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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2-4. 혁명전우 장울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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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928회 작성일 15-06-12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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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혁명전우 장울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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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과 죽은 사람사이에도 우정이 계속될수 있는가? 계속된다면 어떤 형태로 계속되는가?

이것은 전령병 김정덕이 계관라자전투에서 전사한 직후 그의 딱친구였던 김봉석이 나에게 던진 물음이다. 김봉석은 빨찌산시절의 나의 전령병이였다. 김정덕이 전사한후에도 그는 오래동안 고인을 잊지 못해 비분속에 잠겨있었다.


나는 그때 그에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사이에서도 우정이 계속될수 있다는것과 그런 경우의 우정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잊지 않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추억속에 비껴드는 형태로 지속된다고 대답했었다. 그 실례로 나와 장울화의 우정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것은 체험에 기초한 내 심정 그대로의 고백이였다. 장울화가 서거한지 몇해가 지난 때였지만 나는 그를 잊지 않고있었다. 꿈에도 그가 문득문득 나타나 생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와 우정을 나누군하였는데 그런 꿈을 꾸고났을 때의 심정이란 실로 이상야릇한것이였다.


김봉석은 나의 대답을 듣고나서 이렇게 물었다.

《사령관동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일가요?》

전령병은 그때 분명 나의 대답에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을만한 어떤 심오한 훈계를 듣고싶어하였던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질문에 충분히 대답할수 있는 준비가 되여있지 않았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과의 우정에 관한 문제가 나의 정신생활에서 일정한 령역을 차지하고있은것만은 사실이나 그것은 두메산골의 보통초부들도 생각할수 있는 범상하고도 소박한것이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할수 있는 일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것은 고인이 생전에 남기고 간 유지를 잘 지키는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때 내가 김봉석에게 한 대답은 이것뿐이였다. 아마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대답하였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 말은 초부들뿐아니라 소학교 학생들도 대답할수 있는 단순한 리치였으나 김봉석은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였다. 김정덕이 그에게 남긴 유지는 나라의 광복을 이룩할 때까지 사령관동지를 잘 모셔달라는것이였다. 김봉석은 그 유지를 지켜 해방되는 날까지 나를 잘 받들어주었다. 그러다가 그자신도 전사하였다.


고인의 유지를 잘 지키는것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산 사람들의 최고의 의리로 된다는것은 항일전쟁의 나날 나의 전우들이 다같이 품고있던 공통된 견해였다.

《쓰러진 혁명전우의 원쑤를 갚자!》

《중대장동지의 유언을 명심하고 우리모두 저 고지를 점령하자!》

《동지들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부탁대로 기어이 조국을 해방하자!》

싸움터와 숙영지, 행군로들에서 자주 울린 이런 내용의 구호들에는 희생된 전우들의 유지를 지켜가려는 빨찌산투사들의 지향과 념원이 그대로 반영되여있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자기앞에 부과된 혁명임무에 충실하는것으로 희생된 전우들에 대한 의리를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나도 역시 혁명임무에 충실하는것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간 혁명동지들의 유지를 지키고 그들이 생전에 우리에게 표시하여준 높은 신임과 기대에 보답하려고 혈전분투하였다. 지금도 나는 이런 립장과 관점을 가지고 당과 인민이 우리에게 맡겨준 혁명임무수행에 투신하고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산 사람들의 도리의 전부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조국해방이라는 대사변을 분기점으로 하여 이 의리의 내용은 새로운 시대적요구와 조건에 맞게 비할바없이 풍부해졌다. 고인들의 유지를 잘 지키면 희생된 전우들앞에서 산 사람으로서의 우애를 다하는것으로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것으로 만족할수 없게 되였다. 그들은 이국산천에 널려있는 전우들의 유해도 조국으로 옮겨오고싶어했고 력사의 수풀속에 파묻혀있는 전우들의 업적도 후대들에게 알려주고싶어하였다. 나라가 부강해지게 되니 전우들의 동상도 세워주고싶어했다. 새로운 도시와 거리들이 생기면 거기에 전우들의 이름을 붙이고싶어하였다.


희생된 전우들에 대한 동지적의리는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에서도 집중적으로 발양되였다. 우리는 조국에 개선하기 바쁘게 일군들을 파견하여 해외에 널려있는 혁명가유자녀들을 조국으로 데려왔다. 모래밭에서 금싸래기들을 주어모으듯이 한아이, 한아이 찾아내서는 만경대혁명자유가족학원에서 공부시키였다. 국내에서 싸운 투사들의 자녀들도 그 학원에 데려다가 새 조선건설의 역군으로 육성해냈다.


1970년대에는 우리와 함께 싸우던 전우들의 모습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주기 위하여 대성산 주작봉에 혁명렬사릉을 건설하였다. 형제산구역의 신미리 산등성이에는 제2의 혁명렬사릉이라고도 부를수 있는 애국렬사릉이 건립되였다.


이 모든 시책과 조치들은 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산 사람들의 의리를 최상의 높이에서 구현하려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고결한 동지애와 변함없는 순정의 표시이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반세기이상의 장구한 혁명실천을 통하여 살아있는 혁명전우들은 말할것도 없고 희생된 전우들과의 관계에서도 만민의 찬양을 받을만한 모범을 창조하였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사이에서도 우정이 계속될수 있다는것은 조선의 혁명가들이 창조한 전무후무한 인간관계의 력사, 동지애의 력사가 잘 말해주고있다. 내 개인의 력사로 볼 때에는 장울화와의 우정을 상기하는것만으로도 충분할것이다.


나와 장울화사이의 우정이 장울화의 죽음으로 끝났을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수 없다. 한 인간의 죽음이 우정을 마감짓는 종막으로 된다면 그런 우정을 어떻게 진실한 우정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잊지 않고있을 때 그 우정은 그것만으로도 살아있는 우정, 생명을 가진 우정으로 되는것이다.


나와 장울화의 우정은 장울화가 서거한 다음에도 계속되였다. 장울화는 세상을 하직하였지만 나는 한시도 그를 잊은적이 없었다. 장울화가 남기고 간 그 인간적향기는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나의 페부에 더 깊숙이 젖어들었다. 항일전쟁이 조중공산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을 때 나의 추억속에 제일 선참으로 떠오른 수많은 중국의 동지들과 은인들 가운데서도 장울화는 단연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였다. 해방된 조국땅에서 나와 나의 일가를 도와주고 조선혁명을 성심성의로 후원해준 수많은 중국의 은인들을 한사람, 한사람씩 회고해볼 때의 심정이란 실로 감개무량한것이였다. 좋은 세월이 오고보니 은인들에 대한 그리움도 더 간절해졌다.


나는 장울화를 회상할 때마다 그가 남기고 간 부모처자들을 생각하였다. 내가 그의 일가에 대한 생각을 제일 많이 한것은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한뒤 동북지방에서 토지혁명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적개혁이 실시되고 장개석의 국민당군대와 중국인민해방군사이에 진행된 내전의 불길이 만주전역을 휩쓸던 시기였다. 도처에서 악질지주들과 매판자본가들을 청산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타도하는 때인데 장씨가문 사람들도 혹시 독재대상으로 판정되여 부당한 제재를 받지나 않겠는가 하는 우려가 생기였다. 이웃 나라에서 동란이 일어나고 그 무엇인가를 타파하는 사회적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장울화네 유가족들의 운명을 걱정하였다.


장울화가 공로를 많이 세운 혁명렬사인것만은 사실이나 리면에서 지하공작을 많이 한 사람인것만큼 대중이 큰 부자집자식인 그를 반동파나 역적으로 보지 않고 공산주의자로 인정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들과 만나게 될 날을 일구월심으로 기다리였다. 그러나 새 나라 건설과 반미대전, 사회주의기초건설의 복잡한 과정들은 나로 하여금 많은것을 뒤로 미루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찾고싶은 사람도 많고 만나고싶은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국사를 위해서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고 일에만 전심하였다.


내가 장울화네 일가의 소식을 처음으로 입수한것은 1959년경이였다. 그해에 우리 나라에서는 항일무장투쟁전적지답사단이 조직되여 만주행을 하였다.

나는 답사단을 만난 자리에서 박영순단장에게 이런 부탁을 하였다.

《박포리동무, 마안산밀영에서 아이들이 병마와 추위에 떨고있을 때 우리에게 천도 보내주고 돈도 보내주던 〈형제사진관〉주인 장울화가 생각나오?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스무해가 넘는데 난 아직 그의 부모처자들에게 문안인사조차 변변히 하지 못했소. 무송에 가거들랑 동무가 나대신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의 안부를 전해주시오.》

《부탁을 명심하겠습니다. 저도 무송에 가면 장울화네 유가족을 만나보는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신세를 얼마나 많이 졌습니까.》

박포리도 깊은 감회에 잠기는듯 눈시울을 슴뻑거리였다.

《장울화는 사실 국적은 다르지만 조선사람이나 다름없고 조선의 혁명가나 다름없소. 그가 남긴 업적은 중국의 공산주의운동뿐만아니라 우리 나라의 항일혁명력사에서도 당당한 한페지를 차지할수 있소. 만일 장울화의 유가족들이 무송에서 살지 않고 다른 지방으로 이주했다면 공안기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기어이 그 행처를 알아내야 하오.》

《알겠습니다. 온 중국을 다 뒤져서라도 그들을 찾아내겠습니다.》


답사단이 중국으로 떠나간후부터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무송소식을 기다리였다. 전쟁의 상처를 완치하고 도시와 농촌에서 사회주의적개조도 완성한 뒤여서 나에게는 희생된 옛 전우들에 대해서와 그들이 남기고 간 유가족들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할수 있는 어느 정도의 정신적여유가 생기였다.


조국을 떠난지 몇달만에 박영순은 마침내 내가 그처럼 고대하던 무송소식을 전보로 보내주었다.《오늘 무송에서 장울화의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수상님의 인사를 책임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부인은 고맙다고 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그 부인이 답사단에 사진자료 한장을 제공하였습니다. 수상님과 장울화의 공동투쟁을 반영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고있습니다. 구체적인것은 조국에 돌아가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나는 후날 박영순의 보고를 듣고 장만정이 1954년에 서거하였다는것과 그가 세상을 떠난후 장울화의 부인이 아들 장금천과 딸 장금록을 데리고 무송의 옛집에서 검박한 생활을 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박영순이 나의 명의로 되는 인사를 전해주자 장울화의 부인은 감격하여 어쩔바를 몰라했다.

《하늘은 시간을 두고 변하고 사람은 일생을 두고 변한다는데 김일성장군님의 우정은 어쩌면 그렇게도 변함이 없으십니까. 벌써 20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저의 남편을 잊지 않고계시니 무슨 말로 감사를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인은 답례의 표시로 수십년동안 간수해오던 사진 한장을 답사단 단장앞에 내놓으면서 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장울화와 철주동생이 함께 찍은 사진이였다.


그 사진은 그해 가을 혁명전적지답사단이 수집한 사적자료들과 함께 당시의 민족해방투쟁박물관에 전시되였다. 우리 인민들에게 장울화의 얼굴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것은 그때부터였다. 전시장을 돌아보던 나는 그 사진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뗄수 없었다. 20여년전에 대영에서 헤여진 장울화가 죽지 않고 살아서 평양으로 찾아온것 같은 착각이 생길 정도로 그의 사진이 나에게 준 인상은 참으로 충격적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인민들속에는 장울화를 아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선전부문의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사대주의자들이 우리 당의 혁명력사와 혁명전통을 잘 소개하지 않던 때여서 그가 나를 어떻게 도와주었고 조선혁명을 위해 어떤 업적을 세웠는가를 아는 사람도 별반 없었다. 장울화와 나와의 연고관계를 아는 인물들이란 몇명의 투사들뿐이였다.


나는 수원들에게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인간이고 얼마나 훌륭한 혁명가이며 얼마나 훌륭한 국제주의자인가를 자랑하고싶었다. 20여년세월 내 마음속에 고이고 고인 련민의 샘, 추모의 샘이 마침내 분수가 되여 솟구쳐올랐다.

《동무들, 이 사람이 바로 무송 제1우급소학교 시절의 나의 동창생 장울화입니다. 그는 나의 벗인 동시에 충실한 혁명전우였습니다. 그의 전우들가운데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장울화는 우리를 통하여 조선을 리해하고 우리와의 교우를 통하여 조선인민의 항일투쟁을 동정하고 지지성원한 위대한 국제주의전사입니다. 혁명을 하지 않아도 호의호식할수 있는 사람이였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투쟁의 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길에서 생명까지 바쳐 나를 보호해주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이 사진을 보니 장울화에 대한 생각이 더 간절해집니다. 우리는 행복하면 할수록 장울화와 같은 은인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혁명위업을 피로써 도와준 중국의 벗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부터 우리 나라 출판물들에는 장울화의 업적이 광범히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장울화는 라성교나 황계광과 같이 우리 인민이 다 아는 유명한 국제주의렬사로 되였다. 우리의 후대들은 김진과 마동희를 회상하듯이 무한한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장울화를 회상하고있다.


우리 나라 답사단이 무송에 도착한 다음날 장울화의 부인은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장군님과 너의 아버지는 소학교시절부터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 두분의 친교가 어찌나도 깊었던지 무송의 동창생들치고 그 우정을 부러워하지 않는 학생들이 없었다. 너의 아버지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여 견결히 싸운것도 김일성장군님의 영향과 지도가 있었기때문이다. 그래서 너의 할머니도 늘 너희들이 그이를 큰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씀했단다. 장군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언제나 네 아버지를 생각하고계신단다. 금천아, 너는 큰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감사를 드리고 문안인사를 올려야 한다.》


어머니의 회고담은 20대의 혈기방장한 청년 장금천으로 하여금 잠을 못이루게 하였다. 1959년의 장금천은 아버지가 사진현상약을 먹고 자결할 때보다 두살이나 나이가 더 든 미청년이였다. 그는 가족일동의 심정을 대변하여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여왔다.

나는 그 편지를 받아보고 며칠밤 장울화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못이루었다.

나와 장울화를 이어주고있던 우정의 피는 나의 문안인사와 장금천의 그 편지로 하여 다시금 하나의 동맥속에서 줄달음치게 된셈이였다.

죽은 사람에 대한 산 사람의 우정은 희생된 사람들의 자녀들에 대한 산 사람의 사랑과 배려를 통해서도 계속된다고 말할수 있다. 장울화에 대한 나의 우정은 나와 그가 남기고 간 자식들과의 빈번한 만남속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심화발전되였다.


장금천의 편지를 받은 그때로부터 나의 관심은 용모도 성미도 전혀 알지 못하는 이 미지의 청년에게로 쏠리였다. 신통히도 필체는 아버지의것과 류사하였다. 이왕이면 모습마저 아버지를 닮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가 아니라 지척에서 실물로 볼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 꿈을 실현하자면 아직도 이러저러한 난관을 헤쳐나가야 했고 내자신이 꾸준한 열의와 인내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와 장울화의 유가족들사이에는 국경이라는 랭담한 저지선이 그어져있다. 국경은 지난날의 의리나 친분관계에 리해를 표시할수 없는 엄격한 차단물이다.


장금천의 편지를 받은 때로부터 20년이상의 세월이 흐른 1984년 5월 나는 쏘련과 동구라파사회주의나라들을 력방하는 기회에 기차를 타고 중국 동북지방을 통과하는 행운을 가지게 되였다. 동북의 산야는 내가 20년이상의 세월을 보낸곳이고 무장항일의 만고풍상을 헤쳐가던곳이다. 나는 나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그 산야에 많은 추억을 묻어두고있었다. 생시에 못가보는 안타까움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꿈에도 발목이 시도록 밟아보는 고장! 그래서 김정일동지도 로정을 도문-목단강-할빈-치치할-만주리-쏘련으로 잡아주었는지 모른다.


나는 낯익은 산발들에서 오래 눈을 뗄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붉은 피를 뿌리며 이 땅에 쓰러졌던가.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간 때였지만 불무지앞에서 쪽잠도 같이 들고 풀죽도 같이 나누고 초연에 살도 같이 그슬리던 옛 전우들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히 어려와 차창밖에서 시선을 좀처럼 돌릴수 없었다.


우리를 태운 특별렬차가 도문을 떠나 돈화쪽으로 한참 달리고있을 때였다. 나는 무송에 있는 장울화의 처자들 생각이 나서 수원들을 불렀다.

《이곳은 내가 오래전부터 와보고싶었던곳이였소. 시간이 있으면 빨찌산시절의 전우들과 친지들도 만나보고 전우들의 유해가 묻혀있는 싸움터에도 가보고싶은데 그런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것이 안타깝기만 하오. 여기서 몇백리밖에 안되는 무송땅에서 장울화네 가족들이 지금도 살고있다고 하오. 그들에게 기념으로 선물이라도 보내주었으면 좋겠소.》


며칠후 나의 이름으로 된 선물을 중국의 관계부문 일군들이 장울화의 집에 전해주었다.

구라파방문을 마치고 조국에 돌아온 나는 장금천이가 보낸 두번째 편지를 받고 그를 평양에 초청하였다. 그리고 호요방총서기에게 장금천의 우리 나라 방문이 순조롭게 실현될수 있도록 협조해줄것을 부탁하였다.


1985년 4월 장금천은 마침내 동생 장금록과 맏아들 장기를 데리고 력사적인 조선방문의 길에 올랐다. 일만초목에 꽃이 피고 새 싹이 움트는 만화방창한 봄날 나는 흥부초대소에서 무송의 귀빈들을 만났다.


승용차에서 내리는 장금천과 장금록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크나큰 격정에 잠겨 잠시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아버지를 닮은 장금천과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한것 같은 장금록, 그리고 량친의 두 얼굴에서 좋은 세부들을 이것저것 따다가 모방한것 같은 장기! 그들이 부모들의 생김새를 고스란히 물려받은것은 그들자신을 위해서도 기쁜 일이겠지만 나를 위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였다. 이미 고인들이 된 장울화부부가 소생하여 내앞에 나타난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조차 들었다. 나는 그들의 일거일동에서 장울화다운 면모를 발견해내려고 시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묘령과 대영에서 장울화를 만났을 때처럼 장금천, 장금록, 장기를 한아름에 그러안았다.

《너희들을 환영한다!》


나는 첫 인사를 중국말로 하였다. 수십성상의 세파를 겪는 과정에 나의 중국말밑천에도 적지 않은 공백이 생긴 때였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너희들을 환영한다.》는 중국말이 거침없이 튀여나갔다. 국가수반이 외교석상에서 다른 나라 말로 대화를 하는것은 관례에 어그러지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관례를 무시해버리였다. 장금천일행은 외교를 하려고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 아니였고 나도 외교를 하려고 그들을 초청한 사람이 아니였다. 전우의 자손들을 만나는데 외교는 해서 무엇하며 관례는 따라서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날 그들을 위해 마련한 오찬석상에서도 축배사를 하지않았다. 그것도 역시 관례에 없는 일이였다.

《우리는 한집안식구인데 축배사 같은것은 할 필요가 없지. 그저 여기에 앉은 사람들의 건강과 중조친선을 위해 잔을 찧자!》

내가 축배사대신 이런 말을 하자 장금천도 기뻐하였다.


장금천은 아버지처럼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였다. 나는 그에게 술을 많이 권하지 않았다. 우리는 도수가 높지 않은 들쭉술을 석잔씩만 마시였다. 나는 미떼랑이 우리 나라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에게 들쭉술을 권했었다. 왜정때에는 일본천황만 마신다고 하던 유명한 술이다. 석잔이라는 그 수량속에는 깊은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1932년 6월 무송현 십자거리 북쪽의 《동소과》라는 양주공장에서 나와 장울화가 작별담화를 할 때에도 우리는 석잔의 술을 마시였다.


무송의 귀빈들을 위한 환영연은 3시간동안이나 진행되였다. 격식과 관례를 벗어난 이날의 오찬분위기는 참말로 가족적인것이였다. 우리는 정원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의 화제가운데서 중심을 이룬것은 의리에 관한 문제였다. 나는 우리 일가에 대한 장만정과 장울화의 의리를 두고 무송시절에 체험한 과거사를 술회하였고 손님들은 나의 의리를 두고 감사를 표시하였다.

《너의 할아버지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와주고 너의 아버지는 조선공산주의운동을 도와주었다.》

나는 한마디로 장씨가문의 공적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내가 그날 장만정과 장울화의 의리를 두고 특별히 많은 말을 한것은 단순히 그들을 찬양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통하여 장금천, 장금록, 장기를 비롯한 장울화의 자손들도 대대손손 의리를 귀중히 여기는 참된 인간이 되고 절개가 강한 혁명가가 되기를 바라마지않았다.

인간의 도리는 봉건적인 도덕에서 말하는 군신과 부자지간에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벗과 동지들사이에도 존재한다. 붕우유신이란 이런 리치를 담고있는 성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덕과 의리에 기초하는 덕치주의를 선양하여 인자무적이라고 하였다. 덕이 있으면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땅이 있는것이고 땅이 있으면 재물이 생기는것이고 재물이 있으면 씀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덕인지재용이라는 다섯가지의 글자로 함축되는 옛 동방철학의 이 리치는 참으로 오묘하며 현대생활에서도 참고할 가치가 크다고 본다.


우리는 삼강오륜을 덮어놓고 나쁜것이라고 보지 않으며 그것을 공산주의리념에 인위적으로 대치시키고 그 도덕과 배치되는것이라고 비평하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견해도 용납하지 않는다. 나라를 섬기고 받드는 신하의 도리가 무엇이 나쁘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의 효도가 어찌 법도에 어긋나는 행위로 될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도덕관념이 봉건적인 국가사회제도를 합리화하고 인민들을 무저항과 맹목적인 굴종에로 내모는것을 반대하는것이지 인간본연의 도덕적기초를 강조하는 삼강오륜의 원리적측면은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장울화와 나와의 사이는 군신의 관계도 아니고 부자지간의 관계도 아니였다. 그가 목숨을 바쳐 나를 보호해준것은 삼강의 군신유의로부터 출발한것이라고 볼수 없다. 한갖 혁명동지에 불과한 나와 혁명 그자체의 리익을 위하여 삼강의 요구와는 다른 최대의 공산주의적의리를 발휘한것이였다. 장울화의 업적이 그토록 소중하고 위대한것은 이 의리의 순결성과 숭고성에 있었다.


그때 장금천일행은 무송사람들과 가문을 대표하여 나에게 《두마리의 룡이 구슬을 가지고 놀다》라는 제명이 새겨져있는 나무장식으로 된 시계와 한폭의 중국화 《다수도》를 선물하였다.

한 농가에서 아이가 큰 장수복숭아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쥐고있는 모습을 형상한 그림이였는데 장금천의 해석에 의하면 나의 건강과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가 담겨져있다고 하였다.

나는 답례로 나의 이름이 새겨진 금시계를 장금천, 장금록, 장기의 팔목에 각각 하나씩 채워주었다.

장금천은 그때 평양에 와서 종합검진도 받고 삭아서 못쓰게 된 어금이대신 금틀이도 해넣었다.


나와 장금천일행과의 두번째 상봉은 국경도시 신의주초대소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귀국의 길에 오르는 그들을 위해 또다시 오찬을 마련하고 3시간에 걸치는 담화를 하였다.

작별을 앞두고 내가 일행에게 각각 1대씩 사진기를 선물하였을 때 그들은 모두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 나는 천사만량의 고려끝에 그들에게 줄 기념품으로 사진기를 선택하였다. 무송에서 《형제사진관》을 운영할 때 장울화는 우리에게 사진기도 1대 보내주었다. 내가 마련한 사진기는 장울화의 그 선물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였으며 사진업으로 혁명에 투신한 그의 모범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심정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장금천도 아버지처럼 무송에서 사진업에 종사한다고 하였다.


나는 작별을 앞두고 그들에게 말했다.

《난 래일 신의주를 떠나 평양으로 가게 된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일을 잘하고 우수한 공산당원이 되여라. 지위를 탐내지 말고 잘못을 범하지 말거라. 너희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없이 자랐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이다.》

장금천은 1987년에도 처 왕봉란과 둘째아들 장요, 손녀 장맹맹을 데리고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다. 그때 나는 그들을 일곱차례나 만나주었다. 이것도 역시 기성관례나 규범을 초월하는것이였다. 5살난 장맹맹은 나의 생일 75돐을 축하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에 온 외국손님들중에서 제일 년소한 벗이였다. 그는 장씨가문의 다섯번째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4월 13일 밤 장맹맹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과 함께 초청에 따라 봉화예술극장에서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한 세계 각국 예술단들의 련환공연을 관람하였다. 나는 그날 그 극장에서 장맹맹을 처음으로 만나보았다. 휴계실에서 나와 중간통로를 거쳐 객석으로 다가가던 나는 통로옆의 맨앞줄에 자리잡은 장금천부부와 인사를 나누다가 그를 덥석 끌어안고 공중으로 추켜올리였다. 장맹맹은 서먹서먹해하는 기색도 없이 내 볼에 볼을 비비면서 밝게 웃고있었다.


그 순간 극장안에 모인 수천명의 관중들은 우리에게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와 장씨일가의 인연을 알지 못하는 외국의 손님들도 이 장면의 목격자로 된 기쁨을 안고 오래동안 만장이 떠나갈듯한 축복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렇다. 맹맹아, 내가 너의 큰 증조할아버지이다. 이렇게 너를 안고보니 너의 증조할아버지 생각에 목이 메이는구나. 증조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무척 귀여워하시는분이였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겠느냐. 그러나 그분은 30살도 되기전에 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엇으로 그 은혜를 다 갚을지 알수 없구나. 너는 5대째로 피여나는 조중친선의 꽃이다. 너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나와 나의 아버지는 이 친선을 위해서 한생을 바쳐왔다. 너는 그분들이 흘린 피와 로고우에서 태여난 한떨기의 꽃이다. 조중 두 나라의 친선을 위해서 온세상이 보란듯이 곱게 피거라.


우렁찬 박수갈채속에 휘감긴 그 짤막한 순간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이런것이였다. 나는 장맹맹을 품에 꼭 그러안았다. 처녀애의 작은 심장은 내 심장 가까이에서 빠른 박동으로 고르롭게 뛰고있었다. 그 힘차고 열정적인 박동이 내 가슴에 와닿은 순간은 나와 장울화의 우정이 5대째로 이어진 의미심장한 시각이라고 할수 있었다. 장만정, 장울화, 장금천, 장기, 장맹맹… 그렇다. 풍파사나운 세월의 류수에도 불구하고 두 가문의 우의는 무수한 장강과 내를 건너 5대째로 이어진것이였다. 이것은 두 가문의 우정인 동시에 조중 두 나라, 두 인민의 친선인것이다. 그러기에 장금천도 후날 이 친선을 가리켜 《흘러온 옛정》이라는 말로 명명하지 않았던가.


나와 나의 품에 안겨있는 장맹맹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때 조중친선이 천추만대를 두고 영구불멸할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였다.

이날 나는 장울화와 나의 동생 철주가 찍은 사진에 기념으로 나의 이름을 써주었다. 금천이는 그것을 자기 집의 가보로 정히 간수하겠다고 하였다.


장금천일행이 우리 나라에 체류하는 기간 우리는 그들에게 전용비행기와 특별렬차를 내주고 많은 봉사성원들도 붙여주었다. 그들은 장울화의 후손들로서 국빈으로서의 응당한 대우를 받은셈이였다.


1992년 4월 장울화의 자제들은 나의 생일 80돐을 축하하기 위하여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세번째로 되는 그들의 우리 나라 방문이였다. 장금천부부와 장기부부, 장유, 장맹맹, 베이징에서 살고있는 장금록과 그의 남편 악옥빈, 딸 악지운, 아들 악지상 등 12명에 달하는 일행이 평양에 모이였다. 방문회수가 잦아질수록 나와 장울화의 후손들사이의 정은 점점 더 깊어지고 열렬해졌다.


장금천은 세번째 방문기념으로 나에게 자기가 손수 집필한 장편수기 《흘러온 옛정》을 선물하였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와 장만정의 교분으로부터 시작된 두 가정의 우의에 대하여 보태지도 가공하지도 않고 소박하게 서술한 책이였다. 필치는 비록 소박하였으나 글줄들에 넘치는 우애의 정, 친선의 정은 참으로 호방하고 류창한것이였다. 그 책은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내가 글을 잘 썼다고 칭찬하자 장금천은 어린애처럼 얼굴을 붉히며 큰아버님께서 자기들에게 돌려주시는 그 뜨거운 은정이 잘 그려졌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였다.


나는 답례로 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중문판 1,2권을 그들에게 선물하였다.

《다른 나라 사람으로서 목숨으로 나를 보호하여준 사람은 장울화와 노비첸꼬 두 사람이다. 물론 노비첸꼬는 살아있지만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희생성을 발휘할수 없는것이다. 오래 생각할새도 없이 순간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이것은 장금천일행이 세번째로 우리 나라에 왔을 때 내가 그들에게 한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장금천과 장금록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자기 아버지의 공적보다 노비첸꼬의 공적이 몇배나 더 큰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아니였더라면 어쩔번했는가고 진심으로 말하였다.

《나의 생애에는 나를 위해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아슬아슬한 위기일발의 순간에 나를 도와나선 잊을수 없는 생명의 은인들이 많다. 지금 너희들과 함께 다니는 손원태선생의 아버지 손정도목사도 그렇고 … 그래서 나는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늘이 내려다보고 언제나 귀인이 나타나게 되는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관념론이 아니다. 인민을 위하여 한생을 바칠 각오가 되여있는 사람은 그 어데서나 인민이 도와나서게 되여있다. 이것은 진리이고 변증법이다.》


나는 그들이 아버지처럼 인민을 위해 복무하고 인민을 위하여 한생을 바치는 훌륭한 인민의 아들딸이 되여야 한다고 간곡히 말해주었다.

장금록은 나에게 자기가 손수 뜬 자지색모세타를 선물하였다. 내가 몸에 걸칠수 있는것으로 준비하였다는것이다. 다른것을 가져오면 국제친선전람관 같은데 가져다 소장하고 쓰지 않을것 같아 몸가까이에 두고 쓸수 있는것으로 마련했다는것이다. 생각이 깊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매우 고맙게 받았고 그들의 소원대로 그자리에서 세타를 입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장금천은 그때 나를 만난 자리에서 자기 아버지의 서거 55돐을 계기로 묘비를 새로 해세우려고 하는데 거기에 새길 비문을 하나 써주었으면 하는 의향을 표시하였다.

그가 나에게 그처럼 허물없는 청탁을 한데 대하여 나는 고맙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그가 나를 큰아버지로 받드는것이 진심이고 진정이라는것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벌써 55돐이 된단 말이지. 너의 아버지가 돌아간것이 음력 10월이였던것 같은데…》

나는 숙연한 생각에 잠겨 1937년의 그 음산한 가을을 회상하였다.

《그렇습니다. 큰아버님, 1937년 음력 10월 2일입니다. 양력으로는 올해에 10월 27일입니다.》

《그럴것이 없겠다. 너희들이 세우는 묘비에다 글을 써줄것이 아니라 나의 이름으로 된 기념비를 하나 세워주겠다. 어떻니?》


그 돌발적인 제의에 장금천과 장금록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로 얼굴만 마주 쳐다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큰 요구를 나에게 제기한것이 아니였다. 나를 자기 집안의 가장처럼 여기고 속생각을 허물없이 비쳤던것이였는데 내가 예상치도 않았던 기념비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바람에 당황해지지 않을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금천은 황황히 말하였다.

《그렇게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큰아버님께 페를 끼쳐서야 안되지요. 그저 글만 써주시면 저희들이 그것을 가지고 가서 묘비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도 좋긴 하다. 그러나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내가 쓴 글을 새긴 기념비를 여기에서 마련해놓고 우리 사람들을 시켜 들여보내줄터이니 너희들은 그것을 받아서 세우기 위한 준비나 하도록 하여라. 언제쯤 하면 좋겠니?》

《참 그렇게 하여주신다면 더없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큰아버님께서 바쁘실텐데 또 마음을 쓰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외람된 청을 드렸는가 봅니다.…》

장금천과 장금록은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기념비를 준비하는것은 오래 걸릴것이 없다. 그러나 이왕지사 기념비를 세울바치고는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즈음하여 행사를 진행하는것이 좋을것 같다.》

장금천과 그 일행은 나의 제의에 기꺼이 동의하였다. 그들은 무송에 돌아가면 기념비제막준비를 다그치고 중국의 해당 기관에도 알리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옛 혁명전우인 장울화의 묘소에 나의 이름으로 된 기념비를 세워주게 되였다.

우리 나라 당력사연구소 일군들이 기념비를 평양으로부터 무송까지 날라갔다. 중국의 당과 정부에서는 림강교두에까지 사람들을 보내여 우리 대표들을 열렬히 맞이하였고 10월 27일에는 무송시내에 있는 장울화의 묘지에서 기념비건립행사를 성대히 치르도록 해주었다. 중국의 방송보도기관들에서는 큰 의의를 부여하여 그 행사를 널리 보도하였다.

《장울화렬사의 혁명업적은 조중인민의 친선의 빛나는 상징이다. 렬사의 숭고한 혁명정신과 혁명업적은 인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것이다.

김 일 성

1992년 10월 27일》

이것은 나의 자필로 된 그 기념비의 전문이다.


우리 대표들이 평양에 돌아온 다음 나는 기념비건립행사를 촬영한 록화물을 보고 그 성대함에 놀랐다. 그것은 조선인민과 중국인민, 조선의 투사들과 중국의 투사들만이 창조할수 있는 친선과 의리의 산 화폭이였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사이에서도 우정이 계속될수 있는가?

나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계속될수 있다고 대답해왔다. 지금도 역시 그렇게 대답하고있다. 장씨가문의 3세, 4세, 5세들과의 나의 친교, 무송에서 진행된 기념비건립행사는 이 대답의 타당성을 힘있게 립증해주고있다.


산 사람은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잊지 않을 때라야 그 우정이 공고하고 진실하고 영원한것으로 될수 있다. 만일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잊는다면 그 순간부터 우정은 사멸을 면치 못한다. 죽은 사람을 자주 추억하고 그들의 업적을 널리 소개하며 그들이 남기고 간 후대들을 잘 돌보고 그들이 남긴 유지를 잘 지키는것이 선대들과 선렬들, 먼저 간 혁명동지들에 대한 산 사람들의 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리가 없다면 력사와 전통의 진정한 계승이 있을수 없다.


기념비까지 보내고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런 기념비를 수천수만개 세운들 나를 위해 한목숨을 바친 장울화의 그 은혜야 어떻게 다 갚겠는가.

지금 장울화의 손자 장유와 외손녀 악지운은 부모들의 소망대로 평양국제관계대학에서 공부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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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장울화가 그리워질 때마다 나는 그 애들의 숙소를 방문하군한다. 분과 초를 쪼개여 쓰는 국가주석의 긴장한 일과에서 외국류학생들과의 사업을 위한 시간을 짜낸다는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보좌관들은 장울화의 후손들을 위해 바칠 주석의 사업시간을 아낌없이 짜내고있다. 그 애들을 위해 바치는 시간은 아깝지 않다.

장유와 악지운이 류창한 조선말로 나에게 설인사를 할 때 나는 흐뭇한 심정을 금치 못하였다. 그 애들의 조선말솜씨가 대단하였다. 나는 그 애들이 하루빨리 조선말에 능숙해지고 조선음식에 익숙해지며 조선사람들에게 친숙해지기를 바란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세계의 정국은 매우 준엄하고 복잡하나 나와 장울화일가사이에 흐르는 옛정은 변함이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무송을 방문하고싶은 심정을 표시해왔다. 지금도 그 심정은 변함이 없다. 무송에 가서 남전자에 있는 장울화의 묘소를 찾고 싶으나 그것이 한갖 소망으로만 남아있을것 같아 두려운 생각이 든다. 그 소망이 실현되지 못한다면 꿈에라도 옛 전우의 곁으로 찾아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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