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7-2. 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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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7-2. 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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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796회 작성일 15-04-2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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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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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촌에 와서도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요영구의 승전소식이 간도전역으로 빠르게 퍼져가던 때여서 우리에 대한 소왕청인민들의 환영열도 대단히 높았다.

적의 통치에서 완전히 해방된 유격구의 생활은 우리 일행을 몹시 흐뭇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신천지를 지배하는 모든것이 다 우리를 감동시킨것은 아니였다. 간도혁명을 움직이는 일부 지도자들의 일본새와 사고방식가운데는 우리의 불만을 자아내는 점도 없지 않았다.


우리를 제일 놀라게 한것은 동만지방 혁명가들의 활동에서 열병처럼 만연되고있던 좌경바람이였다.

좌경병은 유격근거지를 건설하는 사업에서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명월구, 소사하 회의들에서 유격근거지창설문제를 론의할 때 우리는 이미 그 형태를 완전유격구, 반유격구, 활동거점의 세가지로 규정하고 형태설정에서 균형을 잘 보장할데 대하여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동만지방의 일부 열성공산주의자들은 해방지구형태의 완전유격구를 건설하는데만 몰두하고 반유격구나 활동거점을 창설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낯을 적게 돌리고있었다. 초기에는 왕청에서도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만 건설하였다. 소왕청유격구역만 보더라도 오늘의 우리 나라 한개군 면적과 맞먹는 땅덩어리가 모두 혁명세력이 관할하는 해방지구형태의 쏘베트구역으로 되여있었다. 그 당시에는 완전유격구를 쏘베트구역이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넓은 땅에다 공농정권을 상징하는 쏘베트기발을 띄워놓고 간부들은 《혁명!》, 《혁명!》하면서 무사분주하게 돌아갔다. 유격구역밖에 나가서 싸움은 별로 하지 않고 프로레타리아독재니, 무산자사회건설이니 하는 허공중에 뜬 구호만 연방 웨치면서 얼렁얼렁 하루하루를 보냈다. 기념일이 오면 병실마당이나 운동장 같은데 모여 로씨야식 단스도 하고 메데가도 불렀다. 어떤 날은 동만특위와 현의 간부들이 한데 모여서 목청을 돋구어가며 론쟁도 하였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사실 우리도 그해 봄을 덩덩해서 보냈다. 그러나 점차 유격구사업에서 발로되고있던 일련의 좌익소아병적인 편향도 포착하게 되였고 그것을 퇴치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도와 전술도 모색하게 되였다.

유격구역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창기에는 왕청근거지에만도 수천명의 피난민과 망명자들이 와있었다. 훈춘, 연길, 화룡의 실태도 마찬가지였다.


부침땅이 적은 산골안에 수천명이 모여들어 와글와글하니 먹을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전부가 콩죽을 먹었다. 망에 콩을 갈아서는 쌀을 좀넣고 죽을 쑤어 먹군하였는데 그것도 있을 때는 더러 타발도 하였지만 없을 때는 양재물에 끓인 송피를 두드려서 송기떡을 만들어 끼니를 에우든가 고사리, 닥지싹, 도라지, 더덕, 둥굴레뿌리 같은것을 삶아서 먹었다.


그렇게 하고서는 혁명가를 부르고 주먹을 흔들면서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친일파를 타도하고 놀고먹는 기생충의 무리들을 타도하라고 연설하는것이 초시기의 근거지생활이였다.

물론 소소한 전투도 여러번 하였다. 경찰서를 습격하고 후방물자를 실은 마차수송대도 들이치고 유격구역에 침습해오는 《토벌대》를 제끼고 무기를 빼앗아내기도 하였다. 승리하고 돌아오면 인민들은 기발을 들고 만세도 불렀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는 많이 하지 못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보초를 서든가 피난민들을 보호하는것으로 매일매일을 보냈다. 땅덩이는 컸으나 총도 적고 무장인원도 적다나니 유격대원들은 총을 몇자루씩 나눠가지고 근거지를 보위하는데 몰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가 무장대오를 늘이려고 하면 무슨 서기요, 위원이요 하는 사람들이 겁에 질린 소리로 혁명군은 통일전선군대가 아니니 로동자, 농민의 정수분자들만 흡수하여야지 아무 사람이나 망탕 받아들이게 되면 오합지졸의 무리가 된다고 하면서 한사코 막아나섰다. 그 당시는 항일유격대가 쏘베트구역안에 있는 무장력이라는데로부터 그 명칭도 공농유격대라고 하였다.

공농유격대란 로동자, 농민의 군대라는 뜻이다.


몇개 중대밖에 안되는 유격대력량으로 몇천평방키로메터에 달하는 커다란 땅덩어리를 사수한다는것은 참으로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방어밀도가 설피니 일단 《토벌》만 시작되면 적이 우리의 방어진을 뚫고 종심깊이에까지 쳐들어왔다. 그러면 수천명 인민이 보짐을 이고지고 피난을 가느라고 야단법석을 하였다. 이런 피난소동이 매일과 같이 유격구사람들을 들볶았다.


좌경병에 걸린 사람들은 마치 해방지구령토의 크기가 혁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표징이라도 되는것처럼 적아의 력량관계에 대한 과학적인 타산도 없이 주관적인 욕망만을 앞세우면서 터를 넓게 잡고 유격구역을 고수하는데만 전념하였다. 그들은 지어 유격구역과 적통치구역을 《적색구역》, 《백색구역》이라는 간판밑에 인위적으로 갈라놓고 《반동군중》, 《량면파군중》이라는 딱지를 붙여가면서 적구인민들과 중간지대 인민들을 함부로 의심하거나 배척하였다. 국내인민들도 역시 《반동군중》의 대접을 면치 못하였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거리였다.


《적색구역》에서는 녀성들이 단발머리를 함으로써 《백색구역》과의 차이를 표시하였다. 말도 글도 노래도 학교도 교육도 출판물도 적백이 서로 달랐다. 《백색구역》에서 《적색구역》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무조건 단속을 했고 취조를 한 다음에도 집으로 잘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백색구역》에서 오는 사람은 덮어놓고 적의 간첩으로 치부하라는 상급의 지령이 아동단조직에까지 떨어졌다. 왕청현당의 일부 사람들은 소왕청골안에 있다가 도시로 내려간 사람들에 대하여 늘 악의를 품고있었다.


한번은 동일촌에서 망원보초를 서던 적위대원들이 소를 사려고 유격구에 온 대두천의 농민을 붙잡아다가 심문한 일이 있었다. 《백색구역》에서 수상한 농민 한명이 나타나 적위대의 심문을 받고있다는 통보를 받은 현당의 좌경분자는 그 농민이 스파이일수도 있으니 바른대로 대지 않으면 주리를 틀어서라도 정체를 실토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주리를 틀어도 농민은 스파이가 아니라고만 대답하였다. 그 농민은 사실 스파이도 아니고 주구도 아니였다. 그러나 좌경분자들은 농민이 가지고 온 현금을 압수하고 불문곡직으로 악행을 가하였다.


왕청에서 다년간 공청사업을 해온 최봉송은 언제인가 좌경으로 인하여 빚어진 유격구시절의 비사들을 회고하는 좌석에서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좌경이라는 말만 들으면 초기유격구시절이 자주 눈앞에 서물서물합니다. 간도에서의 좌경이 정말 지독했습니다. 한번은 유격대원들이 왕청령에서 일본군의 소금달구지를 로획해가지고 소왕청으로 끌고온적이 있습니다. 근거지가 생긴 초창기이니 아마 수령님께서 남만진출을 하실 때일것입니다. 달구지군은 삯일을 하여 그날그날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최하층의 조선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좌경분자들은 〈량면파군중〉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를 죄인처럼 다스렸습니다. 일본놈의 소달구지를 끌었으니 역적이라는거지요. 유격구밖에 있는 사람들이 유격구를 좋게 볼수 없었습니다. 참 기막힌 일이였습니다.》


적아를 구별하지 않고 기본군중까지도 서슴없이 처형하는 이와 같은 무지한 망동은 다른 현의 유격구들에서도 빈번히 발생하였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이 저주받을 행위들이 모두 혁명이란 신성한 간판밑에서 꺼리낌없이 감행되여 항일을 하겠다고 따라나섰던 수많은 혁명군중을 《백색구역》으로 밀어던지는 가슴아픈 결과를 빚어낸다는데 있었다.


유격구의 좌경분자들은 지어 온성땅에서 적의 《토벌》에 희생된 부모의 제사를 지내려고 상경리에 온 리치백로인의 친척까지도 《반동군중》이라고 하면서 붙잡아가는 추태를 부리였다.

이런 행위를 목격할 때마다 나는 온몸과 넋으로 참을수 없는 수치를 느끼였다. 만일 어떤 공산주의자가 반동이라는 감투를 씌워 무고한 백성을 마음내키는대로 처형한다면 그는 벌써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특급범죄자이다.


그런데 우리가 왕청에서 유격구생활을 할 때만 하여도 이런 특급범죄자들은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수 없는 《특급혁명가》로 행세하면서 군중을 아무렇게나 망탕 다스리고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쏘베트만 가지면 만사가 다 해결될것처럼 생각하고있었는데 우리는 거기에 큰 문제가 있다고보았다. 근거지도 고수하고 혁명도 발전시키자면 페쇄적인 경향을 극복하고 활동범위를 넓혀야 한다는것이 우리가 얻어낸 결론이였다. 말하자면 유격구사수에만 매달리는 근시안적인 활동방식으로부터 벗어나 큰 정예부대를 꾸려가지고 자유자재로 기동하면서 적극적인 군사정치활동을 벌리자는것이였다.


군대가 본격적인 군사작전에로 이행하자면 근거지방위에서 안고있는 부담을 줄여야 하였는데 이 부담을 줄이는 하나의 방책이 바로 완전유격구주변의 광활한 지역에 반유격구들을 대대적으로 늘이며 이러한 반유격구들이 유격구를 옹위하도록 하는것이였다. 우리는 반유격구를 창설하는데서 우리 혁명의 새로운 승리를 담보할수 있는 돌파구를 찾았다.


나는 중국관내에서의 유격구건설경험을 참고할 목적으로 동장영과도 여러번 진지한 담화를 하였다.

1931년 가을 중국 강서성 서금에서는 중화쏘베트림시정부수립을 선포하고 쏘베트구역을 창설하였다. 동장영의 말에 의하면 중국혁명의 수뇌부가 집결되여있는 쏘베트중앙구는 그 면적이 대단히 넓고 주민도 수백만을 헤아리며 무력도 몇개 군을 이룰만큼 막강하다는것이였다. 동장영자신도 하남성에서 쏘베트구역을 창설한 경험을 가지고있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홍군은 10여만명에 달하였고 그 관할지역은 강서성 남부로부터 광동성 북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령토와 인구상으로 볼 때 어지간한 한개 독립국가와 맞먹는 중국의 쏘베트구역건설경험을 두만강연안에 그대로 이식할수 없다는것과 간도를 활동기지로 삼고있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혁명의 책원지를 튼튼히 사수하고 유격전쟁을 판이 크게 벌릴수 있는 유일한 첩경은 완전유격구주변과 북부조선일대에 반유격구를 창설하는것이라는 견해를 더욱 굳히게 되였다.


반유격구창설의 필요성은 무장투쟁의 실천속에서 더욱 절박하게 제기되였다. 광대한 령역을 사수하자니 힘이 딸리였고 힘이 딸리니 그 타개책을 빨리 세우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가 만일 유격전을 해보지 않고 고전이나 뒤적거리며 로씨야볼쉐위크들이 어떻게 했소, 중국 서금의 경험이 어떻소 하는 식으로 탁상공론만 하였더라면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외에 또 다른 형태의 유격근거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것을 인식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그 창설을 그토록 절감하고 빨리 다그치지 못했을수도 있었다.


반유격구문제는 근거지에 대한 단순한 형태상의 고찰이 아니였다. 그것은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혁명에서 주체적대를 세우는가 못세우는가 하는 사상적립장문제였으며 좌경에서 벗어나 지난날 《량면파군중》이라고 하면서 배척했던 광범한 인민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보는가 보지 않는가 하는 군중관점문제였고 그들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결속시키는가 못시키는가 하는 혁명력량편성과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반유격구란 우리도 통치하고 적들도 통치하는 지역, 형식상으로는 적의 통치지역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우리의 관할지역으로서 항일유격대에 대한 지원조건도 지어주고 그 후비원천을 비롯한 혁명력량도 키워내며 적구와 유격구사이에서 중간련락소의 역할도 담당하는 그런곳을 말한다. 좀더 형상적으로 표현하면 낮에는 적들이 통치하지만 밤에는 우리가 관할하는 그런 지역을 말한다.


혁명근거지건설에서 반유격구형태는 우리의 투쟁실정에 맞는것이였다. 이런 형태는 다른 나라들의 유격전쟁경험에도 별반 없는것이였다. 당시 우리 혁명의 발전로정은 반유격구창설을 절실한 과제로 내세웠다.


우리는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발전시키며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조선혁명을 급속히 앙양시키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1933년 3월중순 함경북도 온성군 왕재산일대에 진출하였다.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며 조국해방을 이룩하려는것은 항일대전을 선포한 그날부터 우리가 시종일관 견지해온 전략적목표였고 우리의 가슴속에서 단 한순간도 떠나본적이 없는 불변의 신념이였다.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륙읍일대를 비롯한 북부조선지역에 반유격구를 꾸리는것이였다. 반유격구를 잘 꾸려놓으면 유격구건설에서 나타나고있는 이러저러한 좌경적편향도 능히 청산할수 있었다.


우리는 셋째섬에 활동기지를 두고있는 왕청대대 2중대성원 40명과 각 중대들에서 선발된 10명의 지휘관들과 정치일군들로 국내진출대오를 편성하고 박태화소대장과 그밖의 몇몇 대원들로 구성된 선발대를 온성지구에 파견하였다.


그 당시 동만당조직의 책임적인 자리에 앉아있던 일부 사람들은 우리가 국내로 나가는데 대하여 몹시 신경을 쓰면서 그것을 저지시키려고 각방으로 제동을 걸었다. 그들은 중국령내에 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을 위해 싸우는것은 민족주의적인 《조선연장주의》경향이라고 비난하였으며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는 행위이므로 국내진출도 애당초 단념하는것이 좋을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민족적임무에 충실한것이 곧 국제주의적임무에도 충실한것으로 되며 조선의 혁명가가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것은 그 누구도 방해할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는 자기나름의 배짱을 가지고 그들의 주장을 론박하였으며 변함없이 국내진출준비를 하였다.


이런 때에 항일유격대의 국내진출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는 사건이 발생하여 우리의 분노를 격발시키였다. 국내와의 련계를 위하여 온성지방에 나갔던 2중대의 대원이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자마자 김성도라는 사람에게 체포되여 동만특위로 끌려갔다는것이였다.


그 당시 2중대장은 안기호였고 정치지도원은 최춘국이였다. 그들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허둥지둥 마촌에 뛰여와 내앞에서 중대지휘관들도 모르게 유격대원을 함부로 붙잡아간 김성도의 월권행위를 두고 의분을 터뜨리였다.


성미가 첫날색시처럼 얌전하고 마음씨가 비단결같아 남의 흉이라고는 좀처럼 보지 않는 최춘국이 《외눈깔왕가》라는 별명까지 입에 올리며 김성도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함구무언으로 앉아서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였다. 김성도에 대한 파악이 별로 깊지 못하였기때문이였다. 내가 알고있는것이란 그가 공청동만특위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동만당특위로 갓 소환되여온 사람으로서 각 현으로 순시를 다니는중이라는것뿐이였다. 동만당조직에서는 상급조직의 간부들이 하부조직을 돌아다니며 지도사업을 하는것을 순시라고 하였다.


나는 최춘국이 김성도를 이름대신 상스러운 별명으로 부르는것이 마음에 걸리여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춘국동무, 동무는 언제부터 다른 사람들을 이름대신 별명으로 부르는 고약한 버릇을 배웠소? 김성도라는 사람이 우리를 무시하는 탈선행위를 한것만은 사실이지만 동무한테는 그래 그의 인격을 존중해줄만한 아량도 없단말이요?》

최춘국은 비판앞에서 허심한 사람이였다. 그는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담고 송구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언행이 조금이라도 불손했거나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유격구도 인간들이 모여사는곳이니 별명이 없을수 없겠지. 그런데 그 별명은 너무도 야비하구만. 외눈깔이라고 하다니…》


나는 김성도가 2중대의 대원을 체포해간것보다 당장은 왕청사람들이 그를 《외눈깔왕가》라고 부르는 사실에 더 화가 났다.

어째서 김가를 왕가라고 하는가고 물으니 최춘국은 조선사람인 김성도가 중국사람냄새를 너무 내고 간부들앞에서 지나치게 굽실거리는것이 아니꼬와서 간도사람들이 그에게 《왕가》라는 성을 붙여준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동만특위로 가던 길에 현당에 잠간 들렸더니 거기서도 김성도를 이름대신 《외눈깔왕가》라고 부르는것이였다.


현당사무실에서 리용국이 나에게 들려준 말에 의하면 김성도는 1927년에 벌써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화요파 만주총국의 어느 세포위원을 하다가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여 매도 맞고 감옥밥도 먹어본 로당원이라고 하였다. 감옥에서 풀려나온후에는 재빨리 중국당에 전당하여 특위급간부로 승진되였는데 곯아빠진 한쪽눈의 허물을 감추느라고 그러는지 늘 색안경을 끼고 다부산자차림으로 다닌다는것이였다.


리용국은 김성도를 《날아가는 까마귀발에 버선이라도 신길수 있는 수완가이고 변설가》라고 평가하였다.

나는 동만특위사무실에서 3시간쯤 김성도와 담화를 하였다.

정작 마주앉고보니 그의 월권행위를 문책하려던 결심은 뒤전으로 밀려나고 측은한 감정부터 앞섰다. 곯아버린 눈과 몹시 지친듯해보이는 컴컴한 얼굴표정으로부터 환기된 동정심때문이였을지도 모른다. 한쪽눈의 실명이라는 불우한 신체적조건을 무릅쓰고 간도의 험산준령을 넘나들며 혁명을 위해 동분서주하는것은 얼마나 장하고 눈물겨운 일인가.


《순시원동무, 동무는 우리와 토론도 하지 않고 무슨 리유로 공작중에 있는 유격대원을 함부로 체포해갔소?》

나는 음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례절있게 물었다. 김성도는 안경너머로 나를 유심히 보았다. 언감 특위순시원도 몰라보고 당돌하게 문책을 들이대느냐고 사뭇 못마땅해하는듯한 눈치였다.

《그런 질문을 받는다는게 참 이상하구만. 그 대원의 월경이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에 모순되는 민족주의의 표현이라는걸 모를리 없겠는데… 우린 그를 〈민생단〉으로 보고있소.》

《무슨 근거로?》

《조선에 갔다왔으니 민족주의인것이고 민족주의적오유를 범했은즉 그거야 〈민생단〉이 아니고 뭐겠소.》

《그게 동무의 생각이요?》

《그렇소. 나의 상급도 그렇게 보고있소.》


나는 김성도가 이런 대답을 하였을 때 그가 괘씸하다는 생각보다도 가련하다는 생각이 앞서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무런 과학적타당성이나 진리성도 없는 망발에 분노를 표시하고 쇠망치와 같이 드센 론리로 그 망발의 부당성을 립증해야 할 그런 정황에서 분노와 경멸대신 일종의 동정심이 발동되였다는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김성도가 지니고있는 허황한 편견과 유치한 사고방식이 동만특위 순시원이라는 요란한 직급과 대조를 이루면서 그를 더욱더 가련한 존재로 보이게 하였던것 같다.

(육체적불구에 정신적불구까지 겹치였으니 저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불행한 인간인가. 색안경으로 밀정들의 목표물이 될수 있는 애꾸눈을 가리우고 혁명을 위해 투신하는 그 기개야 물론 찬양받을만한것이지. 그 기개에 건전한 넋까지 담겨져있다면 정말 좋겠는데 어떻게 되여 저 사람의 정신은 저렇게도 참혹하게 병들었을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처음보다 음성을 더 낮추어 조용조용 그를 타일렀다.


《동무는 민족주의와 〈민생단〉을 동일시하고있는것 같은데 어떻게 그 량자를 감히 한 천평우에 올려놓을수 있겠소. 박석윤이나 조병상, 전성호와 같은 몇몇 민족주의자들이 발기인이 되여 〈민생단〉을 조직했다고 해서 민족주의와 〈민생단〉을 동일시하는것이야 너무나도 억지스러운 삼단론법이 아니겠소. 내가 알기에는 동무도 처음에는 민족주의자들이 주관하는 단체에 들었다가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한것 같은데 그것을 근거로 삼아 동무에게 〈민생단〉감투를 씌우면 납득이 가겠소? 어떻소?》

김성도는 《그거야 어떻게…》하면서 말끝을 얼버무리였다.

나는 그가 반성해볼수 있는 여유를 좀 주었다가 조리있게 설복을 계속하였다.


《동무가 상부라고 한것은 동장영서기를 념두에 두고 한 말 같은데 나는 그가 그렇게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만일 동장영서기가 실정을 잘 몰라서 일시적인 편견이나 오해를 가지고 그런 판단을 내린다면 조선의 물정을 잘 아는 동무들이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가 옳은 리해를 가질수 있도록 조언을 주어야 하지 않겠소.》

김성도는 그 말에도 역시 묵묵부답이였다.


체포당했던 2중대의 대원을 데리고 지휘부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나는 김성도가 가련하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날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 숙반공작을 진두지휘하기전까지는 리론투쟁때문에 여러번 충돌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그를 불쌍하게 여기였다.

그러나 김성도가 《민생단》숙청의 간판밑에 견실한 혁명가들을 무수히 살해하는것을 보고서는 그를 더는 동정하지 않았다. 후날 그 자신도 결국은 《민생단》감투를 쓰고 처형되였다. 테로는 테로한테 망하고 좌경은 좌경의 심판대에서 죽는다는것, 신념과 주대가 없이 간에 붙었다 섶에 붙었다 하는 사람에게 차례지는 운명은 자멸이라는것이 수십년에 걸치는 동란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내가 얻은 또 하나의 인생체험이라고 할수 있다.


3월초순에 마촌을 떠나 온성군 타막골대안에 도착한 국내진출대오는 솔골이라는곳에 숙영지를 정하고 온성땅에 침투한 선발대를 기다리면서 한주일가량 이 일대를 혁명화하여 반유격구로 꾸리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낮에는 송동산서쪽기슭에 가서 전투훈련을 하였고 밤에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속에 지하조직을 꾸리는 일을 하였다.


우리는 그때 만주국의 말단행정책임자들인 십가장, 백가장들과의 사업도 하였다. 우리가 인민의 리익을 침해하지 않고 혁명군대의 복무조례에 맞게 주민들과의 관계를 잘 가지였기때문에 그들도 우리에 대해서는 매우 깨끗한 인상을 가지고있었다. 유격대원들은 그때 솔골에 머물러있으면서 농민들의 일손을 많이 도와주었다. 어떤 대원들은 산에서 싸리나무를 해다가 주인집 울타리까지 고쳐주었다.


박영순의 회상기에 나오는 그 유명한 도끼이야기도 바로 우리가 이 마을에 주둔해있을 때에 생긴 일이였다.

어느날 나는 중국사람인 주인집 로인부처의 일손을 덜어드리려고 도끼와 물초롱을 들고 두만강가로 나갔다. 이 지방 주민들은 겨울에 두만강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도끼나 곡괭이 같은것으로 얼음을 까고 구멍을 낸 다음 초롱에 물을 퍼가지고 돌아오면 그것이 곧 음료수가 되였다.

나도 그런 얼음구멍을 내려고 도끼를 들고 나갔다. 그런데 얼음을 다 까내려갔을 때 그만 자루가 빠지면서 그 구멍속에 도끼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긴 장대기를 가지고 몇시간동안 강바닥을 훑어보았으나 도끼는 좀처럼 나지지 않았다.

나는 주인집 로인에게 도끼값을 후히 치르어주고 재삼 사과하였다.


로인은 대장어른께서 새벽마다 자기네를 도와 물을 길어주신것만도 고맙고 황송한 일인데 이 늙은것이 힘이 없어서 혁명군에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도끼값까지야 어떻게 받겠는가고 하면서 굳이 사양하였지만 나는 우리가 값을 치르지 않고 이 고장을 떠나가버리면 내가 대장으로서 혁명군의 규률을 위반하는것으로 되니 나를 생각해서라도 그 돈을 받아달라고 간청하였다.

로인에게 값을 넉넉히 치르어주었지만 내 머리에서는 얼음구멍에 빠진 그 도끼생각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갚아주어도 손때묻은 연장을 잃어버린 주인들의 아쉬움이야 어떻게 가셔질수 있겠는가.

그래서 1959년 봄에 항일무장투쟁전적지답사단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떠나갈 때 그들에게 량수천자의 그 로인을 만나면 나를 대신하여 사과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답사단이 량수천자에 찾아갔을 때는 유감스럽게도 그 로인이 이미 고인이 된 뒤였다.


두만강을 건는 우리 일행이 선발대의 안내를 받으며 왕재산마루에 오른것은 오후 4∼5시경이였다.

그때 륙읍지구에서 온 혁명조직책임자들과 정치공작원들은 산릉선과 이깔나무수림속에 숨어있다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나는 애어린 참나무들이 빼곡이 서있는 그 산마루에서 한참동안 주변의 풍경을 부감하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지만 이 고장의 일각은 3년도 되기전에 옛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두루봉에서 국내당조직을 무을 때 볼수 없었던 탄광의 버럭더미도 새로 생긴 풍경이였고 웅기(선봉)-온성선을 타고 달리는 렬차 역시 1930년 가을이나 1931년봄에는 볼수 없었던 온성의 새 모습이였다. 산천과 함께 사람들도 성장하고 혁명도 전진하였다. 우리가 이 고장을 다녀간후 륙읍일대와 그 주변에서는 새로운 반일혁명조직들이 련속적으로 태여나 활동을 개시하였다.


륙읍지구의 투사들은 치안유지를 담당한 일본군부와 경찰수뇌들이 국경경비의 만전을 자랑하는 조국의 북변땅에서 혁명조직이라는 거대한 강철그물로 적의 통치기구를 포위하고있었다. 우리의 무장투쟁도 성장하였다.


유격대무력은 동만지방만 보더라도 대대급으로 발전하였다. 각 현에 있는 대대들은 오래지 않아 련대로도 되고 사단으로도 될것이다. 유격전쟁을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무력은 남만에도 있고 북만에도 있다. 우리의 사단들과 군단들이 조국땅에 진출하여 적들에게 철추를 내릴 그날은 머지 않았다. 벌써 우리가 그 선견대로 이렇게 온성땅에 나오지 않았는가.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겨 창덕학교시절에 외할아버지한테서 배운 남이장군의 한시를 입속으로 조용히 외워보았다.

백두산석 마도진(白頭山石 磨刀盡)

두만강수 음마무(豆滿江水 飮馬無)

남아이십 미평국(男兒二十 未平國)

후세수칭 대장부(後世誰稱 大丈夫)

이 시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뜻으로 된다.

백두산의 돌은 칼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 먹여 다 말리리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평정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일러주랴


외할아버지는 그때 나에게 남이장군이 북관의 적을 무찌르는 싸움에서 용맹을 떨쳐 20대에 벌써 병조판서가 되였다고 하면서 성주도 크거들랑 왜놈치는 대장이나 선봉장이 되라고 말씀해주었다.

나는 그때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남이장군이 간신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데 대하여 몹시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크면 남이장군처럼 외적을 치는 선봉에 서서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싸우리라고 결심하였다.

(남이장군이 륙진에 의거하여 북적을 막았다면 우리는 륙읍의 반유격구에 의거하여 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하고 일제가 멸망할 함정을 파놓으리라!)

나는 왕재산마루에서도 이런 맹세를 다지였다.


왕재산에 모인 정치공작원들과 혁명조직책임자들은 나에게 국내형편과 그동안의 활동정형을 보고하였다.

나는 륙읍을 비롯한 북부국경지대에서 항일혁명의 대중적지반을 축성하는 사업이 속속 진행되고있는데 대하여 고무해주고 정치공작원들과 혁명조직책임자들앞에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몇가지 과업을 제기하였다.


여기에서 내가 력점을 찍어 강조한것이 반유격구창설과 관련된 문제였다. 우리는 그때 온성일대를 중심으로 국내의 여러지역에 반유격구를 꾸리고 동시에 무성한 청림지대들에 비밀련락장소를 비롯한 여러가지 활동거점들을 마련함으로써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발전시킬수 있는 초석을 쌓으려고 하였다. 왕재산회의에서는 로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전민족을 하나의 정치적력량으로 튼튼히 묶어세우기 위한 과업과 대중운동과 당창건준비사업을 힘있게 내밀기 위한 국내혁명조직들의 과업도 토의되였다.


유격대의 온성진출은 항일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서막으로 되였으며 민족해방투쟁발전에서 또하나의 새로운 리정표를 마련하였다. 이 진출을 통하여 우리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을 위해 싸우는것이 그 누구도 막을수 없는 신성한 임무이며 절대적인 권리라는 움직일수 없는 신념과 립장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항일유격대의 온성진출과 왕재산회의의 전과정은 완전유격구 주변과 국내에 반유격구를 창설할데 대한 우리의 주장이 옳았다는것과 간도와 륙읍일대에 반유격구를 건설할수 있는 주객관적조건이 충분히 성숙되였다는것을 실증해주었다.


왕재산회의가 끝난후 우리는 경원(새별)의 류다섬과 박석골, 종성군 신흥촌 금산봉을 비롯한 국내 여러곳에 진출하여 회의도 하고 강습도 하고 정치공작도 하였다. 이 진출의 주요목적은 국내 혁명조직책임자들과 정치공작원들에게 지하혁명투쟁에서 견지해야 할 원칙과 방법을 배워주려는데 있었다.


우리가 국내에 나가서 혁명가들을 자주 만난것은 그들을 주체적인 혁명로선과 사업방법으로 무장시켜 복잡한 실천투쟁을 용의주도하게 이끌고나갈수 있도록 튼튼히 준비시키자는데 있었다. 국내혁명조직의 지도자들과 핵심들을 정치실무적으로 잘 준비시키는것은 반유격구를 성과적으로 꾸리기 위한 선결조건이였다.


그 당시 우리가 파견한 지도핵심들은 국내깊이에 침투하여 반일항쟁에 총력을 기울이고있던 로조, 농조들에 뿌리를 뻗치였으며 도처에서 혁명적인 대중단체들을 조직하였다. 우리의 공작원들은 서울을 비롯한 남부조선일대에도 줄을 늘이였다.


륙읍지구의 반유격구들을 튼튼히 꾸리고 국내혁명운동을 앙양시키는데서 두만강연안에 꾸려진 당조직들은 결정적역할을 하였다.

그후 동만의 지도간부들은 반유격구건설에 관한 우리의 제안을 방침으로 채택하고 그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과업을 명시하였다. 반유격구를 건설해야 한다는 우리의 공명정대한 제안에 대하여 우경이라고 시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비평은 즉석에서 신랄한 반격에 부딪쳤다.


동만의 쏘베트구역들에서는 1933년 봄부터 반유격구를 창설하기 위한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라자구, 다홍왜, 전각루, 량수천자 등 왕청지구와 연길, 훈춘, 안도, 화룡 지구의 넓은 지역에 반유격구가 꾸려졌다.

이 시기에 창설된 반유격구들은 항일무장투쟁발전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완전유격구들가운데서 방어하기에 불리한 일부 지역들도 반유격구로 전환시키였다.


만주국이 내세운 툰장들가운데는 우리를 지지하고 동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라자구 같은곳은 시내에서 한발자국만 나와도 다 우리 세상이고 우리편 사람들이였다.

반유격구건설경험과 그 로선의 정당성은 그후 조선인민혁명군의 백두산지구에서의 활동을 통하여 유감없이 증명되였다.


반유격구라는것이 참으로 좋았다. 그래서 1930년대 후반기 압록강연안에 나와서 백두산일대를 개척할 때에도 우리는 혁명군이 주둔하는곳들에만 밀영을 건설하고 나머지는 모두 반유격구로 만들어놓았다. 적백을 가리지 않고 군중들속에 혁명조직을 박고 거기에 일군들을 파견하였다.


우리는 일정한 지역을 차지하지 않고 적들이 이 지구를 주목하면 저 지구로 옮겨앉고 저 지구를 주목하면 또 다른 지구로 옮겨가군하였다. 그 사품에 정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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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 사품에 정동철, 리훈, 리주익(리취)과 같은 애국구장, 애국백가장, 애국십가장, 애국면장, 애국순사, 애국자위단원들이 많이 나왔다. 우리는 그때 적의 하부말단통치기관들에 똑똑한 사람들을 공작원으로 많이 박아넣었다. 우리가 파견하지 않은 적지 않은 하부말단관리들까지도 혁명을 지지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들은 낮에는 만주국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열성을 부리는척하였지만 해가 떨어지면 혁명군의 길안내도 하고 낮에 수집한 정보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혁명군공작원들도 만나고 혁명군에 보낼 원호물자수집도 하였다. 동만과 국내에 창설된 반유격구들은 해방지구의 군대와 인민들을 보호하며 거기에 수립된 인민의 정권과 민주주의적시책의 열매들을 보호하는 믿음직한 위성들로 되였다.

완전유격구주변의 넓은 지역이 반유격구로 전환된 다음부터 항일유격대는 적구 깊이 침투하여 군중을 혁명화하고 당, 공청을 비롯한 전위조직들과 각종 대중조직들을 확대해나감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더욱 튼튼히 다지고 소극적인 방어전으로부터 적극적인 공격전에로 이행할수 있었다. 항일전쟁을 주동적인 공격작전에로 전환시킴으로써 우리는 적들의 악랄한 경제봉쇄전을 타파하고 유격구생활에서 가장 큰 골치거리였던 식량문제도 보다 용이하게 해결할수 있었다.

반유격구의 건설은 적백구역의 설정으로써 많은 군중을 적의 편으로 밀어던지던 좌경적편향을 극복하고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광범한 인민대중을 하나의 정치적력량으로 묶어세울수 있게 하였으며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조선혁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왕청지방의 반유격구들중에서 가장 모범적인곳은 라자구와 량수천자였다.
라자구를 반유격구로 건설하는데서는 리광의 공로가 컸다. 리광은 라자구에 파견되여 반일부대공작도 하고 독립군출신들과의 사업도 하면서 우리가 발을 붙일수 있는 기틀을 튼튼히 마련하여놓았다.

라자구는 1920년대초부터 리동휘일파가 독립운동의 주요기지로 개척한 고장이였다. 그때 리동휘를 따라다니며 독립군운동에 관계했던 령감들이 라자구지방을 쥐락펴락하고있었기때문에 리광은 그들을 통하여 이 지방 인민들을 혁명화할수 있었다. 라자구에 반유격구를 창설하려고 그때 유능한 정치공작원들이 이 지방에 많이 파견되여갔다. 그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대오에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라자구를 혁명화하는데서 큰 공헌을 한 최정화도 거기서 희생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유능한 지대장이였던 박길송과 최광은 그 당시 라자구에서 지하공작을 하였다.
적들이 이 고장에 협화회나 협조회와 같은 악질적인 반동단체들을 조직하여 혁명세력을 말살하려고 미쳐날뛰였다면 우리는 여기서 반일회와 같은 큰 그릇의 대중조직들을 만들어 모든 애국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웠다.
라자구는 왕청의 혁명군중을 먹여살리는 식량창고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소왕청유격구에서는 식량사정이 곤난할 때마다 라자구혁명조직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긴급구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면 라자구에서 혁명조직성원들이 십리평 돌문안까지 쌀을 등짐으로 지고 와서 왕청사람들에게 인계해주었다.
적들이 라자구를 점령한 조건에서도 해방지구들에서는 계속 그 고장의 쌀을 가져다 먹었다. 유격구가 해산되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이 북만원정을 떠난 1935년 하반기부터 왕청현내의 혁명가들이 사실상에 있어서는 라자구의 식량을 먹고 목숨을 부지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의 《토벌》을 피하여 한동안 라자구 서산에 가있던 일부 혁명군중과 왕청 3중대 군인들도 이 지방 인민들이 가져다주는 식량을 소비하면서 1935년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라자구가 이처럼 왕청혁명가들의 식량공급소와도 같은 역할을 훌륭히 감당해낼수 있은것은 거기가 원래 지나가는 거지한테도 기장밥을 해먹인다는 비옥한 곡창지대라는데도 있었지만 그 지방에 혁명조직들이 많이 들어가 박히고 그 조직들이 일상적으로 대중교양을 잘하였기때문이였다.

라자구의 백호장 김룡운은 만주국이 신임하는 말단행정 심부름군이지만 내적으로는 우리의 조직원이였다. 그는 백호장이라는 합법적지위를 리용하여 혁명가들에 대한 방조를 많이 주었다.
적들은 유격대공작원들의 성시침투를 막고 인민들이 혁명군과 내통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반출을 가혹하게 통제하는 한편 청년들을 도시경비에 상시적으로 동원시켜 출입자들을 엄중히 단속하게 하였다. 경비에 동원되는 청년들에게는 곤봉을 하나씩 쥐여주었다. 그 곤봉은 만주국이 발급한 일종의 신임장과 같은것이였다.

혁명군이 라자구에 식량공작을 가는 날은 김룡운이 일부러 우리의 영향하에 있는 청년들만 엄선하여 경비에 내보냈다. 식량공작을 담당한 사람들이 성시주변에 나타나면 경비에 동원된 청년들은 그들에게 곤봉을 넘겨주고 마을에 달려가 백호장의 지휘밑에 쌀을 모아가지고 돌아와 식량공작원들에게 넘겨주군하였다.

라자구에서는 혁명조직성원들이 위만군들을 구슬려서 수만발의 탄알까지 뽑아냈다. 그 당시 라자구시내에는 혁명조직에서 운영하는 개인상점이 있었다. 그 상점주인은 오랜 공청일군이였는데 성시에서 혁명군에 보낼 원호물자를 자유롭게 뽑아내가기 위하여 위만군병사들과 결의형제까지 무었다.

돈에 환장한 어떤 만주국 군인은 다른 지방에 가서 물건을 렴가로 사다가 값을 몇배로 올려가지고 그 상점에 찾아와 자기대신 상품을 팔아달라고 부탁하군하였다. 군인이 물건을 가지고 장사질하는것이 알려지면 처벌도 받을수 있었으므로 부득불 상점을 리용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군인은 상점주인과 결의형제를 무은 다음 그에게 탄알까지 팔아주었다.
상점주인은 탄알 한발에 25전씩 사서 혁명군에 넘겨주었는데 그 수량은 무려 5,000여발에 달하였다.
이것은 반유격구건설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실증해주는 하나의 단편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군을 원호하는데서는 왕청남부지역에 창설된 량수천자반유격구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량수천자의 혁명조직들에서는 수십차례에 걸쳐 해방지구에서 쓸 식량과 생활필수품들을 보내주었다.
우리는 그때 쌀, 피복, 성냥, 약품, 화약, 소금 등 유격구인민들의 생활에 절실히 필요한 물자의 많은 몫을 온성과 량수천자의 혁명조직들을 통하여 해결하였다.

유격구에서 제일 귀한것은 소금이였다. 죽을 다섯숟가락쯤 먹고는 인단알만한 소금을 한알씩 깨물고 억지로 간을 맞추는 형편이였다. 적들은 그때 유격구에 사는 생명들을 질식시키기 위하여 식량과 소금에 대한 통제를 무섭게 하였다. 가을이면 농민들이 한해 농사를 지어 거두어들인 쌀을 자기네가 관리하는 집단부락의 창고에 고스란히 가져다 넣게 하고 식구수에 따라 하루동안 먹을만한 식량만 내주었다. 농민들에게 식량의 예비가 생기면 그 식량이 곧 항일유격대나 유격근거지 인민들에게로 흘러간다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적들은 소금의 류출을 막기 위하여 집사대라는 소금경찰대까지 조직해가지고 가옥들에 대한 수색을 무시로 하였다. 된장, 간장이 조금만 많아도 세금을 부과시키고 《볼기채》라고 부르는 세모난 나무몽둥이로 무섭게 후려갈기였다.
우리는 1934년 가을에 근거지의 소금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2중대성원 30여명을 포함하여 수많은 군민들과 아동들로 구성된 공작대를 량수천자에 파견하고 거기에 말들까지 따라보내였다. 왕청에서 량수천자까지는 왕복 200리길이였다.

사전에 우리의 통지를 받은 량수천자의 혁명조직에서는 온성지하혁명조직과 남양운송부를 통해 넘겨받은 많은 량의 소금을 두만강변에 쌓아놓고 공작대를 맞이하였다.
공작대는 말 한필에 소금가마니를 두세짝씩 얹어가지고 셋째섬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나머지 소금은 한사람당 20∼30키로그람씩 등짐으로 져서 유격근거지까지 날라왔다. 일부 소금은 라자구에 가서 밀가루와 바꾸어왔다.

량수천자조직이 우리에게 보내준 후방물자는 대부분 온성을 비롯한 륙읍지구에서 넘어온것이였다. 그곳 인민들은 우리 유격대와 유격근거지 인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의 많은 몫을 도문과 룡정 일대에서 해결하여 보내군하였다. 적들의 감시와 통제가 심한 국내에서는 일용필수품들을 대량적으로 구입할수 없었다. 국내조직들은 도문이나 룡정 같은 상업지구들에 슬슬 건너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두었다가 제정된 통로를 통하여 항일근거지들에 보내주었다.

도문과 룡정은 사실상 우리의 후방을 담당한 믿음직한 근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문이나 룡정이나 백초구와 같이 우리의 혁명조직들이 조밀하게 박혀있는 고장들은 함부로 다치지 않았다. 처음에 우리 동무들이 백초구를 한번 들이친 일이 있었는데 그 습격전투가 있은 직후 리광의 아버지가 연통해오기를 민족적량심이 있는 부자들을 통일전선에 끌어들여야 하겠는데 그들이 몹시 놀랐기때문에 후과가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다음부터 우리는 백초구와 같은 고장을 치지 않았다. 왕청과 그밖의 해방지구 군민들을 먹여살리는데서 륙읍일대의 반유격구는 실로 력사책에 대서특필해야 할 공적을 쌓아올리였다.

우리는 완전유격구와 반유격구 외에도 적통치구역에서 유격대의 군사정치활동과 련락을 보장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활동거점들을 무수히 꾸려놓았다. 지하혁명조직들과 련락소들로 이루어진 이 활동거점들은 기동적이고 림시적인 성격을 띠는 유격근거지의 한 형태로서 룡정, 훈춘, 도문, 로두구, 백초구를 비롯한 적통치지역의 큰 도시들과 철도연선지대들에 많이 꾸려졌다.

간도와 국내에 반유격구를 창설하던 잊지 못할 나날들을 회상할 때마다 내 추억속에 가장 뚜렷이 떠오르는 인물은 오중화이다.
서대문형무소를 출옥하기 바쁘게 북행렬차에 몸을 실은 그는 도문에 건너오자 희막동근처에 있는 처가집에서 며칠간 정양을 하고는 인차 석현으로 돌아와 나를 찾아왔다.

오중화가 감옥살이를 끝내고 왕청으로 돌아온것은 남북만원정을 마치고 유격구에 발을 들여놓은지 얼마 안되는 나에게 있어서 커다란 기쁨으로 되고 위안으로 되였다.
그는 나를 만나기 바쁘게 큼직한 과업을 하나 맡겨달라고 하였다. 병색이 짙은 얼굴을 보아서는 몇달 정양을 더 해야 할 형편이였는데 일거리를 달라고 자꾸 간청하는 바람에 가야허주변의 일부 지역들을 반유격구로 꾸려보라고 하였다.

오중화가 속해있는 제5구는 량수천자, 도문, 연길, 백초구, 대두천 등 적의 주요《토벌》거점들과 잇닿아있었고 가야허에는 일본령사관 경찰분서까지 도사리고있었다. 1933년 정월초 류재구가 적의 습격을 받았고 그후에는 사수평이 두차례나 《토벌》을 당하였다.
오중화자신도 감옥에서 풀려나왔으나 적의 꼬리가 계속 달려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업을 받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리가 오중화에게 가야허주변의 일부 지역들을 반유격구로 꾸려보라고 한것은 그 지역들이 적의 군사요충지들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또 적의 공격목표로 지목되고있는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위험을 동반하는 어려운 과업이였으나 나는 오중화를 믿었다.

1930년 가을의 첫상봉때 그는 벌써 나에게 지울수 없는 믿음을 남기였다. 그때 나는 오중화의 집에서 그와 진지한 담화를 하였다. 담화를 끝내고 밖에 나오니 울타리밖에 억대우같은 청년들이 삼엄한 경비진을 치고 서있었다. 동구밖에도 그런 청년들이 여러명 늘어서있었다. 나는 그때 그 광경을 보면서 오중화의 사업능력과 혁명가다운 풍모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사업능력과 혁명가다운 수완은 군중을 끄는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오중화는 자기가 사는 마을을 혁명화하기 위하여 리발기를 하나 갖추어놓고 가위계라는 조직부터 먼저 내온 다음 거기에 동네에 있는 주민들을 다 망라시키였다. 그 당시 일반리발소의 리발료금은 15전이였다.
그러나 오중화는 5전씩 받았다. 그 돈으로 책을 사서는 계에 망라된 사람들의 눈을 틔워주었다. 사람들은 눅은 값으로 리발을 하고 책을 보는 멋에 계에 열심히 모여들었다. 오중화는 그런 틈을 타서 계원들을 교양하였다.

가위계를 통하여 마을사람들을 초보적으로 계몽시킨 다음 이전날의 동창회, 학우회, 친목회 등 계몽단체들을 통합하여 령동친목회를 조직하였다.
이 친목회는 돈화와 할바령동쪽지구인 연길, 훈춘, 화룡, 왕청 일대 청년학생들의 합법적조직이였다. 오중화는 마을을 혁명화하기 위하여 연극공연도 자주 조직하였다. 그가 직접 각본을 쓰면 한개 분대도 넘는 4촌들이 달라붙어 배역도 나누고 장치도 만들고 저희들끼리 연출도 하여 미끈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군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군중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어놓고는 자기 가문의 사람들부터 혁명조직에 받아들이고 나중에는 모든 마을사람들을 다 조직성원으로 흡수하였다. 겨울명월구회의를 전후한 시기에는 강상준, 조창덕, 유세룡 등과 함께 항일유격대 결성준비작업의 중요고리의 하나인 무기획득공작에 참가하였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탈취해낸 무기들은 최인준, 한흥권, 강상준, 김은식 등의 투사들이 망라되여있는 별동대원들을 무장시키는데 큰 밑천으로 되였다. 오중화는 우리의 의도에 맞게 적의 1차 공격목표로 지목되여있는 5구의 일부 지역을 반유격구로 훌륭히 꾸려놓았다. 그는 적통치구역에 활동거점을 꾸리는 과업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도문의 천일인쇄소는 그가 꾸려놓은 중요한 활동거점으로서 혁명군의 귀와 눈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적들은 오중화와 그의 가문을 눈에 든 가시처럼 보고 그 일족을 멸살시킬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였다. 1933년 봄에 유격대의 한 소조는 룡정령사관에서 석현경찰서에 보내는 비밀문건을 압수하였다. 그것은 오씨일가를 전멸시키라는 살인지령서였다.
우리는 그 정보를 받은 즉시에 유격대를 출동시켜 구제공작을 하였다.
유격대원들은 31명이나 되는 오씨네 식구들을 눈깜짝할사이에 십리평으로 소개시키였다.
지칠줄 모르는 정열과 투지를 가지고 단거리 륙상선수와도 같이 숨가쁜 속도로 일생을 줄달음쳐 살아오던 오중화는 1933년 여름 북봉오동의 비밀아지트에서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적들은 체포현장에서 무참히 그를 살해하였다. 오중화가 최후의 순간을 어떻게 마쳤고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였는지 그것을 목격한 증견자는 없다. 그와 그의 동료들을 처형한 살인마들만이 그것을 영원한 비밀로 간직하고 학살현장에서 사라져버리였다.

오태희로인이 주먹을 부르쥐고 십리평에서 북봉오동으로 뛰여갔을 때 오중화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여 비밀아지트주변에 눈을 뜬채 쓰러져있었다.
생명의 불꽃이 아직 채 꺼지지 않은 그 눈동자에는 그가 살아서 그렇게도 큰 애정을 가지고 자주 쳐다보던 유격구의 푸른 하늘이 비껴있었다.
그러나 입만은 생시보다 더 굳게 다물려있었다. 오태희로인은 그 입매만 보고서도 아들이 조직의 비밀과 생명을 바꾸지 않았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것이 장해서 로인은 더 슬프게 울었다. 세상에 태여나 34해밖에 살지 못한 아들이였지만 그 아들은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오래 산다고 더 큰 락을 누린다는 법이야 없지. 그렇지만 아들아, 너는 너무도 일찌기 이 애비의 곁을 하직하였구나. 너를 그렇게도 아끼는 김일성장군이 알면 얼마나 가슴아파하겠느냐!
그때 로인은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이런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오중화가 학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평소에 그렇게도 많은 말을 하고 그렇게도 많은 걸음을 걷고 그렇게도 많은 흔적을 남기면서 불같이 살아오던 사람이 이다지도 조용히 가버릴수 있는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었다.

오중화의 곁에는 그를 바래준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그는 한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못한채 대지우에 쓰러졌다. 그가 우리에게 유언으로 남길수 있는 말이 있었다면 그것은 과연 무슨 말이였을가? 반유격구건설도 끝났으니 또 새로운 과업을 맡고싶었노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오중화가 살아있었더라면 나는 그에게 더 큰 중책을 맡기였을것이다.
혁명하는 사람의 륜리에서는 일거리를 많이 주는것이 최대의 사랑이고 최고의 믿음이다.

우리 혁명은 간도일각에서 만사람의 총애를 받던 또 한명의 유능한 조직자, 선전자, 인민에게는 긍지를 주고 적들에게는 공포를 주는 성실하고 강직한 동량지재를 잃었다. 그것은 동만땅에서 노도치며 전진해가는 우리 혁명의 앙양을 위해 정녕 가슴아픈 손실이였다.
그러나 오중화는 그 장렬한 죽음으로써 군중을 각성시키고 궐기시키였다. 그는 희생되였지만 그가 피로 적시고 간 반유격구들에서는 항일대전의 새로운 전성기를 떠메고나갈 주인공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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