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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3-5. 신념과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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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546회 작성일 16-07-09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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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념과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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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문들에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다시 싣고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들은 그 하나하나가 다 훌륭한 교양적가치를 가지고있는 우리 당의 귀중한 재보입니다.

《필승의 신념》도 얼마나 좋은 글입니까. 1960년대에 우리 인민이 이 회상기를 많이 읽었습니다. 전후 경제를 복구하고 나라의 공업화를 실현하는데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가 큰 작용을 하였습니다.

정세가 어렵고 투쟁이 간고한 때일수록 《필승의 신념》과 같은 회상기들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정세가 어렵고 투쟁이 간고해지면 동요분자들이 나오기때문입니다.

혁명앞에 고난의 행군과 같은 모진 시련이 닥쳐오자 혁명적신념이 박약한 사람들속에서는 락오자와 도주자, 투항분자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쏘련과 일본사이에 중립조약이 체결되였을 때에도 우리 대오에서는 동요분자, 도주자들이 생겼습니다. 회상기 《필승의 신념》에 나오는 지갑룡이도 바로 그런 도주자들중 한사람입니다.

쏘일중립조약은 1941년 4월에 체결되였습니다. 내가 소부대를 데리고 활동할 때입니다. 일본외상 마쯔오까가 독일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모스크바에 들려 중립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파동이 인민혁명군에까지 미쳤습니다.

체약쌍방이 평화관계를 유지한다는것, 호상 령토의 보존과 불가침을 존중한다는것, 어느 일방이 제3국과 분쟁상태에 들어가는 경우 중립을 지킨다는것이 이 조약의 골자였습니다.

보다싶이 조약에는 조선문제와 관련된 조항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선문제가 상정되지 않은 조약이니 조선사람들의 신경을 특별히 건드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조선의 혁명가들은 쏘일중립조약이 체결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였습니다. 쏘련을 가장 믿음직한 동맹자로 보고있었는데 그 동맹자가 일본과 같은 적국의 손을 잡게 되자 판이 다 망가진다고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호상 령토를 존중하고 평화관계를 유지하겠다는것은 곧 쏘련이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고 해석하면서 락심해하였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결국 대오의 한구석에서 비관주의와 패배주의, 투항주의를 낳게 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쏘일중립조약을 체결하고나서 그것을 요란스레 광고하였습니다. 그들은 쓰딸린과 마쯔오까가 만나는 사진을 신문에 실었습니다. 이 사진들이 동요분자들의 심리를 크게 자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웃나라들에서 무슨 조약을 체결했다고 해서 조선혁명에 대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근본립장이야 달라질수 없는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혁명을 시작할 때 어떤 큰 나라를 믿고 시작했습니까. 우리는 자기의 신념에 따라 혁명을 시작했지 그 누구의 힘을 믿고 혁명을 시작한것이 아닙니다. 무장투쟁을 시작한후에도 이웃나라들에서 수류탄 한알 지원받은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제 나라 인민의 힘을 믿고 모든것을 자체로 해결해가면서 무장투쟁도 하고 당건설도 하고 통일전선운동도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 중국사람들과도 공동투쟁을 했고 쏘련사람들과도 련합전선을 무었습니다. 동맹자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방하다는것이 우리의 시종일관한 립장이였습니다. 그래서 무장투쟁을 시작한 첫날부터 군대와 인민을 자주의식으로 교양했고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으로 무장시키였습니다. 자주를 하면 살고 외세에 의존하면 노예가 되며 자력갱생을 하면 흥하고 자력갱생을 하지 않으면 조국광복도 할수 없고 새 나라 건설도 할수 없다는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해왔습니다.

그런데 일부 지휘관들이 자력해방이나 자력갱생을 고취하는 교양에는 힘을 덜 돌리고 쏘일간의 모순과 쏘련의 강대성에 대해서만 강조하다나니 쏘련과 일본이 전쟁을 해야 조선해방을 위한 결정적계기도 마련될수 있고 쏘련과 같은 대국의 도움을 받아야 일본도 타승할수 있다는 사대주의적인 병균이 지갑룡과 같은 사람들의 머리에 침습하게 되였습니다.

일본외상이 모스크바에 찾아가서 쏘련사람들과 중립조약을 체결한것은 하나의 기만동작에 불과한것이였습니다. 일본사람들은 그때 자나깨나 북진의 기회만 노리고있었습니다. 북진이란 쏘련을 친다는것입니다. 일본과 독일은 쏘련을 칠 때 서로 합작하기로 밀약하였으며 우랄을 경계로 하여 쏘련의 광활한 령토를 동쪽과 서쪽에서 각각 한쪽씩 차지한다는 분배안까지 짜놓았습니다.

그런데 국력이 딸리는 일본으로서는 아직 쏘련침공이 시기상조였습니다. 그래서 남진론이 득세하게 되였습니다. 동남아를 타고앉아 전략물자의 예비를 충분히 마련해두었다가 히틀러독일이 쏘련에 치명상을 입힌 다음 원동으로 쳐들어가 우랄계선까지 단숨에 집어삼키자는것이 일본의 속심이였습니다. 말하자면 감이 무르익기를 기다려 따먹자는 숙시주의적인 책략이였습니다. 쏘련과의 중립조약은 이 시간표에 따르는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중립조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두달이 지난후 독일군이 쏘련을 침공하자 일본은 지체없이 《관동군특별연습》이라는것을 발령하였는데 이것은 대쏘전쟁예령이나 다름없는것이였습니다. 이 연습때 쏘만국경에 배치된 관동군병력이 2배로 증강됐다고 하니 일본사람들의 속내를 알수 있지 않습니까.

중립조약체결의 주역이였던 마쯔오까자신이 앞장에 서서 쏘련에 대한 즉시적인 개전을 주장했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일본지배층이 얼마나 교활하고 파렴치한자들이였는가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쏘련이 일본의 이런 속임수를 모르고있었는가 하는것입니다. 쏘련은 일본의 책략을 알아도 너무나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제발로 찾아와 평화관계의 유지요, 령토존중이요 하니 일본과 독일의 합작에 의한 동서협공을 몹시 경계하고있던 쏘련으로서는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쏘련은 히틀러독일의 침공이라는 미증유의 대국난을 눈앞에 두고있었습니다. 서부국경일대에 집결되여있는 독일군의 대병력이 어느 순간에 밀려들지 모르는 형편에서 씨비리를 호시탐탐 노리고있던 일본이 중립을 표방한것은 쏘련으로 하여금 동서량면전쟁을 지연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해주었습니다.

일본의 마쯔오까외상이 모스크바를 떠날 때 쓰딸린이 역에까지 나가서 바래주었다고 하는데 이 하나의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쏘독전쟁을 눈앞에 둔 쏘련지도부의 심리상태를 가늠할수 있었습니다.

그런즉 중립조약체결을 계기로 쏘련이 일본의 우방으로 되였다고 보는것은 얼마나 암둔합니까.

정세가 긴장할수록 그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나타나는 현상만 보면서 그 본질을 꿰뚫지 못하면 돌이킬수 없는 착오를 범하기 십상입니다. 지갑룡의 실례가 바로 그렇습니다.

지갑룡이 도주한 사건을 왕바버즈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것은 1941년 봄입니다. 내가 소부대를 데리고 안도지방에서 활동할 때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한총구라는곳에 기지를 정하고 각 지방에 파견된 소부대들과 소조들의 활동을 지도하고있었습니다. 우리가 소부대활동을 하면서 제일 큰 애로로 느끼고있었던것은 주민들이 모두 집단부락에 들어가 있는것이였습니다. 집단부락에 갇혀있는 인민들과 련계를 맺어야 하겠는데 그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출로는 산중에서 돌아다니는 사냥군들이나 숯구이군들, 약초캐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련계를 맺는것이였습니다.

그때 사냥군들은 이른봄부터 가을철까지 록채를 놓는 방법으로 사슴사냥을 하였습니다. 록채란 사슴을 잡는 함정을 말합니다. 깊은 구뎅이속에 쇠로 만든 뾰족한 창들을 촘촘히 세워놓고 그우에 사슴이 밟으면 쉽게 부러질수 있는 가느다란 나무가지들을 가로지른 다음 새초를 펴고 소금을 뿌립니다. 사슴이 소금을 먹으려고 새초풀우에 올라서기만 하면 구뎅이속에 빠져 뾰족한 창끝에 찔리게 되여있었습니다.

록채를 놓는 사람들과 교섭을 잘하면 지하조직들과 련계도 맺을수 있고 적정도 탐지할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소부대들을 여러개의 소조로 나눈 다음 매개 소조들에 과업을 주어 사방에 파견하였습니다. 지갑룡과 김봉록은 안도현 왕바버즈라는곳에 갔습니다. 그들한테는 지방공작을 하면서 식량을 해결할 임무를 주었습니다.

사령부의 명령대로 각 지방에 파견된 소조책임자들은 닷새에 한번씩은 꼭꼭 사업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갑룡이네 소조에서만은 어떻게 된셈인지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비상사고였습니다. 왕바버즈에 책임적인 사람을 한명 파견해서 실태를 료해해야겠지만 사령부에 인원이 없어 보내지 못하고있는데 마침 류경수네가 사령부로 돌아왔습니다. 그 소조에는 김익현과 서보인이라는 중국인대원이 속해있었습니다. 세 사람 다 박달나무처럼 단단한 사람들이였는데 주제를 보니 말이 아니였습니다.

식량이 거덜나서 고생, 푸르허물이 범람하는 바람에 길을 곱절이나 에도느라고 고생, 위경련을 만나서 고생, 이런 고생 저런 고생이 겹치는데다가 대포시하인지 어디인지를 지날 때는 농민으로 가장한 류뀨인 이주민들의 무장집단과 맞다들어 그들의 추격을 받느라고 이만저만 고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는 그 류뀨인 이주민무장집단에 대한 말을 듣고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정말 음험하고 교활한놈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류경수와 김익현이 번갈아가며 하는 말이 그 무장집단은 100명가량 되였다고 합니다. 농민복차림을 한 그 사람들이 밭에서 봄씨붙임을 하기에 저 농사군들한테 식량을 좀 부탁해보자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만 화단을 일으켰다는것입니다.

세 소조원은 길가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다가 밭머리로 나온 사람을 붙잡고 말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항일빨찌산이다, 돈을 주겠는데 식량을 좀 사줄수 없겠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민은 아무 말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조선말을 해도 몰라, 중국말을 해도 몰라, 그래서 벙어리인가보다 하고 손짓으로 의사표시를 했더니 그제서야 의사가 통하더라는것입니다.

우리 대원들의 부탁을 받은 농민은 밭으로 슬렁슬렁 걸어가다가 갑자기 무엇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밭일을 하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돌각담뒤와 덤불속에서 총을 찾아쥐고 류경수네를 향해 사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숱한 사람들이 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그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기관총도 불을 뿜었습니다. 기관총이 2정이나 되였다고 합니다.

함정이라도 이만저만한 함정이 아니였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5리나마 달려서야 놈들을 떼버릴수 있었습니다. 추격에서 벗어나고보니 눈을 뜰 힘도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일행은 주인없는 밭에서 감자눈을 한소랭이 파서 삶아먹었습니다. 감자눈 한소랭이값으로 돈 50원을 유지에 싸서 작대기끝에 달아맨 다음 주인이 알아볼수 있게 밭머리에 세워두었다고 합니다.

부림소 한마리에 50원 정도 할 때였는데 감자눈 한소랭이값으로 50원을 두고 왔더란말입니다.

기관총까지 가진 류뀨인 이주민들의 무장집단과 맞다들린 사실은 이 시기 소부대활동이 얼마나 간고한 정황에서 진행되고있었는가를 잘 말해줍니다.

적들은 혁명대렬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김익현은 몸이 녹초가 되였지만 지갑룡소조의 형편을 알아보아야 할 과제가 제기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자 자기가 가보겠다고 자원해나섰습니다.

다음날 나는 왕바버즈에 김익현을 파견하였습니다.

김익현은 소조의 활동정형을 료해해보고 소조책임자인 지갑룡이 패배주의에 빠져 사령부가 준 임무를 하나도 수행하지 않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지갑룡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앞산봉우리에 올라가 마을을 바라보는것으로 지내고있었습니다.

김봉록은 식량이 떨어져서 나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라고 하면서 풀막에 누워있었습니다. 공작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데다가 기력이 없어서 사령부에 보고하러 갈 엄두도 못낸다는것이였습니다.

김익현은 지갑룡이 풀막으로 돌아오자 타일렀습니다. 공작임무를 받고온지 열흘이 다되여오는데 사령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가만있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오늘밤에라도 당장 사냥군들을 만나 일을 시작하자고 하였습니다.

지갑룡은 지금은 적정이 삼엄해서 움직이기 위험하니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익현이 아무리 설복해도 마이동풍이였습니다.

다음날아침 지갑룡은 김익현과 김봉록이 세수하러 간 틈을 타서 그들의 총을 걷어쥐고나서 두 대원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무장대오를 따라다니였다, 그 과정에 고생이란 고생을 다했지만 고생끝에 조선독립이 온다는 생각을 하면서 모든걸 참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그 꿈이 깨지고말았다, 너희들도 알다싶이 쏘일간에는 중립조약이라는게 체결되였다, 나는 쏘련과 일본간에는 뿌리깊은 적대적모순이 있고 불원간 전쟁이 폭발한다고 믿어왔다, 전쟁이 터지면 쏘련군대와 협동하여 일본군을 격멸하고 나라를 해방시킬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바랄수 없게 되였다, 그러니 이 허망한 노릇을 더는 못하겠다, 게다가 병까지 도지니 어쩌겠는가, 나는 집에 돌아가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익현은 그 말을 다 듣고나서 그게 정말인가고 물었습니다.

지갑룡은 사실이다, 여러날 고심하며 생각한 끝에 먹은 마음이다, 너희들도 가려면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김봉록은 억이 막혀 울면서 달아나고싶으면 너나 혼자 가라, 나는 죽어도 사령관동지의 곁에 가서 죽겠다, 혁명의 전도가 어두우면 어두웠지 사령관동지를 버리고 달아난다는게 말이나 되는가고 하면서 지갑룡을 쏘아주었습니다.

지갑룡은 부대를 떠나도 림수산이처럼 너절한짓은 하지 않을테니 나를 믿어달라, 이 세상 그 어데를 가도 인간답게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익현이 그를 면박하였습니다.

혁명의 전도가 암담하다고 해도 우리는 사령관동지를 버리고 당신을 따라갈수 없다, 좋을 때는 좋아서 따르다가 나쁠 때 나쁘다고 물러서면 그게 무슨 인간의 도리인가, 당신은 이 세상 어디를 가나 인간답게 살겠다고 하는데 산에서 내려가 보라, 아무리 인간답게 살고싶어도 살수가 없다, 손에서 총을 놓는 그 순간부터 당신의 가치는 막돌만도 못하게 된다, 림수산이 어떤 꼴이 됐고 최용빈이 어떤 꼴이 됐고 김백산이 어떤 꼴이 됐는가, 그러니 원쑤들한테로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을 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지갑룡은 자기 결심은 확고하다고 하면서 산에서 무사히 내려갈 때까지 총을 못내놓겠다, 총은 풀막에서 멀지 않은 다리밑에 걸어놓고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풀막을 떠나 내려간 다음 김봉록은 다리목에 가서 두자루의 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지갑룡이 도주한후 김익현과 김봉록은 약속된 련락지점으로 떠났습니다.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가 로상에서 적들과 맞다들기까지 하다나니 예정시간보다 퍼그나 뒤늦게 련락지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파견한 련락원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우리 유격대에는 소부대가 지방공작을 떠난 다음에는 지휘부가 자리를 옮기고 그대신 거기에 련락원을 파견하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두 대원은 련락원을 만나지 못했지만 련락지점을 떠나지 않고 풀을 우려먹으면서 사령부와의 선이 이어질 날을 고대하였습니다. 소랭이에 풀을 뜯어넣은 다음 소금을 치고 끓이면 퍼런 풀물이 우러나오는데 그걸 조금씩 마시고 연명을 하였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몇달전에 먹다버린 소뼈다귀를 끓였는데 흰쌀알같은것이 국물에 떠있었습니다. 그것은 흰쌀이 아니라 뼈다귀속에 있던 구데기였습니다. 구데기가 떠있는 국물을 먹고 두 대원은 취해서 노그라졌습니다.

며칠후 굶어죽을 지경이 된 그들은 껍질이 벗겨진 나무에다가 우등불자리에서 얻은 숯으로 지갑룡이는 도주하고 김익현과 김봉록은 굶어죽었다는 글을 써놓고 덤불속에 나란히 누워서 죽음의 시각을 기다렸습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전문섭이를 련락지점에 파견하지 않았더라면 김익현과 김봉록은 이름모를 덤불속에서 한줌 흙으로 되고말았을것입니다.

나무의 글을 본 전문섭이 온 산판을 돌아다니며 두 전우의 이름을 안타깝게 불렀으나 김익현과 김봉록은 기력이 없어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전문섭은 모기소리같은 신음소리를 듣고 전우들을 찾아냈습니다.

두 전우를 사령부까지 데려오느라고 전문섭이 숱한 고생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그 사람마저 기진맥진해서 걸음을 옮기지 못할 형편이였습니다.

전문섭은 있는 힘을 다 짜내여 김익현과 김봉록을 사령부까지 데려왔습니다. 김익현과 김봉록은 미음을 몇숟가락씩 먹고서야 비로소 실신상태에서 깨여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바버즈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제일 심각한 교훈은 무엇이였는가. 사대주의를 극복하고 자기 힘을 믿도록 교양해야겠다는것이였습니다.

지갑룡의 도주는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데로부터 발생한 사건인 동시에 사대주의로 해서 생긴 사건이기도 합니다. 무슨 사대주의였는가. 쏘련에 대한 사대주의였습니다. 일부 지휘관들이 쏘련에 대한 환상을 주입하면서 쏘일간의 모순으로 전쟁은 언제든지 꼭 터진다, 그러면 일제는 망한다는 식으로 리해시키다나니 그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빚어진것입니다.

우리의 일부 대원들속에 쏘련에 대한 사대주의가 있었던것만은 사실입니다. 강국의 주변에는 항상 그것을 추종하거나 우상화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러다나니 쓰딸린이 마쯔오까와 만나는 사진을 보고서도 우리 혁명의 전도가 막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였고 나아가서는 도주할 궁리까지 하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지갑룡의 도주와 같은 사건이 두번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의 힘으로 조선혁명을 완수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사대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을 진공적으로 벌렸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왕바버즈사건을 통해 얻은 중요한 교훈은 혁명가의 생명은 신념에 있다는것, 신념이 고갈될 때 혁명가의 생명은 끝장이라는것이였습니다.

지갑룡이 도주한것은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을 잃었기때문이며 김익현이나 김봉록이 도주하지 않고 사령부로 돌아온것은 풀을 우려먹으면서도 신념을 고수했고 덤불속에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던 그 순간에도 자기들은 죽지만 혁명은 승리한다는 신념을 그대로 간직하고있었기때문입니다.

신념은 혁명가의 생명입니다.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은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힘을 믿는데서부터 생깁니다. 자기 령도자에 대한 믿음, 자기 자신의 힘, 자기 집단의 힘, 자기 인민의 힘, 자기 당의 힘을 확고하게 믿을 때만이 혁명가의 신념이 고수되는 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신념을 가지고 혁명의 길에 들어섭니다. 문제는 그 신념을 얼마나 오래 고수하는가 하는것인데 그것은 련마강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련마과정을 떨떨하게 거친 신념은 인차 부패변질됩니다. 신념을 련마하는 수단으로 되는것이 바로 조직사상생활과 혁명실천을 통한 정치사상적단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혁명년조가 오래면 신념도 의례히 강할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신념은 년조에 따라 결정되는것이 아닙니다. 년조가 길어도 자체수양을 잘하지 않으면 신념상으로는 약자가 되며 년조가 짧아도 자체수양을 잘하면 신념의 강자가 될수 있습니다.

지갑룡이란 사람도 년조로 볼 때에는 김익현이나 김봉록보다는 퍽 선배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는 유격대생활을 근 10년이나 해온 사람이였습니다. 김익현이 그때까지 인민혁명군에 몇해 복무했는가 하면 4년 복무했습니다. 김봉록은 2년밖에 안되니 신입대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변절은 누가 했습니까. 더 오랜 유격대경력을 가지고있는 지갑룡은 도주했지만 후배인 김익현과 김봉록은 절개를 지켰습니다. 이것은 년조가 오래거나 투쟁공로가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신념을 잃으면 변질된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지갑룡은 건군초창기부터 유격대생활을 해온 사람으로서 공로도 세워 중대장으로까지 발탁되였습니다. 그런데 준엄한 시기가 도래하자 동요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배가 아프다고 하면서 혁명임무를 잘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녀성동무들이 그에게 배띠개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신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라고 동정도 하고 특별히 돌봐도 주었는데 종당에는 곤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주해버리고말았습니다.

신념을 가지고있을 때에는 그래도 싸움을 잘하던 사람이 신념을 잃게 되자 락오자가 되고 의리도 다 줴던지고말았습니다.

림수산이도 혁명년조가 짧아서 변절한것이 아닙니다. 혁명년조로 말하면 그는 좌상급이라고도 할수 있는 사람입니다. 박성철이 8도구광산에서 일을 하다가 유격대에 입대하려고 장재촌으로 들어갔던 1933년에 림수산은 거기서 벌써 연길유격대 2중대 정치지도원을 하고있었습니다. 그는 박성철이 비조직적으로 찾아왔다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욕지거리를 했습니다.

입대전에는 그가 중학교에도 다니고 교원도 하였습니다. 키가 구척이나 되였는데 김일보다 더 컸습니다. 멀끔하게 생긴데다가 식견도 있고 말주변이 있어 초기에는 전우들의 호감도 샀습니다.

그런데 점차 그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원들속에서는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돌아갔습니다. 림수산이란 사람이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지만 겁쟁이라는것입니다.

1938년 봄 한달사이에 우리가 6도구전투를 두번 했는데 왜 두번했는가.

첫 전투를 림수산이 지휘하였으나 다 이긴 전투를 망쳐놓았습니다.

6도구는 1,000여호의 집들이 밀집되여있는 큰 성시였습니다. 성시에 적이 얼마 없다는 보고를 받자 림수산은 즉시 련대를 이끌고 6도구시내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전투에 진입하자 곧 예상치 않았던 적부대와 조우하게 되였습니다. 정찰병들이 정찰을 하고 돌아온후 6도구에 새로 나타난 부대였습니다.

련대가 성안으로 쳐들어갔을 때 적들은 한창 먹자판을 벌리느라고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능히 소멸할수 있는 적들이였습니다. 그러나 림수산은 적의 력량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것을 알게 되자 겁을 집어먹고 얼른 퇴각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퇴각명령은 아군으로 하여금 주동으로부터 피동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대원들은 어리둥절해서 전투를 중지하였고 그 틈을 타서 적들은 인차 기관총을 란사하면서 반격으로 넘어왔습니다. 결국 부대는 아무 소득도 없이 6도구거리에서 물러나게 되였습니다.

이 전투가 있은 다음 적들은 유격대의 공격을 격퇴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습니다. 인민들이 그 선전을 듣고는 누구나 어깨를 떨구고 다녔습니다. 림수산의 오유로 해서 첫 6도구전투는 이처럼 인민혁명군의 권위에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나는 6도구전투를 다시 조직하였습니다. 부대를 이끌고 성시로 쳐들어가 6도구를 단숨에 점령했습니다. 적들은 유격대의 공격을 격퇴했다는 선전을 더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지휘관회의에서 림수산의 과오를 비판하였습니다. 사상적으로 분석하면 비겁성이 그 과오의 주되는 요인이였습니다.

그러나 림수산은 비판을 받은후에도 잘못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어려운 고난의 행군때에도 사령부에서 준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후방밀영에 들어가 안일하게 생활하였습니다. 과오를 고치지 않는다고 북대정자회의에서 또 그를 비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림수산을 참모장자리에서 떼내깔리자고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다시한번 과오를 씻을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림수산은 우리의 이 신임에 변절로써 대답하였습니다. 무장투쟁이 장기화되여가는데 대해 권태를 느끼고있던 그는 《노조에토벌대》의 출현과 그 전례없는 규모에 질겁하여 전전긍긍하다가 동패자밀영에 가서 단독임무를 수행하게 된것을 기화로 적들한테로 달아나버리고말았습니다. 혼자만 달아난것이 아니라 적과 내통하여 밀영주변에 《토벌대》를 미리 대기시켜놓고있다가 숱한 전우들을 잡아가게 하였습니다. 적지 않은 동무들이 적들에게 붙잡혀간것은 다 림수산때문이였습니다.

그 림수산이란 사람이 나중에는 우리를 잡아보겠다고 사령부에까지 《토벌대》를 끌고온적이 있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림수산이 싸움판에서 총쏘는것을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는 정치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적의 총알이 날아오지 않는 구석진곳으로만 찾아다니는 사람이였습니다.

림수산이 투항했을 때 적들은 산 범이라도 잡은것처럼 기세등등해서 김일성빨찌산의 몇번째가는 인물이 다수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대일본제국에 귀순해왔다고 요란스럽게 떠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림수산의 투항은 우리 대오에 일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다들 심각해서 며칠동안 말도 잘하지 않았습니다. 림수산의 변절로 해서 우리 부대는 실지로 적지 않은 피해도 입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도 않았고 상심하지도 않았습니다.

림수산은 타락분자였습니다. 타락분자란 사상적으로 부패변질된자들을 말합니다. 그런자들은 대오에 있어야 해독작용밖에 할것이 없습니다.

혁명을 하는 과정에 배신자들이 생기는것은 어느 시대에나 보게 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력사에는 쓰딸린이나 주은래나 텔만이나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들만 있은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수령과 수령의 위업을 배신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쯔키도 맑스, 엥겔스를 숭상하던 사람들이였지만 력사에 배신자로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맑스주의도 배신하고 자기들의 스승이며 혁명선배인 맑스, 엥겔스도 배반하였습니다. 한때 쏘련당의 요직에 있던 뜨로쯔끼도 쏘베트국가의 적으로 되였습니다. 장국도는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을 배반하고 장개석에게로 달아나버렸습니다. 배신자들의 말로는 다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그런자들이 혁명을 배신했다고 해서 혁명이 좌절되거나 후퇴했습니까. 배신자들이 제거될 때마다 혁명은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고조되고 앙양되였습니다. 뜨로쯔끼가 청산된후 쏘련의 사회주의건설이 얼마나 눈부신 속도로 진척되였습니까. 뜨로쯔끼는 자기가 없으면 쓰딸린이 하는 모든 일이 시시해지고 쏘련이라는 나라가 망가질것처럼 생각했지만 쏘련인민은 자기 나라를 세계에서 으뜸가는 사회주의강국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장국도가 공산당을 등지고 국민당의 식객이 된 다음 중국혁명은 쇠퇴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로상승하여 전국적인 승리를 달성하였습니다.

림수산이 적에게 투항하여 사령부의 비밀을 다 팔아먹고 《토벌대》를 끌고 돌아치며 우리에게 피해도 입혔으나 조선인민혁명군은 약화되지도 않았고 붕괴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변절한 다음 우리 대오는 더욱더 철통같이 단합되였고 우리 혁명은 자체의 순결성을 튼튼히 고수해가면서 최후승리를 향해 힘차게 돌진하였습니다.

혁명의 배신자들은 전후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건설이 벌어질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최창익, 윤공흠, 리필규를 비롯하여 우리 인민의 전진운동에 장애를 조성하려고 하던자들이 저들의 종파적기도가 실현될수 없게 되자 당을 배반하고 조국을 반역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떨어져나가자 우리 혁명에서 새로운 고조가 일어나고 천리마시대가 펼쳐졌습니다. 그때부터 온 세계가 우리 나라를 천리마조선이라고 부르게 되였습니다.

배신자들은 민족운동대렬에도 있었습니다.

실례로 최남선과 같은 사람을 들수 있습니다. 최남선이 3.1인민봉기때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데 참가했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가 쓴 백두산기행을 읽어보았는데 구절마다 애국심이 흐르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애국으로 이름높던 그가 돌연히 량심과 신념을 버리고 배신과 반역의 길을 걸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어려운 시련을 겪고있던 1940년대초에 최남선은 우리의 이름을 크게 찍어가지고 투항을 촉구하는 권고문까지 써서 비행기로 뿌렸습니다.

 

아래에 최남선이 몇몇 친일파들과 함께 쓴 권고문의 일부를 소개한다.

《황량한 산야를 정처없이 회배하며 풍찬로숙하는 제군! 밀림의 원시경에서 현대문화의 광명을 보지 못하고 불행한 맹신때문에 귀중한 생명을 초개같이 도하고있는 가엾은 제군! 제군의 저주된 운명을 깨끗이 청산하여야 될 최후의 날이 왔다. 생하느냐 사하느냐…

오호! 밀림에 방황하는 제군!

이 권고문을 보고 즉시 최후의 단안을 내려 갱생의 길로 뛰여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참회할것도 참회하고 이제까지의 군등의 세계에 류례없는 불안정한 생활에서 즉각으로 탈리하여 동포애의 따뜻한 온정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여 군등의 무용과 의기를 신동아건설의 성업으로 전환봉사하라. 때는 늦지 않다!…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

고문 최남선…

총무 박석윤…》

[잡지《삼천리》, 소화16년(1941년)1월호 206∼209페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에 《충청도의사》라는 별명을 가진 50대의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 의사의 이름은 류한종이였습니다. 그는 우리 부대에서 몇달동안 우리와 함께 여러곳을 돌아다니면서 전상자들을 치료해주었습니다. 지내놓고보니 사람이 아주 진국이였습니다.

류한종은 금침 몇대와 수술칼 하나를 가지고 외상이란 외상은 다 고쳤습니다. 명의인데다가 정성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여서 대원들이 다들 따르고 존경하였습니다. 나도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언제인가는 한지잠을 많이 자는 그를 위해 곰가죽도 마련해주었습니다. 나는 성시공격전투를 하고 대원들이 전리품을 로획할 때마다 의약품이나 의료기구부터 찾아서 류한종에게 주도록 하였습니다.

류한종의 건강상태가 몹시 나빠졌기때문에 우리는 1940년 정초에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나이에 산속에서 유격대생활을 한다는것은 사실 보통 의지나 각오를 가지고서는 해낼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석달만에 류한종은 다시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몇달동안 안해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호강스럽게 보냈지만 먹는 밥이 살로 가지 않고 밥알이 목구멍에 걸려 모로 서는것 같아서 견딜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목숨이나 구차스레 부지해서야 그게 무슨 인생이겠습니까.》

류한종은 이런 말을 하면서 눈물을 머금었습니다. 깨끗한 량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도달할수 없는 높은 경지의 사고방식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건강상태로 보아 부대생활을 할수 없는 몸이였습니다. 그를 설복하느라고 땀을 뽑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류한종은 몹시 아쉬워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해방직후 그는 딸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와 반갑게 만나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내 손을 꽉 잡고 건강한 장군님을 뵈왔으니 이제는 한이 없다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하는 그에게 나는 왜놈들을 몰아냈으니 나와 함께 건국사업을 해보자고 하였습니다.

류한종은 그후 평양에 눌러앉아 혁명자후원회사업도 하고 평양학원 군의로도 사업하였습니다. 그의 딸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실 타자수를 하였습니다. 류한종의 두 아들은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보는바와 같이 최남선이나 림수산이나 지갑룡이와는 얼마나 대조되는 인간입니까. 신념을 잃은 림수산이 도망갈 궁리를 하고있을 때 류한종은 유격대에 입대하였습니다. 최남선은 우리의 투항을 촉구하는 권고문이라는것을 써가지고 다니며 만주산야와 백두산에 뿌리였지만 류한종은 그가 《밀림의 원시경》이니 《불안정한 생활》이니 하고 묘사한 유격대의 생활이 그리워 몇달전에 떠났던 우리의 대오에 다시 찾아와 복대를 탄원했습니다.

평범한 의사였지만 류한종은 최남선이나 림수산, 지갑룡이보다 얼마나 돋보입니까. 그는 수정처럼 깨끗한 량심을 가진 진실한 인간이였습니다. 그가 돋보이는것은 고결한 량심때문입니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혁명을 쉽게 배반하는것은 신념이 없이 추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과 불평분자들, 우연분자들, 탐위분자들, 의지박약자들, 행세식운동자들이였습니다.

일을 태공하는 사람들, 임무수행에서 무책임한 사람들, 어려운 일을 맡기면 얼굴부터 찡그리면서 이타발, 저타발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혁명이다 뭐다 하고 번지르르한 말을 하면서도 뒤에서는 제 주머니를 채우느라고 여념이 없는 사람들, 남의 공로를 자기의 공로로 서슴없이 만드는 사람들, 거짓말을 식은죽먹기로 하는 사람들, 이런 류형의 인간들도 기회만 조성되면 언제든지 붉은기를 팽개치고 적진으로 뺑소니를 칠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류형의 인간들에게서 찾아보게 되는 하나의 공통점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다 량심을 저버린자들이라는것입니다.

혁명가에게서 량심을 떼놓으면 무엇이 남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리념도 사상도 도덕의리도 다 무너집니다. 량심을 버리면 인격도 찌그러집니다.

혁명가가 되기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것은 곧 량심을 가진 존재, 도덕의리에 충실한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량심을 가져야 도덕도 알게 되고 의리도 지키게 됩니다. 량심을 저버린 사람들에게는 도덕도 의리도 희생성도 정의감도 성실성도 있을수 없습니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신념화, 량심화, 도덕화, 생활화해야 한다고 한 김정일동무의 말은 명언입니다.

량심을 가진 사람만이 혁명가로 될수 있고 량심에 때가 오르면 신념에도 때가 오르며 량심에 금이 생기면 신념에도 금이 생기고 투지가 마비됩니다.

그래서 혁명가는 량심을 버리는 순간부터 혁명가이기를 그만두며 쓸모없는 인간으로 되고마는것입니다.

량심을 버린자들과는 같이 길을 걸을수도 없고 한가마밥을 먹을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량심을 버린 그 순간부터 동상이몽을 하며 양봉음위를 합니다. 그런자들과는 헤여져야지 헤여지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하게 됩니다.

지갑룡도 량심에 병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혁명가의 면모를 잃었습니다.

내가 지갑룡의 행동에서 비량심적인 색채를 발견한것은 륙과송전투에서였습니다.

륙과송전투에서 주공방향은 적병영이였고 그것을 담당한것은 7련대와 황정해네 구분대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벼락치듯 총소리가 울렸는데 몇분 지나지 않아 총성이 뚝 멎었습니다. 그것은 적병실을 점령했다는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 다시금 요란한 기관총소리가 병실쪽에서 울려왔습니다. 왜 기관총소리가 다시 울리는가 하고 이상스레 생각한 나는 즉시 정황을 알아오도록 지갑룡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갑룡은 병실로 가다가 되돌아 달려오면서 부상을 당했다고 우는소리를 하며 주저앉았습니다. 보니 싸창목갑이 적탄에 맞아 터졌을뿐 몸은 상한데가 없었습니다. 목갑에 탄알이 맞을 때 그 충격으로 넘어지면서 타박을 좀 입은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가 겁을 먹었다는것을 알고 지봉손과 김학송에게 다시 과업을 주었습니다.

지봉손과 김학송은 비발치는 적탄속을 뚫고 전투장으로 달려가 적패잔병들이 병실밑 비밀지하도에 들어박혀 반항하고있다는것을 알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즉시 대원들을 병실에서 철수시키고 화공전술로 지하도를 제압하라는 명령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내 명령이 가닿기전에 오중흡이 희생되고말았습니다. 오중흡은 자체판단으로 화공전술을 썼지만 대원들을 철수시키지 않고 서둘러 수색작전을 벌리다가 돌이킬수 없는 피해를 입은것입니다.

만약 지갑룡이 되돌아서지 않고 제때에 병실에 달려가 정황을 알아왔더라면 우리의 명령이 지체없이 오중흡에게 전달되였을것이고 그러면 이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을수도 있었습니다. 전투에서의 정황처리는 분초를 다툽니다. 지갑룡이 수행하지 못한 임무를 김학송과 지봉손이 대신 수행하느라고 늦어진 사이에 오중흡은 지하도에 깊이 숨어있던 패잔병들이 란사하는 총탄에 맞았던것입니다.

지갑룡은 그때 이미 전투원의 량심을 가지고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대원들이라면 중상을 당했다 하더라도 되돌아서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니 량심에 병이 든자의 무책임하고 비겁한 소행으로 얼마나 큰화를 입었습니까.

량심을 버리고 혁명을 배반한자들의 말로는 어느 경우에나 다 비참하였습니다. 력사는 그런자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리였습니다. 죄가 가벼워 용서를 받은 사람들도 죽는 순간까지 얼굴을 쳐들고 다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날까지 혁명적인 량심을 간직하고 신념을 고수한 투사들에게는 인민이 꽃보라를 뿌려주고 월계관을 씌워주었습니다.

8도구광산에서 로동을 하다가 유격구에 찾아와 입대청원을 했을 때 비조직적으로 왔다고 림수산에게서 수모를 받았던 박성철은 그후 간고한 투쟁의 길을 끝까지 걸어 조국으로 돌아왔고 오늘은 국가의 주요한 직책에서 혁명을 계속하고있습니다.

어느해인가 박성철은 행군도중 지휘관의 허락을 받고 집에 들린 일이 있었습니다. 입대후 몇해가 지나도록 가족들의 안부도 몰라 궁금하던차에 부대가 자기네 마을을 지나게 되니 부모처자들을 만나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더라는것입니다.

그런데 박성철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생각지도 않던 봉변을 당했습니다. 안해가 아이를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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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안해가 아이를 둘쳐업으며 남편을 따라 유격대로 가겠다고 떼를 썼던것입니다. 박성철이 제정신이 있는가, 아이를 가진 녀자가 가긴 어디로 간다고 그러는가 하고 막아나서자 안해는 그의 허리띠를 꽉 거머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말로 타일러서는 이가 들것 같지 않고 콱 떠밀쳐버리고 달아나자니 울음을 터뜨릴것 같았습니다. 울음만 터뜨리는 날에는 온 동네가 그 사연을 다 알게 되고 적의 귀에도 들어가 유격대가족이라고 식구들이 결딴나게 될 판이였습니다.
박성철이 어쩔바를 몰라 쩔쩔매고있을 때 어머니가 며느리를 타일렀습니다. 네가 지금 처신을 잘못하면 남편을 죽일수 있다, 저 사람이 약속된 시간까지 부대를 따라서지 못하면 도망군이 될것인즉 그건 역적이 되는 길이다, 아이애비가 그렇게 돼도 좋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안해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허리띠만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아들을 향해 사내가 한번 큰 일을 하자고 집을 나섰으면 그만이지 넌 왜 이 밤중에 뛰여들어 소동이냐, 다시는 이 집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독립이 되기전에 또 오면 네 정갱이를 분질러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때에야 안해는 남편의 허리띠를 놔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에서 얼마나 큰 자극을 받았던지 박성철은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지식으로 볼 때에야 그 어머니나 안해가 림수산에게 비길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혁명에 대한 관점이나 립장으로 볼 때에는 그들이 림수산에 비할수 없는 선생이였습니다. 아이를 업고서라도 유격투쟁을 하겠다는 안해의 지향도 아름답지만 나라를 독립하기전에 다시 집에 나타나면 아들의 정갱이를 분질러놓겠다고 엄포를 놓는 어머니의 뜻은 또 얼마나 고결하고 숭고한것입니까.
김익현이 조선인민군 차수칭호를 받던 날 나는 그가 어린 나이에 지양개등판에 찾아와 유격대에 받아달라고 간청하던 일이며 지갑룡의 회유를 뿌리치고 사령부로 찾아오다가 굶어죽게 되자 나무에 숯덩어리로 글을 써놓고 덤불속에 들어가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던 일들을 회상하였습니다.
김익현은 죽음을 각오하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나 후대들에게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였습니다.
김익현도 훌륭한 대원이지만 그와 김봉록을 사령부에까지 부축해가지고 온 전문섭은 또 얼마나 강인하고 동지적의리에 충실한 사람입니까. 실신상태에 있는 두 전우를 사령부에까지 업어온 그를 보니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있었습니다. 전우들의 몰골이 너무나 처참해서 눈물을 참지 못한것입니다.
혁명적신념이 박약하고 의리와 량심이 없는 사람 같으면 배고픈 고생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동지들을 버리고 달아나버렸을것입니다. 산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되는데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다 갈수 있었습니다. 철조망이 있는가, 울타리가 있는가, 감시막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총을 던지고 내려가서 문서장에 손도장만 찍으면 밥도 배불리 먹을수 있고 뜨뜻한 온돌방에서 마음껏 잘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문섭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고 두 전우를 번갈아업으며 사령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후에도 우리를 변함없이 따르며 충실하게 혁명을 해왔습니다.
동무들은 한생을 빛나게 장식한 항일의 로투사들과 같은 신념의 강자들을 많이 키워내야 하겠습니다. 욕망만으로는 내밀수 없는것이 혁명이고 사회주의위업입니다. 신념이 강해야 자기도 지키고 사회주의도 고수할수 있습니다.
백날을 굶어도 살아날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 단 하루의 떳떳한 삶을 위해 천날 고생도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 절해고도에 홀로 떨어져 이름모를 숲속에서 한점의 티끌로 사라져도 조직이 자기를 찾고 자기의 이름을 기억해줄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자기를 키워준 지도자와 동지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폭도 하고 교수대에도 서슴없이 올라서는 그런 의지를 가진 사람들만이 언제나 승리자가 될수 있습니다.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교양, 사회주의위업에 대한 신념교양은 나라의 형편이 어려운 때일수록 더 잘해야 합니다. 나는 신념이 강한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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