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모든 곡이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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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득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은 민중가요, 혹은 운동권가요라고 불리던 한국의 저항적 노래운동사에서 공식적인 첫 전문 창작집단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4년 김민기가 활동을 재개하며 서울대 ‘메아리’ 고려대 ‘노래얼’ 이화여대 ‘한소리’ 등 대학 노래패에서 활동했던 일군의 청년들과 함께 만든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노래운동 진영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합법적 앨범이다.
노찾사 1집에서는 의외로 이후 노찾사의 대표곡이라 불리게 되는 클래식한 민중가요 명곡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솔아솔아푸르른솔아’ ‘광야에서’ 등은 89년 발표된 2집에 대부분 담겨있기 때문이다. 노찾사 2집은 민주화 운동의 부분적 성공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1집은 오히려 2집의 큰 성공에 힘입어 뒤늦게 재발견된 측면이 크다. 최소한 일반 대중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87년 이전 노찾사는 대중이 접근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영역에 위치했으니까. 그렇다면 이 앨범을 채우고 있는 노래들은 어땠을까?
80년대 중후반 이후 민중가요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노찾사 1집의 노래들은 의외로 들릴 수도 있다. ‘민중가요이기 때문에 이럴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질수록 그렇다. 이후 정형화된 민중가요의 표현법은 노찾사 1집 노래들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갈 수 없는 고향’에서는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의 도시 노동자의 아픔을 슬쩍 보여주고, ‘바람 씽씽’ ‘그루터기’ 등에서 아스라이 보이는 희망의 기운과 역동적 의지를 얼핏 읽어낼 수 있기는 하지만 모든 메시지는 상징과 은유 속에 꽁꽁 감춰져 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84년 합법 음반으로 발표될 수 있는 음악의 수위는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를 담당했던 김민기조차 이 정도 음반도 발표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노찾사 1집의 음악을 시대와의 일방적 타협이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일면적이다. 1집의 노래들은 엄밀히 말해 70년대 시작된 노래운동의 연장선에서 김민기, 한대수와 양병집 등에 의해 정착됐던 리얼리즘 성향의 토착화된 모던포크의 영향권에 있던 곡이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80년대 중반 이후의 본격적 투쟁 국면에서 등장한 훨씬 ‘뜨거운’ 노래들의 투쟁성에 비해 아마추어적이고 낭만적인 한계에 머물고 있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학적 측면에서 봤을 때 이 음반이 담고 있는 어법은 전통적 한국 가요의 ‘뽕기’를 벗어나면서 기성의 포크나 록에서 나타나는 서구 취향도 비켜가는 독자적 정체성의 맹아를 빚어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대적 가치에 가려진 음악적 가치를 재평가받아야 할 명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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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허허허님의 댓글
허허허 작성일
노찾사가 대부분의 저항 민중가요들을 창작했군요.
몰랐습니다. 대단한 분들이었군요...
금번 추모제에 오신 전멤버였다는 분...
그런줄 알았으면 좀 더 극진히(?) 대접해드리는건데...
민중님의 댓글
민중 작성일
그러게요....추모제가 아닌 우리가 편하게 모일 수 있는 날에 따로 초빙하여
노찾사의 지난 이야기도 듣고, 또한 노래도 함께 부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당연히 감사도 표하면서요......
제이엘님의 댓글
제이엘 작성일좋으신 생각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초빙해서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질수 있으면 좋겠네요! ^^
딴지는 아니고님의 댓글
딴지는 아니고 작성일노찾사가 좋은 노래패인 것은 맞지난 직접 창작한 노래는 거의 없습니다. 그전부터 대학가나 노동현장에서 불려지던 노래들이죠. 다만 노찾사가 그런 노래들을 거의 최초로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공간으로 끌여들었다는 건 평가할만 하고요.
허허허님의 댓글
허허허 작성일
아 그랬군요. 아마 보다 정확한 평가이신듯 합니다.
잘못알려지거나 왜곡된 역사를 바로 이해한다는 것이 이래서 가치가 있는 일이겠습니다.
알려주어 매우 감사합니다.