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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3-4. 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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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551회 작성일 15-03-18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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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반제청년동맹과 공청을 내온 다음부터 우리는 활동무대를 광할한 지역에로 넓혀나갔다.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의 핵심들이 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꼬리를 물고 길림을 떠나갔다.


나도 그때 학생의 몸이지만 여러 고장들에 나가군 하였다. 길림에서 몇백리 떨어진곳들에도 자주 다니며 새로운 활동무대를 개척하였다. 토요일 저녁차로 길림을 떠나 교하, 카륜, 고유수와 같은 고장들에 갔다가 다음날 밤차로 돌아오군 하였는데 피치못할 사정이 있을 때에는 결석도 하였다. 리광한교장이나 상월선생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원들은 그것을 몹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아버지도 안계시고 집이 가난하여 학비벌이라도 하는게 아닌가고 짐작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신분이 학생이고보니 여러가지 구속과 제약이 없지 않았다. 강의에 참가하고 과외학습을 하고 그 여가를 타서 여러 조직들의 사업까지 보아야 했으므로 나는 늘 시간의 부족을 느끼군 하였다.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수 있는 시기는 방학때였다. 우리는 보통때 준비를 잘해두었다가 방학이 되면 여러 고장으로 다니며 조직을 꾸리는 활동도 하고 군중계몽도 하였다.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는것은 국내에서도 하나의 사회적풍조로 되고있었다. 방학이 되면 많은 학생들이 농민들속에 들어가 계몽활동에 참가하였다. 내가 화성의숙에 다니던 그해 여름 국내에서는 《조선일보》사가 방학이 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등학교이상의 학생들로 계몽대를 뭇고 그들에게 강습까지 주어 농촌으로 내려보냈다. 계몽대에 망라된 학생들은 고향에 돌아가 신문사에서 만들어준 조선어교본을 가지고 문맹퇴치사업을 하였다.


일본에 가서 공부하는 류학생들도 방학이 되면 조국에 돌아와 류학생순회강연대를 무어가지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계몽사업을 하였으며 천도교와 기독교청년회에서도 농민들속에 침투하여 농촌진흥사업을 추진시키였다.


그러나 국내학생들의 계몽운동은 민족의식의 계발을 지향하는 모든 국민적운동을 저들의 식민지정책에 대한 반항으로 보는 총독부당국의 철저한 탄압과 지도자들의 사상적제한성으로 인하여 대중을 혁명화하고 조직화하는 단계에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민족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순수한 개량주의적운동에 머무르고말았으며 그것마저 1930년대중엽에 들어가서는 하강기를 맞이하였다.


그 운동이 순수한 개량주의적운동으로 전개되였다는것은 농촌에서 그들이 해온 활동내용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그들의 활동에서 중심을 이루는것은 문맹퇴치와 농촌의 생활환경을 위생적으로 개조하는것이였다. 기독교청년회성원들이 진행한 활동내용가운데는 지어 료리법의 개선운동과 우물을 깨끗이 거두는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양계, 양잠법과 당국이 발행한 증명서, 신청서의 사용법에 이르기까지 농촌주민들을 근대적생활에로 안내하고 유도하기 위한 여러가지 문화계몽적인 문제들이 다 포함되여있었다.


우리는 일제의 탄압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농촌계몽활동을 대중을 조직화, 혁명화하기 위한 활동과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그것을 적극적인 정치투쟁의 한 형태로 승화시키는데 큰 주의를 돌리였다. 우리의 군중공작은 애국주의교양, 혁명교양, 반제교양, 계급교양을 주선으로 하여 사람들을 의식화하고 그들을 각종 대중조직에 묶어세우는 방향에서 진행되였다.


우리가 대중의 혁명화를 위해 그처럼 전력을 다한것은 그들을 우매하고 미개한 계몽대상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인민이야말로 우리의 선생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기본동력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그것을 절대시한데 있었다.

우리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인민들속으로 들어갔다.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라!》

그때부터 이 구호는 나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좌우명으로 되였다.


나는 인민들속에 들어가는것으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고 오늘도 인민들속에 들어가는것으로 혁명을 계속하고있다. 그리고 인민들속에 들어가는것으로 인생을 총화하고있다. 단 한번이라도 인민들과의 접촉을 게을리하고 단 한번만이라도 인민의 존재를 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면 나는 10대의 시절에 이미 형성된 인민에 대한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을 오늘까지 간직하지 못하였을것이며 인민에 대한 참다운 복무자가 되지 못하였을것이다.


인민의 권리가 최대한으로 보장되고 인민의 지혜와 창조력이 무한정 발양되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나는 우리를 인민행렬차에 처음으로 태워준 길림시절에 감사를 드리군 한다.

우리가 인민들속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한것은 1927년 겨울방학부터였다.


부자집학생들한테는 겨울방학이 문자그대로 신선놀음이였다. 그들은 겨울내내 집에서 련애소설을 보며 뒹굴든가, 기차를 타고 장춘이나 할빈, 베이징과 같은 대도시로 유람을 떠나든가 하였다. 음력설이 되면 좋은 음식을 해놓고 폭죽을 터뜨리며 흥겹게 놀았다. 원래 중국사람들에게는 음력 정월초하루부터 2월 2일까지 정월 한달동안 계속 노는 풍속이 있다. 그들은 음력 2월 2일을 룡태두(룡이 대가리를 쳐든 날)라고 하면서 정월에 잡은 돼지대가리를 다 삶아먹어야 명절놀이를 끝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처럼 유람을 다닐수도 없었고 명절놀이로 풍청거릴수도 없었다. 그대신 어떻게 하면 방학을 리용하여 혁명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수 있겠는가 하는 궁리를 하였다.

나는 방학이 되자 연예대원들을 데리고 장춘에 갔다가 거기서 돌아오기 바쁘게 인차 무송으로 떠났다. 박차석과 계영춘도 한해 겨울을 우리 집에서 보내기로 약속하고 나와 동행하였다.

그해 겨울방학을 우리는 참으로 바쁘게 보내였다.


나는 집에 도착하기 바쁘게 새날소년동맹원들에게 둘러싸이였다. 그들은 동맹이 겪고있는 사업상 고충에 대하여 기탄없이 하소연하였다.

동맹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우리는 그들의 애로를 풀어주기 위하여 새날소년동맹원들과의 사업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동맹지도일군들에게 연예선전대의 활동방법, 사회활동방법, 군중공작방법, 동맹내부사업방법들을 가르쳐주면서 정치토론회와 성격검토회에도 자주 참가하여보았다.


소년동맹사업을 추켜세운 다음에는 무송지방의 핵심청년들로 백산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백두산주변에 있는 청년들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백산청년동맹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그 단체는 사실상 반제청년동맹의 변신이였다. 우리가 그 조직에 백산반제청년동맹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저 청년동맹이라고 한것은 적들에게 혼란을 주고 조직을 위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백산청년동맹은 민족주의영향하에 있는 단체처럼 변장하고 합법적인 활동을 하였다.

우리는 백산청년동맹원들을 움직여 청와재를 비롯한 주변의 농촌마을들에 야학을 내오도록 하였다.


나는 청년조직들이 늘어나고 그 대렬이 확대되는 조건에서 광범한 청년들과 군중들에게 사상적인 량식을 줄수 있는 신문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신문을 만드는 사업은 완전히 령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욕심같아서는 한번에 신문을 100부 정도씩 찍어내고싶었지만 우리에게는 등사기도 없고 종이도 없었다.


무송에 중국사람이 경영하는 자그마한 인쇄소가 하나 있기는 하였으나 우리가 만들 신문의 내용으로 보아 그 인쇄소에 의뢰할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다 못해 손으로 써서 신문을 내기로 마음먹고 이 사업에 새날소년동맹열성자들과 백산청년동맹의 핵심들을 동원시키였다. 100부를 쓰는데 한주일이상의 시간이 걸리였다.


1928년 1월 15일 우리는 드디여 《새날》이라는 제호를 단 신문의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때 무슨 정력으로 그 많은 글을 다 써냈던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그 시절의 혈기와 젊음이 그리워지는 때가 많다. 우리는 그때 자기를 혁명에 깡그리 바치는 거기에서 둘도없는 행복을 느끼였다.


꿈도 없고 담력도 없고 열정도 패기도 투지도 랑만도 없는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리상을 높이 세우고 그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난을 무릅쓰고 완강하게 투쟁하여야 한다. 생신한 사상과 건실한 육체를 가진 청춘들이 피와 땀을 바쳐 가꾸고 이룩해놓은 모든 열매들은 조국의 귀중한 재부로 되며 그 재부를 이루어놓은 주인공들에 대하여 인민들은 영원히 잊지 않는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것은 그때가 일생에서 일을 제일 많이 할수 있는 시절이기때문이다. 일을 많이 할수 있는 때가 제일 행복하다.

그후 나는 아버지의 친지들한테서 힘들게 얻어낸 등사기로 《새날》신문을 밀어냈다.


1927년 겨울방학의 활동가운데서 가장 이채로왔다고 말할수 있는것은 연예선전대의 활동이였다. 무송의 연예선전대에는 새날소년동맹원들과 백산청년동맹원들, 부녀회원들이 망라되였다. 이 연예선전대가 무송과 그 주변의 농촌부락들을 돌아다니면서 한달가량 순회공연을 하였다. 우리는 순회공연을 하면서 도처에 조직도 꾸리고 군중계몽도 하였다. 《혈분만국회》,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딸에게서 온 편지》와 같은 연극들은 다 그해 겨울에 우리가 무송에서 창작하고 공연한 작품들이다.


연예선전대가 순회공연을 앞두고 무송시내에서 며칠동안 공연활동을 하고있을 때 군벌당국이 아무 리유없이 나를 체포하여 감옥으로 끌고갔다. 몇몇 봉건주의자들이 우리의 공연내용이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린다고 나를 군벌당국에 밀고하였던것이다.


그때 소학교동창생인 장울화가 나를 석방시키느라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설복하여 경찰당국이 우리 집을 수색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게 하였다.

장울화의 아버지는 우리 집에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과정에 의사가 소통하여 아버지의 친지가 된 사람이였다. 그는 거부이지만 량심적인 인간이였다. 우리 아버지가 무송에서 백산학교 복교를 발기하고 그 인가를 얻지 못해 애를 태울 때에도 그가 나서서 교섭을 하였다.


장울화의 아버지와 같은 세력가가 압력을 가하니 특별한 단서를 잡지 못하고있던 군벌당국도 어떻게 하는수가 없었다.

그때 무송에 있는 조선사람들이 군벌당국에 몰려가 나를 석방하라고 집단적인 항의를 들이댔다. 우리 어머니가 조직을 발동하고 군중을 추동하였다. 중국인유지들까지도 군벌당국의 처사를 비난하면서 나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얼마후 군벌당국은 하는수없이 나를 석방하였다.


나는 경찰서에서 풀려나오자 연예선전대를 이끌고 푸수허마을로 떠났다.

연예선전대는 푸수허마을에서 연 사흘동안이나 공연하였다.

우리의 공연을 이웃마을사람들까지 와서 구경하고 돌아가다나니 주변부락들에 소문이 굉장히 퍼지게 되였다.

두지동사람들도 그 소문을 듣고 우리를 찾아와서 연예선전대를 자기네 마을로 초청하였다.

우리는 그 초청을 쾌히 수락하였다.

두지동에서의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우리는 부락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예정했던 체류기일을 여러번 연장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첫 공연이 끝났을 때 새날소년동맹위원장이 무대뒤로 뛰여와서 마을의 좌상아바이가 나를 찾는다고 알려주었다.

입에 골통대를 문 풍채좋은 중늙은이가 방금 우리가 공연을 한 그 집 울타리밖에서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로인은 수북한 장미밑으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있었다. 우리를 자기네 마을까지 안내한 두지동의 청년이 내곁에 다가와서 《차천리로인이요.》하고 귀띔해주었다.

나는 차천리라는 말을 듣기 바쁘게 절을 하였다.

《로인님,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로인님께서 이웃동리에 나들이를 가셨다기에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내 나들이를 갔다가 연예대소문을 듣구 급히 뛰여왔네. 자네가 김형직선생의 자제라는게 적실한가?》

《네, 그렇습니다.》

《자네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김선생이 지하에서나마 마음을 놓게 되였네. 내 한평생 이렇게 훌륭한 연예는 처음 보았네.》

로인이 격식을 차려 깍듯이 대하는 바람에 나는 여간만 당황해지지 않았다.

《로인님, 이러지 마십시오. 아들같은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뭘 이러십니까.》


로인은 그날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나는 로인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가면서 넌지시 이렇게 물었다.

《로인님, 이거 버릇없는 물음이지만 로인님이 하루에 천리를 걷는다는게 정말입니까?…》

《허허, 자네도 그 소문을 들었던가. 내 한창나이때에는 천리는 몰라도 오백리는 걸었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차천리로인이 소문과 같이 대단한 독립운동자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성밑에 본명대신 천리라는 별명이 붙은것이 다 일리가 있는 일이였다.

그 천리라는 이름때문에 로인은 만주지방의 조선사람들속에서 신비스러운 인물로 알려지고있었다.


우리 아버지도 생전에 이 로인의 걸음걸이를 두고 탄복의 말씀을 한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 천리라는 별명이 붙은것은 로인이 강계지방에서 의병활동을 할 때부터라고 말씀해주었다.

차천리는 만주에 건너온 후 참의부에 소속되여 심룡준의 부하로 활동하였다. 참의부가 상해림시정부의 치하에 들어갈 때 그것을 제일 견결하게 반대한 사람이 차천리였다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독립군단체가 림시정부의 울타리안으로 들어가는것을 달가와하지 않던 정의부의 몇몇 인사들은 로인의 립장을 격찬하였다. 지도부의 대다수가 군인출신인 정의부인물들속에서는 문관위주의 림시정부를 시답게 보지 않는 경향이 지배하고있었다.


차천리로인은 그날 나에게 교훈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로인은 지난날 조선민족이 얼마든지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을 물리칠수 있었고 독립국가의 당당한 인민으로 발전할수 있었으나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때문에 나라를 빼앗겼다고 통탄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려면 말만 하여서는 안되며 손에 총을 잡고 왜놈을 하나라도 더 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아주 교활한놈들이기때문에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자네 경성성냥공장이 망한 경위를 들어본적이 있나? 이 공장에서 만들어낸 〈잰내비표〉성냥이 아주 유명했네. 성냥두 성냥이지만 상표가 특별해서 사람들의 눈을 끌었지. 잰내비가 복숭아가지를 메고있는 상표였거든. 왜놈들이 조선에 와서 딱성냥공장을 차려놓았지만 이 성냥때문에 돈벌이를 할수 없었다는구만. 그래 여러가지로 계책을 짜내던 끝에 〈잰내비표〉성냥을 수만통 사가지고 어느 무인도에 가서 성냥가치를 모조리 물에 잠궜다가 말린 다음 시장에 내다 팔았다는걸세. 그다음부터는 사가는 사람마다 불이 일지 않아 못쓰겠다고 하면서 왜놈들의 딱성냥만 사갔다지 않겠나. 경성성냥공장은 상표를 왜놈회사에 팔고 파산당했네. 왜놈족속들이란 이래.》

사실여부는 확증할수 없었지만 일본제국주의를 리해하는데서는 만냥짜리 이야기였다.


로인의 말이 자기는 한창나이때 화승대를 가지고 놈들이 5련발총으로 다섯발을 쏘는 사이에 세발은 쏘았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싸우지도 못하고 집에 들어박혀있자니 답답해서 견딜수 없다고 하였다.

로인은 그날 우리가 공연한 《단심줄》이라는 가무가 대단히 좋다고 하면서 지난날 의병활동이 흐지부지돼버린것도 힘을 합치지 못한탓이며 독립군이 맥을 못추고 왜놈들에게 쫓겨다니는것도 역시 힘을 합치지 못하고 제가끔 뿔뿔이 놀아나는탓이라고 개탄하였다.

《조선사람은 비록 셋이 모여도 단결하여 왜놈들과 싸워야 하네.》

로인은 격해서 이렇게 말했다. 차천리로인의 말이 다 옳았다. 단결하면 이기고 분렬하면 망한다는 리치를 아프게 체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런 말을 할수 없었다.


로인이 내 손을 붙잡고 자기는 나이가 많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울것 같지 못하다고 하면서 젊은 세대들이 잘 싸워달라고 당부할 때 나는 조선의 아들로서 인민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게 혁명을 잘해야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을 느끼였다.

그날밤 차천리로인이 해준 말은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조선사람들은 비록 셋이 모여도 단결하여 일제와 싸워야 한다고 한 로인의 말은 그후 우리의 투쟁에서 큰 교훈으로 되였다. 연예선전대를 데리고 사람들속으로 들어가면 군중을 깨우쳐주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이렇게 군중에게서 배우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우리의 선생은 역시 인민이였다.


그래서 나는 일군들을 만날 때마다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라고 간곡하게 말하군 한다. 인민들속에 들어가는것은 보약을 먹는것과 같고 들어가지 않는것은 독약을 먹는것과 같다고 늘 강조하군 한다. 인민들속에 들어가야 차천리 같은 로인도 만날수 있다. 인민들속에는 철학도 있고 문학도 있고 정치경제학도 있다.


차천리로인은 참의부의 경호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자기의 상관인 심룡준에게 암살당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 슬픈 소식을 듣고 조선사람은 비록 셋이 모여도 단결하여 왜놈들과 싸워야 한다던 차천리로인의 말을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되새겨보았다. 로인의 좌우명처럼 참의부의 지도자들이 서로 마음을 합치였더라면 이런 통탄할 불상사도 생기지 않았을것이다.

우리는 두지동에서 그해 음력설을 쇠였다.


설명절이 지난 후 나는 연예대원들을 무송으로 돌려보내고 계영춘, 박차석과 함께 안도땅으로 향하였다. 안도현에는 조선사람들만 사는 내도산마을이 있었다.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우는 백두산기슭의 이 마을은 울창한 밀림속의 산간벽촌이였다. 내도산이란 수림속의 섬 같은 산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중국사람들은 산모양이 젖꼭지 같이 생겼다는 의미에서 내두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간마을에 오래전부터 조선의 독립운동자들이 드나들었다. 독립군의 백전로장인 홍범도와 최명록도 한때 이 부락에 와있었다.

우리가 이미 《ㅌ. ㄷ》성원인 리제우를 내도산에 파견하여 그 일대의 청년들을 조직에 묶어세우도록 한것은 장차 백두산주변을 큰 혁명기지로 만들자는 타산이 있었기때문이다.


리제우(리우)는 황해도태생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장백에 있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와의 련계밑에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런 연고가 있었기때문에 리제우도 자연히 나와 함께 손을 잡을수 있었다.

화전에서 헤여진 후 내가 리제우를 다시 만난것은 무송에서 백산청년동맹을 결성할 때였다. 나는 그때 그와 내도산부락에 백산청년동맹지부를 내올데 대한 문제를 의논하였다. 리제우는 롱절반 진담절반으로 자꾸 과업만 주려 하지 말고 한번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무송에서 내도산까지는 300리가 넘었다. 중국쪽에서 보면 만주땅의 마지막부락이지만 조선땅에서 보면 백두산너머 첫 마을이다. 이 내도산주변 100리안팎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우리는 저녁녘에 마을에 도착하여 리제우의 안내로 한의노릇을 하는 최씨의 집에 들었다.

최씨의 말이 우리가 들어있는 방에 장철호가 두번 와있었고 리관린이도 있었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다녀가고 아버지의 친구들이 개척하던 고장에 오늘은 우리가 와서 혁명의 보습을 대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숙연해지는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내도산부락에 며칠 있어보니 리제우가 기어이 와달라고 하던 심정이 리해되였다. 내도산마을은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 발을 붙이기가 무척 어려운 고장이였다.


마을에는 주로 최가, 김가, 조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는데 이들은 바깥세상과 담을 쌓고 서로 삼각혼사를 맺었다. 최씨네 딸은 김씨네 아들한테 시집을 가고 김씨네 딸은 조씨네 아들이 데려갔으며 조씨네 딸은 최씨네 며느리로 들어갔다. 좁은 골안에서 혼사가 이런 식으로 맺어지다나니 온 마을이 친척관계로 얽혀져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형님》, 《아재비》, 《사돈님》 하면서 돌아갔다.


이 마을사람들은 거의다 천불교를 믿었다. 천불교신자들은 하늘에서 99명의 선녀가 백두산천지에서 미역을 감고올라갔다는 전설에 기초하여 그곳에 《덩덕궁》이라는 99칸짜리 절간을 지어놓고 일년에 두번씩 찾아가 기도를 드리였다. 천불교신자들은 마을에도 《천불사》라는 절간을 지어놓고 열흘이나 한주일에 한번정도씩 가서 기도를 드리였다.


우리가 내도산에 도착한 다음날이 마침 천불교신자들이 절간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날이였다. 그날 우리일행은 리제우의 안내를 받아 절간근처에까지 가보았는데 과연 장관이였다. 신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고구려사람들처럼 머리를 우로 틀어올리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한데 모여들어 꽹과리와 제금을 치고 북과 목탁을 두드렸는데 덩덕궁덩덕궁하는 소리가 아주 장엄하였다. 그래서 절간이름마저 《덩덕궁》이라고 지었다는것이였다.


리제우가 하는 말이 내도산일대에서는 이 천불교가 골치거리라는것이였다. 그는 종교가 아편이라는 단순한 관념을 가지고 천불교를 곱지 않게 보고있었다. 무송에서 리제우의 말을 들었을 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식을 거행하는 천불교신자들의 진지한 모습과 웅장한 《덩덕궁》을 보고나서는 생각을 한번 더 깊이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날 나는 최씨의 안내를 받으며 리제우와 함께 천불교 교주 장두범을 찾아갔다.

장두범은 한때 독립군에서 싸우던 사람이였는데 독립군이 맥을 못추게 되자 총을 내던지고 내도산에 들어와 왜놈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는 복을 내려달라고 백두산천기에 빌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하는 천불교를 만들었다는것이였다.

나는 교주와 담화를 하면서도 천정밑에 매달려있는 기장이삭에서 시선을 뗄수 없었다. 최씨네 집에서 본 기장이삭이 교주의 집에도 똑같은 모양으로 매달려있었기때문이였다. 종곡을 하려고 간수해두는가고 리제우에게 물었더니 그는 불공을 드릴 때 쓰는 기장이라고 시답지 않게 대답하였다.


논농사를 하지 못하는 이고장 사람들은 제밥을 지을 때 흰쌀(입쌀)대신 기장쌀을 썼는데 어느 집에서나 기둥이나 천정 같은데 기장이삭을 매달아두고있었다. 먹을것이 없어 끼니를 번지는 때에도 그들은 이 기장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백두산절간에 불공을 드리러 갈 때에만 그것을 절구에 정성껏 찧어 키질을 하고 나무숟갈로 싸래기와 풀씨, 뉘, 티검불을 고른 다음 똑같은 크기의 쌀알만 하나하나 모아 참지에 싸두었다가 깨끗한 샘물에 제밥을 짓군 하였다.


《그 망할놈의 천불교때문에 내도산사람들이 그만 다 환장하였소.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말은 정말 명언중의 명언인것 같소. 이런 종교쟁이들을 새 사상으로 개조하는것이 과연 필요하며 가능하겠는가 하는거요.》

리제우는 이렇게 푸념하면서 내도산사람들의 얼을 다 뽑아가는 《덩덕궁》에 불을 지르고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 때도 있다고 고백하였다.


나는 리제우의 관점이 협애하다고 비판하였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명제를 나는 물론 부정하지 않소. 그러나 이 명제를 어떤 경우에나 다 적용할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요. 일본에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비는 천불교에다 그래 아편이라는 감투를 함부로 씌울수 있겠소? 나는 천불교를 애국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며 이 교의 신자들을 다 애국자라고 생각하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이 애국자들을 하나의 력량으로 묶어세우는것뿐이요.》


나는 리제우와 앉아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 천불교를 타도할것이 아니라 그들의 반일감정을 적극 지지해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한 열흘가량 머물러있으면서 마을사람들과의 사업을 하였다. 종교를 믿는것만으로는 조국을 광복하지 못한다는 나의 말을 천불교신자들은 쉽게 긍정하였다.


그해 겨울 내도산사람들이 우리를 참으로 성의있게 대해주었다. 내도산사람들의 주식은 감자였다. 당콩을 넣은 감자밥이 별맛이였다. 계영춘은 방귀바람에 구들장이 깨지겠다고 우스개소리까지 하였다.

만일 그때 우리가 내도산에 가보지 않고 길림에 앉아서 리제우의 보고를 들었거나 지나가는 풍문이나 얻어듣고 사태를 판단하였더라면 천불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하였을것이다. 내도산에 가서 《덩덕궁》도 보고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의 진지한 표정도 보고 집집의 대들보밑에 달아맨 기장이삭들도 보았기때문에 천불교와 그 신자들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내릴수가 있었다.


인민적풍격과 인민의 리익에 부합되는 인민적인 사고방식을 지닌다는것은 결코 탁상앞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더우기 말공부로써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들의 육성은 물론, 숨결, 눈빛, 표정, 말투, 손세, 몸가짐까지도 자기의 눈과 귀로 직접 포착할수 있는 인민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법이다.


우리는 마을사람들을 계몽시키기 위한 정치사업을 선행시킨 다음 이 부락에 백산청년동맹지부를 내오고 소년탐험대를 꾸려주었다.

내가 길림으로 돌아온 후에는 우리 형권삼촌이 백산청년동맹사업을 책임지고 리제우와 함께 덕수, 독골, 절골, 약수동, 임수골, 지양개를 비롯한 장백일대와 신파, 보천, 혜산, 갑산, 삼수 등 국내 여러 지방들에 그 지부들을 조직하였다.


동맹은 리제우에게 백산청년동맹 장백지구 책임자의 임무를 맡기였다. 리제우는 그 중임을 훌륭히 감당해냈다. 형권삼촌과 리제우는 백두산일대를 혁명화하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덕으로 우리는 후날 이 일대에서 혁명투쟁을 할 때 군중의 지원을 많이 받을수 있었다.


배움을 잠시 중단하고 쉬는 때가 방학이지만 나는 그해 겨울방학에 책에서는 볼수 없는 많은것을 배웠다.

겨울방학을 마치고 길림으로 돌아온 후 우리는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의 반년간사업을 총화하고 각계각층의 청년들과 군중들을 망라하는 계층별 대중조직들을 더 많이 꾸릴데 대한 과업을 제기하였다.

그 과업을 실행하기 위하여 김혁, 차광수,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등 공청핵심들이 흥경현, 류하현, 장춘현, 이통현, 회덕현 일대와 국내로 떠나갔다. 그들은 거기에 가서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을 비롯한 각종 대중조직들을 빠른 속도로 늘여나갔다.


나는 길림에 남아서 신안툰에 농민동맹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하였다. 농민들을 조직에 결속하는것은 그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준비시키기 위한 사업이다. 특히 농민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그들을 전취하는 문제가 혁명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적문제였다.

우리는 강동마을에 나가서 농민동맹도 조직하고 반제청년동맹지부와 부녀회도 조직하였으며 련이어 카륜과 대황구에도 반제청년동맹지부를 무어주었다.


교하지방에도 반제청년동맹지부를 조직하였다. 내가 교하의 청년들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려신청년회 조직부장 강명근을 만난 다음부터였다. 이 사람이 아마 장철호한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모양이였다. 교하로 말하면 장철호의 중간정류소와도 같은 곳이였다. 그는 길림과 무송사이를 왔다갔다할 때마다 교하에 있는 강명근네 집에 들려 길림의 청년학생운동에 대하여 전해주고 길림에 돌아와서는 교하의 소식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이렇게 되여 강명근이 우리를 알게 되였고 나도 교하지방의 청년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바로 그런 때에 강명근이 나를 만나려고 길림으로 찾아왔다.


내가 동대탄에 있는 장철호네 집에서 학교를 다닐 때였다.

나보다 나이가 열살이상이나 더 든 사람이 《선생님》, 《선생님》하면서 자기가 겪고있는 사업상 고충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다 털어놓고 안타깝게 방조를 호소할 때 나는 그에 대한 동정을 금할수 없었으며 길림에서 180리나 떨어져있는 교하에서 보통중학생에 지나지 않는 나한테까지 찾아온 그의 혁명가다운 열정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교하현에서는 랍법산을 경계로 서북쪽에서 려신청년회가 활동하고 동남쪽에서는 랍법청년회가 활동하였다. 교하일대의 조선청년들은 대체로 이 두 청년단체에 망라되여있었다.

청년들은 처음에 큰뜻을 품고 조직에 들었지만 자리다툼이나 하고 군자금이나 거두어들이는 민족주의운동지도자들의 소행에 점차 환멸을 느끼게 되였다.

그와 동시에 《프로레타리아혁명》과 《헤게모니》에 대하여서만 요란스럽게 떠들며 돌아치는 행세식맑스주의자들의 빈말공부에도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갈길을 찾지 못해 좌왕우왕하게 된다는 강명근의 그 심정이 리해되고도 남았다.

나는 길림일대에서 벌어지고있는 청년학생운동의 실태와 우리의 활동경험을 강명근에게 소개하였다.

그리고 교하에 돌아가면 반제청년동맹지부를 내올수 있게 준비를 잘해보라고 하였다. 그가 돌아갈 때에는 여러권의 맑스ㅡ레닌주의서적도 주었다.


나로서는 성의를 다하여 깨우쳐주느라고 하였지만 강명근이 돌아간 다음 교하의 일이 마음놓이지 않았다.

나는 벼르던 끝에 로일령을 넘어 교하땅으로 찾아갔다. 그것이 아마 1928년 봄이였던것 같다.

강명근은 나를 보자 그러지 않아도 길림에 한번 다시 찾아갈 생각이였다고 하면서 여간 반가와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이 길림에서는 막힐것이 없을것 같았는데 정작 돌아와서 일을 하려고보니 걸리는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것이였다.

교하의 농촌청년들은 우선 조직을 어떻게 내오겠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어떤 청년들은 려신청년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이기때문에 당장 거기서 나와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끼리 반제청년동맹을 뭇자고 하였으며 어떤 청년들은 려신청년회를 무작정 해산해치우자고 하였다.

조직에 어떤 사람들을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그들은 옳바른 견해를 세우지 못하고 누구는 《적대분자》이고 누구는 《동요분자》이기때문에 조직성원이 되기 곤난하다는 식으로 웬만한 청년들은 미리부터 다 대상에서 제껴놓고있었다.


나는 그날 마실방에서 목침을 베고 그들과 같이 한자리에 누워 조직을 내오려면 군중을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쟁취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사람들을 이편저편 가르기 전에 꾸준하게 교양하고 설복하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청년들이 민족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의 물을 먹지 않게 만들며 려신청년회와 랍법청년회안에 있는 선진적인 핵심청년들의 역할을 높여야 한다는데 대하여서도 말해주고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토론해주었다.

이렇게 한 다음 려신청년회에 망라되여있는 5명의 핵심청년들을 선발하여 교하반제청년동맹지부를 무어주었다.

나는 그후에도 교하지방에 자주 나가 반제청년동맹성원들과 사업하였다.


나는 동만청총안에 있는 청년들도 우리 조직에 묶어세우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룡정에 와서 고학을 하고있던 조선청년들은 거의 모두가 동만청총에 망라되여있었다.

그들은 화요파의 영향을 받고있었다.

그런데 이 단체의 조직부장으로 사업하던 동흥중학교 학생 김준이 우리가 길림에서 발간한 잡지와 소책자를 보고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는 김준을 통하여 룡정일대의 청년운동형편을 구체적으로 파악할수 있었다.

김준은 길림에 왔다간 다음부터 우리와 련계를 가지고 대성중학교, 동흥중학교, 은진중학교를 비롯한 룡정시내 여러 학교의 청년학생들속에 우리의 사상을 선전하게 되였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간도지방과 회령, 종성을 비롯한 6읍관내의 청년들을 선진사상으로 교양하였다.


이 시기 나는 로동자들과의 사업에도 관심을 돌리였다.

당시 길림에는 화력발전소, 철도기관구, 성냥공장, 방직공장, 정미공장과 같은 크고작은 공장들이 적지 않았지만 로동계급을 망라하는 신통한 조직은 없었다. 다만 1927년 봄에 조선인로동자들의 취직과 생활편의를 도모할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성회가 조직되였을뿐이였다.

우리는 길림화력발전소에 다니다가 농촌에 나온 한 청년을 교양하여 반제청년동맹에 받아들이고 그가 이전부터 일해왔다는 길림화력발전소에 다시 들어가게 하였다.

그가 길림화력발전소에 발을 붙이고 선진적인 로동자들을 모으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발판이 생기였다.


우리는 류길학우회 성원들을 발동하여 송화강선창을 중심으로 로동자야학을 조직하고 3.1인민봉기기념일이나 5.1절, 국치일 같은 때 그들을 찾아가 연설도 하고 연예공연도 하였다. 이런 준비사업에 기초하여 1928년 8월에 반일로동조합을 내왔다. 그 책임자는 반제청년동맹의 핵심성원이였다.


청년학생들을 주되는 사업대상으로 삼고 그들의 의식화, 조직화를 다그쳐오던 우리가 활동판도를 로동계급속에까지 넓히고 그들을 조직에 묶어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였다.

조선인로동자들을 중심으로 무어진 이 반일로동조합을 통하여 합법적단체인 한성회를 움직이게 하였다. 한성회는 점차 정치적인 경향이 뚜렷해져갔다. 후에 한성회는 원산로동자들의 총파업을 돕기 위해 동정금을 모아 원산로동련합회에 보내였고 1930년 여름 조선에서 있은 수재때에는 여러 조선인단체들과 협동하여 구제회를 뭇고 수재민들을 위해서 의연금을 수집하였으며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반대하는 투쟁에서도 한몫 단단히 하였다.


길림과 교하일대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자들과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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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길림과 교하일대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의 영향밑에 있던 청년단체들을 혁명적인 조직으로 개편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매우 유익한 경험들을 축적하였다.
혁명가의 생명은 군중속에 들어가는것으로 시작되며 군중을 떠날 때 끝이 난다고 할수 있다.
《ㅌ. ㄷ》를 뭇던 화성의숙시절이 나의 청년학생운동의 시작이였다면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하고 확대해나가던 길림육문중학교시절은 학생의 테두리를 벗어나 로동자, 농민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군중속에 깊이 침투되여 도처에 혁명의 씨앗을 뿌려가던 나의 청년운동의 전성기였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의 활동과 그 영향력을 사람들은 《길림바람》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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