 나어린 렬사들이다.
《나를 총으로 쏘지 말고 날창으로 죽여달라. 그리고 총알은 유격대에 보내달라.》
이것은 통신련락임무를 수행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사형장으로 끌려간 훈춘의 아동단원 전기옥소년이 최후의 순간 위만경찰들에게 한 유명한 말이다.

처형직전의 그 무시무시한 긴장과 죽음의 공포속에서도 자기 개인의 목숨이나 육체를 걱정하기에 앞서 유격대를 생각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생각한 그 숭고한 혁명정신은 교형리들까지도 감동시키였다.

목운식소년의 위훈도 세계만방에 자랑할만한것이였다. 짚신속에 비밀통신쪽지를 감춰가지고 영창동에서 평강으로 가던 그는 길청령경비막앞에서 적들의 문초를 받게 되였다. 온몸을 샅샅이 뒤지면서 비밀을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여 날뛰던 적들은 소년의 왼쪽발에서 짚신을 느닷없이 벗기였다. 그 순간 목운식은 일각의 여유도 없이 문초하던 자위단원을 밀치고 경비막안으로 뛰여들어가 부엌아궁이에 바른편 발을 다짜고짜 밀어넣었다. 바른쪽짚신에 비밀쪽지가 들어있었던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적들은 아궁이에서 소년을 끌어내려고 그의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나 목운식은 온몸에 내려지는 뭇매를 당하면서도 부엌돌을 힘껏 그러안고 불속에서 발을 뽑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짚신도 타고 발도 타고 솜바지가랭이도 다 타버리였다.

적들은 목운식을 병원으로 떠메고 갔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의 가슴에 주사침을 놓고 그가 깨여나기를 기다리였다. 비밀을 뽑아내려는 적들의 심사는 실로 검질긴것이였다. 그러나 목운식은 그 비밀을 굳건히 간직한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항일무장투쟁을 일선에서 후원한 아동단원들과 소년선봉대원들은 모두가 우리 혁명의 1세들중에서 가장 어린 세대를 대표하는 영웅들이였다.
지금도 우리 혁명은 사로청과 함께 소년단을 로동당의 믿음직한 저수지로 보고있다. 우리가 온 나라의 보화를 다 모아 아이들의 궁전을 건설하고 후대교육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리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일군들에게 후대들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나라의 《왕》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미래를 사랑하지 않는 혁명,미래를 가꾸지도 돌보지도 않는 혁명은 전망성이 없는 혁명이다.그런 혁명이 그 어떤 금빛찬연한 리상을 달성하리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짓이다.

지구의 한쪽에서는 지금 향락주의가 전염병처럼 만연되고있다. 후대들이야 어찌되든지간에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극단적인 개인리기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침식해들어가고있다. 어떤 사람들은 후대가 생기면 거치장스럽다고 하면서 아이를 낳지 않고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마저 포기하고있다. 사람이 결혼을 안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것은 물론 각자의 자유이다. 하지만 후대들이 없이야 무슨 락이 있겠는가.

극단적인 개인리기와 향락에 중독된 수정주의자들은 후대들을 돌보지 않고있으며 그들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시켜 온갖 사회악앞에 사정없이 내던지고있다.
10대의 어린이들이 자기 부모들을 원망하고 집권자들을 원망하고 이 세상을 원망하며 혼란된 현실에 눈물을 짓는다면 그 나라의 혁명은 의심할바없이 미래가 없는 혁명이며 전도가 암담한 혁명이다.

일군들이 후대들을 위해 시간과 돈과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을 때 우리 혁명은 더많은 김금순과 전기옥과 목운식을 낳게 될것이다.
금순이의 일가는 이름난 혁명가의 가정으로 항일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참혹한 수난을 당하였다. 아버지는 왕우구에서 지하혁명조직책임자로 활동하다가 《민생단》으로 몰려 피살되였고 어머니는 손에 총을 잡고 근거지를 지키다가 싸움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금순이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나는 그에게 내적으로 어려운 과업을 많이 주었다.
금순이의 아버지는 한번 과업을 받으면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해제끼고야마는 강의한 성품을 지니고있었다.
금순이까지 셈하면 그의 일가에서 다섯명이 희생된것으로 된다. 류관순의 가정이 겪은 운명과 어쩌면 그렇게도 비슷한지.

하지만 그처럼 가혹하고 무자비한 운명의 신도 이 훌륭한 가정의 피줄기를 이어주기 위해서 후대를 한명 남겨주었다. 금순의 어머니가 전투장에서 마을사람들에게 부탁하고 간 금순이의 두살난 동생 김량남이 기적적으로 세상에 살아남아있었던것이다.

그가 김금순의 동생이라는것을 맨 처음으로 포착하고 나에게 그의 경력을 보고한것은 김정일동지였다.
그 당시 김량남은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기록영화촬영소에서 음악편성원으로 일하고있었다. 공개된 어느 출판물에서 아버지가 《민생단》으로 처형되였다는 구절을 읽은 그는 자신에게 가해질 사회적비난을 두려워하며 기를 펴지 못하고 고민하였다.

나는 김량남의 아버지가 《민생단》이 아니고 견실한 혁명가라는것을 보증해주었다.
그때부터 김량남은 문학예술부문 사업을 지도하는 당중앙위원회 일군이 되여 김정일동지의 사업을 정력적으로 보좌하였다. 그는 자기 누이 김금순이처럼 타고난 음악적재능과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소유하고있었다.솟구쳐오르는 망국민의 설음을 풀피리에 담아 처량하게 울리던 어제날의 목동은 낮과 밤의 구별을 모르고 혁명적인 음악예술의 원전을 복구하는 가극창조사업에 심혈을 깡그리 바치였다.

김량남은 김정일동지의 직접적인 지도밑에서 만수대예술단을 창립하고 그것을 세계적인 1류급의 예술단체로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공로자의 한사람이다. 1971년 2월 만수대예술단은 조국으로부터 수천키로메터 떨어진 지구의 서반구 꾸바땅에서 력사적인 첫 원정공연의 막을 올리였다. 그때 김량남은 정치부단장으로 예술단을 인솔하였다.

김정일동지는 김금순의 일가가 남긴 단 한명밖에 없는 후손으로 2살때부터 남의 집 젖을 먹고 자라나 머슴군으로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을 보낸 김량남의 과거를 늘 가슴아프게 여기면서 그를 친혈육처럼 각별히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김량남이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에는 수십명의 전문가들로 강력한 의료진을 뭇고 낮에 밤을 이어 집중적인 치료전을 벌리게 하였으며 각 국에 주재하고있는 우리 나라 대사관들에 그의 병력서를 보내여 효능높은 고가약들을 대량적으로 구입해들이게 하였고 제약공업이 발전했다는 여러 나라들에 특별비행기도 무시로 띄워보냈다.

김량남은 이런 은정속에서 무려 10여차례에 달하는 수술을 받으면서 거의 2년동안이나 생명을 연장하였다.
김량남이 40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누이에 비해서는 네곱이상의 세월을 산것으로 된다. 하지만 장수자들이 많은 우리 시대의 척도로 보면 너무도 일찌기 끝장을 본 단명의 생애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가인박명》이라는 고래의 생활철학이 인생리치에 부합되는 실질적인 진리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수많은 김금순,김량남이들을 위해 그 철학을 추방해야 할것이다. 얼마전에 김량남의 둘째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모교인 평양음악무용대학 작곡학부를 졸업하고 만수대예술단에서 예술창조의 첫 걸음을 떼였다. 할아버지,할머니가 불렀고 고모가 불렀으며 아버지가 부르던 혁명의 노래를 지금은 그가 부르고있다.

선렬들이 피로써 개척한 우리 혁명은 이처럼 대를 이어가며 훌륭하게 계승되고 완성되여가고있다.
금순이는 죽었지만 그의 기개와 넋은 오늘도 후대들의 심장속에 마촌과 요영구 골안을 뛰여다니던 천진란만한 그 시절처럼 생동하게 살아 고동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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