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0-6. 녀투사들의 혁명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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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16-02-19 00:16 조회 10,971 댓글 0본문
6. 녀투사들의 혁명절개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생전에 조국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전장과 교수대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녀투사들과 마지막까지 혁명적의리에 충실하였던 녀대원들에 대해서도 자주 회고하시였다.
이 절에서는 우리 혁명이 가장 어려운 고비를 겪고있던 나날들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쳐 혁명의 리익을 지키고 공산주의자의 영예를 고수해낸 녀투사들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회상교시들중에서 그 일부를 정리하였다.
새로 건립된 혁명렬사릉을 만족스럽게 돌아보았습니다. 릉을 건설하느라고 동무들이 그동안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안치된 투사들중 녀투사들은 얼마나 됩니까? 녀투사들이 10여명이나 여기에 안장되였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들은 모두 반신상을 세우고 비석에 이름을 새겨줄만한 동무들입니다.
리순희는 공청일군으로서 투쟁을 잘하였습니다. 그는 한때 왕청지방에서 아동국장사업도 하였습니다. 내가 그를 잘 압니다. 리순희는 절개가 강한 녀자입니다. 적들이 나어린 그를 좀 숙보고 지하조직의 비밀을 뽑아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는 고문을 많이 당했지만 비밀을 불지 않았습니다. 이런 투사들은 응당 후대들앞에 내세워주어야 합니다.
장길부녀사는 유격대원은 아니지만 마동희를 낳아키운 혁명가의 어머니답게 한생을 값있게 살았습니다. 그는 딸과 며느리도 유격대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자신은 혁명가들의 뒤바라지를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과 딸,며느리는 무장투쟁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하였습니다. 무장을 들고 항일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다 영웅들입니다. 영웅칭호를 주는 제도가 없었으니 그렇지 그런 제도가 있었더라면 장길부어머니의 자식들은 모두 영웅이 되였을것입니다. 영웅을 셋이나 키워낸 어머니이니 마땅히 혁명렬사릉에다 모셔야 합니다. 장길부녀사는 고령의 몸으로 사회주의건설에도 잘 참가했습니다.
장길부녀사를 제외한 나머지 녀성들은 모두 손에 무장을 잡고 우리와 함께 항일혁명의 길을 걸어온 녀대원들입니다.
김책,강건 동무들이 있는 렬에 녀투사를 2명 배치하였는데 그것은 항일혁명투쟁에서 우리 녀성들이 차지하고있던 지위와 역할을 말해준다고 볼수 있습니다. 김일,림춘추,최현을 비롯한 로투사들은 나에게 인민의 일치한 념원이고 전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라고 하면서 김정숙을 거기에 세워줄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최희숙을 그 렬에 추천한것은 나입니다. 그는 웃렬에 세워줄만한 당당한 투사입니다. 김정숙과 최희숙을 동렬에 놓는것은 항일혁명의 나날 그들사이에 맺어진 우정을 보더라도 자연스러운것입니다. 김정숙이 도천리일대에서 어려운 적후공작임무를 수행하고있을 때 최희숙은 요방자라는 마을에 침투하여 그의 활동을 은밀히 도와주었습니다. 김정숙이 신파에 건너가서 조직건설활동에 마음껏 투신할수 있은것은 최희숙이 요방자에 틀고앉아 그의 사업을 잘 도와주었기때문입니다. 최희숙은 1939년 가을에 올기강일대에서 수많은 군복을 제작할 때에도 김정숙과 함께 손발을 맞추어가며 일을 본때있게 하였습니다. 그 군복을 제작하는데서 발휘한 최희숙의 높은 책임성과 로력적성과를 평가하여 우리는 그에게 금반지와 시계를 선물하였습니다.
최희숙은 조선인민혁명군 녀대원들중에서 로병급에 속하는 인물이였습니다. 그의 입대년도가 아마 1932년일것입니다. 1932년이면 동만각현에서 반일무장대오들이 앞을 다투어 태여나던 해가 아닙니까.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에 녀대원들이 적지 않았지만 1932년에 입대한 녀성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932년에 총을 멘 대원이면 응당 로병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것이 1936년 봄일것입니다. 그해 봄에 연길,화룡 지방의 부대들에서 활동하던 녀성들이 우리 주력부대에 많이 편입되였습니다. 김정숙과 최희숙도 그때 주력부대로 넘어왔습니다.
녀대원들은 다들 최희숙을 언니라고 불렀습니다. 남대원들중에는 그를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최희숙은 나이로 보아도 우리의 누이벌이 되였습니다. 그는 나보다 여러살이나 나이가 더 든 녀자였습니다. 녀대원들중에서는 김명화나 장철구 다음가는 년장자였던것 같습니다.
최희숙이 전우들속에서 언니나 누이로 불리운것은 비단 나이때문만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일상생활과 임무수행에서 항상 남들의 모범이 되였습니다. 그리고 전우들을 잘 보살펴주었습니다. 지방조직들에서 몇해동안 공청활동과 부녀회활동,반일부대공작을 해온 그는 정치적자질도 높고 통솔력도 강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힘든 일거리를 많이 맡기였습니다. 최희숙이 소할바령회의 이후시기에도 조선인민혁명군 재봉대책임자로 계속 활약한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신임의 표시였습니다.
주력부대의 모든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최희숙의 남다른 충실성과 혁명성을 언제나 경이의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늘 전우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나도 그의 숭고한 의리와 인격에 탄복한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고난의 행군때 목격한 일인데 최희숙은 남들이 다 자는 한밤중에도 우등불가에서 언 손을 녹여가며 전우들의 꿰진 옷들을 기워주었습니다. 그는 맹물로 끼니를 에워가면서 이틀이건 사흘이건 맡은 일을 끝내기전에는 절대로 쉬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사업의 성과를 론할 때면 매번 전우들을 내세워주었습니다. 군복제작이 끝난 다음 공로자들을 표창할 때 금반지와 시계를 받고 《군복을 만드느라고 고생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나만 이런 특대를 받으면…》하고 송구해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소할바령회의후 소부대공작에 참가하였던 최희숙은 중요한 정보자료를 가지고 사령부로 찾아오다가 적들의 《만산토벌》을 당하였습니다. 《만산토벌》이란 빗으로 훑듯이 온 산판을 샅샅이 뒤진다는 뜻입니다.
소부대를 발견한 적들은 유격대원들을 사로잡으려고 기를 쓰고 따라왔습니다. 최희숙은 포위속에서 그만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적들에게 붙잡히였습니다.
적들은 비밀을 뽑아내려고 그에게 말이나 글로써는 다 표현할수 없는 무지막지한 고문을 들이댔습니다. 나중에는 그의 두눈까지 뽑아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문과 위협도 최희숙의 송죽같은 절개를 꺾을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에게는 지금 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녀투사의 이 웨침앞에서 혼비백산한 적들은 최희숙의 심장까지 도려냈습니다. 공산주의자의 심장이 어떤것인가를 보려는것이였습니다. 혁명가의 심장이라고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심장에는 혁명가의 표식도 없고 반역자의 표식도 없습니다. 혁명가의 심장이 조국과 민족,혁명동지들을 위해 고동친다면 반역자의 심장은 언제나 자기자신만을 위해 고동친다고 할수있을것입니다.
적들은 최희숙을 체포하자마자 우리가 그에게 표창으로 준 금반지를 빼앗아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놈들은 그의 심장속에 간직된 우리에 대한 믿음과 의리는 결코 빼앗아낼수 없었습니다.
적들은 최희숙의 심장을 도려냈지만 이런 리치를 깨닫지 못했을것입니다.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들은 혁명절개가 어떤것인지도 알수 없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생명관에 깃든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정신세계의 높이도 리해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최희숙이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간데 대하여 애석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녀대원들은 목이 메여 밥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오래동안 슬픔에서 헤여날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말에서 우리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원쑤들에게 두손을 묶이우고 두눈을 빼앗긴 최악의 상태에서도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고 한 최희숙의 말속에는 얼마나 견결하고 자랑스러운 혁명적기개가 높뛰고있습니까.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는 말은 누구나 할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위업의 정당성과 진리성을 확신하는 사람들만이 할수 있는 말이며 혁명절개가 강한 투사들만이 할수 있는 명언입니다. 그 말은 녀투사 최희숙의 한생의 총화이기도 하였습니다.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 인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혁명적락관주의를 상징하는 금언으로 되였습니다. 녀투사의 그 웨침소리는 오늘도 우리 인민의 귀에 쟁쟁히 울리고있습니다.
나는 락관주의를 주장하며 락천적인 인간들을 사랑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것이 내가 중시하고있는 좌우명의 하나입니다. 내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도 어떤 동요나 편향이 없이 건강한 몸으로 혁명과 건설을 령도해올수 있은것은 이 락관주의의 덕입니다.
나는 한줄기의 빛조차 볼수 없는 실명상태에서 남긴 최희숙의 마지막말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있습니다.
그것은 그 말이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강의한 의지와 불변의 신념을 담고있는 말이기때문입니다.
다시한번 강조하는바이지만 최희숙은 간고한 시련을 헤쳐온 우리 혁명대오의 1렬에 당당히 세울수 있는 녀성혁명가입니다.
최희숙의 남편 박원춘은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서 옥중생활을 했습니다.
최희숙처럼 최후를 마친 녀대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안순화의 최후도 그렇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사람이 최후를 그렇게 마친다는것이 쉽지 않습니다.
안순화는 리봉수의 안해입니다. 리봉수가 군의로 활동할 때 안순화는 같은 부대에서 재봉대책임자로 일하였습니다.
원래 그들에게는 자식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섯명의 자식은 유격전쟁을 하는 과정에 모두 죽었거나 부모들과 생리별을 하였습니다. 동상으로 두발의 발가락을 모조리 자른 맏이는 중환자들과 함께 쏘련으로 들어갔고 둘째는 홍역을 앓다가 죽었으며 셋째는 유격구에 쳐들어온 일본군의 총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넷째는 굶어죽고 다섯째는 남의 집에 주었는데 그 생사여부와 행방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리봉수의 회상기가 여러편 세상에 소개된것만큼 그 다섯째가 살아있으면 분명 아버지를 찾아올텐데 나는 아직 그런 소식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아이를 두돌전에 남의 집에 주었으면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수 없을것입니다. 그의 양부모들이 친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수도 있습니다.
안순화는 1938년 봄에 적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밀영에 있던 유격대원들이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남만으로 떠날 차비를 하고있던 어느날 적《토벌대》가 갑자기 밀영에 달려들었습니다.
당시 그 밀영에는 주로 병원일군들과 재봉대성원들이 있었습니다. 안순화는 적들에게 체포되여 험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적들은 유격대원들의 행방과 식량창고,탄약창고,약품창고의 위치를 대라고 하면서 안순화를 악착스럽게 고문했습니다. 《토벌대》대장은 승산도 없는 싸움에 피를 바치고 청춘을 바치는게 아깝지 않는가고 하면서 달콤한 말로 그를 구슬리기도 했습니다.
만일 그때 안순화가 고문이 두려워 놈들의 물음에 고분고분 대답했더라면 적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을것입니다.
적들은 귀순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우대》하는 방법으로 우리 혁명대오를 와해시키려고 날뛰였습니다. 귀순신청서에 보증인을 밝히고 손도장이나 찍으면 어제날까지 《타도일제》를 부르짖으며 무력항쟁을 하던 사람도 목숨을 건질수 있었습니다.
안순화가 연약한 녀성의 몸으로 적들의 회유와 고문을 이겨낸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적들은 처음에 그를 발길로 차고 짓뭉개다가 머리칼을 마구 잡아뜯었습니다. 그러다가 안순화가 《이놈!》,《저놈!》하며 점점 더 완강하게 저항해나서자 총알이 아깝다고 하면서 그의 가슴과 배에 참나무말뚝을 박아놓았습니다.
손바닥에 가시가 박혀도 얼굴을 찡그리는것이 사람의 본능인데 육중한 나무말뚝이 살과 뼈를 문지르며 육신에 깊숙이 박힐 때 안순화가 얼마나 큰 고통을 느꼈겠습니까.
그러나 안순화는 그처럼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도 절대로 혁명가의 지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고싶은 말을 다하고 지킬것을 다 지키였습니다. 참나무말뚝이 몸에 박히는 순간에는 마지막힘을 모아 《조선혁명 만세!》와 《녀성해방 만세!》를 부르짖었습니다.
안순화가 희생된후 전우들은 그의 배낭을 풀어헤치고 유물들을 정리하였습니다. 그 유물들가운데는 안순화의 남편 리봉수가 1920년대말에 울라지보스또크에 가서 부두로동을 하여 번 돈으로 사준 세루치마와 채 뜨지 못한 책상보가 있었습니다.
세루치마는 10년동안 한번도 입어보지 않고 배낭속에 넣어가지고다니기만 하던것이였다고 합니다. 그가 세루치마를 왜 그처럼 고이 간수해왔겠습니까. 안순화는 틀림없이 조국이 해방된 다음 그것을 입으려고 했을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의 유물을 통해서도 그가 혁명이 승리하게 될 래일을 얼마나 굳게 믿고있었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헌 샤쯔의 실을 풀어 짬짬이 떠왔다는 책상보도 역시 조국이 해방된 다음 남편의 책상우에 치려고 했을것입니다.
숨진 안해의 시신을 세루치마로 덮어줄 때 리봉수는 10년전에 세운 치마의 주름이 그대로 남아있는것을 보고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 눈물을 걷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최희숙,안순화와 같은 녀성들은 북만의 항일무장부대들에도 적지 않았습니다.
북만에서 싸운 조선녀성들이 얼마나 혁명절개를 잘 지켰는가 하는것은 한주애의 실례만 보아도 잘 알수 있습니다. 재봉대책임자인 한주애는 후방밀영에서 유격대원들의 솜동복을 짓다가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나어린 딸애와 함께 적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전우들을 뒤로 빼돌리느라고 한주애는 자기를 일부러 로출시키면서 승산없는 맞불질을 하다가 《토벌대》놈들의 손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는 몇달동안 철창속에 갇혀있었습니다. 적들은 어머니와 딸이 한감방에 있는것은 너무나도 호강스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그들 모녀를 따로따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한주애의 마음을 굽히기 위해 이따금씩 딸애를 데려다가 면회도 시켰습니다. 모성애를 역리용하려는 심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술책도 한주애의 지조를 꺾을수는 없었습니다.
적들은 우쑤리강변에서 한주애를 총살하였습니다. 일본헌병대의 형리들이 그에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말을 한마디만 하면 살려준다고 하였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굴하지 않았습니다.
북만유격대에서 활동한 안순복,리봉선을 비롯한 8명의 재봉대원들은 포위망을 좁히며 달려드는 적들과 생사결단의 싸움을 벌리다가 사로잡힐 고비에 이르자 목단강의 깊은 물에 꽃같은 몸들을 던지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실은 동만의 녀대원들속에도 있었습니다. 7명의 녀대원들이 내도산으로 가던 도중 적들의 포위에 들자 푸르허강물에 뛰여들어 청춘을 마치였습니다. 그들의 비장한 최후는 항일혁명사의 한페지에 새로운 전설을 남기였습니다.
어느해인가 나는 중국을 방문하는 과정에 목단강 8렬녀의 투쟁을 형상한 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북만녀성들뿐아니라 남만유격대원들의 친근한 누나인 리순절도 혁명가답게 절개를 잘 지키였습니다.
김수복은 장백현 주경동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체포되여 희생되였습니다.
영웅이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최희숙이나 안순화,동만의 7렬녀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영웅이라고 합니다.
벽성군녀맹위원장이였던 조옥희가 일시적후퇴시기 적구에서 빨찌산투쟁을 하다가 적들에게 붙잡혀 학살되였을 때 우리는 그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였습니다. 그도 최희숙이나 안순화처럼 혁명절개를 끝까지 지켜낸 강한 녀자였습니다. 적들이 손톱,발톱을 뽑고 두눈과 젖가슴을 도려내고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살을 지지였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추상같은 목소리로 적들을 호령하였으며 《조선로동당 만세!》를 부르며 용감하게 최후를 마치였습니다.
조옥희가 빨찌산투쟁을 하면서 적들을 죽였으면 얼마나 많이 죽였겠습니까. 우리는 그가 살상한 적의 수자를 중시한것이 아니라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머리를 떳떳이 쳐들고 적들의 멸망을 선고한 그 높은 기개와 혁명적지조를 귀중하게 여기고 그를 표창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사나 짓고 녀맹사업이나 몇해 하던 평범한 녀성이 그처럼 빛나게 일생을 마치였다는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는 온 나라 인민들과 세계의 량심앞에 조옥희를 내세우고싶어 그를 형상한 영화도 만들라고 하였고 그의 조각상도 만들어 세우게 하였으며 그의 고향 농장에 조옥희라는 이름도 달게 하였습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혁명박물관을 돌아보시다가 그곳에 소장되여있는 항일투사 리계순의 달비앞에서 오래도록 걸음을 떼지 못하시였다. 그것은 리계순이 16살때 혁명에 한몸을 바칠 굳은 결심을 담아 어머니에게 잘라보낸 머리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리계순의 달비를 오래도록 바라보시다가 귀중한 유물이니 잘 보관하라고 당부하시였다. 그후 수령님께서는 리계순에 대하여 뜨겁게 회고하시였다.
달비에 깃든 사연을 보더라도 리계순동무가 대단히 훌륭한 혁명가라는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나는 그 달비를 보면서 우리의 어머니들과 누이들,우리 나라 녀성혁명가들의 깨끗하고 굳센 절개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원래 조선녀성은 외유내강하고 절개가 굳습니다. 나는 항일혁명을 하면서 그것을 더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리계순의 달비는 녀성혁명가들의 절개를 상징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내가 만주에서 지하활동을 할 때 우리 어머니는 내 신발바닥에 달비를 깔아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조선에서 살 때부터 여러해동안 고이 간수해오던 달비였습니다. 추운 겨울날 눈보라가 울부짖는 무인지경을 걸어가고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걸어도 발이 시리지 않았습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발바닥이 후끈후끈해났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신발을 벗어보니 바닥에 달비가 깔려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무슨 사랑,무슨 사랑 해도 이 세상에 어머니의 사랑을 따를 사랑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시절에 어머니가 깔아준 달비는 모성애의 표시였습니다.
상해에 조선사람들의 림시정부가 서고 중국 동북지방에 정의부니 참의부니 신민부니 하는 독립군단체들이 생겨나 인민들한테서 세금을 받아낼 때 나는 적지 않은 녀인들이 달비를 팔아 독립헌금을 마련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의 그 달비는 애국심의 표시였습니다.
내가 왜 리계순에 대한 말을 하면서 달비와 관련된 과거사를 돌이켜보는가 하면 그 달비 하나만을 통해서도 그의 인간상을 잘 파악할수 있기때문입니다.
리계순에 대해서는 그와 함께 싸운 김일동무와 박영순동무가 잘 압니다. 리계순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려면 김일제1부수상과 박영순동무를 취재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일제1부수상이 과묵해서 취재할 멋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그것은 김일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한 자랑은 잘 안하지만 남에 대한 이야기는 곧 잘합니다.
리계순을 혁명의 길로 이끌어준 사람은 그의 오빠 리지춘이였습니다. 리지춘은 내가 육문중학교에 다닐 때 길림에 있는 사범학교에서 우리의 지도를 받으며 혁명투쟁에 나섰던 사람입니다. 그후 그는 부모들이 살고있는 화룡땅에 돌아가서 공청사업을 지도하다가 그만 적들에게 붙잡혀 학살되였습니다. 적들은 그를 총살한 다음 시체에 불을 질렀습니다. 결국 리지춘은 두벌죽음을 당한셈입니다.
리계순은 어랑촌유격구에 가있을 때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빠의 소식을 들은 다음날새벽 리계순은 머리채를 풀고 그것을 가위로 뭉청 잘라 다리를 지었습니다. 다리란 달비라는 뜻입니다. 그는 달비와 함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의 말을 보냈습니다.
《어머니! 제가 집을 떠난후 오빠마저 세상을 떠났다니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그러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원쑤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마십시오.》
어머님께 저의 다리를 보내드립니다. 제가 오래동안 어머니곁에 가지못하더라도 나를 보듯이 이 다리를 보십시오. 혁명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부디 몸성히 계실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리계순의 마지막고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혁명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던것 같습니다.
화룡에서 여러해동안 지하사업을 해온 박영순의 말에 의하면 리계순은 어릴 때부터 혁명에 대한 감수력과 지혜가 남달리 뛰여나 군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1933년 여름에 그는 당조직으로부터 룡정시내에 들어가 지하공작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가 받은 주되는 임무는 파괴된 지하조직들을 복구하거나 없는 조직을 새로 만들어내는것이였습니다. 적의 중요한 통치거점중의 하나인 룡정지구에는 군경들과 밀정들이 우글우글했습니다. 이고장에 둥지를 틀고있던 첩보기관들은 촉각이 매우 예민했습니다.
유격구의 혁명조직이 지하공작경험이 별로 없는 리계순을 이런 고장에 파견한것은 그에 대한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그 당시 룡정시내에 있는 당조직들과 부녀회와 소년선봉대를 비롯한 대중단체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조직원들은 거의다 검거되여있었습니다.
리계순은 만사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리라는 굳은 각오를 가지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국수집에 잡부로 들어갔습니다. 얼굴에 검댕이를 묻히고 국수집에서 부엌데기노릇이나 하는 촌티나는 녀자를 공산당이 파견한 지하공작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국수집은 공작거점으로도 훌륭하였습니다.
리계순은 물도 긷고 빨래도 하고 설겆이도 하고 주인이 시키는 일을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다했습니다. 주인은 속으로 복덩이가 굴러들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고 새로운 조직도 내오자면 하루종일 밖에서 돌아다닐수 있는 일자리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런 일자리가 바로 국수배달이였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돈냥이나 있고 세도깨나 쓰는 집들에서는 국수를 주문해다 먹었습니다. 집에 올방자를 틀고앉아서 농마국수 몇그릇을 가져오라고 호통치면 배달원이 목판에 국수와 육수물을 따로따로 담아가지고 주문자들한테까지 날라다주었습니다.
리계순은 주인마누라의 신용을 얻어 국수배달원의 자리를 따냈습니다. 그는 국수를 배달하러 나갈 때마다 짬을 내여 필요한 조직원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소선대조직부터 복구해놓았습니다. 그런데 목판에 국수그릇들을 담아 이고 하루에도 수십리 걸음을 해야 하는 배달원노릇은 말처럼 쉬운것이 아니였습니다. 어느날 목판을 머리에 이고 주문자의 집으로 바삐 걸어가던 리계순은 미친듯이 달려오는 왜경의 자동차를 피하다가 그만 목판을 떨어뜨려 국수그릇을 깨뜨리고말았습니다.
리계순은 그바람에 주인한테서 된욕을 먹고 배달원의 자리를 떼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락심하지 않고 하루영업이 끝나면 피곤을 무릅쓰고 국수집뒤뜨락에 나가 목판에 돌을 담아 이고 자정이 넘을 때까지 걷는 련습을 하였습니다.
리계순의 이런 직심스런 열의가 주인의 눈을 끌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리계순의 나이가 아마 그 당시 열일곱살쯤 되였을것입니다.
녀투사들은 벌써 15살,16살만 되여도 정치활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10대의 나이에 선동연설도 하고 적구공작도 하고 조직건설활동도 하였습니다. 그 나이에 그들은 세상물계를 다 알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고생속에서 자라난 세대여서 지금 청년들보다 조숙한것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하여 덮어놓고 선각자가 되고 투사가 되는것은 아닙니다. 중요한것은 사상입니다. 사상적으로 준비되여야 혁명투쟁에 일찌기 뛰여들수도 있고 혁명을 해도 본때있게 할수가 있습니다. 사상이 견실하지 못하면 혁명을 할수가 없습니다. 리계순이 혁명을 잘한것은 사상이 견실했기때문입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20살이라고 하면 젖비린내가 난다고 하면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고있습니다.
간부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20대라고 하면 아직 세상물계를 모르는 철부지로 치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30대나 40대,50대가 돼야 간부가 되는것으로 알고있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입니다. 20대의 청년들도 맡겨만 주면 책임적인 임무를 얼마든지 수행할수 있습니다. 나는 해방직후 건당,건국,건군 위업을 수행할 때 이것을 절실히 체험하였습니다.
항일혁명시절에는 20대의 청년들이 현당서기도 하고 성당서기도 하고 사장도 하고 군장도 하였습니다. 나는 20대에 혁명군사령관을 하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등용하지 않으면 간부대렬이 로령화될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전진운동이 활력을 잃게 됩니다. 간부사업에서는 철저히 로중청을 배합해야 합니다.
리계순이 동만사람들의 화제에 제일 크게 오른것은 화룡현당 서기로 일하던 그의 남편 김일환이 《민생단》이라는 루명을 쓰고 배타주의자들한테 희생되였을 때였습니다. 그때 간도지방사람들은 김일환을 학살한 주범들을 한결같이 저주하고 증오하였습니다. 그대신 그의 미망인인 리계순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정하였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리계순이 동만당지도부의 처사에 환멸을 느끼고 혁명에서 손을 떼거나 유격구를 떠나지 않겠는가 하는 추측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간도지방의 조직원들과 유격대원들 속에서는 동만당지도부의 좌경망동주의에 침을 뱉고 유격구를 등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벌어지는 과정에 공산주의자들의 영상에 때가 많이 낀것만은 사실입니다.
어지간한 녀자 같으면 혁명에 염증을 느끼고 유격구를 떠나갔거나 손맥을 놓고 신세타령을 하며 세월을 보냈겠지만 리계순은 그와 반대로 강심을 먹고 일어나 자기한테 맡겨진 임무를 더 잘 수행하는것으로 혁명에 보탬을 주려고 했으며 남편이 혁명앞에서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결백하고 량심적인 인간이였다는것을 증명해보이려고 하였습니다.
처창즈유격구에 기근이 들었을 때 리계순은 만삭이 된 몸이였습니다. 그는 임신부였지만 영양을 제대로 섭취할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리계순은 자기자신과 태여날 새 생명을 걱정한것이 아니라 배고파서 운신조차 하지 못하는 유격구의 인민들을 걱정하면서 매일같이 산채를 뜯고 나무껍질을 벗기였습니다. 그런것조차 바닥이 나면 개구리를 잡고 그 알을 모아다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완하였습니다.
그후 리계순이 해산을 했지만 젖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때에 유격구마저 해산되였습니다. 리계순은 어린 딸애를 시어머니에게 맡겨 적구로 떠나보내고 유격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그가 시어머니에게 맡긴 젖먹이는 김일환이 학살된 다음에 낳은 유복녀였습니다.
그 유복녀와의 리별이 아주 눈물겨웠다고 합니다. 두살밖에 안된 어린애는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질을 치고 시어머니도 울지,리계순자신도 아이가 불쌍해서 몇번이고 되돌아가서는 부둥켜안고 흐느끼지… 그러니 그 리별이 왜 눈물겹지 않았겠습니까.
유격구해산과 함께 일가친척들과 친지들,혁명전우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가던 그 나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들처럼 눈물속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리계순의 시어머니가 손녀애를 살리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동냥젖도 한두번이지 노상 남들의 신세를 질수는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보리알과 강냉이알을 짓씹어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리계순은 이처럼 녀성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불행과 모진 아픔을 안고 총대를 잡은 투사였습니다. 그는 무송에서 우리 부대에 입대하였습니다.
얼마후 우리는 리계순을 후방병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동상을 당한 몸이였기때문에 전투부대에서 싸울수 없는 형편이였습니다. 처음에 리계순은 병원으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였습니다. 일선에서 싸울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졸라댔습니다.
그러나 나는 리계순을 위해서 그 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동상이 얼마나 무서운것인지 몰라서 그러는것 같은데 싸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 지금 당장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오라,우리 아버지도 동상때문에 돌아가셨다,발가락이 몽땅 썩어 문드러져서 지팽이를 짚고다니는 불구자가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하였더니 그는 마지못해 병원치료를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를 치료해주던 유격대의 후방병원이 곰의골밀영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백두산이 아주 가까왔습니다. 1937년 음력설에 나는 횡산지구의 후방밀영들을 한바퀴 돌아보았습니다. 박영순이네 무기수리소 동무들이 깡통으로 국수분통을 만들어가지고 농마국수를 눌러 나에게 대접해주었다는 음력설이 바로 그해 음력설입니다.
우리가 후방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리계순은 우리에게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느라고 분주하게 돌아쳤습니다. 송의사가 하는 말이 그는 치료만 받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간병원노릇도 하고 작식대원노릇도 하면서 몸을 혹사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병원을 떠나면서 리계순에게 딴 일에는 일체 손을 대지 말고 병을 떼는 일 하나에만 전심하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을 떼지 못한다고 엄포도 놓았습니다.
그후로는 그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통신원을 통해 병원동무들에게 편지와 후방물자를 몇차례 보내주었을뿐입니다.
우리가 백두산지구를 잠간 뜬 사이에 적들은 우리 부대의 후방밀영들에 《토벌대》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때 송의사가 책임진 후방병원도 불의습격을 당했습니다. 박순일은 격전끝에 전사하고 리계순은 적들에게 사로잡혀 장백현으로 끌려갔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리두수뿐이였습니다.
우리는 그런줄도 모르고 김정필과 한초남에게 식량을 지워 병원으로 련락을 보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들이 다 나았을터이니 모두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험상스럽게 변모해버린 리두수만 데리고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후방병원에 들이닥친 재난을 알게 되였습니다.
나는 사방에 정찰조들을 내보내여 리계순의 행처와 생사여부를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정찰조들이 그가 적들에게 붙잡혀간지 10여일만에 학살되였다는 비통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정찰조원들은 리계순의 최후를 직접 목격했다는 장백사람들을 만나보기까지 하였습니다.
리계순을 총살하는 날은 장날이였다고 합니다. 적들은 그날 《전향》한 공산군녀자의 반성연설이 있다는 광고를 내면서 주민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혜산쪽에서 넘어오는 장사군들도 모조리 그 운동장으로 끌고갔습니다.
그러면 리계순이 무엇때문에 주민들앞에서 연설을 할수 있는 합법적기회를 마련해달라고 적들에게 요구했겠는가 하는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공산주의자로서의 리계순의 참다운 면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운동장에 주민들을 모이게 해달라고 한것은 인민들과의 영별을 반일혁명선전으로 마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반성연설을 몇마디 하면 적들은 그를 살려줄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계순은 그런 비루한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총칼을 겁내지 않으며 무슨 말이든지 다할수 있습니다.
리계순은 나는 비록 죽지만 조선인민혁명군은 건재하며 그 사령관도 건재하다,조선인민혁명군을 타승할 힘은 이 세상에 없다,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될 날은 멀지 않아 온다,모두다 일치단결하여 적의 폭압을 박차고 반일항전에 떨쳐나서라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고 합니다.
리계순은 마지막까지 인민의 충실한 복무자,교양자,선전자로서의 사명과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반성연설을 한다고 소개했던 공산군녀자가 반일을 선동하는 혁명선전을 했으니 적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장백지방의 토배기들이 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생생하게 회상한다고 하니 그 연설이 그고장 인민들에게 상당한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던것 같습니다.
리계순이 유명한 녀투사로 된것은 그가 이처럼 최후를 잘 마치였기때문입니다. 그의 생애에서의 정점은 바로 이 최후에 있습니다. 생애의 정점이란 사람의 정신력과 활동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를 의미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 정점이 오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20대에 맞이할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50대에 맞이할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60대나 70대에 맞이할수도 있습니다.
한때 명성을 날리다가 중도에 불미스럽게 한생을 마치는 사람보다 리계순이나 최희숙처럼 인생의 끝을 쇠소리가 나게 맺는 사람들을 력사는 언제나 잊지 않습니다.
내가 리계순을 잊지 못해 하는것은 그때문입니다. 리계순과 같은 녀투사는 세계에 대고 당당하게 자랑할수 있습니다. 그가 걸어온 영웅적인생애는 혁명적인 소설이나 영화를 만들수 있는 좋은 소재입니다. 리계순은 조선민족이 낳은 참된 딸이며 녀성혁명가의 훌륭한 본보기의 한사람입니다.
리계순의 친정어머니는 오래동안 외손녀의 생사여부를 몰라 남모르게 고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정전후에야 종합대학에 다니는 외손녀를 만나 딸이 남기고간 달비를 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3대를 오르내린 그 유물은 단순한 달비가 아니라 리계순렬사의 값높은 인생의 상징이였습니다. 두살때 생리별을 당하여 얼굴도 목소리도 알길 없는 어머니가 한줌의 달비로 되여 딸을 찾아왔으니 세상에 이런 상봉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딸은 그 달비에 볼을 비비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리계순의 딸은 지금 부모들이 목숨을 바쳐 개척해온 혁명의 대를 충실하게 이어가고있습니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쳐 혁명가로서의 존엄과 절개를 지켜낸 녀성들의 실례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녀성들이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를 담당한다는 나의 주장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로 물들여진 항일의 혁명력사와 우리 나라 녀성해방운동의 직접적인 참가자,증견자로서의 산 체험에 기초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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