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3. 타도제국주의동맹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3. 타도제국주의동맹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990회 작성일 15-03-12 00:05

본문

3. 타도제국주의동맹


화성의숙의 시대적락후성은 나로 하여금 낡은 방식대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총 몇자루를 가지고 소규모의 무장단성원으로 압록강을 넘나들면서 왜놈순사나 몇놈 처단하고 군자금이나 모으러 다니는것과 같은 투쟁방법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없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굳어졌다.


나는 새로운 방법으로 조국광복의 길을 개척해야 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품게 되였다. 새 길로 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나의 동무들도 견해가 같았다.

그런데 그런 견해를 가지고있는 학생이 몇명 되지 않았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새 사조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계하거나 배척하였다.


화성의숙에서는 공산주의서적도 마음대로 읽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공산당선언》을 학교에 가지고 나가면 학생들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그런 책은 집에서나 보라고 슬그머니 귀띔해주군 하였다. 학교당국이 제일 경계하고 엄중시하는것이 적색계 책인데 경중에 따라 퇴학처벌도 할수 있다고 위협했다는것이였다.

나는 통제를 한다고 읽고싶은 책도 읽지 않으면 큰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책은 퇴학을 시킨다해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산당선언》은 김시우의 서재에 있던 책이였다. 그 서재에는 공산주의서적들이 많았다. 김시우의 서재는 민족해방운동이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하고있던 당시의 시대상과 그 시대의 흐름에 발을 맞추려는 김시우 자신의 립장을 보여주고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화성의숙당국이 그런 책들을 읽지 못하게 하니 나로서는 불만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의숙의 계률은 어떻든 새 사상에 심취되여 그것을 깊이 파고들려는 우리의 열정은 눅잦힐수 없었다. 나는 당국의 요구를 무시하고 공산주의서적들을 정열적으로 탐독하였다. 그무렵에는 벌써 그런 책을 보고싶어하는 학생들이 줄을 서고있을 정도로 늘어났을 때여서 우리는 독서순서와 기간을 정하고 제때에 책을 바치도록 하였다. 새 사조를 신봉하는 학우들사이에서 은연중에 약속된 이 독서규범을 청년들은 대체로 잘 지키였다.


그런데 성미가 더펄더펄한 계영춘이만은 이 규범을 곧잘 어기였다. 그는 독서기간도 잘 지키지 않고 독서장소를 선택하는데서도 조심성이 없었다. 《공산당선언》은 혼자서 열흘이상 끼고있었다. 그래서 다른 동무에게 빨리 넘겨주라고 했더니 그는 좀 발취할 대목들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틀만 더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계영춘은 다음날 학교에도 나오지 않고 기숙사에서 슬그머니 새여버리였다. 오전공부가 다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여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휘발하강가에서 풀숲에 엎드려 정신없이 책을 읽고있는 그를 찾아내였다.


나는 그에게 책에 심취되는것은 좋지만 강의에 빠지지 말고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읽으라고 조용히 귀띔해주었다.

계영춘은 조심하겠다고 하였지만 다음날 력사시간에 책을 몰래 꺼내보다가 교원에게 빼앗기였다. 그 책이 숙장선생의 손에까지 들어가서 큰 말썽을 일으키였다.

학교당국은 그 책이 나를 통해 김시우의 서재에서 흘러나왔다는것을 알고는 나와 총관에게 력사교원을 보내여 야단을 부리였다.


그 선생은 김시우에게 화성의숙의 사업을 잘 도와주어야 할 총관이 학생들이 좌익서적을 읽는것을 보고도 막지 않는것은 총관답지 못한 처사라고 하면서 이제부터는 학생들이 그런 책을 읽지 못하도록 단속해달라고 하였다. 나를 보고는 성주도 조심하는것이 좋겠다고 위협하였다.

나는 학교당국의 처사에 격분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람이 건전한 인격을 갖추려면 다면적인 지식을 섭취해야 하지 않습니까. 학교당국은 어째서 새것을 한창 섭취해야 할 청년들에게서 세계적으로 공인된 선진사상을 연구할 권리마저 빼앗습니까. 맑스나 레닌의 저작들이 보통책방에까지 흘러나와 글을 아는 사람이면 다 읽는 판인데 유독 화성의숙에서만은 어째서 그런 책들을 못읽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화성의숙에 대한 불만을 터놓으며 김시우에게 들이댔다.

김시우는 한숨을 쉬면서 정의부의 시책이고 학교당국의 방침이니 자기 재간으로는 어쩌지 못하겠다고 고백하였다.


사람의 가치를 규정하는 기본척도가 사상인것처럼 교육의 가치, 학교의 가치를 규정하는 기본척도도 사상이다. 그런데 화성의숙당국은 시대의 추세에 맞지 않는 케케묵은 사상으로 새 사조의 물결을 막아보려고 헛되게 애를 쓰고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은 학교안에 맑스ㅡ레닌주의를 탐구하는 패가 있다는것을 감촉하게 되였다. 당국은 이 사건을 가지고 퇴학이니, 엄중처벌이니 하고 요란스럽게 떠들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진보적인 청년들속에서 공산주의사상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부채질해주는 결과를 빚어냈다.


그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나한테로 좌익서적들을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학생들의 수가 부쩍 늘어났다.

나는 그런 청년들가운데서 뜻을 같이하고 생사를 같이할수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들을 한사람한사람씩 만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가 생전에 늘 한 말씀이 동지를 잘 사귀고 동지를 많이 가지라는것이였다. 아무리 정당하고 훌륭한 목적을 가진 사람도 생사를 같이할수 있는 동지들이 없으면 원대한 뜻을 이룰수 없다고 한 아버지의 말씀을 나는 늘 명심하였다.


많은 학생들과 접촉하였는데 그중에는 1중대에서 온 리모라는 학생도 있었다. 그는 머리도 총명하고 실력도 우수하고 성격이나 기질도 다 좋아서 동무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학생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상만은 보수적이였다.

세계혁명사과목시간에 왕조복귀를 맨처음으로 주장해나선 학생이 바로 그 청년이였다.


평소에는 그저 지나가면서 한두마디의 말이나 주고받던 그 학생이 나와 속을 터놓을 정도로 친숙해진것은 조선인모범소학교 고등반학생들과의 축구시합이 있은 후부터였다. 그날 공격수로 활동한 그 학생은 상대편선수와 부딪쳐 다리를 상하였다.

나는 기숙사에 들어가 침식을 같이하면서 열흘 남짓하게 그를 간호해주었다. 그 과정에 그와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되였다.


그는 세계혁명사강의시간에 자기가 왕조복귀를 주장한것은 엉터리없는 일이였다고 하면서 성주가 말한것처럼 우리 나라는 독립후 근로하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사회로 가는것이 옳을것 같다, 빨리 왜놈들을 내쫓고 우리도 잘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지금 화성의숙에서 배워주는 군사교련이나 받으면 왜놈들과 싸워서 이길수 있을것 같은가, 일본을 세계 5대강국의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소총 한자루 변변치 못한 독립군의 힘만으로 그런 강적을 감당해낼수 있을것 같은가고 물었다.

그 학생은 싸우자면 신체를 단련하고 총을 잘 쏘아야지 별수가 있는가, 오래동안 독립운동을 해오던 사람들의 방식을 따라야지 다른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하였다.


나는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독립을 못한다, 지금 그 방법을 찾아내려고 맑스나 레닌이 쓴 책들을 읽고있는데 배울것이 많다, 지금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공산주의사상을 비방중상하고 있고 또 완고한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배척하고있는데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나쁘다고 한다 하여 로동자, 농민의 자식들인 우리가 공산주의가 어떤것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나쁘다고 해서는 안된다, 참다운 독립운동자, 애국자가 되자면 맑스ㅡ레닌주의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학생은 내 말에 공감되는지 깊은 생각에 잠기는듯 하더니 자기에게도 그런 책을 빌려줄수 없는가고 하였다.

나는 이제 상처만 나으면 책을 빌려줄터이니 우선 치료를 잘하여 빨리 일어나라고 고무해주었다.


새 사조를 동경하는 조류는 걷잡을수 없는 힘으로 화성의숙을 휩쓸었다. 민족주의를 따르는 완고한 몇몇 학생들을 내놓고는 절대다수가 선진사상을 신봉하게 되였다.

나는 진보적인 청년학생들로써 읽은 책에 대한 토론회를 자주 조직하였다. 토론회는 김시우의 집에서도 하고 숙감인 강제하의 집에서도 하고 휘발하강가에서도 하였다.


총관의 서재에서 토론회가 벌어지는 날이면 김시우는 은근히 왼심을 쓰면서 손님들은 물론, 집안식구들까지 그 방에 드나들지 않도록 엄하게 단속하군 하였다. 때로는 토방우에 걸터앉아 무슨 허드레일을 하는척하면서 망도 봐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말없는 그의 행동에서 후더운 인정과 지지를 느끼였다.


우리가 강제하의 집을 토론회장소로 정한것은 그의 아들 강병선이 나와 가까운데도 있지만 강제하자신이 아버지의 친구인데다가 사상경향이 좋은 사람이였기때문이다.

강제하는 민족주의자이지만 공산주의를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놀러 가면 앉혀놓고 공산주의선전을 하였다. 우리는 나이가 많아서 틀렸는데 자네들은 공산주의적방법으로라도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우리한테는 적지 않은 힘이 되였다. 그의 집에는 공산주의서적도 여러권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때 우리는 조선혁명과 관련된 실천적문제들을 가지고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토론을 진행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토론과정을 거쳐 청년들은 조선혁명에 대한 견해와 립장을 통일시킬수 있었다.


어느날 김시우네 집에서 이런 토론을 하고있을 때 나의 간호를 받던 리동무가 쌍지팽이를 짚고 찾아와 약속했던 책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다른 동무들은 다 새 길을 가는데 자기 혼자 기숙사에 누워있자니 락오자가 되는것 같아서 찾아왔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그도 우리와 한길을 걷게 되였다.


자본가들은 돈을 모으는 재미가 별재미라고 하지만 나한테는 동지를 모으는 재미가 최상의 락이고 재미였다. 동지 한명을 얻을 때의 희열을 어찌 황금덩이 하나를 얻을 때의 기쁨에 비길수 있겠는가. 동지를 얻기 위한 나의 투쟁은 이렇게 화성의숙에서부터 첫 발자국을 떼였다. 그때부터 나는 한생을 동지를 얻는 일에 바치였다.


좋은 동지들이 주위에 많이 집결되자 나는 이들을 어떻게 조직적으로 결속하여 판을 크게 벌려볼수 없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모대기였다. 동무들에게도 내 생각을 터놓았다. 그것이 아마 9월말경에 있은 모임에서였다고 기억된다.


내가 그날 조직의 필요성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였던것 같다. 나라를 해방하고 근로민중이 잘 사는 세상을 세우자면 멀고도 험난한 길을 개척해야 한다, 우리가 대오를 늘이고 완강하게 혈전을 벌려나간다면 능히 승리할수 있다, 조직을 내온 다음 대중을 그 두리에 묶어세우고 각성시켜 그들의 힘으로써 나라를 광복해야 한다, 이런 내용으로 말했더니 동무들이 다들 기뻐하면서 빨리 조직을 내오자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조직을 내오자면 준비를 더해야 한다는것과 우리와 사상을 같이 하며 함께 투쟁할수 있는 동무들을 더 많이 흡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임에서는 앞으로 조직성원이 될 만한 대상들을 정한 다음 아무개는 누구를 맡고 아무개는 누구를 맡아 교양한다는 식으로 분공조직도 하였다.


그런데 몇몇 동무들이 우리가 장차 새로운 조직을 내오면 또 하나의 파가 생기지 않겠는가고 우려하였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우리가 무으려는 조직은 민족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의 분파와는 전혀 다른 새형의 혁명조직이다, 그것은 파쟁을 하자는 조직이 아니고 오직 혁명을 하자는 조직이다, 우리는 자신을 혁명에 깡그리 바쳐 싸우고 또 싸우는것으로써 만족할것이다.…


우리는 준비기간을 거친 다음 당시 중국의 국경절인 쌍십절(10월 10일)에 조직을 내오기 위한 예비회의를 열고 조직의 명칭과 성격, 투쟁강령, 활동규범들에 대한 토의를 하였으며 한주일후인 1926년 10월 17일에는 김시우네 집에서 정식으로 조직을 무었다.

연탁도 없는 수수한 온돌방에서 모임은 조용히 진행되였다. 그러나 그 방에 차넘치던 활기와 열정만은 60여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은 동무들도 흥분하고 나도 흥분하였다. 조직을 뭇는 마당에 정작 나서고보니 왜 그런지 돌아가신 아버지생각이 떠오르고 조선국민회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조선국민회를 무으려고 여러해동안 수만리길을 걸으면서 사방에 흩어져있는 동지들을 결속하였다. 국민회를 내온 뒤에는 그 리념을 실현하기 위해 한생을 깡그리 바치다가 돌아가시였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뜻을 자식들에게 넘겨주었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한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길에서 드디여 첫 열매를 맺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가슴도 울렁이고 눈물도 났다.

우리가 내오게 된 조직의 강령에는 아버지의 리념도 포함되여있었다.


그날 모임에 참가하여 열변을 토하던 청년들의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 최창걸, 김리갑, 리제우, 강병선, 김원우, 박근원, … 후날 배신은 하였지만 리종락과 박차석도 혁명을 위해 피와 살을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전투적인 언약을 하였다.

언변이 좋은 사람도 있었고 서투른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훌륭한 토론들을 하였다. 나도 그때로서는 꽤 긴 연설을 하였다.


그 모임에서 나는 우리가 뭇는 조직을 타도제국주의동맹으로, 략칭으로는 《ㅌ. ㄷ》라고 할것을 제의하였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은 반제, 독립, 자주의 리념밑에 민족해방, 계급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새 세대의 청년들이 력사의 진통속에서 창조한 순결하고 참신한 새형의 정치적생명체였다.


우리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할 목적으로 이 동맹을 결성하였지만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너무 좌익적인 조직인것 같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하여 조직의 명칭을 타도제국주의동맹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우리는 그때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조직의 명칭을 타도제국주의동맹으로 하자는 제의는 만장일치로 가결되였다.


내가 발표한 《ㅌ. ㄷ》의 투쟁강령도 그대로 채택되였다. 《ㅌ. ㄷ》는 문자그대로 제국주의일반을 타도하자는 조직이였던것만큼 그 구호도 대단하였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의 당면과업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는것이며 최종목적은 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며 나아가서는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세계에 공산주의를 건설하자는것이였다.

우리는 이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방침도 채택하였다.

모임에 참가한 청년들에게 등사한 규약책도 나누어주었다.

그 회의에서 최창걸이 나를 타도제국주의동맹 책임자로 추천하였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한덩어리가 되여 휘발하강가에 달려나가 노래를 부르며 조국과 민족을 위한 혁명의 길에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비장한 맹세를 다지였다.


그날 나는 잠이 전혀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밝히였다. 너무도 흥분이 크고 감격이 커서 잠을 이룰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그때 온 세계를 전취한것 같은 감격과 희열에 휩싸여있었다. 돈더미우에 올라앉은 억만장자들의 락을 어떻게 이런 기쁨에 비길수 있을것인가.


그 당시 공산주의운동내부에는 큼직한 간판을 가진 조직들이 많았다.

우리는 조직을 방금 내온데 지나지 않았다. 규모를 보면 아직 그런 조직들에 비길만 한 형편이 못되였다. 세상은 아직 《ㅌ. ㄷ》라는것이 나왔는지 어쨌는지 알지도 못하고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ㅌ. ㄷ》를 뭇고나서 그처럼 열광적인 기분에 휩싸였던것은 우리가 만든 조직이 종래의 조직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새형의 공산주의적혁명조직이라는 긍지감을 가지고있었기때문이였다.


《ㅌ. ㄷ》는 어느 파에서 갈라져나온 조직도 아니고 또 거기에 망라된 성원들로 말하면 어떤 종파에 가담했거나 망명단체에 가있다가 떨어져나온 사람들도 아니였다. 문자그대로 백지처럼 깨끗하고 순결한 새 세대였다. 《ㅌ. ㄷ》의 피에는 잡것이 섞여있지 않았다.


그 성원들로 보면 또 다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였다. 연설을 하라고 하면 연설을 하고 론문을 쓰라고 하면 론문을 쓰고 노래를 지으라고 하면 노래를 짓고 격술을 하라고 하면 격술도 할수 있는 끌끌한 재목들이였다. 지금말로 한다면 《일당백》, 《일당천》의 청년들이였다. 그런 청년들이 모여서 새 길을 개척하자고 덤벼들었으니 그 기세 또한 대단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ㅌ. ㄷ》성원들은 우리가 개척한 혁명위업이 어려운 국면에 처할 때마다 항상 육탄이 되여 그 출로를 열어나갔다. 그들은 조선혁명의 핵심부대로서 어데서나 선도적역할을 수행하였다. 김혁, 차광수, 최창걸, 김리갑, 강병선, 리제우를 비롯하여 《ㅌ. ㄷ》의 산아들중 많은 사람들은 투쟁의 앞장에서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고결하게 생애를 마치였다. 개중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출발은 잘 떼고서도 혁명투쟁이 심화되는 과정에 《ㅌ. ㄷ》의 리념을 저버리고 배신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유감스러움을 금할수 없다.


이제는 《ㅌ. ㄷ》시절에 나와 같이 손잡고 일하던 사람들이 한명도 남지 않았다. 조국의 독립과 무산민중의 사회를 그리며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싸우던 수많은 《ㅌ. ㄷ》의 아들딸들이 좋은 세상도 못보고 꽃같은 나이에 모두 일찌기 우리 곁을 떠나가버리였다. 그들은 청춘을 바쳐 우리 당과 혁명의 초석을 쌓아놓았다.


우리 당 력사에서는 《ㅌ. ㄷ》를 당의 뿌리로 보고있으며 《ㅌ. ㄷ》의 결성을 조선공산주의운동과 조선혁명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시원으로 인정하고있다. 그 뿌리에서 우리 당의 강령이 태여나고 우리 당 건설과 활동의 원칙이 마련되고 우리 당창건의 골간이 육성되였다. 《ㅌ. ㄷ》가 조직된 때로부터 우리 혁명은 자주성의 원칙에 기초하여 새로운 걸음을 떼였다.


그때 우리가 추켜들었던 타도제국주의동맹의 리념이나 기개에 대하여서는 해방직후 최일천(최형우)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서 《〈ㅌ. ㄷ〉와 김일성》이라는 제목으로 그 일단을 서술했다고 생각한다.


여러해가 지난 후 혁명군이 창건되고 조국광복회가 태여나 2천만의 총동원을 소리높이 웨칠 때 그리고 그 대렬을 수천수만의 지지자, 동정자들이 위성처럼 둘러싼 혁명의 전성기가 도래하였을 때 나는 화전에서 우리가 《ㅌ. ㄷ》를 조직하던 시절을 감개무량하게 회상하군 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