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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4-3. 카륜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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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257회 작성일 15-03-26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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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카륜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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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하순이 되자 동무들은 약속한대로 카륜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카륜에는 이미 우리의 혁명조직들이 들어가있었다. 우리는 1927년경부터 만주각지로 쉽게 래왕할수 있는 교통의 분기점에 활동기지를 하나 만들어둘 필요를 느끼고 공청핵심들을 파견하여 이 일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카륜에서 회의를 하려고 결심하게 된것은 이곳이 교통상 편리한 지점에 자리잡고있다는 점과 회의참가자들의 신변안전과 비밀보장을 전적으로 담보할수 있는 은페된 활동기지라는 점을 고려해서였다.


카륜은 반일운동자들의 래왕이 잦은 고장이였지만 적들에게는 로출되지 않은 곳이였다. 이 고장 인민들이 또한 우리의 일이라면 후원을 아끼지 않았기때문에 회의장소로는 리상적인곳이였다.

내가 카륜에 도착하니 소년탐험대 총대장인 정행정이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내가 카륜에 갈 때면 늘 그가 역에 마중을 나왔다가 나와 동행하군 하였다.


카륜에 와보니 돈화나 길림보다는 분위기가 좀 평온하였다.

5.30폭동이 휩쓸고 지나간 뒤여서 그 당시 간도의 공기는 대단히 험악하였다. 그런데다가 일본군대의 동만출병이 박두한것과 관련하여 정세는 더 긴장해졌다. 일제가 간도에 군대를 들이밀려고 한것은 이 일대에서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혁명운동을 진압하고 만몽을 점령하며 쏘련을 침공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자는데 있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라남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 제19사단 사단장 가와시마중장이 룡정, 연길, 백초구, 두도구지방을 순시하고있었다. 국민당 길림군참모장과 민정청 청장도 때를 같이하여 동만을 시찰하였다.


간도지방의 혁명조직들이 동만으로부터 일본군 중장과 국민당 참모장, 민정청 청장을 내몰라고 호소한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나는 그때 카륜에 가서 진명학교 교원들인 류영선과 장소봉의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장소봉은 진명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동아일보》지국장의 일도 겸하여보았다. 그는 차광수처럼 글도 잘 쓰고 식견도 높은데다가 일도 잘하여 동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면 부부싸움을 자주 하는것이 흠이였다.

동무들이 충고를 주면 자기 안해가 지나치게 봉건적인 녀자여서 도무지 뜻이 맞지 않는다고 타발하였다. 장소봉이 가정생활에 취미를 붙이게 하느라고 내가 여러번 설복도 하고 비판도 하였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장소봉은 조선혁명군이 조직된후 무기를 구입하려고 장춘에 나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여 전향하였다. 한때는 나에 대한 《귀순공작》에도 동원되였다고 한다.

카륜을 혁명화하는데서 김혁과 장소봉은 특별히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그들은 이 지방의 유지들과 힘을 합쳐 학교와 야학을 세우고 그것을 거점으로 교육운동을 벌리였으며 농민회, 청년회, 소년회, 부인회 등 종래의 계몽단체들을 농민동맹, 반제청년동맹, 소년탐험대, 부녀회 등의 혁명적인 조직들로 개편하여 각계각층 군중을 항일혁명의 담당자로 훌륭히 교양육성하였다.


김혁의 주관하에 잡지 《볼쉐위크》가 창간된곳도 바로 카륜이였다.

나는 카륜에 가서도 사도황구에서처럼 조선혁명의 진로를 두고 사색을 계속하였다. 한달가량 사색하고 정리한것을 종합해보니 퍼그나 부피가 큰 글이 되였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것은 우리 나라의 민족해방투쟁이 새로운 지도리론을 요구하고있는 현실적절박성을 뼈에 사무치도록 통감하였기때문이다.

새로운 지도리론이 없이는 혁명을 한걸음도 전진시킬수 없었다.


자주성을 요구하는 피압박인민들의 혁명적진출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세계적규모에서 더욱 더 확대되였다. 지구상에서 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피압박인민들의 해방투쟁이 가장 치렬하게 벌어지고있던 대륙은 아세아였다.

아세아가 식민지민족해방투쟁의 중심무대로 된것은 제국주의자들이 이무렵에 와서 아세아후진국들의 리권을 강탈하기 위한 침략을 더욱 로골화하였기때문이며 동방의 여러 나라 인민들이 과감히 떨쳐일어나 도처에서 민족적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결사적으로 전개하였기때문이였다.

외세를 구축하고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새 사회에서 살아가려는 동방인민들의 정의로운 투쟁은 그 어떤 힘으로써도 멈춰세울수 없었다.


쏘련, 몽골혁명의 약진에 발을 맞추어 중국, 인도, 윁남, 버마, 인도네시아 등 아세아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의 억센조류는 격랑처럼 끓어번지였다. 비폭력불복종운동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인도의 거리에서 방직공들이 붉은기를 들고 시위를 단행한것도 이무렵이였다.

중국인민은 제2차 국내전쟁의 불길속에서 1930년대를 맞이하였다.

중국을 비롯한 아세아 여러 나라들에서 벌어지고있는 혁명투쟁과 국내인민들의 적극적인 진출은 우리를 끝없이 흥분시키고 분발시켰다.


당을 내오고 옳은 지도리론만 내놓는다면 인민을 궐기시켜 얼마든지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승리할수 있다는 자신심이 우리의 마음속에 움직일수 없는 신념으로 뿌리를 내리였다.

이 시기에 와서도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무대에는 각당, 각파의 립장과 리해관계를 대변하는 여러가지 주의주장이 등장하여 대중을 이렇게도 이끌고 저렇게도 이끌고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리론들은 이러저러한 시대적, 계급적 제한성을 면치못하고있다.


그때까지의 민족해방투쟁에서 우리가 그중 높은 형태의 투쟁이라고 본것은 독립군들의 무장투쟁이였다. 이 투쟁에는 민족주의좌익진영에서 가장 적극적인 반일독립운동자들과 애국자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이 독립군부대를 조직해가지고 무장투쟁을 시작한것은 독립전쟁을 해야 나라를 찾을수 있다고 믿었기때문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대부대에 의한 군사활동으로써만 독립을 쟁취할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인 테로전술만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쫓아내는 가장 좋은 방도라고 주장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군대를 잘 훈련시켜두었다가 쏘련, 중국,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이 일본과 전쟁을 할 때 그들과 련합하여 독립을 이룩하는것이 조선의 실정에 맞는 전략이라고 하였다.

이 모든 주장들은 어느것이나 다 일제와의 혈전을 지향하고있었다.


그러나 독립군의 투쟁은 이러한 초지를 끝가지 관철할만한 과학적인 전략전술을 갖추지 못하였고 독립전쟁을 끝까지 해나갈수 있는 강력하고 세련된 지도부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그 투쟁을 인적, 물적, 재정적으로 뒤받침할수 있는 튼튼한 대중적지반을 꾸리지 못하였다.


개량주의리론가운데서는 《실력양성론》이라는 안창호의 《준비론》이 독립운동자들의 화제거리로 되고있었다.

우리는 안창호란 인물자체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에 일생을 고스란히 바친 청렴하고 량심적인 애국지사로 존경하고있었지만 그의 리론에 대해서는 환영하지 않았다.


상해림시정부의 비폭력적독립운동로선도 대중의 지지와 공감을 받지 못하였다.

상해림시정부가 조직된지 얼마 안되여 사람들의 실망을 자아낸 존재로 된것도 이 단체가 시종일관 한가닥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비폭력적인 외교로선에 매달려 세월을 보냈기때문이였다. 그런것만큼 군사로선을 절대화하고있던 독립군은 이것을 한사코 랭대하였다.


조선을 국제련맹의 위임통치하에 두어달라고 애걸한 리승만의 청원에 대해서는 무슨 로선이라고 말할것도 없으며 민족주의우파가 제창한 《자치론》역시 민족의 독립정신에 배치되는 하나의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


1925년에 창건된 조선공산당도 조선의 실정에 맞는 과학적인 전략전술을 세우지 못한채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였다.


총괄적으로 말하여 선행세대의 전략이나 로선이 가지고있는 보편적인 약점은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외면한데 있었다.

선행세대의 운동자들은 한결같이 인민대중이 혁명의 주인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진리를 무시하고있었다. 수백만대중의 조직된 힘에 의거해야 일제를 타도할수 있겠는데 우리 나라의 반일운동자들은 혁명도 독립전쟁도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것으로 알고있었다.

공산주의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이런 립장에서 기초축성은 별로 하지 않고 몇몇 상층인물들로써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당을 만들었으며 대중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3인1당, 5인1파식으로 서로 분렬되여 여러해동안 헤게모니싸움을 벌렸다.


선행세대의 로선이나 전략들은 또한 조선의 산 현실에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한 심중한 약점을 가지고있었다.

나는 조선의 산 현실에 부합되는 옳은 지도리론을 내놓자면 고전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을 절대시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자체의 실정에 맞게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지도리론을 마련한다고 하여 10월혁명의 경험같은것을 통채로 받아들여도 안되였고 국제당이 그 어떤 만병통치의 처방을 가져다줄것같이 기대하면서 팔짱을 끼고 앉아있어도 안되였다.


《우리가 믿을것은 인민대중의 힘밖에 없다. 2천만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세워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혈전을 벌리자.》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웨침이 자주 울리였다.

나는 이런 충동을 안고 오늘 우리가 주체라는 이름을 달아서 부르고있는 사상을 보고의 구절구절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보고에 담으려고 한 내용들은 모두 우리 혁명의 전도와 관련되는 심중한 문제들이였다.


나는 그때 특히 무장투쟁문제를 놓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보고에서 무장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벌릴데 대한 문제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기본로선으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첫째가는 과업으로 제기하였다.

무장투쟁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그것을 방침으로 확정하기까지에는 오랜 시일이 필요하였다. 카륜에서 이 문제를 방침으로 채택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적수공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조건에서도 나는 무장투쟁을 하자면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손으로 새형의 군대를 창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독립군이 엄연하게 존재하고있는데 그속에 들어가서 활동하면 되지 따로 군대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반일군사력량이 분렬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의견을 달리하였다.

독립군이 우경화되고 반동화되여가는 조건에서 그속에 들어가 군대를 갱신하는 방법으로 무장활동을 벌린다는것은 불합리한 일이였고 불가능한 일이였다.


1930년 당시 독립군의 무력은 매우 렬세한 상태에 있었다. 국민부산하에 독립군의 무력이 있었다고 하지만 9개 중대밖에 되지 않았다. 그 무력조차도 상층의 분렬로 국민부파와 반국민부파로 대립되여있었다.


국민부파란 독립군이 10여년동안 틀어쥐고온 기본방침의 고수를 절대화하는 보수세력이였고 반국민부파란 기존방침을 반대하고 새로운 로선을 추구하는 혁신세력이였다. 반국민부파인물들은 공산주의에 공감하면서 그와의 제휴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을 《제3세력》이라고 규정하였다.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닌 새로운 중도세력이라는 뜻이다. 민족운동내부에서 반국민부파와 같은 《제3세력》이 대두하였다는것은 이 운동의 방향을 공산주의운동에로 전환시키기 위한 지향이 실천단계에 들어섰다는것을 실증해주었다.


국민부파와 반국민부파의 대립으로 독립군력량은 분렬되였고 민족운동내부는 혼란에 빠지였다.

독립군의 중대들은 대체로 유격전쟁을 하는데 불리한 벌방지대의 부락들에 주둔하고있었다. 무장도 변변치 못하였지만 규률이 문란하고 훈련상태가 저조한데다가 군중들과의 관계도 잘 가지지 못하였다.


청산리전투나 봉오골전투에서와 같이 일제의 대부대를 무리로 통쾌하게 섬멸하던 1920년대초의 전성기와는 달리 독립군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고있었다.

남만청총대회에 참가하려고 왕청문에 갔을 때 나는 현묵관과 함께 국민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국민부력량을 가지고 일본과 싸워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사실은 그가 국민부자랑을 너무 하기때문에 자극을 주느라고 던진 물음이였다.

《승산은 무슨 승산, 이렇게 버티다가 대국들이 도와주면 독립을 하는거지.》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아연해졌다. 싸워서 이길수 있다는 배심도 없이 대국들의 원조를 기다리면서 맹목적으로 싸우는 군대가 어떻게 맥을 추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롱담삼아 국민부선생님들이 가지고있는 무기를 우리한데 모조리 넘겨주지 않겠는가, 무기만 넘겨주면 우리가 3~4년안으로 일본놈들을 몰아내겠다고 말하였다.


대회준비위원들에 대한 테로가 있기전이여서 그때까지는 그런 롱담을 할 여유가 있었다. 현묵관이 원래 길림시절부터 내 롱담은 잘 받아주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쓴 웃음만 지었다. 철없는 공상을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국민부군대 같은것을 가지고서는 현상유지만 하자고 하여도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새형의 군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무장투쟁만이 가장 철저하고 혁명적인 반일항전으로 될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만이 자기의 무장대오에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반일애국력량을 폭넓게 집결시킬수 있으며 대중의 리익을 정확히 반영한 과학적인 전략전술로 무장성전을 끝까지 책임적으로 전개하면서 전반적조선혁명을 승리에로 령도할수 있기때문이였다.


우리가 타도해야 할 일본제국주의는 청일, 로일 두 전쟁에서 자기 령토의 몇십배나 되는 광대한 땅을 가지고있는 대국들과 싸워 쉽사리 승리한 신흥군사강국이였다.

이런 강국을 타승하고 나라를 찾는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한다는것은 곧 세계적으로 공인된 일본의 군사력을 타승한다는것을 의미하며 그들의 광신적인 황도정신을 타승하고 명치유신후 신흥일본이 근 70년동안 이룩해놓은 모든 인적, 물적, 재정적력량과의 소모전에서 승리자가 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장투쟁만 하게 되면 3~4년안팎에 일본을 패망시킬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젊은 혈기가 아니고서는 감히 엄두도 낼수 없는생각이였다. 일본군벌들이 그런 고백을 들었더라면 아마 앙천대소하였을것이다.

무슨 담보로 그렇게 판정했는가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 맨주먹밖에 없는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담보가 있었겠는가.


우리에게 있는것은 애국심이였고 젊은 혈기뿐이였다. 우리가 3~4년안팎이라고 한것은 일본의 힘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애국심이 그보다 더 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다. 우리에게 담보가 있었다면 그것은 2천만 민중의 힘이였다. 2천만을 잘 훈련시켜 도처에서 들고일어나 일본군경들을 족치면 나라를 독립시킬수 있으리라는 배심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무장투쟁을 본때있게 해나가자면 대중적지반을 잘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로부터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대한 구상이 나왔다고 할수 있다.


내가 조직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깨달은것이 화성의숙시절이라면 민족의 힘을 처음으로 느끼고 뇌리에 새겨둔것은 3.1인민봉기때였다. 내가 인민들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을 묶어세우고 그들의 힘에 의거하여 혁명을 하겠다는 결심을 품은것은 길림시절이였다.


2천만의 총동원으로 이루어지는 거족적인 항전이 없이는 식민지노예의 멍에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순수한 계급혁명이라면 로동자, 농민대중만이 혁명의 동력으로 되겠지만 우리 혁명의 성격자체가 봉건을 반대하고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인것만큼 로동자, 농민은 말할것도 없고 청년학생, 지식인, 애국적인 종교인, 민족자본가들도 다 혁명의 동력이 될수 있다고 우리는 주장하였다. 우리의 원칙은 민족해방에 리해관계를 가지는 반일애국력량은 다 집결하고 다 동원시키자는것이였다.


우리가 이런 로선을 내놓았을 때 어떤 사람들은 고전에 없는 규정이라고 하면서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그런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로동자, 농민을 제외한 다른 계층들과 동맹을 맺겠다는것은 몽상이라고 하였으며 종교인이나 기업가계층들과는 손을 잡을수 없다고 하였다. 화요파에서 김찬이 한때 국민부의 몇몇 인물들과 거래하였다는 리유로 그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자의 자리에서 들어낸것도 그런 관점때문이였다.


민족주의자들중에도 공산주의자들을 랭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공산주의운동내부에서는 민족주의가 금물이였고 민족주의운동내부에서는 공산주의가 금물이였다. 이런 경향은 민족력량을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두개 진영으로 분렬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리성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였다. 그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20년대 중엽부터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두 진영의 합작을 위한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1927년에 신간회의 창립으로 결실을 보았다. 신간회의 출현은 리념이 달라도 민족을 위한 길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하나로 뭉칠수 있다는것을 시사해준 사변으로 민중은 누구나 이것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끊임없는 파괴책동과 그에 매수리용된 개량주의자들의 분해작용으로 하여 이 단체는 1931년에 그 해체를 선포하지 않을수 없었다.

두 력량이 애국이라는 대전제로 견고한 결합을 이룩했더라면 설사 안팎의 파괴작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았을것이다.


신간회의 해산으로 모처럼 성사되였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합작이 류산되였을 때 우리는 그것을 몹시 분하게 여기였다. 민족을 우위에 놓지 않고 리념만 절대화하게 되면 진정한 합작이 이루어질수 없다. 민족해방이라는 대전제를 첫자리에 놓는다면 어떤 계층과도 손을 잡을수 있다는것이 그 당시 나의 견해였다.


우리는 이런 립장을 가지고 해방후 일생을 반공으로 살아온 김구선생과도 합작하였고 지금도 모든 겨레의 리성을 향해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고 호소하고있다.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면 남는것은 외세와 매국노들뿐이다.


민족의 대단결이 그처럼 귀중한 지상의 과제이고 경륜이기에 우리는 반공일선에서 우리에게 총부리를 맞대고 평생을 살아온 최홍희, 최덕신선생이 평양으로 찾아왔을 때에도 그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고 혈육의 정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때 나는 최덕신선생에게 북에 사는 사람이건 남에 사는 사람이건 민족을 첫자리에 놓고 통일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민족이 있고야 계급도 있고 주의도 있지 않겠는가, 민족이 없이 공산주의는 해서 뭣하고 민족주의는 해서 뭣하며 《하느님》은 또 믿어서 뭣하겠는가고 하였다.


우리는 카륜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을 모색하던 60년전에도 역시 그렇게 부르짖었다.

정치는 그릇이 커야 하며 정치가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정치가 그릇이 크지 못하면 대중을 다 담지 못하며 정치가가 도량이 넓지 못하면 대중이 그 정치가를 외면해버린다.


보고에서는 당창건문제를 비롯하여 조선혁명의 성격과 임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투쟁에서 견지해야 할 근본립장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나는 보고초안이 준비되자 그것을 곧 카륜회의에 참가하려고 여러곳에서 모여온 공청과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들의 토의에 붙이였다. 그때 우리는 낮에는 벌에 나가 일을 하면서 논밭머리와 무개하의 버들숲에 모여 토론하였고 밤이면 진명학교 수직실에서 낮에 종합된 의견들을 놓고 한조항한조항 토의를 심화시키였다.


대중적인 토의과정에 제출된 의견들가운데는 흥미있는 현실적문제들이 적지 않았다.

우선 조선혁명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겠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론쟁이 생기였다. 보고에서 밝힌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 규정을 두고 론의가 분분했다. 론쟁의 초점은 고전에도 없고 아직 그 어느 나라에서도 내놓은적이 없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 새로운 성격규정이 혁명의 보편적원리나 합법칙성에 모순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때 당시의 청년들은 근대력사를 변혁시킨 혁명가운데는 부르죠아혁명이나 사회주의혁명밖에 없는것으로 알고있었다. 그런데 사회주의혁명도 아니고 부르죠아혁명도 아닌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내놓았으니 의문을 품을만도 하였다.


우리가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한것은 우리 나라에 조성된 계급관계와 우리 혁명앞에 제기된 과업으로부터 얻어낸 결론이였다. 조선민족이 수행해야 할 가장 절박한 혁명임무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우리 인민을 얽어매놓고있는 봉건적관계를 청산하며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것이였다. 이런데로부터 우리는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였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형타에 억지로 틀어맞추어 혁명의 성격을 규정해버리면 교조를 범한다. 형타가 선차적인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이 선차이다. 설사 고전에 없는 정식화이고 남들에게 없는 규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나라의 실정에 부합되는 과학적인 규정이라면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서슴없이 선택할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맑스ㅡ레닌주의에 대한 창조적태도이다.


우리가 이런 내용으로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게 된 취지를 설명했더니 대표들은 리해를 표시하였을뿐아니라 그것을 열렬히 지지한다고 하였다.


제일 론의가 활발했던것은 반일민족통일전선과 관련된 문제였다. 민족통일전선전략과 관련된 문제는 그 당시 리론실천상으로 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문제로 공인되고있었다. 국제당에 있던 일부 사람들이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실패한것을 리유로 통일전선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밀몰아 개량주의자로 규정해버렸기때문에 우리 주변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조심스럽게 대하였다.


큰 용단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런 때에 민족통일전선정책을 로선으로 제기할수 없었다 그런 문제를 로선으로 제기하면 국제당의 립장에 도전하는것으로 인정될수도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때 동무들이 참으로 많은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아버지는 지주인데 그의 아들이 혁명을 지지해나서는 경우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자본가로서 독립자금도 많이 내고 독립군에 대한 물질적방조도 많이 했는데 공산주의자라면 덮어놓고 상대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면장으로서 왜놈들하고도 잘 섭쓸리고 인민들하고도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들도 혁명에 포섭할수 있는가?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본인의 사상동향을 위주로 하여 사람들을 평가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때의 이런 견해가 그후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서 구체화되였으며 해방후에는 20개조정강에서 국가정책으로 명문화되였다.


우리가 카륜에서 내놓은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의 정당성은 그후 실생활을 통하여 확증되였다.

동무들의 의견은 보고를 완성하는데 많은 참고가 되였다.

카륜회의가 정식으로 열린것은 1930년 6월 30일 밤이였다.

카륜의 동무들은 진명학교교실에다가 회의장을 준비하였다. 대표들을 위해 교실바닥에 초물방석들을 깔고 천정에는 여러개의 남포등을 매달아놓았다.


첫날 회의는 나의 보고를 청취하는것으로 그치고 그다음날부터는 농민들의 일손을 도우면서 강가나 버들숲에서 조단위로 혹은 대표전원이 모여서 보고에서 제기된 과업을 집행하기 위한 대책을 론의하였다. 아주 독특한 회의방식이였다.

카륜의 혁명조직들이 부락의 경비를 철통같이 하였기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놓고 회의를 진행할수 있었다. 소년탐험대원들이 회의전기간 특히 우리를 잘 보호해주었다.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의 대부대가 중부만주지방에 집결되여있다는것을 내탐한 일제는 우리의 활동구역인 장춘현, 회덕현, 이통현일대에 밀정들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밀정들중에는 내 사진까지 들고다니며 행처를 탐문하는자들도 있었다.


만주에 주재하고있는 일본령사관의 끄나불들과 조선총독부경무국의 밀정들을 통하여 길림을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에 종래의 공산주의자들과는 계렬도 다르고 활동방식도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나 력량을 확대해나가고있다는것을 내탐한 일제는 처음부터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지도핵심을 잡아내기 위해 우리의 뒤를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우리가 소문을 크게 내지 않으면서도 터를 넓게 잡고 인민들속으로 깊숙이 들어갔기때문에 그놈들도 우리를 만만치 않게 본것 같았다.


그때 카륜에서 부락의 경비조직을 책임지고 소년탐험대원들과 반제청년동맹원들을 통솔한 사람은 김원우였다. 그는 회의장에 앉았다가도 슬그머니 밖에 나가 마을을 돌아보면서 경비상태를 알아보군하였다. 내가 일에 몰려 숙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진명학교 교실에서 밤을 새울 때면 그도 밖에서 우리들의 신변을 지켜주느라고 밤을 밝히였다. 어떤 날에는 학교수직실 부엌아궁이에서 감자를 구워가지고 우리에게 밤참으로 내놓군하였다.


카륜, 고유수, 오가자 등지를 개척하는데서 김원우의 공로가 컸다. 그는 길림에서 청년학생운동을 할 때에도 많은 일을 하였다.

우리는 1928년 봄에 장춘지방의 농촌들을 혁명화하기 위하여 김원우를 파견하였다. 그때 김원우는 카륜의 진명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카륜과 고유수 일대를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교양하였다. 1930년 봄부터는 차광수를 도와 조선혁명군결성을 위한 준비사업에도 참가하였다. 김원우가 얼굴이 곱게 생겼기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녀자옷을 입히고 현균과 부부간으로 《짝》을 무어주어 지하공작에 내보낸적도 있었다.


김원우는 조선혁명군이 조직된후 무기를 구입하려고 돌아다니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몇해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는 옥중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견결하게 잘 싸웠다.

김원우는 전후시기 안팎의 정세가 복잡할 때 지방에서 당의 로선을 옹호하여 싸우다가 종파분자들에게 잘못되였다. 그 당시 종파분자들은 당에 충실한 사람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모해하였다.

김원우의 본명은 변묵성이다.


카륜이 우리의 믿음직한 활동기지로 되고 우리의 리념을 실현하는 혁명촌으로 전변된것은 김원우, 김리갑, 차광수, 김혁과 같은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마을을 개척하기 위해 일찍부터 피타는 노력을 해온 결과였다.


우리가 이 고장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이곳 사람들은 남도패와 북도패로 갈라져 서로 등을 지고 살았다. 한때는 이 두패가 무개하의 물을 둘러싸고 패싸움까지 하였다. 남도패가 논밭을 일쿠느라고 물목을 막으면 북도패가 자기네 논이 말라버린다고 하면서 삽을 들고 달려가 그 물목을 터뜨려놓군하였다. 나중에는 아이들까지 북도패와 남도패로 갈라져 한데 어울려 놀지 않는 서글픈 대치상태까지 빚어졌다.


이와 같은 사태를 바로잡으려고 김혁, 김원우, 김리갑, 장소봉 등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들은 군중을 설복하여 패싸움을 청산하고 카륜에 여러가지 대중조직들을 내왔으며 학교를 세워 면비교육도 실시하였다.


대표들은 7월 2일 밤 진명학교 교실에 다시 모여 회의를 계속하였다. 그날밤 분공안을 발표하고 회의를 결속하였다.

회의가 끝날무렵에 사회를 담당하고있던 차광수가 집행석에서 벌떡 일어나 격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는 《덜렁광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울만큼 덜렁거리기도 하고 흥분도 잘하는 동무이지만 그런 때에도 리성만은 잃지 않았으며 오히려 격정에 넘치는 웅변으로 사람들을 경탄시키는 희귀한 성격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주먹을 내두르며 웨치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좌절을 당했다고 모두가 가슴치며 통탄하고있을 때 우리는 여기 카륜에서 조선혁명의 새 출발을 알리는 력사적인 고고지성을 울리였다. 이 려명의 종소리와 함께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궤도를 따라 매진할것이다.

동무들, 즉각 무장을 잡고 일제와의 판가리싸움에 떨쳐나서자!》

우리는 그 연설을 듣고 모두 환성을 올리면서 《혁명가》를 불렀다.


우리가 카륜에서 이 처럼 조선혁명의 진로를 선포할수 있었던것은 길림시절에 이미 청년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조선혁명에 대한 주체적립장과 태도를 확립하고 공산주의운동의 새 길을 개척해왔기때문이였다. 나는 투쟁의 나날에 심어지고 옥중에서 무르익힌 그 사상과 립장을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을뿐이다.

그것이 곧 우리 혁명의 로선으로 되고 지도사상으로 되였다.


우리가 그 론문에서 전개한 내용을 보면 모두가 주체사상을 핵으로 하였다고 할수 있다.

이 사상은 그후 항일혁명투쟁을 비롯한 여러 단계의 혁명을 거쳐 어렵고 복잡한 실천투쟁속에서 부단히 발전풍부화되여 오늘과 같이 사상과 리론, 방법의 전일적인 체계를 갖춘 하나의 철학사상으로 되였다.


해방후 우리가 주체를 세울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한것은 전후시기 사회주의기초건설을 할 때였다.

1955년에 나는 당선전선동부문 일군들앞에서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주체를 세울데 대한 연설을 하였는데 이것이 곧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데 대하여》라는 문헌으로 세상에 공개되였다.

주체를 세울데 대해서는 그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주체사상의 본질과 그것이 창시되게 된 경위, 그 사상을 어떻게 구현해왔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외국인들과의 담화를 통하여 여러차례 설명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것을 체계화하여 하나의 책으로 묶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인민이 그 사상을 정당한것으로 받아들이고 혁명실천에 구현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그후 김정일동지가 그 사상을 전면적으로 체계화하여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론문으로 세상에 발표하였다.


우리는 카륜회의후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우리가 그 회의에서 내놓은 로선이 정당하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다. 적들은 우리를 《창해일속》이라고 하였지만 우리의 뒤에는 무궁무진한 힘을 가진 인민의 바다가 있었다. 우리가 무슨 로선을 내놓기만 하면 인민들은 그것을 쉽게 리해하고 자기것으로 만들었으며 우리 대오에 수천수만명의 아들딸들과 형제자매들을 보내주면서 물심량면으로 우리를 도와주었다.


우리가 령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만주의 혹한속에서 15년동안이나 발톱까지 무장한 강적과 싸워이길수 있었던것은 인민이라는 강력한 성새가 있고 인민대중이라는 무한대의 창해가 있었기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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