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0-2. 청봉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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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16-02-04 00:15 조회 7,064 댓글 1본문
항일혁명력사를 서술한 도서들과 교과서들에는 청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명의 두 사적지가 나온다. 하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1939년 5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무산지구로 진출하실 때 첫 밤을 보내신 유서깊은 량강도 삼지연군의 청봉숙영지이고 다른 하나는 항일유격대원들이 1930년대 후반기에 후방밀영으로 개척한 서간도의 청봉이다.
삼지연군의 청봉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잘 안다. 그렇지만 서간도의 청봉에 가본 사람들은 그닥 많지 않다. 그 밀영이 고난의 행군과 함께 항일혁명력사의 한페지를 차지할수 있게 된것은 거기서 혁명가의 신념과 충실성을 검증하는 엄중한 사건이 벌어져 인민혁명군의 모든 대원들에게 심각한 교훈을 남기였기때문이다. 그 교훈은 오늘도 후대들에게 많은것을 가르쳐주고있다.
청봉밀영에서 있었던 사건과 관련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회고하신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소개한다.
우리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후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청봉밀영으로 보냈습니다. 청봉밀영은 우리의 후방기지였습니다. 백두산주변과 서간도일대에는 그런 후방밀영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청봉밀영에는 우리 부대의 후방일군들이 감자를 심어놓은것도 있었습니다. 부상자들과 병약자들이 몇달쯤은 식량고생을 하지 않고 지낼수 있는 안전한곳이였습니다.
1939년의 13도만집단부락습격전투가 있은후 나는 전리품들중 일부를 따로 떼내여 청봉으로 보냈습니다. 청봉에 감자농사를 지어놓은것이 있다지만 맨 감자로야 어떻게 음력설을 쇠겠습니까. 그래서 색다른 식료품들을 골라 밀영의 전우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때 짐을 지고 청봉밀영에 갔다온 사람은 부대통신원이였습니다.
그런데 청봉에 다녀온 통신원은 사령부에 나타나 밀영에서 《간첩단사건》이 발생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사령부성원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령솔하는 혁명군대안에서 《간첩단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거야말로 엄중한 사태일것입니다.
통신원은 《간첩단사건》의 전말을 요약한 리동걸의 편지와 함께 증거물로 압수하였다고 하는 《독약》봉지라는것까지 내놓았습니다. 리동걸의 편지에는 녀대원들인 김정숙, 김혜순, 김선, 서순옥 등이 모두 일제의 간첩이라는것과 그들이 독약으로 혁명전우들을 해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사연이 적혀있었습니다. 통신원의 말이 자기가 청봉에 갔을 때 그 녀대원들은 포승줄에 묶이여있었고 고문을 받은 흔적까지 있더라는것이였습니다.
그 보고를 받는 순간의 충격은 장포리나 한봉선과 같은 투사들을 《민생단》으로 몰았을 때의 충격보다 몇곱절 더 큰것이였습니다. 동무들도 잘 알고있는것처럼 《민생단》문제는 1936년의 남호두회의를 종점으로 하여 이미 결속되였습니다. 우리는 그후부터 《민생단》이라는 말조차 입에 올리기 싫어했습니다. 《민생단》소동으로 해서 받은 손실이 너무나도 크고 상처가 너무나도 깊었기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청봉에서 《민생단》과 맞먹는 《간첩단》이라는것을 적발했다고 하니 내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는 처음부터 청봉에서 적발해냈다고 하는 《간첩단사건》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조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녀대원들을 간첩으로 락인한 밀영지휘관들의 주장에는 믿을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기때문입니다. 그들이 증거물이라고 하면서 보내준 독약은 사실상 독약이 아니라 치분가루였습니다. 나는 대원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 가루를 혀끝에 대보기까지 했는데 틀림없는 치분이였습니다. 치분가루를 독약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청봉의 녀대원들은 혁명실천을 통해 충분히 단련되고 검열된 대원들이였습니다. 그들은 다 혁명 하나밖에 모르는 녀성들이였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리상은 조국을 해방하는데 있었습니다. 이런 리상이 아니고야 그들이 무엇때문에 연약한 녀성의 몸으로 총을 메고 설피를 신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씹으면서 시집갈 나이에 시집도 가지 않고 남성들도 감당해내기 힘들어하는 풍상고초의 길을 걸었겠습니까.
이런 녀성들에게 간첩의 감투를 씌우는것은 완전한 억지였을뿐아니라 모독이고 우롱이였으며 범죄였습니다.
김정숙이 어떤 녀성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한마디로 보증할수 있는것은 계급적처지라든가 투쟁경력으로 볼 때 그는 적과 내통할만한 사소한 리유도 없는 녀성이라는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부모형제를 다 잃은 사람이 간첩노릇을 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김혜순이나 김선이나 서순옥이도 혁명적각오가 높은 녀성들이였습니다. 그들은 나쁜놈들의 수작질에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을 간첩으로 몰아붙인것도 역시 언어도단이였습니다.
이런 녀대원들을 간첩으로 본다면 간도에서 숱한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처형하던 김성도나 조아범의 망동과 다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부대에는 적의 간첩으로 전락될수 있는 녀자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유격구시절에도 그랬고 유격구가 해산된후에도 그랬고 우리 녀대원들속에서는 배신자가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행군때 대오를 버리고 달아난 사람들가운데 녀대원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시오. 한명도 없습니다. 림수산이 적들에게 투항해갈 때 자기와 가까이 지내던 녀대원을 한명 데리고 달아났지만 그 녀자도 유격대에 있을 때 간첩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녀대원들은 남대원들보다 고생도 더 많이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가정들에서 녀성들이 짊어지고있는 부담을 생각하면 내 말을 누구나 긍정하지 않을수 없을것입니다. 녀성들은 남성들과 꼭같이 사회사업에 종사하면서도 가정일의 무거운 부담을 거의 도맡아 걸머지고있습니다. 우리가 녀성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여러가지 시책들을 내왔지만 아직도 우리의 어머니들과 안해들, 누나들의 수고야 어디 가겠습니까.
항일혁명시절에도 부담은 녀대원들한테 더 많이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녀대원들은 싸움은 싸움대로 하면서도 작식은 작식대로 하였습니다. 화식도구나 식량도 대부분은 녀대원들이 지고다니였습니다. 남대원들이 피곤에 몰려 우등불옆에 쓰러져 잘 때에도 녀대원들은 남대원들의 찢어진 옷을 깁느라고 바느질을 하였습니다. 찢어진 옷은 바느실로 꿰매주면 되였지만 불에 탄 옷은 천을 덧대야 했습니다. 덧댈 천이 없을 때에는 자기의 치마자락을 잘라내였습니다.
나는 그런 광경을 목격한후부터 군복을 공급할 때 녀대원들에게는 치마를 두벌씩 내주게 하였습니다.
녀대원들은 고난도 남대원들 못지 않게 이겨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그들이 남대원들보다 더 이악했습니다.
녀대원들에 대한 말이 난김에 최순산의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최순산은 이름난 병기창일군인 송승필의 안해입니다. 그는 연길지방에서 지하당사업도 하고 작식공작도 하고 구국군과의 통일전선사업에도 참가한 오랜 당원이였습니다. 연길출신투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책임성이 높고 강인한 녀자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최순산은 유격대에 입대한후에도 작식공작을 많이 하였습니다. 어느날 행군의 쉴참에 그는 저녁준비를 하느라고 쌀을 씻다가 바늘에 손바닥을 찔리웠습니다. 부러진 바늘토막은 살속에 깊이 박히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손바닥에 박힌 바늘토막을 뽑아낼 여유도 없었습니다. 밥을 빨리 지어야 부대가 다음단계의 행군으로 넘어갈수 있었기때문입니다.
최순산은 그날부터 살을 쑤시는 아픔때문에 여간 큰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보통녀자들 같으면 당분간 밥을 짓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할터인데 이 무쇠같은 녀대원은 바늘에 손을 상했다는 하소연도 하지 않았고 손바닥에 들어간 바늘을 뽑아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대장이 작식시간이 늦어진다고 나무람을 해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일손을 놓게 되면 다른 전투원 한명이 자기를 대신해서 작식공작을 해야 한다는것을 알았기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바늘은 손등거죽까지 뚫었습니다. 뾰족한 바늘끝이 손등우에 내밀렸을 때에야 그는 전우들에게 바늘을 뽑아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전우들이 달라붙어 동집게로 뽑아냈습니다.
부러진 바늘토막을 살속에 두고도 아픔을 남모르게 참으면서 보름동안이나 전우들에게 밥을 지어준 녀인, 이것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항일전쟁의 불길속을 헤쳐온 녀투사들의 초상입니다.
이런 녀투사들에게 간첩이라는 수치스러운 딱지를 붙인다는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밀영책임자인 엄광호는 몇해동안 정치사업을 한 경력도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되여 아무 건덕지도 없는 녀대원들을 함부로 의심하고 간첩으로까지 몰아댈수 있는가. 그래 그는 자기가 포승으로 묶어 귀틀집에 가두어넣은 녀대원들이 혁명앞에 한점의 티도 없이 깨끗한 애국자들이라는것을 모른단 말인가. 엄광호의 증언대로 그들이 만일 간첩이라면 세상에 믿을수 있는 존재는 무엇이겠는가.
리동걸의 서면보고만 보고서는 진상을 알아낼 도리가 없었고 뭐가 뭔지 통 분간할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날로 김평을 불러 사태의 진상을 조사할것과 《간첩단》을 《적발》해냈다는 밀영책임자 엄광호와 정치책임자 리동걸 그리고 구속된 녀대원전부를 사령부로 소환해올데 대한 과업을 주어 사건현장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김평이 돌아온 다음 나는 사건관계자들을 차례로 만나보았습니다.
청봉밀영에서 발생한 사건에는 상상이외의 놀라운것이 있었습니다.
청봉밀영은 엄광호가 책임지고있는 밀영이였습니다. 우리가 엄광호를 후방밀영책임자로 보낸것은 그의 병집을 고쳐주기 위해 취한 하나의 동지적배려였습니다. 그는 사상상에서나 작풍상에서나 병이 단단히 든 사람이였습니다.
엄광호는 우리가 도저히 눈을 감아줄수 없는 악습을 가지고있었습니다. 무슨 악습이였는가? 종파적습성이였습니다. 종파행위를 하는 사람들한테는 자기가 제일 잘난체하면서 남을 깔보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남을 깔보다나니 자꾸 동지들을 깎아내리게 되고 동지들이 하는 일을 시비하게 됩니다.
종파적습성에 물젖은 사람들한테는 례외없이 출세욕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출세의 기회가 차례지지 않게 되면 남을 등에 업거나 권모술수를 써서라도 어떻게 하나 벼슬자리를 따내려고 애씁니다. 종파분자들이 야심가라는 비난을 받게 되는것은 그때문입니다. 엄광호가 바로 그런 사람이였습니다.
엄광호는 혁명대오에 들어서던 첫 시기부터 야심가의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연길지방에서 5.30폭동바람을 타고 혁명운동에 뛰여든 그는 한때 독립1사에서 중대정치지도원을 한 일도 있었으나 처음부터 인망을 잃었습니다. 자기를 지나치게 내세우면서 전우들을 까닭없이 헐뜯었기때문입니다. 자기만 자기라고 하면서 혁명동지도 몰라보고 선배도 몰라보는 인간을 좋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엄광호는 반《민생단》투쟁까지도 출세의 기회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반동으로 몰아댔습니다. 《민생단》원들을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임들에서는 그의 초당적인 목소리가 제일 높이 울리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조직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동지들을 고의적으로 버리였지만 조직은 그를 관대히 용서해주고 그에게 재생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가 마안산일대에서 새 사단을 편성할 때 엄광호는 나를 찾아와 일을 성실하게 해서 지난날의 과오를 씻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자기 과오를 깨끗이 고쳐나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를 중대정치지도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엄광호는 그 믿음을 저버리였습니다. 그는 대원들앞에서 쩍하면 호령질을 하였고 중대장의 사업을 잘 도와줄 대신 그 꼭대기에 앉아서 훈계질만 하였습니다. 투쟁년한이 길다고 선배연하면서도 힘든 일에는 어깨를 들이밀지 않았습니다. 전투장에서는 일선에 서지 않고 늘 총알이 미치지 않는 구석쪽에서 어물어물했습니다. 이런 사람들한테는 대중의 거울이 되고 길잡이가 되여야 하는 정치지도원이라는 직책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리유로 해서 우리는 엄광호를 정치일군의 자리에서 떼고 그에게 개준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후방밀영에 가서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그를 청봉으로 보낼 때 부상자들의 치료와 생활조건을 보장해주고 후방일군들과 함께 농사를 잘 지어 부대의 식량예비를 마련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엄광호는 우리가 맡긴 일을 태공하였습니다. 그는 예비병실을 지으라고 한 사령부의 지시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7도구치기에서 우리와 헤여져 청봉밀영에 간 부상병들과 재봉대원들은 숙소의 부족때문에 큰 불편을 느끼였습니다. 그들은엄동설한에 천막을 치고 지내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밀영에는 약품이나 식량도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고생속에서 단련된 유격대원들은 자그마한 불평이나 조건타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적들과 혈전을 벌리고있는 전우들을 생각하면서 모든 곤난을 참아냈습니다. 그리고 밀영의 생활일과를 엄격히 지켜나갔습니다. 학습도 정상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루속의 송곳은 못감춘다고 이 학습과정에 엄광호의 유해로운 사고방식과 패배주의자로서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어느날 밀영에서는 남패자회의방침과 관련된 학습토론을 하였습니다. 엄광호는 그때 로씨야혁명의 경험을 실례로 들면서 어떤 혁명에나 고조기가 있고 저조기가 있기마련이다, 고조기에는 고조기에 알맞는 전략을 세워야 하고 저조기에는 저조기에 알맞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러자면 정세의 변화를 보고 진단을 정확히 내려야 한다, 그리고 저조기의 징조가 보이면 저조기가도래하였다는것을 솔직하게 인정할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혁명은 지금 어떤 단계에 있는가, 저조기에 있다, 보라, 열하원정도 실패하고 《혜산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혁명조직들도 죄다 망가지지 않았는가, 이것이 그래 저조기가 아니란 말인가, 이런 형편에서는 《일보전진 이보퇴각》의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말하자면 공세와 정면대결은 피하고 유리한 기회가 조성될 때까지 퇴각해야 한다, 이것이 혁명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엄광호는 밀영안의 모든 성원들에게 이런 주장을 내리먹이려고 하였습니다. 열하원정과 《혜산사건》의 여파로 해서 혁명이 몹시 위축되여있던 때인것만큼 얼핏 들으면 그것은 사리에 맞는 주장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밀영에 가있던 녀대원들은 엄광호의 목소리가 사령부의 목소리와 다르다는것을 인차 간파하였습니다.
밀영에 가있던 녀대원들은 즉석에서 엄광호의 주장을 론박하였습니다. 객관적정세가 혁명투쟁에 많은 영향을 준다는것은 물론 우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혁명가들은 정세가 불리하면 할수록 그에 반작용을 해서 화를 복으로 만들기 위해 분발해야 한다, 이것은 사령관동지의 뜻이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정세가 유리할 때에도 투쟁을 해왔고 정세가 불리할 때에도 투쟁을 계속해왔다, 만일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정세가 불리할 때에는 숨어서 지내고 정세가 유리할 때에만 활동했더라면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상비적인 무장대오를 가질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총검의 숲을 뚫고 국내에 나가서 보천보를 치는것과 같은 대담한 군사작전을 할수 있었겠는가, 맑스-레닌주의가 공산주의학설인것만큼 혁명활동과 실천에서 그것을 지침으로 삼는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사령관동지가 늘 강조하는바와 같이 맑스-레닌주의도 조선혁명의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해야지 덮어놓고 적용해서는 안된다, 동무는 《일보전진 이보퇴각》의 내용도 잘못 리해하고있는것 같은데 그래 조선혁명이 중중첩첩한 난관속에서 발전해왔다는것을 모른단 말인가, 동무는 지금과 같은 정세하에서는 퇴각하는것만이 상책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우리에게 퇴각할 후방이나 있는가, 우리가 퇴각하면 혁명의 고조기는 누가 마련해주는가, 남패자회의에서 사령관이 선언한것처럼 우리는 어려운 때일수록 난관을 맞받아나가야 한다, 그래서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김정숙동무가 앞장에 서서 엄광호의 패배주의를 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사령부의 로선이나 작전적방침과 어긋나는 그릇된 사상에 대해서는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고 견결하게 투쟁하였습니다. 그는 철저한 사상론자였습니다.
녀대원들한테서 이런 반격을 당하게 되자 엄광호는 맑스와 레닌의 명제들을 이것저것 섬겨대면서 어떻게 하나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럴수록 그의 말에서는 구린내가 더 났습니다. 야심가, 기회주의자로서의 엄광호의 정체는 론쟁과정에 더욱 적라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녀대원들은 그가 여름내 밀영에 있으면서 환자들을 위한 치료준비와 겨울나이준비도 하지 않고 건달만 부린 까닭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비로소 알게 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엄광호에게 배신자나 투항주의자라는 정치적감투를 씌우지 않았습니다. 학습과정에 진행된 론쟁인것만큼 엄광호가 자기의 리론적착오를 인정하고 동지들의 주장을 허심하게 받아들였다면 론쟁은 그것으로 무난히 끝났을것입니다. 우리는 학습토론을 통해 발로되는 이러저러한 사상적착오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수준과 준비정도가 각이한것만큼 사물현상을 리해하고 파악하는데서 일정한 차이가 있을수 있습니다. 만사람이 처음부터 다같이 사상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될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가지고있는 사상적미숙성은 학습과 혁명실천을 통해 극복되고 또 그 과정을 통해 사람은 사상적으로 단련되고 원숙해지는 법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혁명원리에 어긋나는 모호한 소리가 나와도 그것을 규탄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론쟁의 방법으로 끝까지 깨우쳐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엄광호는 녀대원들의 주장을 정당한것으로 받아들이고 사상개조를 위해 힘쓸 대신 투항주의자로서의 자기 정체에 분칠을 하려고 애쓰면서 론쟁상대들에 대한 보복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엄광호의 진면모는 녀대원들을 박해하는 과정에 드러날대로 다 드러났습니다.
그가 녀대원들을 박해하면서 저지른 망동은 간도에서 반《민생단》투쟁을 벌릴 때 《숙반공작위원회》에 망라되였던 사람들이 한 행위와 조금도 다름이 없을뿐아니라 동기와 목적에서는 오히려 그보다 더 비렬하고 음험했습니다.
엄광호가 녀대원들을 박해한 목적은 자기의 죄상을 가리우자는데 있었습니다. 엄광호는 녀대원들의 입에 자갈을 물리기 위해 죄를 날조해서 그들에게 억지로 뒤집어씌우는 수법을 썼습니다. 그는 녀대원들이 죄인으로 되여야 자기를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사령부에 보고도 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비겁하고 위험한 사고방식입니까.
청봉밀영에는 어린 신입대원이 한명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 어린 대원이 엄광호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자리를 뜬 일이 있었습니다. 엄광호는 대뜸 도주자가 생겼다고 떠들어대면서 수색조를 파견하였습니다. 수색조성원들은 밀영근처에서 모닥불에 감자를 구워먹고있는 신입대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밀영에 돌아가자 엄광호에게 신입대원이 잠시 대오에서 리탈한것은 도주가 아니라 시장기를 이겨내지 못해 감자를 구워먹기 위한것이였다고 사실대로 보고하였습니다. 더구나 그 어린 대원은 배고픈것과의 싸움을 많이 해보지 못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밀영을 깜짝 놀래울수 있는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기회만 노리던 엄광호는 그 신입대원을 끝끝내 도주자로 락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 대원이 감자를 굽느라고 불을 피운것도 적들에게 신호를 하기 위한 책동이라고 들이대면서 그에게 간첩의 딱지까지 붙이였습니다. 신입대원이 그렇지 않다고 거듭 항변을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엄광호는 그 대원에게 적들에게서 받은 지령은 무엇이고 그 지령을 실행하는 과정에 대내에서 흡수한자들은 어떤자들인가를 대라고 강요하면서 고문까지 했습니다.
어제날까지 한가마밥을 먹으며 지내던 자기 부하에게 표창은 주지 못할망정 《도주자》니, 《간첩》이니 하는 감투를 씌우고 모진 고문까지 들이댔으니 얼마나 몸서리치는 일입니까.
엄광호가 《간첩》이라고 선언한 그 신입대원으로 말하면 수양은 좀 어리지만 계급의식이 투철한 청년이였습니다. 그는 대렬에서 도주할 근거도 없었고 간첩으로 될 리유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광호는 그가 녀대원들을 《암해공작》에 끌어들이고 밀영안에 있는 혁명동지들을 독약으로 해치려 했다는 허위자백을 할 때까지 고문을 계속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그 《자백》을 근거로 녀대원들을 잡아가두고 그들에게 폭행을 가하는짓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러해동안 사람과의 사업을 해오며 대오의 통일단결을 부르짖던 엄광호가 어떻게 되여 이런 지경에까지 굴러떨어졌는지 나는 그 까닭을 도저히 리해할수 없었습니다. 후날 그의 죄행을 조사하는 과정을 통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가 추악한 인간으로 전락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였습니다.
엄광호는 후방밀영에 가게 되자 그것을 강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기를 정치일군의 자리에서 해임시킨 사령부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다나니 후방일군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건달을 부렸습니다. 녀대원들과의 론쟁이 있은 다음부터는 패배주의자로서의 자기의 깨끗치 못한 본색을 감추기 위해 초혁명적인 요구를 연방 제기하였습니다. 경계태세를 강화한다는 구실로 비상소집을 자주 해서 병약자들을 들볶는가 하면 식량절약을 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하루 두끼씩 하던 식사를 한끼로 줄이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우정 굶기였습니다.
청봉밀영에 하루 한끼씩 먹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식량의 예비가 전혀 없은것은 아니였습니다. 쌀은 없었지만 움속에는 적지 않은 량의 감자가 있었습니다. 밀영에서 얼마쯤 떨어진 덕지대의 숲속에는 꽤 널직한 밭이 있었는데 거기서 감자농사도 하고 배추농사도 했습니다. 엄광호가 임무를 잘 수행했더라면 온 부대가 청봉에서 겨울을 날수도 있었을것입니다.
엄광호는 출세의 길이 막혔다고 단정한 그 순간부터 혁명에 염증을 느끼였고 국내외의 정세가 복잡하고 어려워지자 혁명의 전도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상적병집이 결국은 학습토론과정에 로출되였던것입니다.
엄광호가 이처럼 위험한 전횡을 부리고있을 때 그것을 막을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밀영의 정치책임자인 리동걸이였습니다. 7련대 정치위원인 그는 직급으로 볼 때 엄광호의 상급이였습니다. 그가 부상을 당하였기때문에 우리는 7도구치기에서 분산행동으로 넘어갈 때 밀영의 정치사업을 맡아할데 대한 과업을 주어 청봉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리동걸은 엄가의 아첨과 권모술수에 녹아서 사태의 진상과 본질을 가려보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통신원을 청봉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엄광호의 모략이 실현되여 녀대원들은 생명을 잃었을것입니다.
사건의 내막을 조사하는 과정에 나는 엄광호가 리종락이보다 더 저렬하고 악독한 인간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리종락의 범행은 적들에게 체포되여 변절을 강요당한후에 저질러진것입니다. 그러나 엄광호는 혁명대렬내부에 있으면서 사상적으로 부패변질되였고 그 부패변질을 가리우기 위해 동지들을 모함하고 학대하는 반동적인 행위를 감행하였습니다.
《민생단》소동으로 간도의 유격구들이 진통을 겪던 1930년대 전반기를 제외하고 우리 대렬내부에는 고문이나 형벌이라는것이 없었습니다. 대렬내부에서 발생하는 과오나 부족점은 해설과 설복, 비판의 방법으로 고쳐나갔습니다. 지휘관이 대원들을 고문하는것과 같은 극단적인 행위는 있을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엄광호는 자기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대원들과의 관계를 누가 누구를 하는 불상용적인 적대관계에 놓고 그들을 모해하는 범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원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의도를 실행하기 위해 규률을 좀 어긴 신입대원을 도주자로, 간첩으로 락인하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위에서 계속)
간첩으로 락인하고 녀대원들이 쓰던 가루치약을 독약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그 가루치약의 임자들인 녀대원들까지도 간첩이라고 몰아댔습니다.
엄광호는 김정숙과 도천리에서 몇달동안 지하공작도 같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김정숙을 간첩으로 몰아붙인다는것은무뢰한이나 할짓입니다. 그는 김정숙이 어떤 녀자인가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습니다.
엄광호의 실례는 사람이 출세욕에 빠지면 조직도 동지도 의리도 모르는 악한이 될수도 있으며 혁명의 배신자가 될수도 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엄광호자신도 고백했지만 그는 녀대원들에 대한 모략이 실패로 끝날 경우 그 책임을 면하기 위해 도주할 궁리까지 했습니다.
엄광호의 실례를 통해서도 느낀바이지만 혁명에서는 초당분자, 과격파, 독선적인 인간, 양봉음위하는자, 앞에서는 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끌어당기는자, 기분주의자, 불평분자, 공명출세주의자들이 늘 말썽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대책을 제때에 세우지 않으면 큰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엄광호사건은 또한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상수양을 잘하지 않으면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이 약해지고 불평분자, 의지박약자가 되여 어지간한 난관앞에서도 주저앉게 되며 나중에는 패배주의자가 되여 혁명투쟁에 막대한 해독을 끼치게 된다는 교훈을 주고있습니다.
엄광호가 조작해낸 《간첩단사건》은 우리 대오의 사상의지적통일과 도덕의리적단합을 크게 해칠번한 비상사건이였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엄광호에 대한 문제를 사령부당위원회에서 심중히 검토한 다음 북대정자에서 열린 지휘관, 병사대회에 내놓고 군중심판에 붙이였습니다.
청봉밀영에서 벌어졌던 사태가 구체적으로 발표되자 모든 관병들은 최악의 역경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우리의 로선을 고수한 녀대원들을 일치하게 지지하였습니다. 그와 반대로 엄광호와 사태의 본질을 높은 정치적안목에서 정확히 해부해보지 못하고 그 범죄를 묵인한 리동걸에 대해서는 인민혁명군의 이름으로 처단할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엄광호는 처음에 자기의 죄과를 변명하느라고 전전긍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군중의 규탄을 받고서야 범행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리동걸은 처음부터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자기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였으며 죽여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대중의 비판을 허심하게 받아들이였으며 자신을 심각하게 뉘우치였습니다.
리동걸은 속대가 단단하면서도 인정미가 있고 구수한 사람이였습니다. 정치사업과 지하공작분야에서는 한다하는 실력자였습니다. 우리가 남패자회의에서 오중흡을 7련대장으로 임명할 때 그를 같은 련대의 정치위원으로 임명한것은 그의 자질과 풍부한 정치사업경험을 귀중하게 보았기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급지휘관한테 롱락당하는 과오를 범한것은 밀영에 가있는 동안 엄광호의 방에 숙소를 정하고있으면서 그의 아부아첨에 녹은데다가 대원들과의 사업을 잘하지 않은데 있었습니다. 물론 몸에 중상을 당한 사람인것만큼 대원들과의 사업을 할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면 병실에 대원들을 불러서라도 자주 만나야 하였습니다.
밀영에서 《간첩단사건》이 발생했다고 엄광호가 수선을 떨 때 그가 대원 한명만 만나도 진상을 인차 알아낼수 있었을것입니다. 그런데 리동걸은 엄광호의 보고를 들은 다음 한명의 대원도 만나지 않고 그가 마음대로 전횡을 부릴수 있게 내버려두었습니다. 엄광호가 신입대원을 심문하겠다고 하면 심문하라고 하고 녀대원들을 가두겠다고 하면 잡아가두라고 하였습니다.
리동걸은 엄광호의 말만 듣고 대원들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나니 엄광호와 같은 야심가의 롱간앞에서 사람들의 정치적생명을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 바로 정치일군으로서의 리동걸의 죄책이 있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전체 관병들은 엄광호를 보는것과 꼭같은 시각으로 리동걸을 보았습니다. 정치일군이 군중과의 호흡을 잘하지 않으면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사람들의 정치적생명을 다루는 일군들은 군중과의 호흡을 한시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군중과의 호흡이란 인민이 삽을 들 때 자기도 삽을 들고 인민이 조밥을 먹을 때 자기도 조밥을 먹으며 모든것을 인민과 함께 나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군중과의 호흡을 잘하지 않는 사람은 인민의 감정과 심리를 잘 알지 못하며 그들의 요구와 지향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일부 일군들가운데는 자기를 비판한 사람들을 음으로양으로 박해하며 그 비판의 도수에 따라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희롱하는 페단이 있습니다. 어떤 일군들은 자기에게 알랑거리는 한두사람의 말만 듣고 사람들의 운명문제를 망탕 처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군들이 직권을 악용하여 사람들의 정치적생명을 제멋대로 다루게 되면 인민들의 원한을 사게 되고 미움을 받게 되며 당과 대중을 리탈시키게 됩니다.
우리 당은 인덕정치를 하는 당이며 우리 나라는 인덕정치의 혜택아래 만민이 하나의 대가정속에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인덕정치는 사람들의 육체적생명뿐아니라 정치적생명까지도 보호하고 돌보아주어야 할 사명을 걸머지고있습니다. 우리 당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있는것은 사람들의 정치적생명입니다.
사상과 리념이 같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이루어진것이 곧 조직이고 당이며 매개 사람들은 그 집단속에서 정치적생명을 받아안게 됩니다. 수백만 대중이 지니고있는 정치적생명이 그대로 조직의 생명으로 되고 당의 생명으로 되는 리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정치적생명에 함부로 칼질을 하거나 먹칠을 하는것은 곧 당의 수명을 감소시키는것으로 됩니다. 당이 자기의 최고강령을 실현할 때까지 장수하려면 사람과의 사업을 잘해야 하며 그들의 정치적생명을 잘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름아닌 청봉의 교훈입니다. 동무들은 언제든지 이 교훈을 명심해야 합니다.
과오는 엄중했지만 리동걸은 용서할만한 인물이였습니다. 그가 과오를 범한것은 정치책임자라는 자각을 버리고 엄광호한테 기만당했기때문이였습니다. 그는 주동이 아니라 피동에서 엄광호에게 동조하고 그의 모략을 묵인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참작하여 리동걸을 강직시키는것으로 그쳤습니다. 엄한 처벌을 면한 리동걸은 나를 찾아와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제기하였습니다.
《좀더 무거운 책벌을 받고싶습니다. 저를 가장 위험한곳에 보내주십시오. 저의 과오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야 씻을수 있습니다. 제가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야 전우들은 나를 용서해줄것입니다. 그리고 이전날처럼 동무라고 불러줄것입니다.》
리동걸은 그후 사령부가 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8.15해방전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였습니다.
항일혁명투쟁시기 리동걸은 리동걸이라는 본명과 함께 김준이라는 이름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