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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1-5. 평안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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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1,543회 작성일 16-03-0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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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안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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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생애에는 상봉과 리별로 엮어진 기이한 사연들이 무수하게 기록되여있다. 만났다가 헤여지고 헤여졌다가 다시 만난 사연이 있는가 하면 한번 만났다가 헤여진후로는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한 사연도 있고 다 만나기로 되여있던 사람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감감 소식이 없다가 뒤늦게야 그 행적이 알려져 수령님의 가슴을 아프게 해드린 사연도 있다.

1993년 10월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항일혁명투쟁사 연구자들앞에서 대부대선회작전에 대한 회고의 말씀을 하시다가 륙과송에서 잠간 만나신 평안도사람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시였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항일혁명편 7권에 절을 따로 설정하여 평안도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겠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 걸어오신 혁명활동로정에는 그런 기이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씀하시였다.


말이 난김에 륙과송에서 만난 평안도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오중흡의 추도식을 끝내고 숙영지로 갈 때였습니다. 전령병이 나를 찾아와 하는 말이 웬 낯선 사람이 륙과송에서부터 부대를 따라오면서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조른다는것이였습니다.

나는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 나를 만나려고 찾아온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낸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만나볼 사람은 다 만나보았습니다. 적통치구역이나 국내에서 찾아온 인민들을 만나보는것은 유격전으로 여념이 없는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의 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밤만은 어떤 손님이든 만나고싶은 마음이 없었고 모든게 귀찮았습니다. 륙과송전투에서 오중흡을 잃은것이 너무나도 분하고 애석했기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최일현과 강흥석이까지 잃고나니 밥을 먹고싶은 생각도 없고 말도 하고싶지 않았습니다. 오중흡이 전사한것은 나에게서 오른팔이 떨어져나간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 그때 나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전령병에게 오늘밤엔 누구도 만나주지 못할것 같으니 량해를 구해서 손님을 돌려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전령병은 몹시 난처해하며 벌써 몇번이고 량해를 구했지만 손님은 김일성장군과 자기는 잘 아는 사이인데 단 1분이라도 좋으니 만나서 인사라도 할수 있게 해달라고 한다는것이였습니다.

나는 전령병의 말을 듣고 이상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륙과송에는 내가 알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일대는 우리가 처음 밟아보는 생소한 고장이였습니다.

전령병이 안내하는곳으로 가보니 배낭을 진 중년남자가 서있었습니다. 나를 잘 아는 손님이라는데 나로서는 어디서 만났던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보자 대뜸 접니다,《평안도집》입니다 하고 덥석 내 손을 잡아쥐였습니다.

《평안도집》이라는 말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 인차 짐작할수 있었습니다.

어느해였던지 우리는 부대를 이끌고 수림속으로 행군해가다가 외진 골안에서 불탄 집 한채를 발견하였습니다. 불이 채 꺼지지 않은 집터에서 등에 사내애를 업은 중년사나이가 슬프게 울고있었습니다.

나는 주인을 안정시키고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몇시간전에 도끼를 차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있는 사이에 《토벌대》놈들이 달려들어 집에 불을 지르고 안해와 아이들을 총으로 쏴죽였다고 했습니다. 업은 아이는 자기를 찾아 산에 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고 했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나니 가슴에 분노가 치밀어올라 참을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원쑤를 갚아줄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 적이 몇명이나 되며 떠나간지 얼마나 되는가고 물었더니 《토벌대》는 40명쯤 되고 떠나간지는 반시간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대원들에게 자,보라! 일본놈들이란 이런 야만들이다,아무 죄도 없는 이 가정이 이런 참변을 당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고 물었습니다. 대원들은 당장 복수전을 하자고 하면서 저마끔씩 자기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날파람있는 대원들을 50명쯤 선발해가지고 돌격대를 무었습니다. 그 돌격대가 《토벌대》를 뒤쫓아가서 숙영준비를 하고있는 놈들을 모조리 요정내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불탄 집을 떠날 때 집주인에게 돈 50원을 꺼내주면서 당신의 정상을 생각하면 집이라도 지어주고싶은데 줄것이란 이것밖에 없다,이 돈을 가지고 다른 고장에 가서 살길을 찾으라,앞으로 나라가 독립되면 다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50원이란 돈이 적은 돈은 아니였습니다. 그 돈이면 부림소 같은것도 한마리 살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좁쌀 한말값이 30전정도였습니다.

집주인은 《제 본래 평안도에서 살다가 서간도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 와서 이런 봉변을 당했소이다. 내 흙이 된들 이 은혜를 잊겠습니까. 헤여지기전에 어른의 성함이라도 알고싶소이다.》하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가 너무 조르기에 우리 동무들이 내 이름을 대주었습니다.

나는 봉변을 당한 사람이 평안도에서 살다가 왔다는 말에 친근감과 동정심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그가 평안도사람이면 나의 동향인이나 다름없었기때문입니다.

만주에서 살고있던 조선사람들의 구성상태를 보면 평안도지방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중 대부분은 남만지방에서 살고있었습니다. 간도지방에는 평안도사람들이 얼마 없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서간도에서 평안도사람이 사는 집에 들린적이 있는데 그 집에서 건뎅이젓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만주땅에서 건뎅이젓이 어데서 났는가고 물었더니 며느리가 친정집에 다녀왔다는것이였습니다. 그때 풋강냉이에 건뎅이젓을 발라먹었는데 별맛이였습니다. 나는 어린시절을 서선지방에서 보냈기때문에 건뎅이젓이나 백하젓을 특별히 좋아했습니다.

한날한시에 세 식구를 잃어버린 평안도사람의 불행을 목격하고나니 분해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호구지책으로 돈을 얼마간 주고 떠나기는 하였지만 마음이 가볍지 못했습니다. 평안도사람이 짊어지고가게 될 슬픔과 고통을 생각하니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안해도 없이 어린 자식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쉬운대로 그와 헤여지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란 참 넓고도 좁은것이였습니다. 이름모를 산골에서 얼핏 만났다 헤여진 그 평안도사람을 돈화의 오지에서 다시 만나게 될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오중흡을 잃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정말 대단히 반가왔을것입니다. 전우들을 잃고 너무나 큰 슬픔속에 잠겨있다보니 반가운 사람을 보고도 반갑게 만날수 없었습니다.

나는 슬픔을 억지로 눌러가며 륙과송에는 어떻게 되여 왔고 이 밤중에 왜 나를 만나려고 하는가고 물었습니다.

평안도사람은 우리와 헤여진후 아들애를 데리고 륙과송에 와서 일자리를 얻고 후처도 얻어가지고 그럭저럭 살아왔다고 하면서 《저의 부자가 살아난건 장군님덕입니다. 그 돈 50원이 아니였더라면 우리 부자는 거지가 되였거나 굶어죽었을것입니다. 나는 산판로동을 하면서 흰쌀 한말을 마련해놓고 마음속으로 장군님을 만날 날을 그냥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장군님이 이고장에 오시게 해달라고 〈하느님〉에게 빌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의리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였고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였습니다.

나는 그 흰쌀 한말에서 우리 혁명군에 대한 인민의 뜨거운 사랑을 보았고 깨끗한 지성과 의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민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슬픔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여 다시 일어나 천백배의 복수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날밤 나는 평안도사람과 오래 이야기를 나눌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갈길이 총총했지만 그 사람도 오래 머물러있을 형편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떠나갈 때 나도 무거운 마음으로 그를 바래주었습니다.

그후 나는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 사람의 소식을 한번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직후 신의주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났습니다. 신의주에서 학생소요가 일어났을 때이니 1945년 11월일것입니다.

신의주학생사건은 동중학교에서부터 일어났습니다. 그 학교 학생들이 반동놈들의 사촉을 받아 도당청사를 습격했는데 소요를 제때에 수습하지 않으면 사태가 어떻게 번져갈지 알수 없었습니다. 김일성이 가야 사태를 바로잡을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비행기를 타고 신의주에 갔습니다.

동중학교에는 원래 애국적인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홍동근목사도 아마 동중학교출신일것입니다. 해방전부터 민족주의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이 학교 학생들에게 가짜공산주의자들의 비행을 걸고 반공의식을 불어넣게 되니 그들이 화약처럼 확 달아가지고는 도당청사를 습격하는 망동을 부리게 되였습니다.

신의주에 간 나는 동중학교 마당에 시민들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그 연설을 듣고 자기네가 반동놈들에게 리용되여 부질없는짓을 했다는것과 공산당을 반대하는것이 새 나라 건설을 위해서나 민족의 단합을 위해서나 백해무익한짓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후 그들은 두번다시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내가 연설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려고 할 때 륙과송에서 헤여졌던 《평안도집》이 천만뜻밖에도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도 그날 군중대회에 참석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만사람앞에서 옛친구들처럼 반갑게 포옹을 하였습니다. 나는 동행했던 간부들에게 이 사람은 내가 륙과송전투때 만났던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고 좋은 친구는 헤여졌다가도 다시 만나기마련입니다.

옛날 로인들이 즐겨 쓴 말가운데 《삼익우》라는 말과 《삼손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익우》라는것은 사귀여서 도움이 되는 세가지 리로운 벗이라는 뜻입니다. 다시말해서 정직한 사람,믿음직한 사람,견문이 넓은 사람은 《삼익우》인데 그런 사람들과는 사귀여도 좋다는것입니다.

《삼손우》라는것은 사귀면 손해를 보게 되는 세가지 벗이라는 뜻입니다. 즉 편벽한 사람,착하기는 하나 주대가 없는 사람,말만 앞세우고 실속이 없는 사람은 사귀지 말아야 한다는것입니다.

옛날사람들이 하던 말이니 다 옳다고는 할수 없지만 사귀여서 리익을 주는 벗과 손해를 주는 벗을 비교적 정확하게 찍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행군도상에서 잠간 만났다가 헤여진 사람을 《삼익우》나 《삼손우》의 범주에 넣고 론한다면 좀 무리하다고 하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평안도집》은 분명 좋은 사람이고 믿음직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리득을 주지 손해를 주지 않습니다. 그가 정직하고 미더운 사람이라는것은 륙과송에 우리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쌀을 지고 찾아온 사실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늠할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견문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산골에서 살던 사람이 견문이 넓으면 얼마나 넓겠습니까.

아무튼 나는 그가 《삼익우》에 속할수 있는 좋은 친구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소중히 여길줄 아는 사람,잠간 입은 은혜일지언정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정에 정으로 대답할줄 아는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평안도사람에게 이제는 나라가 해방되였으니 마음대로 만날수 있게 되였다,나를 옛친구로 생각하고 아무때건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별스럽게도 그날 우리는 만나기 바쁘게 또 헤여져야 했습니다. 나는 일이 바빴고 그 사람은 나한테서 시간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과는 세번 다 비상한 정황속에서 만났다가 총총히 헤여지다보니 이름이 무엇이고 고향이 어디인가 하는것조차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1945년말경이면 만사람이 다 해방바람에 들떠있던 때였고 제일 바쁘게 돌아가던 때였습니다. 나도 역시 건국사업으로 매우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러다나니 그처럼 기이한 인연을 가진 평안도사람과도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다 후회가 됩니다.

《토벌》에 처자와 집을 잃고 울 때 그 사람의 등에 업혔던 아이가 살아있다면 아마 지금쯤 환갑이 넘었을것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라도 알아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신의주에서 만났다가 헤여진후 평안도사람이 왜 한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쟁시기 신의주시에서는 미군의 폭격으로 사상자가 많이 났습니다. 그가 그 도시에 그냥 살고있었다면 폭격에 목숨을 잃었을수도 있습니다.

륙과송전투와 관련된 회상자료를 제출한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런 자료제출자가운데 평안도사람이라고 짐작되는 회상자는 없습니까? 그 사람을 전쟁전에 다시 만나보지 못한것이 아쉽습니다.

평안도사람이 언제까지 살아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는 살아있는동안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을 많이 했을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들을 만나는것은 인민들속에 들어가는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둘도 없는 락입니다. 나는 80평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젊은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을 추억하며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려보는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내가 지금도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것은 만나고싶었던 사람들을 다 만나지 못한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절에 나를 도와주고 지지해준 은인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그들의 생사조차 모르는것이 제일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만나기로 약속했다가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면 지금도 가슴이 알알해집니다. 그런 사람들가운데는 김치범이라는 농민도 있습니다.

해방전부터 서울근방에서 농사군으로 일해온 그는 1950년 8월에 서울시와 경기도의 로동자,농민,청년,문화인들로 구성된 인민관광단성원의 한사람으로 평양에 왔습니다. 나는 8.15해방 5돐이 되는 날 내각청사에서 백수십명이나 되는 관광단의 전체 성원들을 다 만나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담화를 하는 과정에 폭격때 헤여졌던 관광단원 한명이 도착하지 못했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가 바로 김치범이라는 농민이였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고 관광단원들에게 물었더니 1943년경부터 서울지구에 침투한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과 련계를 가지고 그들을 물심량면으로 도와준 애국자라고 하였습니다. 관광단원들의 말이 그 농민은 해방후에도 온 가족을 구국투쟁에 내세웠다는것이였습니다. 아들은 리승만정권을 반대해서 싸우다가 사형언도까지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나니 그 농민을 만나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관광단원들도 그가 나의 접견을 받지 못하는데 대해서 몹시 섭섭하게 여기였습니다.

나는 접견시간을 여러번 연장해가면서 인내성있게 그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종시 우리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그 농민은 어디에 가있었겠습니까. 접견후에 들어 알게 되였지만 그는 대오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폭격에 무너진 어떤 유치원건물안에서 부상당한 어린애를 안아내다가 병원에 입원시키느라고 시간을 지체했던것이였습니다. 나는 그런 사연까지 듣고나서 일이 아무리 바빠도 그 농민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나를 만나지 못한것으로 해서 서운해할것을 생각하니 잠도 잘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그들이 만경대를 참관한다고 하기에 나도 우정 시간을 내여 만경대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함께 그 농민을 만나볼 생각에서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농민이고 그도 농민이니 만나기만 하면 서로 의사가 잘 소통될것 같았습니다.

나는 다음날아침 그 농민에게 줄 선물을 마련해가지고 만경대로 나갔습니다.

만사를 다 제껴놓고 고향집에 앉아서 할아버지와 함께 김치범을 기다렸는데 그날도 약속된 시간이 다되도록 남에서 온 그 농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나를 대신해서 손님을 만나주라는 부탁을 남기고 내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그날아침 도착시간을 어긴것은 공교롭게도 관광단일행이 팔동교근방에서 폭격을 당했기때문이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내 부탁대로 그를 만나고 나의 선물까지 전달해주었습니다.

평양관광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간후 김치범농민은 전선원호사업을 잘했습니다. 온 가족이 떨쳐나서서 전선에 식량과 탄약을 날랐습니다. 그의 집 식구들은 인민군부상자들에 대한 간호도 잘했다고 합니다.

그가 그후 어떻게 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관광단원으로 들어왔을 때 환갑이 다된 사람이였으니 지금 살아있다면 100살이 넘을것입니다.

그때 급한 일이 제기되지 않았더라면 그를 만날수 있었는데 아쉽게 되였습니다. 그를 만나주지 못한것이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나를 대신해서 만나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일이 정말 섭섭하게 되였을번했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된다.》는것은 좋은 격언입니다. 좋은 친구를 얻으려면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나라와 집단과 동지와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좋은 친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평안도사람은 내가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투쟁하는 과정에 사귄 벗입니다. 나는 그를 친구로 생각합니다. 등에 아들애를 업고 불탄집 마당에서 슬프게 울던 그의 모습과 쌀을 지고 륙과송에 찾아왔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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