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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6-1. 무송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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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341회 작성일 15-08-18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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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제 6권 제 16장. 압록강을 넘나들며


1. 무송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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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리와 리명수에서 <동기대토벌>에 혈안이 되여 돌아치던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후 나는 주력부대를 이끌고 또다시 장백산줄기를 넘어 북상행군의 길에 오를 결심을 하였다.

내가 무송원정안을 공포하였을 때 우리 부대의 대원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하였다. 이제 당장 국내에 들어가서 적들을 답새기게 되였다고 가슴들을 들먹이며 명령을 기다리는 때에 갑자기 북상행군이라니 웬일인가, 모처럼 개척한 서간도와 백두산을 등지고 북으로는 왜 간다는것일가, 이것 참 모를 일이다 하는 표정들이였다. 그들은 모든것이 다 잘되여가는 때에 부대가 무송으로 원정을 떠나야 할 리유란 전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것은 무리가 아니였다.


당시는 우리 군민의 사기가 절정으로 치달아오르고있던 시기였다. 적들과의 거듭되는 혈전에서 우리는 련승하고 있었다. 적의 발악적인 <토벌>공세와 정치, 경제, 군사적 봉쇄작전에도 불구하고 유격대오는 새로운 참군자들로 나날이 확대되였으며 무장장비와 전투력은 상당한 정도로 강화되였다.


백두산지구와 압록강연안 일대는 온통 우리 세상으로 되여 있었으며 싸움의 주도권은 우리의 손에 튼튼히 장악되여 있었다. 우리의 지하조직망들은 서간도전역으로 조밀하게 뻗어갔다. 남호두를 떠날 때 우리가 세웠던 일차적목적은 성과적으로 달성된 셈이였다.


이제 남은것은 국내진공작전이였다. 하루빨리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해야 조국강토에 반일민족통일전선의 선풍도 세차게 일굴수 있었고 새형의 당을 창건하기 위한 투쟁도 본격적으로 심화시킬수 있었다. 조국에 진출하여 원쑤들을 징벌하는것은 우리모두가 품고있던 가장 큰 꿈이였을뿐아니라 국내인민들의 가슴에 타번지던 최대의 소망이기도 하였다.

국내인민들이 우리의 조국진출을 얼마나 고대했는가 하는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었다.


지양개에는 난덕이라고도 부르고 나하덕이라고도 부르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 동네가 있었다. 이 마을의 구장이며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인 류호는 원군사업을 잘하였다. 언제인가 그는 후방물자를 가지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우리 밀영으로 찾아온 일이 있다. 그런데 그가 인솔해온 짐군들속에는 갑산에서 들어온 농민도 세사람이나 있었다.


그때 갑산사람들은 좁쌀과 귀밀미시가루 그리고 미투리를 잔뜩 짊어지고 경계가 삼엄한 압록강을 건너 우리 밀영에까지 찾아왔다. 그 많은 후방물자를 셋이서 지고왔다는것도 놀라운 일이였지만 그보다 더 우리를 놀라게 한것은 그들이 백두산 원시림속에서 향방을 잃고 헤매는동안 몇끼씩이나 굶으면서도 원호미만은 한줌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밀영까지 지고왔다는 사실이였다.


미투리에 깃든 사연도 그만 못지 않게 우리의 심금을 울리였다. 그때 그들이 가지고온 미투리는 자그마치 200여컬레나 되였다. 삼오리를 꼬아 신총을 만들고 신바닥에도 삼오리에 느릅곁을 섞어 정성스럽게 삼은 그 미투리들은 하나같이 맵시가 있고 탐탁한것들이였다.


김산호가 갑산사람들의 로고를 치하하자 그들은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옛말에 나오는 도사처럼 채수염을 길게 드리운 좌상령감은 김산호의 손을 잡고 이런 말을 하였다.

<백두산장수들에게 미투리밖에 삼아올리지 못하는 이 불충불의한 백성들을 용서해주시오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수고를 로고라고 하니 오히려 몸둘바를 모르겠소이다. 초라한 신발들이지만 이걸 군화삼아 신고 우리 갑산땅에서도 저 섬나라 오랑캐놈들을 료정내준다면 죽어도 눈을 감겠소이다. 우린 그저 혁명군만 기다리겠소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군을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은 비단갑산의 농민들뿐이 아니였다. 언제인가 원군물자를 지고 우리 밀영에 찾아왔던 경상도출신의 리병원로인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적이 있다.

<장군님, 대체 언제쯤이면 저 쪽발이들을 조선땅에서 내쫓게 되겠는지 내 생전에 그런 날을 보게 될가요?>


조국동포들이 우리에 대해 품고있는 불같은 그리움과 따뜻한 정을 우리는 거의 매일매시각마다 절감하고있었다. 갑산사람들이 마련해온 미투리를 한컬레씩 받아안은 우리 동무들은 누구나 할것없이 한시가 새롭게 조국에 진군하고싶은 강렬한 충동과 념원에 휩싸여있었다. 나의 심정 역시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전우들에게 조국방향과는 정반대되는 북쪽방향으로 행군하라는 명령을 내리였다. 그리고 그 명령을 받고 의혹을 금치 못해하는 전우들에게 북상행군을 후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북행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사실 조국으로 가는 남행길이나 다름없다, 조국으로 나가자면 부득불 이 길을 걷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잠시 무송쪽으로 가는것도 결국은 국내진공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라는걸 알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무송원정을 작전하면서 우리가 달성하려고 한 기본목적은 이정화령의 령활한 전법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장백지방에 집결되고있는 <토벌대>력량을 최대한으로 분산시키며 적들의 주의를 딴데로 돌림으로써 이 일대에서 번성하고있는 지하조직망건설사업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편 대부대에 의한 국내진공작전실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자는데 있었다.


적들은 1936년 겨울의 <동기대토벌>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혁명군을 고립압살시키려는 기도를 조금도 버리지 않고 조선강점군과 국경수비대를 비롯하여 위만군과 경찰대의 방대한 력량을 우리 부대의 활동구역에 계속 투입하고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우리가 주동에 튼튼히 서서 우리의 구상과 결심대로 혁명을 줄기차게 상승시키자면 활동지역을 얼마동안 다른 고장으로 옮겨야 하였다. 그래야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고 서간도와 국경 일대의 혁명운동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수 있었다.


장백에 집중되고있는 적들의 <토벌>력량을 분산시키고 압록강연안의 혁명조직들을 보호하는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에도 좋은 조건을 지어주는것으로 되였다. 인민혁명군이 국내에 들어가서 대부대활동을 하려면 우선 우리의 후방이며 출진기지인 서간도에 적들의 대병력이 집중되지 못하게 하여야 하였다.

<도문회담>의 내용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적들이 서간도일대에 무력을 집중하는 목적은 인민혁명군부대들을 장백의 오지에 몰아넣고 압살하자는데도 있었지만 기본은 우리의 국내진출을 결사적으로 막자는데 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부대가 미구에 국내진격을 단행하게 되리라는것은 적들에게 있어서도 기정사실로 되여 있었다. 사실상대부대에 의한 국내진출은 시간문제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제일 두려워한것이 바로 이 점이였다. 인민혁명군의 대부대들이 조선에 들어가서 군사정치활동을 벌린다면 그것은 일본본토를 들이치는것과 같은 굉장한 효과를 낼수 있었다.

적들은 우리가 국내에 나가서 몇방의 총소리를 올리기만 하여도 그것이 어떤 화단으로 되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백두산지구에 자리를 잡은 그 해 겨울부터 그들은 인민들을 동원하여 매일밤 압록강의 얼음을 까는 소동을 벌리였다. 인민혁명군이 개별적으로든지 집체적으로든지 조선땅에 스며들지 못하게 하자는것이였다. 우리의 국내진공을 얼마나 무서워했으면 적들이 그런 유치한 방비책에까지 매달렸겠는가.


일본천황이 자기의 시종무관을 보내여 조만국경을 3주일간이나 시찰하게 한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잠간 언급한바가 있지만 일본 정계와 군부의 우두머리들은 우리 나라 북부국경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시종무관은 그때 국경경비인원들에게 국경을 철벽으로 지키라는 천황의 어지도 전하고 천황부부의 하사품도 전달하였다. 그 야단스러운 전달식장면을 놓고 우리 대원들은 일본천황도 인민혁명군이 조선으로 쓸어나올가봐 조마조마해하는 모양이라고 하면서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대부대에 의한 국내진출을 성사시키자면 반드시 적들이 <동장철벽>이라고 떠드는 국경경비진에 몇개의 돌파구를 뚫어야 하였다. 이 돌파구를 뚫기 위한 선행작업이 바로 장백의 산과 들에 와글와글하는 적의 <토벌>력량을 최대한으로 분산시키는것이였다. 적들을 분산시키자면 무엇보다먼저 우리가 장백땅에서 자리를 뜨는 흉내라도 내야 하였다. 우리가 부대를 데리고 다른 고장으로 가게 되면 어차피 적들이 우리를 따라오게 될것이고 국경방비도 자연히 허술해질수밖에 없을것이였다.


우리는 무송원정과정에 무송현과 림강현, 몽강현의 접경지대에서 활동하는 최현부대와 1군 2사의 동무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협동작전계획도 세우려고 하였다.


우리가 무송원정을 통하여 달성하려고 한 다른 하나의 목적은 이 원정을 통하여 신대원들을 조성된 정세의 요구와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명에 맞게 정치, 군사, 도덕적으로 충분히 교양하고 훈련시키자는데도 있었다.


백두산지구에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가 창설된 후 우리는 수백명에 달하는 참군지망자들로 대렬을 보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적극적인 군사, 정치 활동과 그 성과에 고무된 서간도일대의 청년들은 앞을 다투어 우리 부대에 입대하였다. 국내에서도 련일 애국청년들이 무장투쟁에 참가하려고 우리를 찾아왔다.

부대의 력량이 량적으로 늘어난 조건에서 우리는 그 질을 강화하는데 힘을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데서 기본으로 되는것은 지휘관과 대원들의 수준을 높이는것이였다. 그들의 사상의식수준과 군사실무수준을 높이지 않고서는 부대를 백전백승하는 대오로 만들수 없었다. 그런데 수백명에 달하는 우리 부대의 신병들은 하나같이 계급의식도 강하고 혁명열의도 높았으나 아직 전투경험이 없었으며 유격전법에 정통하지 못하였다. 정치문화수준도 높지 못하였다. 우리의 신병들은 어제날까지 부대기밭을 뚜지거나 날품팥이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살아온 순박한 산골내기들이였다. 호미질, 가래질, 작두질 같은 일이라면 펄펄 날아도 군사에서는 까막눈들이였다. 초보적인 사회발전의 원리는 고사하고 조선글 자모조차 모르는 문맹자들이 있었던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고생도 많이 하고 로동에도 단련된 청년들이기는 하나 그들은 유격대생활에서 겪게 되는 곤난들을 잘 감당해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떤 청년들은 동요도 하고 투정질도 하였다. 잠이 모자라고 행군이 고되다고 두덜거리는 청년도 있었고 신이 꿰지거나 옷이 해지면 자기 손으로 기워야 할텐데 그런것마저 하지 못하고 구대원들에게 부담을 끼치는 청년도 있었다.

제식동작도, 야간행군법도, 방위판정법도 모르는 햇내기들, 총이 고장나면 구대원들더러 <이것 좀 봐주시오.>하고는 우두커니 서있는 그런 신대원들을 그대로 데리고 조국진출을 단행할수는 없었다.


신대원들을 받아들인후 짬이 나는대로 구대원들을 붙여 속성으로 훈련도 시키고 토막상식도 배워주면서 자질을 높여주느라고 하였지만 그런 방법만으로는 그 많은 신병들을 유격전의 요구에 맞게 다방면적으로 준비시킬수 없었다. 리상적인 방도는 적들의 주의가 덜 미치는 울창한 수림지대에 가서 얼마동안 품을 놓고 신대원들에 대한 군사정치훈련을 조직하는것이였다. 이런 본격적인 교육과정이 없이는 그들을 쇠소리가 나는 군인들로 키워낼수가 없었다. 그런데 장백일대에는 신병들의 교육에 알맞춤한 지대가 없었다. 장백땅은 평지나 오지나 할것없이 다 적들에게서 <참빗질>을 당하고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신병훈련의 적지로 혁명군의 후방밀영들이 집중되여있는 무송지구를 택하였다.


총괄적으로 볼 때 무송원정은 적의 대병력이 집요하게 달려드는 조건에서도 주도권을 계속 튼튼히 틀어쥘수 있게 하는 진공적인 대책이였으며 부대의 전투력을 일층 강화하고 혁명군의 국내진출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령활한 전술적조치였다. 이 원정은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진출한후 반년동안 쌓아올린 성과를 공고히 하고 확대발전시키는 길이였다.


1937년 3월 어느날 우리는 무송원정의 길에 올랐다. 거기에는 기본전투성원들과 함께 재봉대와 작식대, 무기수리소 성원들을 포함한 후방부문의 성원들까지 다 참가하였다.

위증민과 전광, 조아범도 우리와 동행하였다.

첫날의 행군목표는 되골령을 넘는것이였다. 하루종일 행군을 하였는데 눈이 어찌나 많이 쌓이고 날씨가 얼마나 추웠던지 령을 다 넘지 못하고 중턱에서 하루밤을 숙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해 겨울 장백산줄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리였다. 적설이 어떻게나 심했던지 어떤 골짜기에는 눈이 몇길씩 쌓인데도 있었다. 그런데서는 몸으로 눈을 밀어제끼면서 한치한치 앞으로 전진해야만 하였다.


장백산줄기에 얼마나 많은 눈이 내리는가 하는데 대하여 새 세대들이 똑똑한 표상을 가지려면 그 당시 무송원정에 참가했던 투사들의 체험담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원정을 끝내고 해토가 되여 백두산쪽으로 나올 때 우리는 이깔나무정수리에 미투리 한짝이 걸려있는것을 보았다. 그것은 장백에서 입대한 신입대원이 무송으로 행군해갈 때 눈속에서 잃어버린 미투리였다.


3월초면 조국의 벌방지대에서는 눈석이가 한창이지만 백두산일대에서는 아직도 동장군이 판을 친다.

엄혹한 설한풍속에서는 천막조차 제대로 칠수 없었다. 설사 친다 해도 바람을 견디여내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런 정황에 부닥칠 때마다 깊은 눈속에 한 개 분대정도의 인원이 숙영할수 있는 구뎅이를 파고 노루가죽이나 나무껍질을 깔고 배낭에 기대여 앉아자는수밖에 없었다. 구뎅이입구에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백포를 쳤다. 에스키모인들이 얼어죽지 않고 눈집이나 얼음 속에서도 능히 살아가는 비결은 우리는 원정과정에 체험을 통하여 터득하였다.


우리는 그때 무릎까지 올라오는 큰 버선에 갑산사람들이 삼아준 미투리를 신고있었다. 백두산일대에서는 그런 차림새가 아니고서는 겨울에 밖으로 나다닐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 미투리를 신은채로 우등불옆에 누워서 숙영하였다.

우리는 다음날에야 되골령을 넘어섰다. 이 원정이 보통원정이 아니였다. 우리 인민들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면 남패자에서 북대정자에 이르는 1938년 겨울의 행군을 의례히 생각한다. 물론 그 행군이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울수 있으리만큼 간고했던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간고성으로 말하면 무송원정도 그에 못지 않은 어려운 행군이였다. 행군거리를 따지면 100키로메터도 되나마나할것이다. 기일은 25일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고난의 행군> 당시의 100여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그렇지만 그 원정도 매우 간고한 로정이였다.


추위에 시달리고 굶주림에 쪼들리고 수면부족으로 고통을 당하고…무슨 고생인들 없었겠는가. 싸움을 여러 번 하다나니 피도 많이 흘리고 희생도 많이 내였다.

무송원정은 로대원들에게 있어서 조차 이발을 악물고 참아 내지 않으면 안되였던 엄청난 시련이였다. 그런즉 입대한지 몇 달밖에 안되는 신대원들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모든 구대원들이 신대원들을 한명씩 맡아 돌보아주도록 하였다. 나도 3~4명 되는 약골들의 보호자가 되였다. 구대원들은 모두 신대원들의 착실한 형구실을 하였다. 행군할 때에는 총이나 배낭 같은것도 메다 주었고 쉴 참에는 불을 피워 몸도 녹여주었으며 숙영할 때에는 잠자리도 마련해주고 옷이나 신발이나 모자 같은것도 기워주었다.


주경동출신의 한 신입대원은 량쪽 엄지발가락이 시뻘겋게 드러나도록 신발이 험하게 해졌지만 쉴참에 그것을 손질할 궁리는 하지 않고 휴식구령이 내리기 바쁘게 우등불곁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잤다. 구대원들은 장백에서 신고 떠난 갑산미투리도 아직 꿰뜨리지 않았는데 그는 예비로 가지고 떠난 지하족마저 다 해뜨렸다.


나는 그에게 나의 예비신발을 갈아 신기고 돗바늘로 그가 신고있던 지하족을 손질하였다. 손질한 지하족은 배낭속에 건사해두었다가 다른 신입대원에게 갈아 신기였다. 해진 신발을 손질할 때면 본인들이 딱해할것 같아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몰래 하군하였다. 그러다가 한번은 신발임자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대원은 눈물을 떨구면서 나에게 매달려 무작정 바느실과 깁던 신발을 빼앗아냈다.


그날 나는 신입대원들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동무들이 집에서는 아버지가 삼아주는 짚신을 신고 어머니가 기워주는 옷을 입고 지내다보니 바느질도 못해보았겠지만 유격대원이 된 이상 옷도 신발도 다 자기 손으로 기워 입고 기워 신을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살 도리는 자기가 해야 한다. 오늘은 나와 함께 신발 깁는 법이나 배우자. …

그들은 사령관에게 당치않은 부담을 끼쳤다고 하면서 몹시 미안해하였다.


신발이나 옷이 제일 심하게 해지는 경우는 얼음버캐가 덮인 눈우를 지날 때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얼음버캐가 덮인 눈우를 걸을 때에는 발을 어떻게 옮겨놓아야 하는가 하는 요령을 대주었다.


무송원정은 주림을 이겨내는 투쟁과정이기도 하였다. 많은 고난이 시시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군 하였으나 그 모든 고난가운데서 가장 심각하게 우리를 위협한것은 식량난이였다. 행군속도가 예상보다 어방없이 떠지는 바람에 장백을 떠날 때 마련해가지고온 얼마 안되는 식량은 되골령을 넘어서기 바쁘게 인차 떨어지고말았다.


언풀뿌리조차 캐먹을수 없는 눈판에서 무슨 수로 먹을것을 얻어내겠는가. 출로는 적의 군량을 빼앗는것인데 우리는 어디에 적이 있는지조차 모르고있었다.

그때 식량고생을 하던 인상이 너무도 강해서 후 날 나는 어느 동무에게 무송원정은 사실상 <기아원정>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한 일까지 있었다. 옹근 하루동안 강냉이 한알 입에 넣어보지 못하고 맹물과 눈으로 창자를 달래면서 수십리를 행군한 날도 있었으니 그 끔찍스러운 기아의 고통을 어찌 잊을수 있겠는가.


원정이 거의 끝날 무렵에 동강부근의 수림속에서 있은 일이였다. 우리는 그 수림속에서 중국집 한채를 발견하였다. 이틀째나 낟알구경을 하지 못하고 맹물로 끼니를 에워온 우리는 그 집을 보자 혹시 식량을 구할수 있지 않을가 하는 한가닥의 기대를 가지게 되였다. 산에 숨어서 아편농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식량의 예비가 있었다.


우리는 집주인에게 부대가 며칠째 낟알구경을 못하였는데 식량이 있으면 다문 얼마만이라도 팔아달라고 사정하였다. 그러나 집주인은 산림부대가 몽땅 털어가버려서 한줌도 없다고 딱 잡아뗐다. 매돌밑에 강냉이 겨가 그득 쌓여있는것으로 보아 분명 강냉쌀이나 강낭가루를 많이 내둔것 같은데 아무리 사정을 하여도 막무가내였다. 우리는 궁색스러운대로 매돌밑에 내버린 강냉이겨로 끼니를 에우기로 하였다.


강냉이겨는 조겨나 피겨와 달라 닦아먹어도 식도에 자꾸 붙기만 하고 잘 넘어가지 않았다. 매돌에 갈아먹어도 넘기기가 어려웠고 설사 물에 풀어서 억지로 넘긴다고 해도 시장기를 더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생각다 못해 전령병 백학림을 불러 지시하였다.


<여기서 고개를 몇 개만 넘어가면 오의성부대가 있을것이요. 사령은 지금 없겠지만 그 부하들은 더러 남아서 항전을 계속하고있소. 동무는 거기 가서 내가 왔다는걸 알리고 식량을 얼마간이라도 보태달라고 이르고 오시오. 쌀이 있으면 지난날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우리의 청을 외면하지는 않을것이요.>

백학림은 오의성부대로 달려갔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오의성부대의 지휘관이 강냉이겨 한마대를 메고 일부러 찾아와서 나에게 량해를 구하였다.

<김사령께서 모처럼 하시는 부탁을 어찌 거절할수 있겠습니까. 돕고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저희들도 식량이 떨어져서 굶고있는 형편이라 이런걸 가지고 찾아왔다고 나삐 생각지 말아주시오.>


그날 우리 대원들은 그 중국집안팎을 두루 살피다가 앞마당에 놓인 관속에 강낭쌀이 가득 들어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만주지방사람들은 후날에 쓸 관을 미리 만들어서 집앞에 놓아두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성불가침의 장의물로 되고있었다. 이런 풍습으로부터 항일혁명때 만주지방에서는 관과 관련된 일화들이 많이 생겨났다.


집주인들이 관속에 쌀을 감추어둔것은 리해할만한 일이였다. 그런데 그 관속의 쌀이 그만 우리 동무들의 분격을 자아냈다. 제일 심하게 격노한것은 신입대원들이였다. 주경동에서 입대한 한 신입대원은 나한테 뛰여와서 이런 송사질을 하였다.

<장군님, 이 집 주인들은 심보가 아주 고약한 사람들입니다. 소나 말 같은 짐승들이 제 집 뜨락에 들어와도 먹을것을 주는것이 인간의 도리이고 례절인데 이 집 사람들은 너무 고약합니다. 도대체 피가 있는 인간들입니까. 한번 혼내줍시다. 그리고 식량은 압수합시다.>

나는 그 대원을 설복하였다.

…압수라니? 그래서는 안된다. 이 집 식량을 조금이라도 건드려서는 안된다. 차라리 우리가 굶는것이 낫다. …

그 신입대원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시면서 물러갔다.


우리는 관속의 식량에 대하여 알고있다는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고 강냉이겨로 식사를 대신해가며 집주인들을 꾸준히 교양하였다.

주인들은 우리와 작별을 하면서도 관속에 식량이 있다는데 대해서는 종시 말하지 않았다.

쌀을 압수하자고 제기하던 신입대원이 나를 찾아와서 <그것 보십시오. 저런 사람들한테는 교양이 통하지 않습니다.>하고 말했다.

나는 <아니요. 쌀은 안주었지만 저분들은 우리가 좋은 군대라는걸 리해하기 시작했소.>하고 말해주었다.


이 사실을 통하여 신입대원들은 인민들속에는 각이한 류형의 인간들이 있다는것, 그런것만큼 교양도 천편일률식으로 해서는 안되며 무슨 일이나 사람의 마음이 움직일 때만이 성사된다는것, 그러므로 군대가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고 해서 인민의 재산을 함부로 침해하거나 그들의 호의나 도움을 강제로 요구해서는 안된다는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였다.


만일 그때 우리가 노여움을 삭이지 못하고 집주인들을 혼쌀냈거나 그들이 우리를 속인데 대한 벌로 식량을 압수하였더라면 신입대원들은 인민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좌우명을 어기고 인민들앞에서 쩍하면 호령을 하거나 특전을 바라는 관료라든가 마적과 같은 인간들로 변질되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만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다가 멀리서 행군대오의 뒤를 쫓아오고있는 처서군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단두산목재소 로동자들이였다. 행색이 하도 수상하기에 어째서 우리 대렬을 계속 따라오는가고 물었더니 적들한테서 유격대의 종적을 탐지하여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솔직하게 자백하였다. 그들이 하는 말이 유격대의 종적을 알아오면 그 정보의 가치에 따라 품삯을 많이 받고 그냥 돌아가면 <통비분자>로 몰리거나 모진 곡경을 치르게 된다는것이였다.


우리는 그 로동자들을 통하여 단두산목재소에는 수많은 인부들과 산림경찰대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힘든 싸움을 하게 되더라도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목재소를 치기로 결심하였다.

이 싸움에 7련대와 8련대를 동원시켰다. 두 련대의 전투원들은 목재소를 치고 창고를 수색하였으나 한포대의 쌀도 얻지 못하였다. 목재소 주인들은 유격대의 습격이 두려워 쌀을 창고에 저장해두지 않고 매일매일 딴곳에서 실어다 먹고있었다. 목재소마을에는 예상치 않았던 700~800명의 적들이 머무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쓸어나와 우리 전투원들에게 대항해 나섰다. 우리 주력부대가 무송쪽으로 움직이고있다는 통보를 받고 <토벌>에 새로 증파되여 온 자들이였다.


7련대와 8련대는 목재소에서 끌어온 20마리 정도의 소를 몰고 본대로 돌아왔다.

추격하는 적은 오중흡이 책임진 방차대가 막았다. 오중흡은 각 소대에서 결사대원들을 선발하여 무려 10여차례의 접전을 하면서 적들을 완강하게 견제하였다. 날이 밝은 다음에 보니 적들은 50메터 밖에까지 와있더라고 하였다.


방차대원들이 적을 막아내는 동안 주력은 동쪽에 있는 두개의 봉우리를 차지하고 전령병을 보내여 그 두 봉우리사이의 새초밭으로 오중흡이네 방차대가 적을 유인하며 빠지도록 하였다. 방차대의 유인전술에 걸려 무연한 새초밭에 들어선 적<토벌대>는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도주하였다.


주력이 전투에 참가하기전에 일부 대원들은 장대뒤에서 소를 잡았다. 잡는 족족 우등불에 구워냈는데 소고기냄새에 창자가 뒤집히는듯하였다. 나머지 소들은 각을 떠서 배낭속에 간수하였다. 우리는 그 고기를 날 것 채로 먹으면서 행군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2~3일후에는 그것마저도 다 동이 나고 말았다.


적들의 추격이 심해지자 전광은 동만강에 있는 밀영으로 가버리였다. 그는 밀영에 돌아가자 우리 대원들에게 통밀 몇말을 주어보냈다.

우리 대원들은 정치주임이란 사람의 인심이 고작 그것뿐인가? 덩지값을 못한다고 하면서 전광을 비난하였다.

어떤 대원들은 그를 용기도 없고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이라고 욕하였다. 그들은 전광이 무송현성전투때 보조적으로 하게 되여있었던 만량하습격전투를 포기함으로써 전반적인 작전에 혼란을 주었던 사실에 대하여 여전히 의혹을 품고있었다. 전광이 간부티를 내는데다 어렵고 위험한 모퉁이에서 매번 몸을 사리였기 때문에 우리 부대의 관병들은 대체로 그를 시답지 않게 보고있었다. 군중의 감각은 정확하였다. 전광은 그 후 변절하여 우리 혁명에 막대한 해독을 끼치였다.


부대는 적들을 뒤에 달고 만강물곬을 따라 무송쪽으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전광이 보낸 통밀 몇말도 인차 바닥이 났다. 우리는 또다시 절량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후 우리는 뒤따르는 적들을 따돌리고 두도령이라는 곳에서 얼마간 머물렀다. 식량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행군을 더 계속할수 없었다. 강태옥을 비롯한 만강출신의 신입대원들이 먹을것을 해결해오겠다고 자청해나선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들은 그 전해 만강에서 연극 <피바다>와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보고 격동되여 즉석에서 참군을 탄원해나섰던 신입대원들이였다.

부대가 만강가까이에 이르렀다는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김택환을 앞세우고 나를 찾아왔다.

<장군님, 우리가 가서 식량을 좀 구해보겠습니다. 만강이 코앞인데 유격대가 굶는다는게 말이 됩니까. 만강에 쌀은 바르지만 감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에 유격대를 원호하려고 모아두었던 감자가 있는데 우리가 그 장소를 잘 압니다.>

그런 말이라도 들으니 마음이 좀 놓이였다.


이렇게 되여 10명 정도의 식량공작대가 만강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기대했던것보다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군량으로 쓰자고 저장했다던 그 감자는 메돼지들이 달려들어 다 파먹고 없더라고 하였다. 식량공작대원들은 메돼지들이 먹다가 버리고간 얼마 안되는 감자를 지고 귀로에 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의 처지에서는 그것도 큰 소득이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였다. 본대로 돌아오던 식량공작대원들이 그만 시장기를 참지 못해 숙영지가까이에 와서 우등불을 피워놓고 감자구이를 하는 엄중한 실수를 하였던것이다.

그들은 새벽에 숙영지근처에서 우등불을 피움으로써 자기 자신들뿐아니라 전부대의 위치를 로출시켰으며 적들을 발견한 다음 보초소에 아무 신호도 보내지 않고 무작정 숙영지로 뛰여왔기 때문에 취침중에 있던 부대가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전투에 말려들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자유주의란 종종 이처럼 예상치 않은 후과를 빚어내군 하였다.


나는 신입대원들에게 늘 유격대에서 자유주의는 금물이다, 규률을 지키는 것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을 부담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규률은 군대의 생명이기때문이다, 숙영할 때 신을 벗고 자지 말며 어디에 가든지 흔적을 남기지 말라, 상관이 지정해주지 않은 장소에서 우등불을 피우지 말며 추격을 받을 때에는 밀영이나 숙영지의 위치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적들을 유인하라, 파악이 없는 풀은 함부로 먹지 말라는 등 유격대가 지켜야 할 규률과 행동규범에 대하여 강조하군 하였다.

그러나 만강에 다녀온 식량공작대원들의 과오로 하여 우리는 적들과의 접전에서 아까운 전우들을 잃었다.


나는 그때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다. 비판으로 죽은 사람들을 살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전우들의 죽음은 비판을 대신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비판이나 처벌보다도 더 준엄한것이였다.


전령병 최금산도 그때 전사하였다. 우등불을 발견하고 우리의 식량공작대원들을 은밀하게 뒤따르던 적들은 숙영지를 포위하고 총질을 시작하였다.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 최금산은 일신이 그대로 방패가 되여 사령부쪽으로 다가드는 적을 막아 결사적으로 싸웠다. 내가 맨 후위에서 철수하는것을 보자 그는 리봉록과 함께 내옆으로 뛰여와 몸으로 나를 막으면서 적들에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그때 그들이 나를 결사적으로 호위해주지 않았더라면 내 신상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났을지 모른다.


여러발의 적탄에 치명상을 입었지만 최금산은 마지막탄알이 다할 때까지 엄호사격을 그치지 않았다. 그의 군복은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리봉록이 눈속에서 최금산을 안아일으켜 등에 업었다. 나는 후위에서 싸창으로 리봉록을 엄호하였다. 리봉록이 맥이 진할 때면 내가 최금산을 업었다.

프위를 돌파한 다음 리봉록의 등에 업혀있던 금산이를 내려놓고보니 그는 이미 숨이 진 몸이였다.


최금산은 남보다 특별히 잘난데도 없고 기질상으로 볼 때 다른 사람들의 인상에 남을수 있으리만큼 모가 나게 두드러진데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사령부성원들은 그를 친동생처럼 사랑하였다.

그는 꿈이 많고 공상이 많은 소년이였다. 그가 바라는것중의 하나는 기차를 많이 타보는것이였다. 그는 조국이 독립된 다음에는 기차를 몰고 다니겠다고 늘 말하군 하였다.

<참, 나이가 아깝소! 이 애가 아직 스무살도 안됐지?>

숨진 최금산을 우등불곁에 내려놓았을 때 내 등뒤에서 누구인가 한 말이다. 그 한마디의 말에 그만 온 부대가 오열을 터뜨리였다.


시체를 안장하기전에 최금산의 배낭을 헤쳐보니 그 안에는 갑산사람들이 삼아준 미투리와 미숫가루 한봉지밖에 없었다.

이국땅에서 태여나 이국의 물을 마시며 자라난 류랑민의 아들 최금산의 가슴속에 간직된 가장 큰 소망은 고국땅을 밟아보는것이였다. 전령병이 되여 먼 북만의 남호두에서 백두산으로 나올 때에도 그는 매일같이 나에게 이제 얼마나 더 가면 조국땅을 볼수 있는가, 서간도땅에 가면 조선사과를 먹어볼수 있는가, 동해바다가 기막히게 멋있다는데 장군님은 가보았는가, 앞으로 몇해안에 평양이랑, 서울이랑, 부산이랑 칠수 있는가 하는것을 비롯하여 별의별 질문을 다하였다. 그가 갑산농민들이 삼아온 미투리를 신지 않은것은 조국진군의 날을 맞을 때까지 아껴두자는 생각에서였다.


최금산은 나와 함께 한모포를 덮고 오랜 기간 사령부 전령병으로 일해온 귀염둥이였고 어린 전우였다. 그래서 내가 여느 전우들과 영결할 때보다 더 슬프게 울었는지도 모른다.

두도령의 땅거죽은 왜 그리도 모질게 얼어붙어있었는지 도끼로도 총창으로도 도저히 흙을 뚜져 낼수가 없어 우리는 최금산을 맨 눈을 덮어 안장하였다. 후날에라도 그를 다시 온전히 묻어주고 싶어 표적을 해두었다.


눈이 다 녹은 다음 무송원정을 총화하고 백두산쪽으로 다시 나갈 때 나는 부대와 함께 최금산을 안장하였던 그 장소로 찾아갔다.

우리는 동강밀영에서 마련해가지고 온 새 군복을 그에게 갈아입히고 양지바른 땅속에 그를 온전히 안장해주었다. 무덤앞에는 몇그루의 진달래도 떠다 심었다. 그가 죽어서라도 그 꽃나무에서 조국의 향기를 맡게 해주고 싶었다. 이국에서 자란 꽃나무일망정 그 향기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진달래는 그가 가장 사랑하던 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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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금산아, 잘 있거라! 우리는 또다시 백두산으로 나간다. 이번 여름에는 네가 소망하던대로 부대를 데리고 기어이 조국으로 진군하련다. 조국에 나가면 너의 원쑤를 백배, 천배로 갚아주마.)
나는 마음속으로 최금산과 이런 말을 하며 그의 령전에 작별인사를 남기였다. 그때의 정경을 회고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난다.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 백학림의 나이만큼 되였을것이다.

1937년 봄의 무송원정때 우리는 아까운 전우들을 많이 잃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이라는 노래의 구절과도 같이 우리는 그때 가는곳 마다에서 피를 흘리였다. 우리 앞에 놓인 한치한치를 피로써 헤쳐나갔다.
이 글에서 나의 전우들이 발휘한 그 빛나는 위훈과 그들이 바쳐온 로고를 그대로 실감 있게 그려내지 못하는것이 유감스럽다. 하지만 붓이 아무리 무딘들 정성이야 다 고이지 못하겠는가. 무송의 그 험한 령과 골짜기에서 조선을 끝가지 찾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우리의 곁을 떠나간 전우들, 죽으면서도 나에게 건강하십시오, 잘 싸워주십시오 하고 미소를 보내던 사랑하는 전우들의 령전에 비문을 쪼아박는 심정으로 나는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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