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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6-6. 구국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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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282회 작성일 15-04-16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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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국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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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류하에 머무를 때 리홍광, 리동광과의 련계를 위하여 반석지방에 련락원을 파견하였다. 우리가 남만원정을 마치고 귀로에 오르던 그때 그 두 사람도 유격활동에 몰두하고있었다. 그들이 9.18사변후 보민회를 비롯한 친일단체의 주구배들과 싸우기 위해 조직했던 무장적위대(일명 타구대, 개잡이대라는 뜻)는 1932년 9월에 이르러 반석로농의용군으로 성립되였다. 이 의용군은 모두 탈량투쟁과 주구숙청, 무기탈취, 반일봉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형태의 대중투쟁을 통하여 단련되고 검열된 조선청년들로 구성되여있었다. 1932년 여름부터 리홍광, 리동광은 항일유격구를 창설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였다.

그들은 주구숙청투쟁에서 특출한 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화제거리를 남기고있었다.


내가 그들을 만나려고 한것은 남만지방의 주인들이기때문에 단순히 의례방문이나 하고 인사나 나누자는것은 아니였다. 중요한 목적은 의사소통을 하자는데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들과 함께 투쟁경험을 나누고싶었다.


다음으로 내가 관심을 둔것은 그들이 조선혁명의 전도를 두고 어떤 견해와 립장을 가지고있는가 하는것이였다. 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앞에 부과된 당면과업에 대한 나의 견해와 립장도 발표하고 그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도 들어보고싶었다.


제일 중요한것은 만주각지에서 분산적으로 무장투쟁을 개시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지역호상간의 련계를 어떻게 보장하고 린접과의 보조는 어떻게 맞추며 활동에서의 협조, 협력, 협동은 어떤 방법으로 실현하겠는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를 가지고 그들과 의견을 교환하는것이였다. 나는 북만의 김책, 최용건, 리학만, 리기동, 허형식과도 그런 의견을 나누고싶었다. 남만과 북만은 우리의 린접이자 익측이라고 할수 있었다. 린접과의 협동을 어떻게 실현하는가 하는것은 무장투쟁의 전반적발전에 심대한 작용을 하는 중요한 고리이고 공간이다.


반석에 갔던 련락원은 우리가 해룡을 떠나 몽강에 자리를 잡았을 때에야 부대로 돌아와 리홍광과 리동광이 지방공작을 나가고 없기때문에 만나지 못하고 그곳 지하조직에 나의 편지만 남기였다는것을 보고하였다.


나는 리홍광, 리동광과의 상봉을 뒤로 미루고 몽강에서 본격적인 군사정치활동을 벌리였다. 몽강에서 우리가 세운 활동의 총적목표는 무장을 해결하는것과 대렬을 확대하는것이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활발한 정치공작과 함께 군사외교활동이 필요하였다.


몽강은 우리가 이런 목적을 이루는데서 몇가지 유리한 점을 가지고있었다. 몽강의 관리들가운데는 길림육문중학교시절의 나의 동창생들이 많았다. 계렬을 따지면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니고 어떤 정치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으면서 머리를 싸매고 고분고분 공부만 해오던 샌님같은 사람들이였는데 그들이 몽강의 실권을 쥐고있었다. 그들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국민당현공서에서 일하고있다가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자위군이라는데 들어가서 큼직한 벼슬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있었다.


몽강에는 통화지방에 본부를 두고있는 당취오자위군 총사령부의 대표도 와있었다. 동창생들을 내세워 그 대표와 교섭을 잘하면 무장을 해결할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실태를 파악한 우리는 몽강에 눌러앉아 자위군과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리려고 결심하였다.


그때 부대의 지휘관들은 자위군과의 사업에 별로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자위군과 접촉하는것을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지휘관들이 태반이였다. 같은 조선사람인 량세봉과도 뜻이 맞지 않아 담판이 결렬되였는데 자위군과 사업하여 무기를 얻어낸다는것은 도저히 실현될수 없는 일이다, 항차 자위군은 지금 와해상태에 있지 않는가, 어떤 부대에는 일본지도관이 틀고앉아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할 모의를 한다는데 그런 함정에 대장자신이 들어가는것을 우리로서는 찬성할수 없다고 그들은 말하였다.


나는 자위군내부에 일본지도관이 틀고앉아 있는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놈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을 판별하는 촉수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들의 눈을 속이고 자위군지휘부에 뚫고들어가 그 상층을 설복할수 있는 담력이 있다, 자위군이 와해상태에 있는것은 오히려 우리가 공작목적을 손쉽게 달성할수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될수도 있다, 그들은 왜놈들이나 토비들에게 총을 넘겨주거나 내버리는것보다 항일을 하는 우리에게 양도하는것이 더 좋다고 생각할것이다, 그처럼 완고한 우사령과도 뜻이 통하여 합작을 성사시켰는데 자위군이라고 해서 왜 굽혀내지 못하겠는가고 하였다.


그러나 지휘관들은 대장동무가 우사령과의 담판에 성공한것은 천번중 한번이나 있을가 말가 한 우연이다, 만일 그 부대에 류본초선생이 없었더라면 단판은 성공하지 못했을것이라고 하면서 자위군부대에 찾아가는것은 좀더 심사숙고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지휘관들에게 해보지도 않고 골방에 들어앉아서 콩이냐 팥이냐 하며 시야비야 하는것은 공산주의자의 기질이 아니다, 유격대를 합법화하는데서 우리가 류본초선생의 덕을 크게 본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성공을 순전한 우연으로만 보는것은 비과학적인 해석이다, 우리가 구국군과의 관계를 풀려고 주동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류본초선생도 우리를 도와나서지 못했을것이다, 문제는 배심을 가지고 어떻게 주동적으로 활동하는가 하는데 달려있다고 루루이 지휘관들을 설복하였다. 그런 다음 련락병을 한명 데리고 자위군의 지휘부로 찾아갔다.


자위군의 병영에는 사병들이 꽉 차있었고 정문으로는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는 우마가 그칠새 없이 드나들었다.

정문에서 보초병이 우리를 멈춰세우고 산동지방말씨로 《무슨 사람들인가?》하고 물었다. 보초의 검실검실한 눈은 우리의 얼굴이 아니라 자위군과는 판판 다른 우리의 유격대복장과 모자의 오각별을 유심히 더듬고있었다.


나는 그 산동사람들의 말씨를 약간 본따서 중국말로 대답했다.

《우리는 안도에서 온 구국군별동대요. 나는 별동대 대장 김일성이요. 당신네 사령을 만나러 왔으니 안내해주오.》

《김일성? 김일성별동대면 공산당이 아닌가?》

얼굴에 마마자국이 뚜렷한 두번째 보초가 입속으로 내 이름을 중얼중얼 외우며 미심쩍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김일성부대가 공산당부대라는 말을 어디서 얻어듣고 기억에 새겨두었던 모양이였다.

《우리는 우사령의 별동대다. 당신 우사령도 모르는가?》


내가 위엄을 풍기며 이렇게 따지자 마마자욱이 있는 보초는 《아, 우사령! 그 사람 알고있소. 그 사람부대 남호두에서 왜놈의 기관총 로획했소. 우사령 대단한 사람이지.》하면서 엄지손가락을 흔들어보이였다.


결국은 우사령별동대라는 명함장이 은을 낸셈이였다. 중국인반일부대들이 있는데서도 이 명함장이 맥을 추었다. 그래서 우리는 행군을 할 때에도 반일부대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늘 구국군 조선인별동대라는 간판을 들고 다니였다.


잠시후 산동말을 하던 첫번째 보초가 병영에 들어가서 풍채좋은 사나이를 데리고 나왔다. 그때 당시의 구국군들이란 대체로 옛 장학량군시절의 군복을 그대로 입고있었다. 그런데 방금 보초를 따라 정문에 나타난 장교는 이상하게도 반소매에 가랭이가 무릎에도 채 닿지 않는 짧은 바지를 입고 발에는 포화를 신었다. 머리카락도 기름을 발라 윤기가 나고있었다.


《아, 이거 김성주주임이 아닌가?》

그것은 이름대신 《장꺽다리》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육문중학교시절의 동창생 장가였다. 그가 나를 주임이라고 한것은 내가 육문중학교에서 공부할 때 맡아보았던 도서주임직을 념두에 둔것이였다. 장가는 학생시절에도 나를 늘 《김주임》이나 《성주주임》이라고 불러주며 호의적으로 대해왔었다.


우리는 반갑게 손을 마주잡고 한참동안 학창시절의 회포를 나누었다. 해수로 계산하면 그와의 상봉은 3년만에 이루어진 셈이였다. 나는 감옥을 나온 다음 학우들에게 작별인사도 남기지 못하고 총총히 길림을 떠난것을 후회하였다. 혁명을 위해 사사로운 모든것을 다 희생시킨다는 정신을 가지고 동분서주하던 때여서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 같기도 하였지만 스승들과 학우들에게 인사를 남기지 못하고 떠났다는 그 도덕적인 빚이 마음속에 연덩어리처럼 무겁게 매달려 나를 괴롭힐 때도 없지 않았다.


장가를 만나고보니 이미 지평선너머로 사라져버린듯한 육문중학교시절의 가지가지 정경들과 그 시절에 맛보던 랑만적인 학생기분이 되살아올랐다. 나는 군화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는 병영마당이 아니라 정향꽃향기가 진동하는 육문중학교 정원에 서있는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장가의 손을 잡고 그대로 병영문을 나서면 북산에도 가닿고 송화강바람도 쏘일수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가슴을 짜릿하게 하는 이상야릇한 향수였다.


장가는 학창시절에 그랬던것처럼 내 팔을 허물없이 잡아끼고 이따금씩 큰소리로 웃어대면서 나를 자기 방으로 안내하였다.

《우리 학교졸업사진에 김주임의 얼굴이 없는건 정말 유감이야.》

그는 나에게 의자를 권하면서 이런 말부터 꺼냈다.

《우린 졸업사진을 찍으면서도 그냥 김주임의 이름을 외웠댔어. 김주임이 학교를 중도반단하지 않았더라면 1등생이 되여 상을 탔을거라구. 혁명이라는게 중학공부를 단념할 정도로 그렇게도 성주를 유혹하던가?》


나는 웃으면서 유쾌한 롱질로 그 말을 받아넘기였다.

《암, 물론이지. 너두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해서 이렇게 싸창을 차구 자위군의 장교가 된게 아니겠어.》

장가는 그 말을 듣자 눈을 슴뻑거리며 내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건 그래. 9.18전만 해두 우린 세상물정을 모르고 살아온 속물들이였지. 그런데 일본이 만주로 쳐들어오는것을 보고서야 잠에서 깨여났거든.》

《그것보라구. 그러게 내가 뭐랬나. 사람은 정치밖에서 살수 없다구 하지 않던가.》

《그땐 그말을 귀등으로만 들었댔단 말이야. 아, 시국이 왜 이리도 급전직하로 변해가는지 모르겠다. 이 만주땅이란 미친 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처럼 살풍경이란 말이야.》


나는 장가가 시국을 옳게 평가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만주를 무대로 하여 펼쳐지고있는 력사의 흐름은 실로 세상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놀라운 변화들로 가득차있었다. 그 변화는 사람들의 운명에도 무자비한 곡절을 빚어놓았다. 장가자신도 몇해전까지는 베이징대학에 가서 력사학공부를 해볼 포부를 가지고있었던 사람이였다. 일본군이 만주를 집어삼키는것을 보자 그는 력사학을 전공하려던 학창시절의 꿈을 버리고 분연히 자위군에 입대하였다.


선비중의 선비라는 평판을 들으며 두보의 시행들에 흐르고있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정서를 친절하게 풀이해주던 류본초선생이 구국군의 참모장이 되여 초연속을 헤치게 되리라고야 누가 상상인들 했겠는가.

《이것보라구 김주임, 9.18덕분에 나도 군복을 입은 호걸남아가 되였어.》

장가는 이런 말을 하고나서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군복을 입은거야 너뿐인가. 나도 군인이 되여 몽강에까지 흘러오지 않았나. 동창 대 동창으로서뿐아니라 군인 대 군인의 자격으로 이렇게 마주앉아 대세까지 론하고있으니 이거야말로 얼마나 멋들어진 연분인가.》

그는 이게 다 일본놈들의 《덕》이라고 하면서 그놈들의 《덕》에 사람들이 좀 총명해진것 같다고 하였다.


알고보니 몽강의 자위군부대에는 장가외에도 육문중학교시절의 동창생이 여러명 있었다. 나는 그날저녁 그들과 함께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치와는 담을 쌓고 립신양명의 길만을 꿈구어오던 그들이 목에 피대를 세워가지고 일본을 규탄하고 장개석을 중화민족이 낳은 최대의 기형아라고 조소하는것을 볼 때 나는 만족감을 금할수 없었다.


우리는 밤늦도록 반일인민유격대와 자위군사이의 공동행동문제도 협의하였다. 자위군의 지도부에 있는 동창생들은 우리 부대와의 합작을 환영하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어렵지 않게 자위군부대내부에 침투할수 있었으며 몽강에 와있는 자위군총사령부의 대표와도 만날수 있게 되였다.


어느날 나는 장가의 요청을 받고 자위군지회성원들앞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 장소에는 총사령부의 대표도 와있었다.

나는 《여러분, 우리와 함께 갑시다!》하는 힘찬 호소로 연설의 첫마디를 떼였다.

《자위군과 반일인민유격대는 공동행동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일인민유격대에 공산군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적대시하는것은 항일을 방해하고 일본을 돕는 길이다.…

반일인민유격대와 자위군은 조선인독립부대를 도와주고 련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조중인민을 리간시키고 그 갈등을 리용하여 량쪽을 다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통치하려는 일제의 교활무쌍한 책동에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

자위군은 대도회, 홍창회를 비롯한 민간무장력과 토비들을 설복하여 그들이 무고한 조중인민들을 살해하고 략탈하지 못하게 하며 그들을 반일투쟁에 적극 인입하여야 한다. 대소민간무장대들은 모두 항일구국력량으로 단합되여야 한다.…

일부 반일부대들중에는 일본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중국관내로 들어가거나 투항하는 페단들이 있다. 투항과 중도반단은 자멸의 길이라는것을 명심하자.》

그때의 연설내용을 요약하면 대체로 이상과 같은것이였다.

자위군지휘관들은 그 연설에 열광적으로 호응하였다.


이런 연설이 있은후 총사령부대표는 우리에게 수십자루의 무기를 넘겨주었다.

우리는 몽강에서 한 둬달동안 자위군의 보호를 받으며 군중들속에 들어가 선전사업도 하고 훈련도 하였으며 끌끌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대렬을 확대하는 사업도 하였다. 안도를 떠날 때 40명에 지나지 않았던 대오가 몽강에 와서는 150명 정도로 불어났다. 김성주가 큰 부대를 무어가지고 진출한다는 소문을 듣고 몽강과 그 주변의 청년들이 연방 우리를 찾아와 입대를 청원하였다. 우리는 몽강에서 마치 주권을 잡은것처럼 자유롭게 활약하였다.


안도에 련락원을 보내여 알아본데 의하면 동만의 형편도 대단히 좋았다. 우리는 그 련락원이 가져온 김정룡의 편지를 보고 안도에 떨궈두고온 우리 부대의 나머지력량이 그동안 많이 불어났다는것과 왕청, 연길, 훈춘에서도 각각 100명이상 규모의 유격대들이 꾸려졌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유격투쟁이 맹아적인 단계에서 본격적인 단계에로 이행하기 시작한 동만의 한복판(왕청)으로 우리의 활동무대를 옮기고 거기서 다른 현의 부대들과 힘을 합쳐 무장투쟁을 좀더 통이 크게 벌리려고 결심하였다. 남만원정과정에서 우리가 얻은 중요한 교훈의 하나가 바로 유격대의 력량이 미약한 현단계에서는 일정한 활동거점을 차지하고 투쟁하는것이 유리하고 능률적이라는것이였다.


우리는 몽강에서 무송을 거치지 않고 직발 안도로 갈수 있도록 행군로정을 잡았다. 부대는 로상에서 비적들과 반일부대 패잔병들을 여러번 만났다. 그들은 우리의 신식총이 탐나서 완력으로 그것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위험한 고비를 여러번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런 때에 참의부계통의 좋은 로인이 옛말에 나오는 무슨 도사처럼 우리앞에 불쑥 나타나 산을 꿰지르면서 부대를 량강구까지 무사히 안내해주었다. 그때 산을 타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큰 단련이 되였고 앞으로 유격투쟁을 장기적으로 할수 있는 준비로도 되였다.


우리가 량강구를 떠나려고 할 때 우사령의 휘하에 있는 한개 련대의 주력이 량강구에 왔다. 그 련대를 맹탄장부대라고 불렀다. 맹탄장의 비서로 있던 진한장도 부대와 함께 량강구로 따라왔다.

진한장은 나를 보자 멀리서부터 두팔을 벌리고 환성을 지르며 껑충껑충 뛰여왔다.

《성주, 이게 얼마만인가!》

그는 마치 몇십년동안 헤여졌다 다시 만난듯이 나를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아갔다.

안도에서 우사령과 담판한후 헤여지고는 한번도 상종하지 못했던 진한장이였다. 시간으로 따지면 불과 석달만에 이루어지는 상봉이였다. 그런데 진한장은 그 석달을 삼년이나 삼십년으로 착각한 사람처럼 우정에 끓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나도 역시 오랜 리별끝에 기적적으로 맛보는 상봉과 같이 느껴져 반가움을 참을 길이 없었다. 사람의 생애에서 석달이란 하나의 작은 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석달사이에 퍼그나 긴 인생이 흘러가버린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생활에 곡절이 많고 체험이 많으면 세월도 길어보인다고 하는데 그것은 옳은 리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주네 부대가 어데 있는지 몰라서 여러곳에 수소문했더랬소. 남만에 갔다가 돌아왔다고는 하는데 행방을 알수 있어야지. 그런데 량강구에서 조선공산군이 독립군과 통합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우리 부대에까지 날아오지 않았겠소.》

진한장은 맹탄장에게 나를 소개하고나서 이런 말을 꺼냈다.

《고맙소. 진동무, 나도 진동무가 보고싶었소. 그런데 량강구에는 어떻게 오게 되였소?》

《래년봄까지 이 지방에서 활동하라는 왕덕림의 명령을 받았으니까. 어떻소? 량강구에서 얼마동안 우리와 함께 활동하지 않겠소? 》

곁에서 진한장의 말을 듣고있던 맹탄장도 같은 제의를 하였다.


나는 맹탄장부대와 함께 있으면 모처럼 성사된 구국군과의 공동전선을 더 공고화할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두 사람의 제의를 흔연히 받아들이였다.

맹탄장부대는 장학량의 정규군으로 있다가 반변해서 나온 부대이므로 무기와 장비가 현대적이였다. 그 부대에는 포도 있고 기관총도 있었다. 총 몇자루에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다른 구국군에 비길수 없을 정도로 이 부대는 전투력이 아주 강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가 량강구에 머무르는 동안 맹탄장부대는 우리를 잘 호위해주었다.


그 당시 만주지방에 조직되였던 대부분의 반일부대들은 일본군의 강력한 공세앞에서 와해되거나 투항하여 그들의 지휘하에 움직이고있었다. 구국군가운데서 그래도 투항하지 않고 큰 세력으로 남아있는것은 왕덕림부대였다. 그러나 그 부대마저 일본군의 포화가 미치지 않는 만주의 동쪽변두리 동녕과 쏘련경내로 퇴각하고있었다. 반일부대들의 무력한 붕괴과정은 우리의 군사정치간부들속에서 그들에 대한 불신임을 낳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중국인반일부대의 동요와 혼란은 막을 길이 없다고 하면서 그들과의 련합전선을 실현하는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승산이 보이지 않는 반일부대와의 뉴대를 끊어버리고 반일인민유격대가 단독으로 싸워나가자고 하였다. 어느것이나 다 허용해서는 안될 위험한 사고방식이였다.


반일련합전선을 포기한다는것은 곧 수만명에 달하는 막대한 무장력을 적들의 편에 밀어던지는것으로 되며 반일부대들을 각개격파하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전술적의도에 발을 맞추는것으로 될수 있었다.

반일부대들의 동요성과 불철저성은 그들을 지도하는 상층의 계급적제한성에 근원이 있었지만 주로는 적들에 대한 공포에서부터 오는것이였다. 반일부대의 동요와 괴멸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사업을 더 적극적으로 하는 동시에 전투를 통하여 그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현실적절박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량강구에서 진한장, 리광, 호진민 등 구국군내부에 파견되여 활동하던 정치공작원들과 동만 각 현에서 온 군정간부들이 참가하는 반일병사위원회를 두차례에 걸쳐 열고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에서 나서는 대책적문제들을 토의하였다.


회의에서는 먼저 구국군공작정형이 통보되고 그 과정에 축적된 사업경험들이 교환되였으며 반일부대들의 동향이 분석총화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절대다수의 반일부대들이 항전을 포기하고 안전지대로 철수해가거나 적들에게 투항하여 반동군대로 변질된 조건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점령지대를 확대해가고있는 일본군에 타격을 주고 애국적군민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하여 우리 부대와 오의성부대, 맹탄장부대와의 련합으로 돈화현성과 액목현성을 습격하는 전투를 벌릴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맹탄장도 우리의 전투계획을 환영하였다.


2,000명에 달하는 구국군부대는 세개 조로 나뉘여 길돈선방향과 연길방향, 돈화현성방향으로 각각 진출하였으며 우리 부대는 맹탄장의 부대와 함께 푸르허동쪽과 대포시하동쪽 산길을 따라 돈화남방 대황구부근 수림속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돈화현성에 정찰조를 파견하여 고재림이 보내온 적정자료를 다시 확인하였다.


그 당시 돈화현성에는 일본수비대가 주둔해있었고 위만군길림경비 제3려단본부와 4련대, 9련대, 비행장경비대와 일본령사관 경찰과 위만경찰을 비롯한 막대한 무력이 주둔하고있었다. 적들은 매 성문포대와 령사관 분관정문에 물샐틈없는 경비진을 치고있었다.


9월 2일 새벽 3시 아군부대들은 일제히 돈화현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우리 부대의 공격방향은 남문이였고 호진민이 인솔하는 구국군부대는 서문과 북문을 거쳐 현성으로 돌입하였다.


성안에 재빨리 돌입한 아군은 적들의 지휘처를 습격한 다음 적려단지휘부와 령사관 분관, 경찰분서를 일거에 소탕하고 적려단구분대병력에 강력한 타격을 가하였다. 전투의 주도권은 아군의 손에 튼튼히 쥐여져있었다.

혼란에 빠진 적들은 2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아군에게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마구 퍼부었다.


구국군대원들속에서는 혼란이 일어났다. 이런 상태로 날이 밝는다면 전투상황이 역전되고 아군은 심대한 손실을 입을수 있었다. 나는 진한장과 호진민에게 급전된 전투정황을 설명해준 다음 이미 차지하고있는 계선에서 철수하여 유인전으로 적들을 소멸할 새로운 전술적방안을 제기하였다.


이 방안에 따라 우리 부대는 현성 서남쪽고지를, 구국군부대들은 관둔자 남쪽 무명고지를 차지하고 추격해오는 적들을 매복전으로 섬멸하였다. 불리하다고 보았던 사태가 순간에 뒤집히는것을 보게 된 구국군부대 병사들은 사기충천하여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일본당국의 보도관제가 심한 때여서 그렇게 되였는지는 잘 알수 없지만 당시의 출판물들은 이 전투에 대해서 별로 소개하지 않았다. 세상사람들은 망국 스물두돐이 되던 그해 초가을에 돈화에서 그런 전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것조차 알지 못하고있었다.


돈화현성전투는 1933년 9월에 있은 동녕현성전투와 성격상 류사하다고 할수 있다 돈화현성전투가 구국군과의 련합으로 진행된것처럼 동녕현성전투도 구국군주력과의 합작으로 설계되고 성사된 전투였다. 규모로 보아도 돈화현성전투는 동녕현성전투와 어슷비슷하였다. 그러나 돈화현성전투는 조중인민의 공동투쟁력사에서 항일유격대가 중국인반일부대와의 협동작전으로 일본군을 타승한 첫 현성전투라는데 의의가 있다.


《중국사람들은 청, 로 두 대국을 일거에 격파한 일본의 군사적명성앞에서 너무나도 혹독하게 위축되였더랬소. 그런데 오늘은 그 위축감에서 완전히 해방되였소.

령토해방에 앞서 정신해방을 이룩하였단 말이요.》

진한장은 분명 나를 포옹하면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혀있었던것을 똑똑히 기억하고있다.


《성주, 우리 이 길에서 영영 헤여지지 말자구!》

그는 내 손을 그러잡고 격정에 넘쳐 말했다. 그가 이 길이라고 한것은 공동투쟁을 념두에 두고 한 말이였다. 진한장은 그후 전사할 때까지 자기자신이 선창을 뗀 이 서약에 충실하였다.


돈화현성전투가 있은 후 한주일가량 지나서 우리는 구국군과 함께 액목현성을 습격하였다. 아군은 이 전투에서도 역시 승리하였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싸움이였지만 그 총성이 남긴 여운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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