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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9-6. 양정우와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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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1,454회 작성일 16-01-12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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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양정우와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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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양정우와 만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항일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날부터 중국인민들과의 공동투쟁,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국제주의적뉴대를 중시하시였으며 중국의 각계각층 애국력량과의 반제공동전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시였다. 그 과정에 중국의 수많은 지도자들과 혁명가들, 군사간부들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으시였다.

동북지방의 저명한 항일련군지휘관이였던 양정우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공동항일의 나날에 생사를 같이한 중국의 명망높은 혁명투사들중 한사람이다. 양정우와 관련된 수령님의 회상교시들에는 중국인민과 중국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뜨거운 우애의 정이 맥맥히 흐르고있다.

양정우는 리홍광, 리동광과 더불어 남만유격대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는데서 큰 공로를 세운 사람입니다. 남만유격대는 항일련군 1군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군장이 바로 양정우였습니다.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조중 두 나라 인민의 공동투쟁에 매우 큰 의의를 부여하고 항일련군 각 부대들과의 련합과 협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였습니다. 이것은 조중인민의 공동투쟁의 리익에 전적으로 부합되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두차례에 걸치는 북만원정도 하고 조국안이 지휘하는 1군 2사 부대와의 협동작전도 하였으며 남만부대들과의 련계도 확대해나갔습니다.

남만부대들에서는 우리에게 사람을 많이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남만동무들의 요구대로 그들에게 우리가 품을 들여 육성한 군정간부들도 많이 파견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남만공산주의자들과의 뉴대가 깊어졌고 남만군정간부들과의 동지적친분관계도 두터워졌습니다. 양정우는 우리가 남만부대들을 잘 도와준 사실을 두고 여러 경로를 거쳐 감사를 표시해왔고 나도 인편을 통해서 양정우에게 문안인사를 종종 하였습니다. 나와 양정우는 공동투쟁과정을 통해 이처럼 부단히 친분관계를 반전시켜왔습니다.

나는 1938년 가을 남패자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군정간부들이 함께 모여서 회의를 할 때 양정우를 처음으로 만나보았습니다. 남패자가 아주 뜻깊은곳입니다.

몽강현에 가면 패자라는 대수림지대가 있습니다.

패자의 특징은 수림이 무성하고 흔들레판이 류달리 많은것입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수림속에 감탕물이 고인곳을 흔들레판이라고 했습니다. 흔들레판에는 흔히 고지개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잡초가 성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망탕 발을 들이밀면 안됩니다. 흔들레판이 사람을 잠간사이에 삼켜버리기때문입니다. 이런 흔들레판은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무산지구전투승리기념탑 오른쪽의 풀밭에도 흔들레판 비슷한것이 있습니다.

패자의 대수림지대를 방향별로 동패자, 서패자, 남패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1937년 겨울에 군정학습을 한곳은 동패자부근이고 양정우를 비롯한 동북항일련군 간부들과 함께 열하원정의 후과를 청산할데 대한 안건을 가지고 중요회의를 한곳은 남패자였습니다. 사람도 말도 순간에 삼켜버리는 흔들레판이 무수히 있고 자세가 험한 남패자는 부대들이 은밀히 모여서 회의를 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남패자회의를 일명 몽강회의라고도 하는것은 남패자가 몽강현에 속해있기때문입니다.

남패자회의를 전후한 시기 우리 혁명앞에는 매우 어렵고 복잡한 난국이 조성되여있었습니다. 하나의 난국은 우리 혁명을 압살해버리기 위한 적의 공세로부터 오는것이였고 다른 하나의 난국은 국제당에 있던 일부 사람들의 좌경모험주의적행동으로부터 오는것이였습니다.

일본침략군은 그 당시 중국 남방으로 공격의 예봉을 들리는 한편 후방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미명하에 동북항일련군부대들에 대한 <토벌>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습니다. 적의 반혁명공세는 우리의 무장투쟁과 전반적인 항일혁명발전을 심히 억제하고있었습니다.

좌경모험주의가 빚어낸 열하원정의 후과도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열하원정의 결과가 말해주는바와 같이 국제당의 지령이 실정에 맞지 않는 무모한것이고 열하원정으로 하여 항일혁명이 엄중한 손실을 당했다는것이 명백해진 이상 흑백을 가르고 그 후과를 청산해야 한다는것은 누구나 다 공인하는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혁명앞에 가로놓인 난국을 타개하자면 적의 공세에 대처할수 있는 새로운 전술적방안과 좌경모험주의의 후과를 청산하기 위한 실천적대책을 시급히 세워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조선인민혁명군과 항일련군 1군산하의 부대들은 남패자에 모이기로했습니다.

그때 나는 양정우를 몹시 기다렸습니다. 그가 열하원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하였고 또 몽강으로 오는 로상에서도 고생을 많이 하고있었기때문입니다. 양정우도 우리와 만나게 될 날을 고대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양정우부대의 길안내를 해줄 사람들도 미리 파견하고 숙식조건도 충분히 마련해놓았으며 그들에게 공급할 피복까지도 다 준비해두고있었습니다.

고생끝에 이루어진 상봉이였던것만큼 나와 양정우와의 상봉은 실로 감격적인것이였습니다.

양정우의 어글어글한 두눈은 첫 순간부터 내 마음을 끌었습니다. 사람이 천냥이면 눈이 팔백냥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양정우의 두눈을 보고 그가 성실하고 열정적인 사나이라는것을 대뜸 알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닥불곁에서 간단한 담화를 하였습니다. 양정우는 몸을 좀 녹이고나자 느닷없이 1군에 있는 조선사람들에 대한 말을 꺼냈습니다. 1군부대에 조선사람들이 많았는데 모두 소문난 싸움군들이였다, 그런데 그 동무들이 여기에 다 오지 못했다, 아까운 동무들을 잃었다고 거듭 통탄하였습니다.

그가 조선동지들을 잃은데 대하여 얼마나 아프게 생각했던지 내가 오히려 그를 위로해주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였습니다.

나와 양정우는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에서 운명적으로 깊이 련결되여있었습니다.

1930년대 전반기 남만일대에서는 대도회군이였던 료녕구국의용군 총사령 왕봉각이 양정우와 더불어 영웅으로 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동변도일대를 휩쓸며 싸움도 많이 하고 피도 많이 흘리였습니다.

우리가 서간도일대를 타고앉은 다음부터 적들은 우리와 양정우, 왕봉각의 이름을 나란히 놓기 시작했습니다. 왕봉각이 안해와 함께 적들에게 피살된후에는 시선이 우리와 양정우에게 집중되였습니다. 적들이 김일성군이라고도 부른 조선인민혁명군과 양정우부대는 동남만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실력으로 압도한 2대무장력량으로 되였습니다. 적측의 극비문건들을 보면 나와 양정우의 이름을 나란히 놓은 개소들을 많이 찾을수 있습니다. 신문, 잡지들도 그렇게 썼습니다.


일본의 어떤 양정우연구가는 길림에 대하여 쓰면서 <청년김일성이 반일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였던 거리>, <양정우가 유격구에 들어가기전에 머물렀던 거리>라는 식으로 썼으며 또 어떤 글에서는 항일운동이 거세찼던 만주지도에 <양정우와 김일성이 항일유격전쟁을 전개한 남만주지역>이라는 설명문을 달기도 하였다.

양정우의 희생에 대하여 쓴 글에서는 그가 항일게릴라의 지도자로서 일본에서는 김일성 다음으로 잘 알려져있다고 하였다.

아래에 당시의 자료를 더 소개한다.

<김일성은 순수한 공산유격대로서 30살도 안되는 젊은이이나 …림강, 무송, 몽강, 장백 등 소위 미토벌지대에 반거하여 현재 약 500명의 부하를 가지고있는것 같다. 현재로서는 동변도에서 첫째가는 집결세력이다.>(<철심> 1937년 5월호 106페지)


담화를 끝내고나서 나는 우리가 꾸려놓은 숙영지로 양정우네를 데리고갔습니다. 질서정연하게 쳐놓은 천막들을 보자 1군의 전우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자기네가 들 천막이라는것을 잘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1군간부들이 사용할 지휘부천막으로 양정우를 안내하였을 때 그는 감격해하였습니다.

김사령네 부대가 손님대접을 잘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 골안에 와서 이런 환대를 받게 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겨울이 어떤 겨울인가고 하면서 천막안으로 선뜻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천막속에 들어가서 몇 달 묵은 피곤을 풀고 잠도 자라고 하였지만 한사코 사양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우리 부대의 전우들에게 아직 도착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피곤부터 풀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양사령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린접부대들에서 우리 부대에 많은 손님들이 왔다갔지만 양정우처럼 숙소에 행장을 풀어놓기도전에 도착인사부터 하겠다고 서두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나에게 양정우에 대한 소개를 처음으로 해준 사람은 동장영이였습니다. 동장영은 대련에서 당사업을 할 때 양정우에 대한 소문을 좀 얻어들었던것 같습니다. 무순탄광 로동자들이 양정우를 친형처럼 따랐다고 합니다.

2사 사장 조국안도 부대를 데리고 우리 밀영에 와있을 때 양정우에 대한 자랑을 많이 하였습니다.

양정우는 무순당특별지부 서기로 갈 때 자기를 위장하기 위해 마상덕이라는 본명을 장관일로 고치고 산동에서 일자리를 찾아왔다고 하면서 로동자들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산동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무순지방에 발을 튼튼히 붙이려면 같은 산동사람으로 위장하는것이 유리하였을것입니다.

무순탄광에서 한번은 로동자들이 일본인광주들을 반대해서 파업을 일으킨적이 있다고 합니다. 파업을 당장 해야겠는데 탄광에는 로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여 나설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탄부들은 대바른 소리를 잘하는 양정우를 자기네 지도자로 내세웠습니다. 양정우는 자기의 주견대로 파업을 줄기차게 내밀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경찰에 체포되였습니다.

그는 경찰에 끌려가서도 로동계급의 권익을 옹호해서 주장할것은 다 주장하고 요구할것은 다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고문이나 위협에도 절대로 굴하지 않았습니다. 지하조직은 광부들과 함께 적들의 손에서 양정우를 구원해냈습니다.

나는 양정우의 소원대로 그를 우리 부대가 있는 밀영으로 데리고갔습니다. 우리 밀영은 릉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1군의 전우들이 있게 될 밀영과 잇닿아있었습니다. 나의 련락을 받고 전부대가 밀영앞에 정렬해있었습니다.

양사령은 그동안 거듭되는 열하원정으로 모두가 큰 피해를 보았는데 력량을 이렇게 고스란히 보존한것은 김사령이 주견을 가지고 부대를 잘 이끌어온 덕이다, 그런데 나는 부하들을 거의다 잃었다, 먹을것도 변변히 먹지 못하면서 열하로 진격하다가 중도에 쓰러진 부하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난다, 내 오늘 그 부하들을 다 데리고 여기에 왔더라면 얼마나 떳떳하겠는가고 하면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가 희생된 대원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짓는것을 보고 나는 감동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양정우는 부하들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사람이였습니다.

나는 로상에서 고생을 많이 한 양정우를 위해 간단한 주연을 마련했습니다. 주연이라야 탁상에 마른안주를 놓고 술 한두잔을 나누는것입니다. 그는 오래간만에 혁띠를 풀어본다고 하면서 허리에서 권총과 전투가방까지 벗어놓았습니다.

양정우와 함께 남패자에 도착한 서철은 그 광경을 보자 나에게 귀속말로 슬그머니 저것은 관례에 없는 일입니다, 양사령은 누구앞에서나 군복을 단정히 입고 무관다운 체모를 유지하기 위해 각별히 애를 쓰는 사람인데 오늘은 격식을 완전히 깨뜨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첫 대면이였지만 양정우는 그날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가 한때 공업학교에 들어가 방직날염에 대하여 학습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놀랐습니다. 미래의 항일련군 사령이 방직날염을 연구했다는 사실자체가 얼마나 흥미있는 일입니까. 양정우의 말에 의하면 그가 공업학교에서 방직날염을 연구한것은 대대로 헐벗고 못살아온 중국의 동포들에게 고운 천으로 옷을 해입히고싶은 욕망때문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계급의식의 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착취받고 억압받는 인민대중을 위해 혁명투쟁을 하겠다는 결심은 이런 계급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것입니다.

양정우는 10살 남짓한 학창시절에 벌써 학교당국의 불공정한 교육시책에 항거해나섰다고 합니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그가 남달리 대가 바르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라는것을 알수 있을것입니다.

양정우는 원래 동북사람이 아니고 하남성사람입니다. 그런데 공산당의 위임에 따라 동북지방에 와서 지하당사업도 하고 무장투쟁도 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무순지방에서 중국공산당 무순당특별지부사업을 하였고 후에는 할빈에서 지하당사업을 하였습니다.

만주사변이 터지고 동북각지에서 항일무장부대들이 련속 태여나고있던 1932년 가을에 중국공산당 만주당조직에서는 양정우를 남만에 순시공작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가 남만에 파견되게 된것은 남만유격대의 구성상 특성과도 관련되여있었습니다.

남만의 주민구성에서 대다수를 차지한것은 중국인들이였습니다. 그런데 반석에서 조직된 남만유격대는 초창기에 전부가 조선사람들로만 이루어져있었습니다. 남만유격대의 조직자들인 리홍광과 리동광도 조선사람들이였고 그 휘하의 대원들도 모두 조선사람들이였습니다. 이런 실정때문에 남만유격대는 초기에 큰 고충을 겪었습니다. 한족과 민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있는 고장에서 순수히 조선사람들로만 유격대가 꾸려지다보니 광범한 주민대중의 보호를 받기도 어려웠고 인적후비를 충당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남만유격대에 파견되여간 사람들가운데는 할빈에서 공청사업을 할 때 우리와 련계를 가지고 활동한 서철도 포함되여있었습니다. 서철은 조선사람이지만 중국사람행세를 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만유격대에 군의관으로 파견되여갔습니다. 조직에서는 그에게 남만에 가면 리홍광과 리동광에게만 조선사람이라는것을 알리고 다른 사람들앞에서는 철저히 중국사람으로 행동할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가난한 화전민의 아들인 서철은 할빈에서 고학으로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지식청년이였습니다. 그는 중어에 매우 능하였고 중국사람들의 생활풍습에도 정통하고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중국사람들속에서 살았기때문입니다.

서철이 혁명대오에 들어서게 된 과정을 보면 재미나는 일화들이 많습니다.

그가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날 그는 하루종일 들판에 나가 소에게 풀을 먹이고 몰아오다가 경찰들에게서 봉변을 당하였습니다. 경찰들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당치도 않은 트집을 걸어 행패질을 했던것입니다. 그들은 서철을 다짜고짜로 소잔등에서 끌어내려 발길로 차며 경찰나리들이 지나가는데 건방지게 인사도 하지 않고 소를 타고 거들먹거린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서철이 한나라 당의 정치국 위원으로까지 되였지만 그때에는 꼼짝 못하고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혈로 몇달동안 애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후부터 그는 경찰들을 미워하였고 그들과 한동아리가 되여 돌아가는 지주나부랭이들과 벼슬아치들도 미워하게 되였습니다.

오래전부터 중국의 풍토에 순화되여있고 동북사람들의 생활관습에 인이 박힌 서철은 중국사람으로 둔갑하여 남만유격대를 곤경에서 구출하는데 도움을 줄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였습니다.

서철은 조직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게 중국인군의행세를 잘하였습니다. 그는 반석유격대의 권위를 높이고 군민관게를 개선하는데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양정우가 남패자에 왔을 때는 그가 데리고온 부하들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하원정에서 당한 손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양정우네 부대는 원정과정에도 많은 피를 흘렸지만 즙안으로부터 몽강으로 빠져나오는 행군과정에서도 온갖 간난신고를 다 겪었다고 합니다. 적들은 비행기와 대포를 비롯한 중무기까지 다 동원하여 그의 부대를 숨쉴사이 없이 추격하였습니다. 온 부대가 포위속에서 고전을 겪은 때도 있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공격하지 앞에서는 정빈이 투항을 권고하는 나발을 불어대지 사처에서 대포를 꽝꽝 쏘아대며 포위망을 좁혀들지 정말 빠질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양정우는 1군에 속한 조선인전투원들이 특별히 잘 싸웠다고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외차구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박선봉련대와 박성철중대에 대해서 거듭 찬양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양정우는 자기가 외차구에서 최후를 각오했었다고 하였습니다.

외차구돌파전에서 결정적역할을 한것은 박성철이 인솔한 중대였습니다. 박성철중대의 결사대원들은 모두가 육탄이 되여 돌파구를 열었습니다. 양정우네 부대를 구출하는데서 박성철의 공로가 컸습니다.

양정우는 그때 자기네 부대에 조선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외차구에서 적의 포위를 뚫지 못하고 전멸당했을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중조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이 항일련군을 내오지 않고 따로따로 갈라서 활동했더라면 자기가 이렇게 남패자에 와서 나를 만나지 못했을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조선인간부들을 많이 양성하여 자기네한테 파견해준데 대해 진정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남패자에서 회의를 10여일 하였던것 같습니다.

남패자회의에서는 열하원정의 좌경모험주의적인 본질과 그 엄중한 후과가 신랄하게 분석비판되고 그 후과를 가시기 위한 대책이 진지하게 론의되였습니다.

회의에서는 적들의 대규모적공세에 대처하여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일대에 진출하여 군사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릴데 대한 문제와 파괴된 조국광복회조직을 복구정비하고 대중정치사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릴데 대한 문제, 혁명에서 자주적립장을 확고히 견지할데 대한 문제들이 토의결정되였습니다.

회의에서는 우리 인민혁명군부대들을 방면군으로 편성하고 그 지휘관들을 임명하였으며 부대들의 활동구역을 분담하였습니다.

력사학자들이 남패자회의의 정치군사적의의를 잘 서술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패자회의는 남호두회의와 함께 조선혁명과 동북혁명의 주체성을 강화하는데서 큰 몫을 담당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혁명의 주체성이란 무엇입니까. 독자적인 판단과 결심을 가지고 자기 나라의 특성과 실정에 맞게 혁명을 자주적으로 해나간다는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남패자회의를 계기로 하여 조선혁명은 질적으로 한걸음 더 비약하였습니다. 인민혁명군의 전체 장병들이 이 회의에서 큰 고무를 받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이 고난의 행군과 같은 시련을 의지나 인내성 하나만으로 극복한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남패자회의의 정신에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 힘은 행군전과정에서 나와 나의 전우들을 줄곧 앞으로, 앞으로 떠밀어주었습니다.

우리는 1939년 봄에 북대정자회의에서 남패자회의의 방침을 다시금 확인하고 국내에로 진출할것을 결정하였습니다. 남패자회의에서 중요한 로선적문제가 채택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적들이 우리를 10겹, 20겹으로 포위하고있던 그 준엄한 환경속에서 장백의 설령과 설원을 헤치고 조국에 나가서 총소리를 울리지 못했 을것입니다. 무산지구에서 울린 조선인민혁명군의 총소리는 남패자회의와 북대정자회의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남패자에서 우리 부대의 대원들로 양정우와 위증민에게 경위련대를 새로 개편해주었습니다. 그 련대에 숱한 인원을 보충해주었습니다. 그때 지휘관들도 재임명하고 양정우에게 전령병도 넘겨주었습니다. 경위련대의 개편과정을 통하여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친선과 우애는 더 깊어졌습니다.

남패자회의가 끝난후 각 부대들은 분담된 작전지역들로 떠나갔습니다. 양정우와의 작별은 상봉의 날처럼 인상이 깊었습니다. 우리는 두 나라 혁명가들의 명예를 걸고 기어이 화를 복으로 바꾸어 승리자가 되여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후 나는 양정우를 다시 만나볼수 없게 되였습니다.

양정우는 우리와 헤여진 다음 화전, 돈화, 몽강, 휘남, 무송, 금천 등지에서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벌리였습니다.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이라는 이름으로 감행된 적들의 <대토벌>로 하여 그의 부대는 중첩되는 곤난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제일 어려운것이 겨울나이준비였다고 합니다. 겨울나이준비를 하자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양정우는 분산활동의 방법으로 <대토벌>을 이겨내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그런 결심을 내린 것은 물론 유격전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볼수 없습니다. 원리적으로 보아 옳은 전술도 정황에 맞게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화가 될수 있습니다. 군사적정황이라는것은 천태만상이고 천변만화하는 법입니다.

소부대로 분산활동을 하게 되면 적들의 시야에서는 비교적 쉽게 빠져나갈수 있습니다. 양정우도 이 점을 타산하고 <이정화령>과 <이령화정>을 능란하게 배합하는 방법으로 적을 타승하고 부대앞에 가로놓인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을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정황의 요구에 따라 흩어졌던 소부대들을 대부대력량으로 집결하려고 하였을 때에 그것이 뜻대로 잘되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대적의 포위속에 있는 상태에서 분산활동만 하게 되면 적이 대부대로 공격해올 때 그것을 쉽게 격파할수 없습니다. 적을 격파하지 못하면 결국 추격을 받게 되는데 그러면 완전히 피동에 빠지게 됩니다. 분산활동을 하다가 대부대와 맞다들어 부득이 조우전을 하게 될 경우에도 불리해지는것은 더 말할것도 없이 분산활동을 하는 측입니다. 적들은 양정우네 부대가 소부대로 분산되여 움직인다는것을 알고는 종전보다 큰 규모의 력량을 투입하여 포초소멸작전을 악착스럽게 벌렸습니다. 게다가 양정우는 류동작전을 벌리지 않고 밀영을 지어놓고 겨울한철 그곳에 머물러있다보니 적들의 집중적인 <토벌>을 면할수가 없었습니다.

놀라운것은 이 작전의 최선두에 선자가 양정우의 수하에서 사장을 하다가 반변한 정빈이라는것입니다. 1940년 정월에 통화성경찰대 대장이 된 정빈은 양정우부대의 주력과 조우하여 몽강현 서강에서 무려 6시간동안의 교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월초에는 다른 하나의 경찰대대와 함께 또다시 양정우의 주력과 교전하였습니다.

양정우는 1940년 2월 몽강현의 한 수림속에서 적<토벌대>와 맞서 싸우다가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치였습니다. 양정우가 마지막결전을 벌리던 그 시각에 그의 곁에는 경위대원들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적들의 포위속에 들게 되였습니다. 적들은 투항하라고 련속 웨쳐댔습니다. 그러나 양정우는 손에 두자루의 권총을 틀어잡고 적들과 치렬한 총격전을 벌리다가 쓰러졌습니다.

양정우를 마지막까지 호위한 사람은 우리가 남패자에서 넘겨준 전령병 리동화였습니다. 리동화는 양정우가 전사하는 순간까지 그와 운명을 같이하였습니다. 우리가 신문지상을 통하여 양사령의 최후에 대한 비통한 소식에 접한것이 아마 대마록구전투 직후일것입니다. 적들을 치고 로획한 신문에 그가 전사한 소식이 실려있었는데 나는 그 신문을 읽은 다음부터 밥맛을 잃었습니다.

출신도 다르고 민족도 달랐지만 나는 그때 양정우와의 상봉을 회고하며 남모르는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적들은 양사령의 머리를 잘라내여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비행기를 타고다니면서 그 사진을 만주도처에 뿌리였습니다. 그들은 양정우의 배까지 갈라보았습니다. 아마 그가 아무것도 없는 산중에서 무엇을 먹으면서 그처럼 초인간적인 투지를 발휘했는가를 알고싶었던 모양입니다. 한알의 낟알도 보이지 않는 양정우의 위장속에는 마른풀과 풀뿌리, 나무껍질을 삭인것만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초근목피뿐이였습니다.

남패자에서 양정우와 함께 우정을 나누던 그 시기 나는 김주현, 김택환, 김영국 등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새 지휘관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패자를 더더구나 잊지 못합니다.

해방후 중국에서는 양정우의 이름을 따서 그가 전사한 몽강현을 정우현이라고 고쳤습니다.

중국에서 양정우렬사를 기념하기 위해 통화시에 <정우릉원>을 꾸리고 개원식을 할 때 나는 그의 령전에 화환을 보냈습니다.

해방후 중국당지도자의 한사람은 동북항일유격전쟁의 위치를 밝히는 글에서 20여년간의 중국공산당의 력사에서 가장 간고한 세 싸움은 첫째는 2만5천리장정이고 둘째는 로농홍군 주력이 장정한후 남방에 남은 홍군의 3년간의 유격전이고 셋째는 동북항일련군의 14년간의 고투였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동북항일련군이 진행한 영웅적항전의 기발에는 중국인민이 낳은 열렬한 공산주의자 양정우의 피도 스며있습니다. 우리 인민은 공동항일의 길에서 양정우가 이룩한 빛나는 투쟁업적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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